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의 새 성지 '인천공항'.. 서울역과 달리 옷차림은 깔끔

이영빈 기자 2019. 6. 2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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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숙자 몰리는 인천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을 찾는 노숙자가 늘어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거나, 입국했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이다. ① 지난 25일 인천공항에서는 제2터미널 지하 1층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거나 ② 인적이 드문 구석에 누운 노숙자를 볼 수 있었다. ③④ 제1터미널 지하 1층에 있는 정자(亭子)는 햇볕이 들고 인적이 드물어 노숙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깔끔하고 시설까지 좋은 노숙자들의 '핫 플레이스'가 등장했다. 그들에게는 집 아닌 곳이 따로 없겠지만, 여기는 조금 새롭다. 인천국제공항이다.

지금까지 노숙자의 천국은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 주로 지하철 역사였다. 꾀죄죄한 차림에 악취는 기본. 오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기피 대상이었다.

인천공항 노숙자는 사뭇 다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다. 그 나름의 깨끗한 차림에 고성(高聲)을 지르지도 않고, 술 취해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구역마다 있는 스마트폰 충전소에서 '유튜브'를 즐기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벤치에서 잠드는 게 일상이다.

공항은 수많은 해외 관광객이 오가는 만큼 경비도 삼엄하다. 그 와중에도 노숙자들은 보안 요원을 피하거나 또는 구슬려 먹고 잔다. 물론 말썽을 일으키는 노숙자도 드물지는 않다. '아무튼, 주말'이 인천공항의 노숙자를 찾았다.

공항 노숙자의 생태계



노숙자들이 종종 들르는 제1터미널 1층 벤치.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노숙자들이 각지에서 인천공항으로 입성(入城) 중이다. 공항은 일반 노숙자들이 머무는 길거리보다 훨씬 쾌적하다. 사시사철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눕기 편한 벤치도 흔하다. 65세 이상이라면 공항철도 지하철을 이용해 무료로 도착한다. 노인이 아니더라도 지하철 요금 최대 5000원가량을 내면 서울 어디에서도 약 1시간이면 도착한다. 공항철도 이용객 수는 지난달에 최고 기록(31만3224명)을 세웠다.

지난 24일 찾은 인천공항. 처음에는 노숙자를 찾기 힘들었다. 이들은 공항 곳곳에 있는 화장실에서 씻고 옷차림을 다듬는다. 불결하거나 난동을 부리면 보안 요원에게 쫓겨나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그들만의 특징을 찾았다. 단정한 장발에 등산복을 입고, 짐을 카트로 끌고 다니며 휴대폰 충전소에서 동영상을 즐긴다. 만약 가까이 갔을 때 코를 찌르는 체취가 난다면 거의 100%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로 제1터미널 지하 1층에 있는 후미진 벤치에서 지낸다. 음식, 옷 등을 찾아 입·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수가 늘어나는 만큼 사연도 다양했다. '공캉스(공항+바캉스)'를 즐기러 왔다는 서울역 출신 노숙자 정모(64)씨는 "덥지 않고 시설도 좋다"며 "많이 더워지는 7~8월 중에 한 번 더 올 생각"이라고 했다. 갈 곳이 없어 노숙자가 된 재외교포도 있다. 30년 넘게 미국에서 사업을 했다는 한 노숙자(66)는 "이혼하고 형제들을 보러 한국에 왔지만, 자존심이 상해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남성은 5개월째 공항에서 체류 중이라고 했다.

전에도 노숙자 취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역·영등포역 등에는 여자 노숙자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인천공항은 거의 반반이었다. 직원들은 "여성 노숙인이 상대적으로 난동을 덜 부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리에서는 가만히 누워 있어도 고성이 오가고, 여자 노숙자는 성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항은 보안 업체가 모든 곳을 24시간 단속 중이라 시비가 붙기도 전에 제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공항에 온 지 4개월 됐다는 한 여자 노숙자는 "소주병 깨지는 소리 없이 조용히 잘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들은 비행기를 오래 기다린 탑승객과 겉모습만으로는 구분이 힘들었다. 다행히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밝혀 얻을 수 있었던 대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복병이 있다. 인천공항 노숙자 최대의 고민은 식사. 무료 급식소가 즐비한 기차 역사 주변과는 다르다. 먹을거리를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했다. 휴지통 주위에서 약 1~2 시간 대기했더니 노숙자가 나타났다. 허리를 숙여 휴지통을 빠르게 훑는다. 그는 "생활 쓰레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거리보다 음식물 보존 상태가 훨씬 괜찮다"고 했다. 운이 좋은 날에는 거의 먹지 않은 샌드위치, 음료 등을 건질 수 있다. 한 노숙자는 "오전 7~8시 보안 요원 교대 시간을 틈타 1~3층을 뒤져야 한다"고 했다. 편의점 진열대에서 몰래 도둑질을 하거나 카페, 햄버거집 손님에게 '버리는 거면 달라'고 구걸하기도 한다. 제1터미널의 편의점 직원은 "상습적으로 음식을 훔치는 노숙자가 있다"고 했다.

공항 직원들 사이 유명해진 이들도 있다. 산발 머리가 마치 망태기를 쓴 것 같다는 '망태 할머니', 토끼를 키우는 것으로 유명한 '토끼 아줌마', 먹을거리를 발견하면 서로 먹여준다는 '엄마와 딸' 등이다. 한 청소부는 "유명한 노숙자들은 공항에서 최소 1~2년간 지냈다. 대부분 영리해서 보안 요원을 설득해 자리를 차지하거나 회유해 먹을 걸 얻어내기도 한다"고 했다.

'제1터미널'에서 공항철도로 약 10분 거리인 '제2터미널' 지하 1층에도 몇명이 눈에 들어왔다. 제1터미널이 '포화 상태'라 옮겨 왔다고 한다. 제2 터미널로 옮긴 지 열흘 됐다는 경모(57)씨는 "1터미널은 오가는 사람이 많은 만큼 노숙자끼리 경쟁도 치열하다"며 "쓰레기통이 조금 덜 차 있어도 마음 편한 2터미널이 낫다"고 했다.

북새통 틈타 훔치고 자리도 차지

눈에 띄지 않을 뿐 상당수 노숙자는 여전히 무법자다. 북적이는 사람들에 숨어 편의점의 물건을 채가기도 한다. 보안 요원 몰래 화장실을 오염시키는 경우도 많다. 인천공항 편의점은 일반 시내보다 월등히 높은 매출을 기록한다. 매장 하나가 도시의 한 구(區)만큼 매출을 올리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그만큼 손님이 북적이는 탓에 직원은 매대(賣臺)에서 계산하기 바쁘다. 나중에 방범 카메라 영상을 통해 붙잡히더라도 절도 장면이 명확히 나오지 않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한 편의점 점주는 "원래 공항에서 팔지 않는 소주를 지난해 들여 놨는데, 상당 부분 없어졌다"며 "한 달 20만~40만원 정도가 노숙자의 절도로 사라지는 것 같다"고 했다.

현장에서 붙잡히더라도 대체로 구속되지 않는다. 보통 단순 소액 절도범은 동종 전과가 수차례 있거나 누군가에게 상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불구속 상태로 수사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상당수는 기소유예(죄는 인정하지만 정상 참작하는 것) 처분을 받는다. 인천공항경찰대 관계자는 "최근 노숙자가 늘어나 관련 신고도 많이 들어오지만, 대부분 기소유예에 그쳐 처벌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가게 테이블을 무단 점거하기도 한다. 출입문 없이 주방과 테이블만 있는 음식점이 많은데, 이곳에 무단으로 앉아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는 속수무책이다. 한 보안 요원은 "노숙자가 점포에서 행패를 부려도 무력을 행사할 권한이 없어 구두로만 경고한다"고 했다. 제1터미널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점주는 "손님이 붐빌 때는 무료 음료로 달래서 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세계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공항 중 하나인 미국 '하츠필드-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도 지난해부터 노숙자가 크게 늘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시 당국은 공항 출입에 제한을 두고, 인근에 노숙자 쉼터를 늘려 숫자를 줄여 나가는 중이다.

미리 대처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공항 노숙자가 급증할 거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새벽 일정 시간 동안에는 비행기 표를 가진 사람만 머무르게 하는 조치와 노숙자가 공항을 떠나 갈 곳을 연결해 주는 대책이 동시에 있어야 숫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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