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TL] TL6.5, MB450-2.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를 넘어서다
지난 번 홍콩 오디오 쇼에서의 일이다. 아는 분의 소개로 여러 오디오 관계자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는데, 중후한 중년 신사의 느낌을 풍기는 분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명함을 받아보니 '맨리'라는 이름이 보였다. 맨리? 당연히 처음에는 맨리라는 브랜드를 떠올렸지만, 가만히 바라보니 저 전설적인 앰프 디자이너의 명성에 비해 나이가 젊었다. 잠시 후 다시 명함을 보니 류크 맨리다. 아하, 그의 아들이구나.
다음날 나는 조심스럽게 VTL의 제품이 전시된 부스를 찾아갔다. 락포트의 스피커와 어우러져, 넓은 공간을 꽉 채운 소리는 상당히 압도적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대음량을 쏟아내는 쪽이 아니었다. 상당히 자연스러우면서 밀도감이 높아, 한 마디로 내공이 대단했다.
원래 VTL의 높은 퀄리티는 인정하고 있는 터였지만, 직접 오너를 만나고 또 큰 공간에서 제대로 구동된 소리를 들어보니 다시 한 번 이 브랜드의 실력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래서 정식 인터뷰를 부탁해 시간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이미 본 사이트에서 소개된 바 있으니 중언부언할 생각은 없다.
아무튼 이때 맨리와는 여러 번 식사도 하고 술을 마셨는데, 일단 온후한 인품이 매우 호감을 느끼게 했다. 농담도 잘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도 깍듯했다. 세계적인 진공관 앰프 메이커의 오너로서 보일 수 있는 오만이나 경박한 태도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성격이 나빠도 오디오를 잘만 만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설계자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와 성실한 태도를 보면 더 호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서 강자가 득실거리는 진공관 앰프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뻗어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 생각하면, 그 험난한 여정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한 태도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려는 모습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무엇보다 가격을 비교적 낮게 책정해서 가격대비 성능이라는 측면이 부각된 점도 좋고, 또 저가 모델도 최선을 다해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점도 보기 좋았다. 모든 오디오 메이커가 이런 태도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VTL이 정식 설립한 연도는 1993년. 어찌 보면 짧은 역사이기도 하지만, 그 뿌리가 되는 맨리까지 생각하면 결코 짧지 않다. 무려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최초의 제품은 이 즈음 남아공에 있는 레코딩 스튜디오를 위해 납품한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는 부친 데이빗이 설계를 담당했다. 실제 그는 세계적인 진공관 앰프 권위자로, 특히 프로용 오디오에 밝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986년, 맨리에서 정식으로 홈 오디오용 앰프를 들고 CES에 나타나면서 컨슈머 시장을 노크하게 된다.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모양으로, 이 과정에서 류크가 미국 쪽 판매를 담당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를 벗어나지 못해,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있는 아파트에서 부자가 함께 앰프를 만들어내고 또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방에서 주문이 쇄도했으므로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이끌어갈 수가 없었다.
이때 이들이 주목한 것은 남부 캘리포니아다. 미국 군수 산업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각종 전자 기기 메이커가 즐비하고 또 값싼 노동력의 이점까지 있으므로, 진공관 앰프처럼 손이 많이 가는 제품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1980년대 말 맨리는 스튜디오 제품뿐 아니라 녹음까지 병행하는 등 사세가 확장 일로였지만, 이로 인한 문제도 많았다. 결국 부자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하고, 아들 류크가 93년도에 정식으로 VTL이 발족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류크의 입장에서 보면, 뛰어난 디자이너를 내보낸 상태에서 회사를 시작해야 하는 고약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살려 차곡차곡 진공관 앰프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점검해나갔다. 일단 현대적인 계측 장비를 들이고, 외부의 전문가들을 영입해서 분야별로 최상의 솔루션을 찾아냈다. MOS-FET를 중심으로 솔리드스테이트에 밝은 사람, 밸런스 설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서킷의 전문가 등이 주요 멤버였고 여기에 PC 보드와 소프트 웨어쪽의 전문가도 초빙했다.
그 결과 진공관 앰프로서는 이례적일 만큼 대출력을 확보한데다가 리모트 컨트롤로 제어가 되고, 오토 바이어스 기능을 갖는 등 사용자측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요소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게 되었다. 특히, 대출력이면서 해상도나 질감, 스피드 등에서 빼어난 솜씨를 발휘해 진공관 앰프의 새 역사를 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큰 성과라 하겠다.
이번에 만난 제품은 6.5 프리 및 MB 450-2 파워 앰프다. 최상급의 7.5 및 지그프리드 못지않은 성능과 내용을 갖고 있는데다가, 가격적인 면도 좋아서 좋은 반응이 기대되는 제품이라 하겠다.
우선 6.5 프리부터 살펴보자. 일단 철제로 구성한 새시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철저히 비자성 형태를 띠게 했다. 따라서 내외의 전자기를 철저히 방지하고 있다. 본 기는 한 새시 안에 파워 서플라이와 동작부가 함께 하는 구성이지만, 투 새시 형태의 7.5를 보다 현실적인 가격대에 맞춰 제작한 만큼 상급기의 노하우가 대폭 이양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원부는 철저하게 밀봉되어 실딩 처리되어 있다.
회로를 보면, 앞서 소개한 MOS-FET 및 밸런스 설계의 전문가들 역할이 크게 발휘되어 있다. 일단 진공관 앰프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하이브리드 성격을 띠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그러므로 입력부에 두 개의 12AU7이 위치하고는 있지만, 이후 MOS-FET 쪽으로 바뀐다. 신호 전송 경로는 되도록 짧게 한 바, 그 과정에서 일체의 네거티브 피드백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좌우 채널을 철저히 분리, 각 채널마다 마치 거울을 보듯 두 개의 회로단이 대칭해서 완벽한 밸런스 설계를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반응이 빠르고, 투명하며, 음악성이 풍부한 음을 얻고 있는 것이다. 특히 95 스텝으로 구성된 볼륨단의 섬세한 작동이라던가, 노이즈가 거의 없는 프로세서 컨트롤을 통한 기기 조작 등, 여러 면에서 정공법을 추구하되 새로운 기술을 무리 없이 융화시킨 면이 돋보인다.
이어서 MB 450-2를 보자. 시그너처 모노 블록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품으로, 2007년에 발표된 지그프리드 파워 앰프의 기술력을 모태로 여러 부분이 새롭게 설계되었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오토 바이어스 기능. 사실 본기에는 채널당 무려 8개의 KT88 혹은 6550C가 투입되어 있다. 도합 16개의 출력관을 일일이 손으로 바이어스 조정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진공관의 음색과 강력한 구동력을 원하는 분들에게 이것은 최대 걸림돌로 다가오는데, 이 부분을 해결해준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폴트 센싱'(fault-sensing)이라는 기능도 있다. 정밀하게 기기의 상태를 체크해서 혹 이상이 생길 경우 바로 표시해주는 것이다. 트러블 때문에 진공관을 멀리하는 분들에게 역시 희소식이라 하겠다.
전원부에 대한 투자도 상당해서, 이 부분은 상급기 지그프리드 못지않다. 특히 와이드 레인지에 대응한 트랜스포머의 제공은, 본기의 음이 투명하면서 다이내믹한 특성을 갖게 했다. 여기에 각종 전자 부품을 최상급으로 투입하고 모든 회로를 밸런스 설계로 구성하는 등 여러 면에서 선진적인 발상이 가득하다. 특히, 이런 개량을 통해 이전 모델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광대한 다이내믹스와 저역의 펀치력. 대형 스피커를 소유한 분들이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질 만한 스펙이 아닐까 한다.
이번 시청을 위해 소스는 플레이백 디자인의 제품을 사용했고, 스피커는 록포트의 미라 그랜드 2를 동원했다. 참고로 시청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키신(피아노)
- 마일스 데이비스 "Summertime"
- 스팅 "Gabriel's Message"
- 퀸 "Death on Two Legs"
먼저 키신을 들으면, 대출력 파워와 대형 스피커의 조합이 주는 광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해상력에 기가 질리게 된다. 일단 이런 음을 듣고 나면 한동안 집에서 음악을 듣기 싫어진다. 그 정도로, 여기서 재생되는 소리는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일단 오케스트라를 보면, 현악군이 세밀하게 분해가 될 정도로 몽땅 디테일이 드러나 보이고, 관악단의 모습도 일목요연하게 잡힌다.
출몰할 때와 들어갈 때의 모습이 스피디하게 나온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가세해서 저역이 웅장해질 때의 표정과 피아노 혼자 솔로를 펼칠 때의 모습도 절묘하게 대비되며, 양자 모두의 표현에 능하다. 풍부한 잔향과 홀 톤으로 그려지는 무대의 모습은 거의 입체 영상처럼 다가온다.
마일스의 뮤트 트럼펫이 가감 없이 나오는
최근에 스팅이 내놓은 앨범에서 고른 이 곡은, 한겨울의 정취를 만끽하는 데 더 없이 좋다. 기본은 클래식이지만, 여기에 록, 재즈, 민속 음악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져 그 신선한 감각은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기타의 정교한 핑거링이나 퍼커션의 둥둥 치는 듯한 어택감, 트럼펫의 차갑고도 낭랑한 음색 등 여러 악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스팅의 보컬과 좋은 밸런스를 이룬다. 눈을 감으면 마치 작은 콘서트홀에 온 듯하다.
마지막으로 퀸의 음악을 들으면, 마치 입체 영화를 보는 듯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진다. 초반부의 난삽하리만치 몰아치는 이펙트 음에 이어지는 피아노의 시치미 떼는 듯한 플레이에서 드라마틱한 대비가 이뤄지고, 생기발랄한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이 신명나게 터져 나온다. 풀 사이즈의 드럼을 만끽할 수 있는 저역의 이펙트, 풍부한 음량을 자랑하는 일렉트릭 기타 등, 과연 퀸의 음악이구나 실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바로 이런 맛에 대형 시스템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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