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성폭력 피해 소멸시효 넓게 인정한 법원 판결 주목한다

2019.11.12 20:52

의정부지법 민사1부는 지난 11일 김모씨(28)가 초등학생 때인 2001년 7월부터 14개월 동안 자신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테니스 코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마지막 범행 후 10년이 지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피고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소시효 시작일을 김씨가 성폭행 후유증인 ‘외상 후 스트레스’ 진단을 처음 받은 2016년 6월로 판단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폭넓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김씨는 ‘체육계 미투(나도 고발한다) 1호’의 주인공이다. 성폭행 가해 코치를 2016년 법정에 세웠고 징역 10년의 대법원 확정 판결을 끌어냈다. 또 언론 등을 통해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고발함으로써 체육계 미투 운동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번 손해배상 판결까지 얻어낸 것이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성범죄는 공식 기록된 것만 해마다 2만건이 넘는다. 성범죄의 특성상 신고하지 못한 사례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얼마 전 전국 초·중·고교 운동선수를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2000여명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으나, 신고까지 이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아동 성폭력 사건은 피해 당시에는 두려움과 가해자 협박 등으로 신고를 주저하게 된다. 김씨도 테니스 코치로부터 성폭행은 물론 상습적으로 ‘각목 매질’까지 당했으나, 14년이 지나서야 가해자를 고소했다.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가 피해자가 성인이 된 후 최장 15년까지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민법상 손해배상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청구가 불가능하다. 영화 <도가니>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한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이런 불합리를 이번 재판부가 바로잡은 것이다. 불법행위를 한 날을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날이 아닌, ‘잠재하고 있던 손해가 현실화된 날’로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감안한다면, 이들에 대한 고소나 배상 등 피해 구제를 위한 권리의 확장은 하급심 판결에 그쳐서는 안될 일이다. 피해자의 특성, 가해자의 영향력 등을 고려한 소멸시효 등에 대한 법 정비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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