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 8개 백반이 5000원..술꾼 성지순례하는 골목시장

손민호 2019. 7. 2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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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만행(飮食萬行) - 충무로 인현시장
충무로 인현시장 골목 어귀. 어둑하고 좁은 골목길에 점포 100여 개가 다닥다닥 모여 있다. 손민호 기자
인현시장을 아십니까.
보통 충무로를 붙여서 부르는 ‘충무로 인현시장’이라는 명칭을 아는 서울 시민은 거의 없다.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 8번 출구에서 진입할 수 있다. 중구 인현동 일대에 있는 이 시장은 본래 해방 후에 번성하기 시작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아니, 거기에 시장이 있었어?”하게 마련인 묘한 위치에 있다.

서울시는 과거 풍전호텔(지금의 PJ호텔) 남쪽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고층 주상복합을 건설했다. 신성상가, 진양상가, 인현상가를 일컫는다. 이 일대는 보통 ‘진양꽃상가’가 알려진 정도이고, 이마저도 강남에 꽃시장의 주도권을 내주면서 지금은 많이 소외됐다.

상가가 지어질 당시는 충격적이었다는 후문이다. 세운상가와 함께 도심형 주상복합의 세계를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완공되었고, 당시로써는 최고 인기 주상복합 아파트로 명성을 떨쳤다. 현재도 재건축 수요 등으로 3억 원 이상의 호가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특색이다. 이 상가 아래쪽 통로 뒤에 있는 골목 시장이 바로 인현시장이다.


싸고 푸짐한 주점 수두룩
인현시장 ‘안동집’ 임재임 대표와 박찬일. 안동집은 이른바 ‘팔도 안주’를 두루 갖추고 있다. 순대도 있고, 병어조림도 있고, 문어숙회도 있고, 홍어삼합도 있고, 배추적(배추전)도 있다. 손민호 기자
“한때 저 위 아파트에 많은 주민이 살았고, 다들 이 시장에 와서 장을 봤어요. 지금은 술집이 많지요.”
저녁 장사를 준비하며 쪽파를 다듬는 임재임(69) ‘안동집’ 주인의 설명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현시장은 이미 해방 직후에도 소매시장으로 유명했다. 무허가 점포도 난립해서 서울시가 나서서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100개가 조금 넘는 점포가 남아 장사를 한다. 소매 종합시장으로서 면모가 남아 있는 것은 업종에서도 알 수 있다. 신발가게, 방앗간, 과일과 채소가게, 정육점도 있다. ‘청년지원사업’ 등으로 죽어가는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 10여 년 전부터인데, 이 시장은 먹자골목으로 나름 제 몫을 하고 있어서 아직 청년들의 진입은 거의 없다. 카레를 파는 ‘서울털보’라는 가게 정도가 드문 청년 점포다.

시장 위치가 아주 절묘하다. 충무로 쪽에서 시작해서 PJ호텔 쪽 출입구까지 좁은 골목으로 200m 정도 이어지는데, 충무로 쪽 출입구는 옛날에 영화인들이 밥을 대 먹던 ‘보은식당’ 등이 있는 골목과 연결되며, 북쪽 출입구는 명보극장이 가깝다. 과거 인근의 서울예대와 동국대 대학생이 즐겨 이용하는 시장이기도 했다. 막걸리에 취한 대학생들이 목이 터져라 운동가요를 불러제끼던 곳이다.
인현시장 안동집의 식재료들. '호래기'라 불리는 꼴뚜기부터, 갑오징어, 병어, 멍게, 새우, 소라 등 없는 게 없다. 다른 술집도 비슷하다. 손민호 기자
안동집의 병어조림. 손민호 기자
“외상 하는 대학생도 많았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싸고 맛있는 허름한 주점들이 많으니까. 그걸로 유명했어요.”
서울로 시집와서 먹고 살려고 순댓집을 시작했고, 이제는 신선한 해물을 판다는 안동집 임재임씨의 기억이다. ‘호래기’라고 부르는 꼴뚜기를 비롯해 갑오징어·병어 등 해산물이 풍성하다. 이런 안주도 좋지만, 고향 안동의 맛인 배추적(배추전)을 시켜서 누런 양은주전자에 담아주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면 오래된 옛 주점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안동의 명물인 문어 숙회도 판다.

인근의 ‘진미집’도 ‘전라도식 술상’으로 단골이 많다. 인터넷에서 더 유명한 집이기도 하다. 안동집 맞은편 술집 ‘칠갑산’의 주인은 ‘관절염 수술로 3개월 후에 나옵니다’라고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노인 업주가 대부분인 동네 정서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릎 아픈 할머니들이 힘겹게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전통시장의 몰락세를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나름 핫한 골목인데도 그렇다.

이 골목의 최강자는 ‘통나무집’이다. 무려 40년이 넘은 노포 급이다. 단돈 2만원에 한 상 가득 안주를 차려내는데, 해산물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안주를 엄청나게 내준다. SNS에서 제일 유명한 집이 바로 이곳이다. 낮술을 마시는 이들도 많고 저녁에는 줄을 선다. 언제나 가성비는 인기 있었지만, 최근의 성가는 아무래도 SNS 덕이 크다. 이른바 성지순례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단골로 다니던 동국대생들이 자리가 없어서 잘 찾지 못한다고 한다.


반찬 8개 백반 한 상이 5000원
인현시장 입구 골목.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진양상가다. 재개발 논란으로 시끄럽다. 사진 왼쪽으로 시장 골목이 이어지고 상가 앞으로 인쇄 골목이 이어진다. 손민호 기자
알음알음 찾는 이들로 시장은 명맥을 잇고 있지만, 경기는 예전보다 못하다. 인쇄 경기가 쇠락했기 때문이다. 인쇄물 수요가 적어진 것이 원인이다. 한 상인은 “컴퓨터로 하지 요새 누가 인쇄하나요. 달력도 안 찍고”라며 한숨을 쉬었다. 시장 골목 중간에 혈맥처럼 작은 골목 여러 개가 동쪽으로 이어지는데, 그 안쪽에 작은 인쇄 관련 점포들이 숨어 있다. 한때 ‘문자 왕국’ 한국의 번영을 이끌었던 현장이다.
진양상가에서 내려다본 충무로 인쇄 골목. 손민호 기자
충무로 인쇄 골목의 유명한 생선구이 집. 지금은 한갓진 날이 많다. 손민호 기자
아는 이들은 알지만 인현시장 바깥쪽, 즉 진양상가와 신성상가의 1층 쪽은 생선구이 골목으로 유명했다. 점심 무렵이면 근처 인쇄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일대의 넥타이 부대가 점심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특히 생선구이가 유명해서 고등어·조기·삼치를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때 소방서에서 연기를 관측해 소방차가 출동했다는 농담 같은 전설이 도는 동네다. 그때는 충무로 일대에 직장인이 워낙 많아서 점심 전쟁이 벌어졌고, 식당마다 자리가 없었다.

이제는 그 유명했던 생선구이 전문집도 두어 곳 외에는 업종을 바꾸었다. 생선 재료비가 많이 오른 데다 생선 굽는 인건비도 부담이 됐고, 무엇보다 근처 상주인구가 줄어든 탓이다.

요즘도 시장 안 점심 밥값은 5000원에 불과하다. 백반 한 상 가격으로는 도심이 아니라 서울과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서 최저가 수준이다. 밥 한 상에 일고여덟 가지 반찬이 오른다. 이렇게 팔아도 남는가 물었더니 “안 남아도 근처 인쇄소 사람들이 찾아주니까 값을 못 올린다”는 게 상인들의 설명이다.

술집 두어 곳에서 한두 잔씩 마시다 보면 술이 불콰해진다. 서울 도심의 몇 안 되는 시장이 여전히 신기한데, 맛집도 많아서 맛 좀 아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하나 인현시장의 운명도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근처 상가가 재개발로 모습을 바꾸게 될 예정이어서다. 술꾼으로서는 다만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살아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박찬일 chanilpark@naver.com
글 잘 쓰는 요리사. ‘로칸다 몽로’‘광화문 국밥’ 등을 운영하며 음식 관련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 식재료로 서양요리 만드는 붐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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