돈은 못 벌었지만 남의 살림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

2019. 6. 2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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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런 홀로
벼룩시장에서 얻은 것

물건 사들이기만 하던 나
SNS 지인이 자기 아파트에서 연
벼룩시장에 판매자로 참여

판매자 물건 보면 취향 드러나
내 물건 객관적으로 볼 기회
2만원 벌었지만 값진 경험
벼룩시장에서 남의 살림살이를 구경하며 “이거 타이 가서 샀던 건데~” 하는 물건에 관련된 추억담을 듣고 말하는 것은 해볼 만한 경험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번 글(4월20일치 ‘맥시멀리스트를 위한 항변’)에서도 밝혔다시피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그 글에서 “맥시멀리스트가 죄인이냐! 물건 많은 게 어때서! 내 돈으로 내가 산 예쁜 잡동사니들을 사랑한다!”고 부르짖었지만, 사실 넓지도 않은 집에 살면서 물건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부담이다. 평생 이 집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좁은 방에 누워 있으면 방을 에워싼 책, 옷, 공간박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러다 압사하는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잡동사니 중에는 벼룩시장에서 저렴하게 업어온 중고물품도 있다. 내 방에 갖다 놓으면 ‘이런 걸 왜 돈 주고 샀나 싶은 쓰레기’도 영국의 포토벨로 벼룩시장 같은 데서 발견하면 ‘유레카! 난 이걸 사기 위해 이 나라에 온 거야!’라며 지갑이 쉽게도 열린다. 되팔 수 있는 명품이 아니고야 모든 물건은 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값어치가 급하강한다. 게다가 혼자 사는 사람은 ‘이런 거 사 가면 엄마가, 남편이, 룸메이트가 욕하겠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집에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만 간다. 자, 그렇게 쌓인 물건들은 어떻게 처분하면 좋을까. 그래, 바자회! 미국 드라마를 봐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장터를 열잖아? 몇년 전부터 지자체나 커뮤니티에서 열리는 바자회에 참여해볼까 기웃거리던 나는 이번에 드디어 벼룩시장에 구매자가 아니라 판매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돈 주고 넘겨야 할 것 같은 물건만

유명인이 여는 바자회도 있지만 일반인들도 자기 공간에 친구를 초대해서 물건을 처분하고 함께 술 마시며 노는 식으로 얼마든지 마켓 겸 파티를 열 수 있다.(물론 여기에는 어느 정도 평수가 보장된 공간이 담보돼야 한다. 좁은 원룸에서 어깨 붙이고 앉아서 물건을 구경할 순 없으니 말이다.) 내가 참여한 벼룩시장도 개인이 이사 가기 전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연 바자회였는데, 마켓을 열기로 한 2주 전부터 개인 에스엔에스(SNS)로 홍보를 하고 이런 물건도 팔 거라고 사진을 올리고 구경할 사람은 여기로 오시라며 대략의 주소와 연락처를 공개했다.

사실 자기 집을 바자회 공간으로 열어젖힌 이 사람과 나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동료’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관계인데, 이 친구(이제 친구가 되었다고 하자)가 나에게 일을 주는 클라이언트였고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피엠(PM, 프로젝트 매니저)이었다. 여러건의 일을 함께하면서 인스타그램 친구를 맺었는데 그녀가 개인 계정에 올린 ‘벼룩시장’ 사진에 내가 ‘앗, 저도 팔 거 많은데’라고 댓글을 달았고, 이틀 뒤 ‘정말 참여하실래요?’라고 메시지가 왔다. 그러니 결국 인스타그램 댓글을 통해 바자회에 판매자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씀. 막상 가보니 일면식도 없는 관계지만 에스엔에스를 보고 판매자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고민은 바자회 참여 전날 시작됐다. ‘오, 저도 물건 가지고 갈게요’라고 답글을 보낼 때는 호기로웠지만, 막상 내 살림살이를 꺼내놓으니 이게 과연 남에게 권할 만한 물건인지 불신이 들었다. 집 안 곳곳에서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고 넘겨야 할 것 같은 쓰레기들만 발굴됐다. 내 집에 물건은 많지만 이게 남도 탐낼 만한 물건일까. 취향만 맞는다면 브랜드 상관없이 사재기를 했던 보세 옷과 그릇이 대다수라서 이건 내가 아니면 아무도 사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가격표도 떼지 않은 원피스, 작아서 팔뚝 한번 못 끼워본 점프슈트, 쇼핑몰 모델이 입었을 땐 예뻐 보였는데 내가 입으니 잠옷 같아서 못 입은 바지, 귀찮아서 반품하지 못한 옷, 선물받았는데 개봉도 안 한 디퓨저, 상자째로 모셔둔 블루레이 세트, 사놓고 김치 한번 못 올려본 그릇 세트, 너무 많아서 이제 둘 데도 없는 유리잔, 먼지만 쌓이고 있는 책 그리고 또 책…. 살 때는 ‘이게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물건들이 이제는 나에게는 짐이고, 남에게도 쓸모없어 보였다.

행사 당일, 빈손으로 갈 순 없어서 그나마 내 물건 가운데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을 골라서 동생의 차에 실었다. 원래 나에게 필요 없는 걸 처분하는 게 벼룩시장의 취지인데 쓰레기를 들고 갈 순 없어서 고르고 고르다 보니 나도 아끼는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동생은 내 물건들을 보며 비웃었다. “아니, 책을 누가 사 가, 언니 분명히 저거 그대로 다 들고 온다. 올 땐 데리러 오라고 하지 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경비실에 호수를 말하고 출입을 허락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의 아파트에 들어서며 나는 난생처음 ‘보통의 서울 아파트’를 구경했다. 이사를 준비하며 휑해진 공간에 판매 물품을 내려놓고 포스트잇에 가격을 써 붙이는 내내 동생은 옆에서 중얼거렸다. “헐, 언니 물건만 이상해. 근데 언니 집이랑 확실히 다르네.” 사람 사는 집다운 아파트 곳곳에 정돈된 다른 판매자들의 물건들은 내 것에 비해 너무 빛나서 나는 박 사장네 집에 몰래 들어간 기우(<기생충>)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가격을 낮춰야겠어. 원래 1만원 이하로는 안 팔려 했던 원피스에는 2천원, 3천원의 가격표를 붙였고 책은 전부 무료나눔 책장에 옮겨놨다. 그러다 보니 5만원 주고 산 그릇도 3천원이 되었고, 10만원 주고 산 원피스도 5천원이 되고 말았지만 다행히 그 그릇과 원피스는 안 팔려서 다시 집에 모셔왔다.

내 선구안에 으쓱

초라한 기분이 든 것은 사실 잠깐이었고, 벼룩시장에 내놓은 남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내 원피스가 2천원, 3천원에 팔리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매우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구경 온 아파트 주민 중 50대 아주머니가 나의 유리컵 세트를 사면서 남편에게 “이거 괜찮네”라고 말할 때는 나의 선구안이 칭찬받은 것 같아서 으쓱하기도 했다.(물론 4천원치고 괜찮다는 거겠지만.) 집에서 물도 잘 안 마시면서 40인 뷔페 파티를 해도 될 정도로 유리컵을 모았던 나의 유리컵 세트는 이렇게 다른 동네 아파트의 4인 가족에게로 가서 좀 더 쓰임을 받게 되겠지. 안녕, 맥주 한번 담아주지 못했던 나의 ‘이탈리아제 유리컵 세트’야.

5명의 판매자는 색깔이 다른 포스트잇으로 자기 물건을 구분해놨는데, 물건만 봐도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개인의 취향이 드러났다. 사실 바자회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나의 물건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없었고 남의 물건 역시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물건에는 개인의 소비 형태와 가족 구성원이 드러났다. 아기띠를 내놓은 사람은 기혼일 것이고, 고양이 간식을 내놓은 사람은 당연히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다. 하지만 ‘물건’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이었다. 스팽글이 많이 달린 금빛 카디건과 화려한 레오파드 구두가 그의 결혼 여부까지 보여주진 않는다. 배지와 마그넷을 많이 파는 사람은 ‘그냥 그것을 좋아하고 모으는’ 사람일 뿐, 거기서 그의 형편까지 알 순 없다. 손님보다는 판매자 가족으로 북적이던 바자회는 6시가 지나 술자리로 변모했다. 거나하게 취해 고기를 구워 먹고 팔려고 내놓았던 타이 라면을 끓여 먹고 판매자끼리 물건을 사고팔다가 남은 건 선물로 주면서 바자회는 즐거이 끝났다.

그렇게 많은 물건을 지고 가서 겨우 2만원을 벌었고 주말 하루를 투자했다.(2만원 벌고 5만원 쓰고 왔다.) ‘그래서, 바자회 또 할 거야?’라고 묻는다면 돈 벌러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놀러 간다면 해볼 만한 경험이라고 답하겠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주말 하루도 좋겠지만 이렇게 남의 살림살이를 구경하며 “이거 타이 가서 샀던 건데~” 하며 물건에 관련된 추억담을 듣고 말하는 그 시간. 그 시간은 분명 2만원보다는 값진 것이었다.

늘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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