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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인물열전

노벨평화상 : 역사와 현재

때로는 따라야할 모델로, 때로는 극복해야할 반면교사로

노벨평화상
노벨평화상
개요표
제정자 알프레드 노벨(스웨덴)
선정기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발표 매년 10월 초, 노르웨이 노벨연구소 강당
시상식 매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
역사 1901년(제1회) - 2017년(제98회)
역대 수상자 131
: 131 = 개인 104명 + 조직 27개
(2017년 기준)
대상 분야 반전평화운동, 국제기구 창설, 인도주의
활동,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 군축 및
군비통제, 국제분쟁 조정과 중재,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환경·생태 운동 등
ⓒ ⓡ The Nobel Foundation

노벨평화상의 의미

현재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평화상은 300여개에 달한다. 그중에서 노벨평화상이 가지는 권위와 명성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노벨평화상은 1896년 알프레드 노벨의 유증에 의해 개시되어 1901년 최초의 수상자를 낸 이후, 한 세기가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거의 매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상으로 인하여 사상 최초로 평화가 매년 정기적으로 수여되는, 더구나 엄청난 상금이 걸린 국제적 어워즈의 주제어가 되었다. 또 1767년 프랑스에서 근대 유럽 최초의 평화상이 제정된 이래, 기존의 평화상이 논문이나 저서 등의 ‘학술적’ 성과를 주된 대상으로 했다면, 노벨평화상은 각종 ‘운동이나 실천, 활동’ 등에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럼으로써 평화의 지평을 보편적 이상이나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을 넘어, 구체적인 개인(집단)의 실제적인 행동의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노벨평화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

노벨평화상의 명성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논란 역시 끊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노벨평화상은 종결된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분쟁이나 이슈도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경향은 최근 들어 더욱 강해지고 있다. 따라서 논란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상이 평화에 대한 이해나,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방법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릇 평화상이란 평화증진에 헌신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 뿐 아니라, 평화와 관련된 각종 이슈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평화실현의 다양한 방식들을 널리 알리고, 그 동참을 호소하기 위한 목적도 가진다. 노벨평화상은 평화상의 이러한 목표에 최대한 근접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지구촌의 평화 트렌드를 앞장서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왔다. 매년 10월 노르웨이에서 노벨평화상이 발표될 때마다 굳이 언론기자가 아니더라도 ‘올해는 과연 누가?...’하며 너나없이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총 6개 분야에 주어지는 노벨상 중 노벨평화상은 노벨문학상과 더불어 늘 가장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세계의 주요 평화상들, 즉 <난센 난민상>,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s)>, <레닌 국제평화상>, <니와노 평화상>, <발잔 평화상> 등이 각각 ‘UN의 노벨평화상’, ‘대안적 노벨평화상’, ‘사회주의 노벨평화상’, ‘일본의 노벨평화상’, ‘노벨평화상보다 상금이 많은 평화상’ 등의 별명을 가진(가졌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벨평화상은 때로는 따라야할 모델로, 때로는 극복해야할 반면교사로 다른 주요 평화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벨평화상의 탄생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노벨의 유언장(1895.11.27.) ⓒ Waage

1895년 11월 27일 파리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스웨덴의 사업가 알프레드 노벨이 마지막 유언장에 서명을 한다. 바로 이 유언에 의해 노벨상이 탄생했다.

“현금화할 수 있는 내 남은 재산 모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다: 유언집행자가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한 자산으로 재단을 만들고, 매년 그 이익이 그 전 해 인류에 가장 큰 혜택을 가져다준 사람들에게 상금의 형식으로 분배될 것이다. 그 이익은 5개 분야에 균등하게 나누어진다...1/5은 국가 간 형제애, 상비군의 폐지나 축소, 평화 회의의 개최와 진흥을 위해 최대 또는 최고의 일을 한 사람에게 준다...평화의 챔피언은 노르웨이 의회가 뽑은 5인의 위원회가 선정한다. 나의 특별한 바람은 상을 수여함에 있어 후보자의 국적을 결코 따져서는 안 되며, 스칸디나비아인이건 아니건,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노벨의 유언 중

다음 해인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후 유언을 둘러싼 많은 논란, 친인척의 거센 반발, 법적 소송이 이어져 실제 노벨상의 집행은 5년 후인 1901년 비로소 이루어진다. 노벨이 남긴 유산은 당시 돈으로 약 3,100만 SEK(스웨덴 크로나), 현재 화폐가치로는 약 17억 SEK(약 2억 600만 달러, 한화로는 약 2천400억 원)에 달한다. 당시 스웨덴의 왕 오스카 2세는 자기 나라 사람들도 가난에 허덕이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내줄 생각을 할 수 있냐며 화를 냈다. 그는 노벨이 평화 광신자들, 특히 ‘여자들’의 영향을 받아 부도덕하고 비애국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했다. 이때 ‘여자’란 노벨의 절친이자 당대의 저명한 반전운동가로, 1905년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베르타 폰 주트너를 말한다. ‘국적을 따지지 않는 거액의 평화상’이라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기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왜 노벨평화상만 노르웨이에서?

최초의 노르웨이 노벨위원회(1897) ⓒ Photographer: Ernest Rude (1871-1948)

유언에 드러나듯이 처음 노벨상은 5개 분야(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평화)로 구성되었으나, 1968년 스웨덴 국립은행 창립 300주년을 기념해 경제학 분야가 추가되었다. 다른 노벨상을 스웨덴에서 주관하는 것과 달리 평화상은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에서 선정한다. 왜 유독 평화상만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에 위임했는지에 대해서 노벨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기에 오직 추측만이 가능하다.

가장 유력한 것으로는 1)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국 상태였기에 5개 중 하나 정도는 노르웨이에 위임하는 것이 양국 간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 2) 실질적으로 스웨덴 지배 하의 노르웨이는 독립적 외교정책을 펼 수 없었기에 오히려 평화상 선정에 보다 객관적일 수 있다, 3) 노르웨이 의회는 국제의원연맹에 적극 참여하고 갈등 해결에 있어 조정과 중재를 중시하는 등, 당시 어느 나라보다 민주적이다, 라고 노벨이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그 외 노벨이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좋아했던 작가 B. 비에른손이 노르웨이 출신의 평화활동가이기도 했다는 점도 자주 거론된다. 실제 이후 비에른손은 노벨위원회 위원으로 노벨평화상 선정에 직접 참여했고, 19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세계 최대 무기상이 세계 최고의 평화상을?

베르타 폰 주트너 (1873년, 30세)

노벨평화상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죽음의 발명가’,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던 세계 제일의 무기상이 세계 최고의 평화상을 만들었는가?” 라는 흥미로운 아이러니와 관련된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노벨이 (의도와 상관없이) 파괴와 죽음을 대가로 축적한 부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가장 믿을만한 근거는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주트너는 병약한 노벨을 평생 돌봤던 어머니, 강렬하지만 짧은 사랑을 나눴던 연인 소피 헤스와 더불어 ‘노벨의 세 여인’으로 꼽힌다. (노벨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다.) 무엇보다 평화에 대한 생각과 방법에 있어 노벨은 주트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산의 사회적 환원이나 노벨평화상의 제정은 분명 주트너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현실주의자 노벨은 주트너가 이끌던 당대 평화운동의 기본 전제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군비축소나 철폐, 조정과 중재에 의해 국제 분쟁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강력한 무기의 출현이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평화를 깨는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군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민간시민운동보다는 국가간 집단안보조약에 더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트너의 비정부 평화운동 및 국제평화단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벨평화상의 제정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추측일 뿐, 노벨의 속내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내가 수수께끼 라고 당신들은 말하지-어쩌면 그럴지도,
우리 모두는 설명할 길 없는 수수께끼니까.”
- 18살의 노벨이 쓴 시 <수수께끼> 중에서

노벨평화상 선정 절차: 추천, 심사, 선정

선정의 전 과정은 노르웨이 의회가 뽑은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노벨위원회가 맡는다. 원칙적으로 외국인도 위원이 될 수 있으나, 현재까지는 모두 노르웨이인이었다.

노벨평화상 선정 프로세스

9월-다음해 2월 1일: 후보 추천
매년 9월 노벨위원회는 후보 추천을 받을 준비를 시작한다. 노벨평화상 후보는 아무나 추천할 수 없다. 노벨재단의 정관에 표시된 범주에 속한 사람만이 추천 가능하다.
추천마감은 2월 1일이다. 노벨위원회 현 위원에 한해서 2월 1일 이후 열린 첫 번째 회의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본인 추천은 불가능하다. 2월 1일이 지나 이루어진 추천은 그 다음 해로 넘어간다. 평균적으로 매년 추천되는 후보 수(개인이나 단체)는 약 200명(개)이다. 후보 수가 가장 많았던 해는 2014년으로 278명(개)이었다.

2월-3월: 최종후보 선별
노벨위원회는 추천된 후보들의 업적을 검토해 최종후보군을 추린다. 매년 최종후보 리스트에 오르는 개인이나 단체는 보통 20-30명(개)다.

3월-9월: 최종후보별 보고서 작성 & 심의
노벨위원회 자문위원들이 최종후보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자문위원은 보통 노벨연구소 소장과 연구부장을 비롯해, 관련 분야의 노르웨이 대학교수들, 때로는 외국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자문위원들의 보고서가 제출된 후, 노벨위원회에서 선정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보통 수상자 발표 직전 마지막 회의에서야 최종결정이 이루어지곤 한다. 위원회는 만장일치를 추구하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다.

10월: 수상자 발표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은 누가 할까?

• 각국 국회나 정부의 멤버
• 국제재판소 멤버
• 각국 대학 총장, 교수(사회과학,역사,철학,법학,신학), 평화연구기관/외교정책연구기관의 기관장
• 노벨평화상을 이미 받은 개인 혹은 단체의 임원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전현직 멤버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전 자문위원

‘50년 비밀의 법칙’

노벨재단 정관에 따라 추천인이나 피추천인, 후보검증결과, 선정과정에서 위원회에서 오고간 의견 등은 향후 50년간 엄격히 비밀에 부쳐진다. 이를 ‘50년 비밀의 법칙’이라 한다. 50년 이 지나면 노벨재단의 데이터베이스가 열린다.

노벨평화상 시상식: 메달, 상장, 상금

시상식

2009년 노벨평화상 시상식. 오슬로 시청에서 오바마가 노벨평화상 수상기념연설을 하고 있다. ⓒ White House (Pete Souza) / Maison Blanche (Pete Souza)

시상식은 매년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다. 수상자는 노르웨이 국왕의 참석 하에 노벨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메달과 상장, 상금증서를 받는다. 수상자는 기념강연을 한다. 매년 시상식 참여를 원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수백 개의 좌석이 제공되고, 상장의 카피본을 기념으로 나눠준다. 저녁에는 오슬로 그랜드 호텔에서 만찬이 거행된다. 1994년부터는 시상식 다음날 노벨평화상 콘서트가 매년 열리고 있다. 티나 터너, 필 콜린스, 스팅, 머라이어 캐리 등의 세계적 팝스타가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한 2000년의 노벨평화상 콘서트에는 조수미가 출연했다.

메 달

이미지 목록

노벨평화상 메달(앞면) ⓒ ⓡ The Nobel Foundation

노벨평화상 메달(뒷면) ⓒ ⓡ The Nobel Foundation

18캐럿 금으로 만든 지름 66mm, 무게 175g의 노벨평화상 메달은 노르웨이의 유명 조각가인 비겔란 (G.Vigeland)의 작품으로, 스웨덴에서 제작되는 다른 노벨상의 메달들과는 디자인이 다르다. 앞면에는 노벨의 초상과 이름, 그의 출생 및 사망년도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Pro pace et fraternitate gentium(인류의 평화와 형제애를 위하여)”라는 글귀와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벌거벗은 채 어깨를 겯고 서로 어우러진 이들은 인류의 형제적 연대를 상징한다. 수상자의 이름과 수상연도는 “Prix Nobel de la Paix(노벨평화상)”이라는 글귀와 함께 메달의 모서리에 새겨진다.

상 장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 상장 Copyright ⓒ The Nobel Foundation 2000, Artist: Elling Reitan, Calligrapher: Inger Magnus

상장은 한 면은 예술적 디자인으로, 한 면은 수상 사항(상의 이름, 수상자 이름, 수상년도, 시상기관 등)의 기록으로 구성된다. 상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특히 1991년 이래로 노르웨이의 대표적 예술가들이 번갈아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수상연도에 따라 상장의 디자인이 각기 다르다. 수상사항은 1992년 이래로 유명 서예가인 망누스 (Inger Magnus)의 손 글씨로 쓰여진다. 다른 노벨상들과 달리 노벨평화상의 상장에는 수상사유가 적시되지 않는다.

상 금

상금은 노벨평화상의 명성에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해왔다. 노벨위원회가 2015년 노벨평화상 상금으로 밝힌 금액은 8백만 SEK(스웨덴 크로나)로, 약 96만 달러, 한화로는 약 11억 원에 해당한다. 수상자가 한 명 이상인 경우 총액을 인원수로 나눈다. 매년 노벨 재단의 투자 이익이 배분되는 탓에 상금의 액수는 매년 다르다.

참고로 제1회인 1901년 상금은 약 15만 SEK, 2014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8백만 SEK로 현재와 거의 동일하다. 비율로 환산해 1901년부터 2014년까지 상금이 가장 적었던 해는 1919년(우드로 윌슨 수상-약 220만 SEK)이고, 가장 많았던 해는 2001년(UN과 코피 아난 수상-약 1173만 SEK)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한 2000년은 역대 7번째로 상금이 많았다.

수상자가 없는 해의 상금은 다음 해로 넘어가고, 그 다음 해에도 수상자가 없게 되면 노벨재단 특별펀드로 예치된다.

노벨평화상의 시기별 특성

노벨평화상의 역사는 세계평화운동의 발전과정이나 평화 개념의 확대과정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노벨평화상은 그 과정을 반영할 뿐 아니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기도 했다.

1) 1901-1913: 평화운동조직의 시기

1901년 최초 수상자 앙리 뒤낭

전 세계적으로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각축이,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운동의 국제적 조직화가 이루어진 때다. 또 조정이나 중재에 의한 전쟁방지, 그를 위한 국제법적 기초가 타진된 때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이 시기 다수의 노벨평화상은 국제적십자위원회, 국제평화국, 국제법학회, 평화중재연맹, 헤이그평화회의 등 대표적 평화조직의 창립자나 공헌자, 또는 조직 자체에 돌아갔다. 국제적십자위원회를 설립한 A. 뒤낭(1901), 국제평화국(1910년 수상)을 주도한 B. V. 주트너(1905), F. 바예르(1908), 헤이그 국제사법회의를 추진한 T. 아세르(1911)의 수상 등이 대표적이다.

2) 1914-1945 : 국제기구와 정치가의 시기

1,2차 세계대전으로 국제평화유지와 협력증진을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에 대한 절박한 요구가 등장했다. 이 시기 수상자의 다수가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의 설립, 각종 평화조약의 성사에 기여한 정치인 중에서 나온 건 이 때문이다. ‘국제연맹의 아버지’ W. 윌슨(1919), 집단안보조약인 로카르노조약을 성사시킨 영국 외무장관 O. 체임벌린(1925), 국제연합 조직에 앞장 선 미 국무장관 C. 헐(1945) 등의 수상이 대표적이다. 한편 전쟁 기간 중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으로 국제적십자위원회는 1917년, 1944년 두 번의 수상을 한다.

3) 1946-1959: 인도주의 시기

UNHCR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이 시기 노벨평화상은 생명 보호, 고통 경감, 복지 증진을 위한 인도주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전쟁 방지를 위한 국가 차원의 활동만이 아니라, 전쟁의 희생자를 위로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민간의 노력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또 단순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행복을 위한 포괄적인 기본 전제들이 마련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가능함을 널리 알렸다. 영미퀘이커봉사협회(1947)나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1954)의 수상, YMCA 세계연맹 회장인 존 모트(1946), 그리고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1952)의 수상 등이 이를 대표한다.

4) 1960-1986: 인권의 시기

아프리카 최초 수상자 A. 루툴리(1960)

평화 개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권에 주목한 시기다. 이는 1960년 A. 루틀리가 아프리카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 시기 노벨평화상은 인종이나 성, 종교 등에 근거한 각종 차별에 저항하고,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 인권의 국제법적 근거를 제공한 사람이나 단체에 돌아갔다. 특히 이 시기는 백인/남성/서구 중심적 경향을 보였던 노벨평화상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인종차별에 반대한 마틴 루터 킹(1964), D. 투투(1984), 유럽인권재판소 의장인 R. 카생(1968)의 수상, 소련과 동구권 인권운동가 A. 사하로프(1975)와 L. 바웬사(1983)의 수상이 대표적이다.

그외 주목할 만한 것은 반핵 메시지를 강력히 던지는 과학자들의 수상이다. 195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L. 폴링의 수상(1962)이나 국제핵전쟁방지의사회(1985), 부분적으로는 소련 핵물리학자 사하로프의 수상이 이에 해당한다.

5) 1987-현재: 민주주의의 시기, 평화 이슈의 다원화

14대 달라이 라마 (1989 수상) ⓒ christopher

평화와 민주주의의 관계가 부각되는 한편, 평화 의제가 다양해진 시기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투사, 또는 민주주의적 체제전환이나 정착을 이루어낸 정치가 등이 상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1989), A. 수치(1991), 과테말라의 R. 멘추(1992)가 전자에, 고르바초프(1990)나 넬슨 만델라(1993), 김대중(2000) 등이 후자에 해당한다. 동시에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한 퍼그워시 회의(1995), 국제지뢰금지운동(1997), 화학무기금지기구(2013),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2007), 빈자들의 은행 그라민(2006), 17살 소녀 M. 유사프자이(2014)의 수상 등은 군축, 지구온난화 방지 및 지속가능한 발전, 경제 정의, 여성과 아동평화 등 지구화시대 다양해진 평화의제를 반영하며 새로운 트렌드를 열었다.

 

참고문헌

· www.nobelprize.org
· www,nobelpeaceprize.org
· Ǿ. Stenersen, I. Libæk, A. Sveen, 『The Nobel Peace Prize : One Hundred Years for Peace』 (Oslo: Cappelen, 2001)
· G. Lundestad, <The Nobel Peace Prize 1901-2000>, Nobelprize.org. Nobel Media AB 2014. Web. 21 Aug 2015.
· C. Toffolo, R. Vandenbroucke, R. P. Alford, N. J. Young, <Nobel Peace Prize> in J. Nigel ed.,「The Oxford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Peace」, vol. 1, USA: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 B. L. Mitchell-Green, <Peace Prizes> in L. Kurts ed.,「Encyclopedia of Violence, Peace & Conflict」Oxford: Elsevi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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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사항

- 당첨자 발표는 네이버 사전 공식블로그를 통해 2015.10.13 알려드립니다.
  (http://blog.naver.com/dic_master)
- 당첨자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선정해주십니다.
- 노벨평화상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입니다만,(본문참조) 후보자를 추천한 사람이 미디어 등을 통해 공표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위 인물/단체들은 한국의 뉴스기사를 통해 공표된 후보자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기사, 일본 평화헌법9조, 드니 무퀘게, 에드워드 스노든, 메모리얼 Мемориал,
  메르켈 독일총리
- 인신공격 등의 댓글은 사전통지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발행일

발행일 : 2015. 10. 01.

출처

제공처 정보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 이문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석사를,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대화주의 사상가 M. 바흐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및 탈사회주의권 문화연구, 탈경계 연구, 평화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오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공저, 아카넷, 2013), 『재난과 평화: 폐허를 딛고 평화를 묻다』(공저, 아카넷, 2015), 『 동아시아-동북아-신동북아』 (공저, 도서출판네오, 2015),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21세기 폭력의 패러다임과 폭력/비폭력의 경계"(『평화학연구』 16권 1호, 2015), “형제국가들의 역사전쟁: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기원” (『역사비평』 112, 2015), 등이 있다.

  • 후원 인문한국지원사업(HK : Humanities Korea),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이 원고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와 네이버가 공동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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