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사랑방이 된 책방 “서울 큰 서점 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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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5.10.09. 오후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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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지사에게 권하는 책’을 전시하고 책을 직접 펴내면서 시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책방이 있다. 경남 진주의 진주문고다. 책방은 색깔이 있고, 책방 주인은 성깔이 있다. “지역에 서점이 없어진 후를 한번 상상해봐라. 그 모습이 맘에 안 들면 우리 서점을 살려라.” 주인은 지역주민들을 협박하면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지역주민의 자랑이 된 책방, 그 책방 사람들을 만났다.



지역 서점의 시름이 깊다. 온라인서점에 밀려 하나둘 사라지는 동네서점. 하지만 진주문고는 출판계의 지각변동을 비켜가고 있다.“지역 서점 살려야 한다고 주민들을 협박한 결과예요” 1986년 개척서림으로 출발해 1988년 복합문화공간으로 확장할 당시, 4만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자회사 격인 출판사도 만들어 2권의 책도 냈다. 내년까지 10권의 책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부들은 아이를 맡기고 장을 보고 학생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드나드는 ‘만남의 공간’으로 진주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8일 경남 진주시 평거동 진주문고 본점(왼쪽 사진)에서 만난 여태훈 대표(가운데 사진)는 “지역사회 관심사와 서점의 가치관을 담는 것이 지역서점의 힘”이라고 말했다. 진주문고 본점 2층에는 진주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책 코너(오른쪽)가 별도로 마련돼 있다.


‘독서의 계절’이 돌아왔지만 ‘책 읽는 사람’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 2분기 가구당 월평균 도서구입비는 1만3300원. 2003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역대 최저이자,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1% 떨어진 수치다. 독서인구가 줄어들면서 지역 중·소형 서점의 시름이 깊다. 반면 온라인서점은 성황이다.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와중에도 국내 최대 온라인서점인 예스24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93억원)은 전년 대비 5배나 증가했다.

시행 1년을 앞둔 도서정가제가 온라인서점만 배불렸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빠른 배송’ ‘낮은 가격’ ‘방대한 장서량’ 등 책을 찾는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몰린다. 인터넷의 발달로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지식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서점들은 끝내 ‘사라지는 풍경’이 되고마는 걸까.

8일 경남 진주시에 있는 진주문고 본점을 찾았다. 진주문고는 출판계가 급격한 지각변동과 빙하기를 동시에 겪던 지난 한 해 동안 도서정가제 시행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무사히 버텼다. 이에 더해 지역서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회사 격인 출판브랜드 ‘펄북스’를 차려 2종의 책도 냈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하자 매대에 수학 학습서 ‘개념원리 수학1’과 학술서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등 9권의 책을 ‘경남도지사에게 권하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진열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주문고 본점은 아파트, 학원. 독서실, 농협, 빵집 등으로 둘러싸인 평거동 주택가에 있었다. 유리문에는 ‘진주 가곡 사랑모임’의 행사 안내와 카페 주소가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소식지 ‘진주소식’과 거북선·궁궐 등 장난감 모형이 보였다. 1층에는 어린이 서적과 중·고등학교 참고서, 요리 등 실생활 위주의 서적이 비치돼 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직원들이 분홍색 티셔츠를 유니폼으로 입은 것 말고는 여느 서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문학·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배열된 2층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토익책 등 대학생 이상의 영어교재는 2층에 있었다. ‘지역에 관한 책’ ‘서점에 관한 책’ 등 테마별로 배열한 서가도 있었다. 책은 권당 가격의 5%를 마일리지로 적립할 뿐, 철저히 정가로 팔았다. 창립 초부터 시행한 정책이다.

진주문고는 ‘만남의 공간’이었다. “지역주민들을 협박한 결과예요. 주변사람들에게 정가 정책을 설명하면서 ‘지역에 서점이 없는 걸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우리 서점을 먹여살리는 것도 문제집입니다. 하지만 서점이 있으면 학생들이 문제집 사러 와서 놀다가 책 표지라도 구경하고 갑니다. 근처 시장 보러 온 엄마들이 애들더러 책 읽고 있으라고 서점에 맡겨두는 경우도 있고요. 다행히 시민들이 이해해줬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도서정가제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전부터 당연히 시행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태훈 진주문고·펄북스 대표(53)가 웃으며 말했다.

지난 8일 진주문고 본점 1층에서 지역 주민들이 책을 고르거나 담소를 나누며 쉬고 있다.



진주문고는 1986년 경상대 앞에서 사회과학서점 ‘개척서림’으로 출발했다. 진주시에 온갖 규모의 서점이 60개 가까이 되던 시절이었다. 경남대 행정학과 82학번인 여 대표는 ‘대학생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지 않으면 대화에 끼지 못했고, 시를 읽지 않으면 연애를 못했던 시절’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대학가 앞은 어디나 서점들이 잔뜩 있었고, 대학생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배고프면 거기서 라면도 얻어먹고, 대신 가게도 봐주면서 자연스럽게 대학을 졸업하면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 서점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개척서림’ 초창기에는 강만길·송건호·리영희 선생의 책이 잘 나갔다. 때때로 금서목록에 오른 책을 팔았다며 책을 압수당하거나 경찰 조사도 받았다. 서점은 1988년 약 150㎡ 규모로 확장해 대여점과 세미나 공간을 겸하는 복합문화공간 ‘책마을’로 개편했다. 당시는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이 막 사회로 첫발을 내딛던 시기였다. 유료회원을 받아 대여를 겸했다. 사회과학 서적이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 기간 진주시민 약 4만명이 회원이 됐다. 인구 5명 중 1명꼴로 등록한 셈이다. 지역사회는 물론 서울에서까지 주목을 받았지만 실험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분위기가 달라진 탓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굳이 사회과학 책을 찾지 않았고, 복합문화공간에 대한 매력도 시들해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 대표는 1991년 책방을 대학가에서 갤러리아 백화점 옆으로 옮기고 이름도 ‘진주문고’로 바꿨다. 이때부터 일반 서적 외에 수험서도 팔았다. “책을 좋아하는 시민들은 여전히 많고, 인터넷이 없던 시대니까 그래도 지식을 구하려면 서점에 가야 했어요. 책을 좋아하는 진주시민들의 ‘사랑방’이 되자는 생각으로 운영했습니다.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책이 있으면 다 가져다 놓고요.” 반응이 좋았다.

지역의 문인들이 놀러오면서 네트워크도 이뤄졌고, 부쩍 여가에 관심 많아진 시민들을 상대로 문화유산답사 행사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지역주민들에게 ‘정가정책’을 설명할 수 있었던 기회도 이 무렵이었다. 지역 특유의 끈끈한 정서가 살아 있어 가능했다.

여 대표에게 최고의 위기는 외환위기 무렵이었다. 1년여 먼저 조짐이 보였다. 1997년 지표상 경기는 ‘호경기’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책 매출은 급감했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종로서적 등 서울의 유명한 서점과 출판사도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주문고도 문을 닫기 직전까지 몰렸다. 서점을 시내 중심지 번화가에서 현재의 아파트 단지로 옮겼다. 건설경기 붐으로 진주에도 아파트단지가 많이 들어서는 시절이었다. ‘서점을 문 닫게 할 수 없다’는 직원들의 의지가 컸다. 다행히 진주문고는 살아남았지만 여 대표는 “구도심의 몰락은 씁쓸한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워낙 힘들었기 때문일까요. 직원들도 단련이 되고, 그래서 오히려 온라인 시대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진주문고 직원 규모는 현재 본·분점 합쳐 26명이다. 서점은 연중무휴 운영하지만 직원들은 주5일, 2교대로 일한다. 출판사 ‘펄북스’는 지역 안팎의 ‘외부기획위원’들의 도움으로 운영한다.

“도서·출판시장의 불황과 인터넷의 발달이 오히려 기회가 된 면도 있습니다. 정보화 덕분에 오히려 서울과의 공간적 거리에서 오는 불이익이 많이 없어졌어요. 반면 서울의 출판시장이 한계에 부딪히고 책을 만드는 고급인력들이 구조조정되는 상황이어서 ‘지역으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겼습니다. 저 자신부터 서울을 보는 관점도 달라졌고요. 한때는 저도 서울을 동경했지만, 지금은 여기서 새로운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출판사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 대표는 “책을 30년 동안 팔다보니 만드는 데도 관심이 생겼다”며 “인구 35만의 도시에, 지역민들의 관심사와 시각을 반영하는 출판사가 없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지난 두 달간 경남 하동군에 사는 박남준 시인의 시집 <중독자>와 일본에서 도서관 운동을 하는 이소이 요시미쓰의 <동네 도서관이 세상을 바꾼다>를 차례로 출간했다. <중독자>는 4000부 넘게 찍어 불황인 출판시장을 놀라게 했다. 에세이와 번역서 등을 포함해 10권의 책 출간을 내년 목표로 삼고 기획 중이다.

진주문고의 문학인문팀장이자 페이스북 관리자인 정도선씨(32)도 ‘서울을 떠난’ 젊은이다. 서울의 서점에서 5년간 근무한 그는 아내의 암 투병을 계기로 세계여행을 떠났다. 여행기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를 출간하고, 고향 산청으로 이주하면서 진주문고와 인연을 맺었다. 정씨는 여행기에서 멕시코의 서점을 소개하며 “대한민국에 다채로운 서점과 서점을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여유가 없는데 책이 무슨 소용일까”라면서 “서점 스스로도 책 읽는 독자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진주문고는 페이스북을 통해 서점에서 추천하는 좋은 책뿐 아니라 ‘오늘 처음 팔린 책’ 등 지역 주민들의 관심사가 반영된 판매현황도 매일 소개한다.

온라인서점의 강점이 ‘알고리즘’을 통해 개별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책을 맞춤으로 소개해주는 것이라면, 지역서점의 강점은 공동체의 관심사를 반영한 ‘편집배열’이다. 진주문고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이 출간되자 <MB의 비용>과 나란히 진열했다. 여 대표는 “직원들끼리 ‘너무 정치적 의도가 뻔한 자서전도 팔아야 되느냐’며 토론에 부쳤는데 ‘서점이 책을 안 팔 권리는 없다. 대신 독자들을 위해 ‘다양하게 소개해 줄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란히 배열했다”고 말했다.

무상급식 중단 풍자와 관련해 정씨는 “홍 지사의 생각이 지역 주민들의 여론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아서 이를 알리고자 했다.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닌데, 화제가 된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숨이 막혀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주민의 여론을 읽어내고, 좋은 책을 고르는 데 계량화된 기준은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직관’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직관을 키우려면 끊임없이 책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여 대표는 “아날로그의 힘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힘’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며 “책을 통해 지역의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주 | 글·사진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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