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피플] ‘중요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 김경배 경북대 명예교수

  • 김은경, 손동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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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6-22 08:00  |  수정 2013-06-22 09:22  |  발행일 2013-06-22 제3면
반듯하고 기품있는 正歌 정신을 복원하고 알리는 것이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
“그래서 내 목은 오늘도 쉬지 않는다”
20130622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인 김경배 경북대 명예교수가 양어머니였던 김월하 여사의 유품인 거문고를 타며 소리연습을 하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대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가 2명 있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인 김경배 경북대 국악과 명예교수(73)가 그중 한 사람이다.

김 명예교수는 2006년 경북대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후진 양성과 국악 보급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국악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를 만나 지난했던 삶과 국악사랑에 대해 들어봤다.

- 가곡(歌曲)은 어떤 음악입니까.

“가곡은 우리 국악 중에서 가장 느린 음악이다. 시조(時調), 가사(歌辭)와 함께 정악(正樂)으로 분류되는데, 조선시대 상류계층에서 주로 애창됐다. 판소리·민요·잡가 등 하류사회에서 불린 성악곡과는 형태와 내용 면에서 매우 다르다. 가곡은 시조를 5장 형식에 얹어서 부르는데, 주로 피리·젓대·가야금·거문고·해금의 반주에 맞춰 부른다. 유네스코는 2010년 11월 한국의 가곡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즉, 인류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 바로 우리의 가곡인 것이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곡

요즘 아이들은 뜻 모르는 외국노래만…

70대 나이에 수년 고생 끝 두번째 음반

정가 보존, 후배들 음악공부 도움됐으면

養母 김월하 여사 반듯한 모습 눈에 선해


- 국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는 것, 악기 연주하는 것이 마냥 신이 나고 좋았다. 처음에는 거문고와 노래 공부를 함께 했는데, 언제부턴가 노래로 방향을 정했다. 정식으로 국악을 배운 것은 1957년 현재의 국립국악고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제1기로 입학하면서부터다. 이후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다가 86년에 경북대 음대 국악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대구로 왔다. 30여년째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대구는 이제 고향이 됐다.”



- 거문고에서 가곡으로 방향 전환은 왜 하셨나요.

“서울대 1학년 시절이었다.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에 해당하는 공보부에서 콩쿠르를 개최했다. 별 기대감 없이 출전했는데 덜컥 수석을 해 장관상을 받았다. 갓 대학에 입학한 풋내기가 대상을 수상한 것은 당시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학교신문에 기사가 나고, 교정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그때 대회에 출전한 장르가 바로 가곡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가곡 무대에 섭외가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거문고가 아닌 가곡을 평생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학창시절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음악가들이 교수와 학생으로 있었다. 기억나는 학생 한 명이 춘원 이광수의 아내인 허영숙 여사였다. 늦은 나이에 소리 공부를 시작했는데 언제나 세련된 옷을 입고, 구성지고 맛깔스럽게 가곡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또 나의 양모였던 김월하 여사를 비롯해 국악인 지화자, 서도 소리 문화재인 김죽사의 동생인 김정년, 그리고 인간문화재 전효준 등이 모두 그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 양어머니인 김월하 여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김 교수는 국악사양성소 재학시절 김월하 여사와 첫 인연을 맺은 후 혈육이 없던 선생을 줄곧 양어머니로 모셨다. “2008년 작고한 성경린 선생은 ‘월하 이전에 월하 없었고, 월하 이후에도 월하 없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김월하 여사는 한국 국악계에서 독보적이고 남다른 경지에 있었던 ‘정가의 어머니’였다고 할 수 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정가에 입문했지만,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며 대성했다. 반듯하고 단아한 자태로 정가를 부르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게 늘 따뜻한 분이었지만, 한편으로 범접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 월하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월하문화재단은 어떤 단체인지요.

“김월하 여사는 겨우 두 살 때 돌림병으로 할머니와 어머니, 쌍둥이 오빠 등 가족 네 명을 잃었다. 날씨라도 흐릴 때면 외로움에 혼자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 근검절약하는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던 선생은 바느질, 강사료, 공연수입 등으로 알뜰히 모은 재산 50억원을 전액 월하문화재단 설립을 위해 기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월하문화재단이다. 선생의 뜻을 받들어 각종 연주회 개최 및 국악장학생 양성 등 정가 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 양어머니 김월하 여사가 남긴 거문고를 애지중지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다면.

“김월하 여사는 부산 피란시절, 재봉틀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다 보니 위가 많이 나빠졌다. 그래서 매일 오후에 부산 구덕수원지에 나가 산책을 하면서 시조를 불렀는데, 그곳에서 거문고와 시조명인인 현포 김태형 선생을 만나게 됐다. 두 분의 우정이 각별해지면서 현포 선생이 양어머니에게 거문고를 주었다. 양어머니가 평생 간직하다가 어느 날 내게 ‘아범이 갖고 가서 쓰라’며 주셨다. 못 돼도 150년 이상은 됐을 거다. 소리가 명징하고 울림이 깊어 늘 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연주했는데, 한 번은 제자 녀석이 뒷걸음질치다가 밟아 한 귀퉁이가 깨지고 말았다. 전문가에게 수리를 받았지만 옛날 소리만 못하다.”



- 그런 사연이 있는 악기라면 탐내는 이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국립기관, 단체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기증을 해 달라는 의사를 보내 왔다. 내가 죽은 뒤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양어머니의 유품을 내가 지키는 것이 맞을 듯하다. 김월하 여사가 사용하던 재봉틀이나 악기, 악보 등 여러 가지 유품은 서울 월하문화재단 사무실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유품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인데 장소를 옮긴다거나 하는 것을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 7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얼마 전 국악음반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줬습니다. 국악음반을 만들게 된 배경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두 번째 전곡음반인데, 정말 힘들게 완성했다. 수년에 걸쳐 정성껏 녹음을 마쳤는데, 대홍수가 스튜디오를 덮쳐 녹음해 둔 소리를 모조리 쓸어가 버려 재녹음을 해야 했다. 86년에 한국 가곡 26곡 전곡을 음반으로 만든 것에 이어 12가사 전곡을 세 장의 CD에 나눠 수록했다. 가사음악은 시조나 가곡과는 달리 노랫말을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을뿐더러 속소리의 활용, 떠는 소리를 비롯해 밀고 당기는 소리의 표현법이나 긴 호흡으로 이어가는 선(線)적인 표현법들이 오랜 공력을 요구한다. 음반제작은 더 늙기 전에 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훗날 내가 없더라도 제자와 후배들이 음반을 들으며 소리 공부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녹음했다.”



- 요즘은 주로 어떤 일로 소일하십니까.

“국악을 널리 알리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경북대와 부산대 등에서 하는 강의와 별도로 국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수업이 너무 재미있다. 대개 나이 든 어른인데, 직업이 다양하다. 수업을 듣기 위해 경주나 포항에서도 찾아온다. 얼마나 열심히 배우려 하는지 모른다. 수업시간 내내 진지하게 소리를 배우고, 끝난 후에는 서로 친목 시간도 갖고 있다. 조만간 이들과 함께 정기연주회를 열 생각이다. 또 얼마 전에는 대구와 서울의 제자들이 무대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월하예당(月荷藝堂)’이라는 작은 문화공간을 마련했다.”

대학 강의와 별도로 일반인 대상 수업

멀리서 찾아와 얼마나 열심히 배우는지…

조만간 그들과 함께 정기연주회 계획

대구·서울 제자들 무대활동 위해

작은 문화공간 ‘월하예당’도 마련

- 월하예당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죠.

“월하예당은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만든 50석 규모의 작은 문화공간이다. 우리 국악의 멋스러움, 풍류를 알리기 위해 열었다. 지난 4월 나를 비롯해 인간문화재들이 출연하는 음악회를 기획했는데, 반향이 꽤 컸다. 작은 공간에서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공연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인근에 창덕궁, 운현궁, 일본공관 등이 있어선지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앞으로 새롭고 다양한 국악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수시로 공연을 할 계획이다. 대구와 서울의 제자들이 월하예당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고결하고 기품 있는 우리 정악의 아름다움을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창구가 될 것이다.”



- 요즘도 노래 연습을 하시는지요.

“연습은 죽을 때까지 매일 해야 하는 것이다. 2006년 정년퇴임을 하고 팔공산 가산에 작은 연습공간을 마련했다. 평소에는 침산동 아파트에서 머물고, 일주일에 1~2일은 팔공산에서 생활한다. 이상하게도 시내에서는 두어 시간 만에 목이 쉬는데, 팔공산에서는 오래 연습을 해도 목이 쉬지를 않는다.”



- 우리 국악의 아름다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국악, 그중에서도 정가(正歌)는 글자 그대로 반듯하고 바른 노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정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뜻도 모르는 외국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가는 자기를 절제하는 노래이면서, 마음을 수양하는 수행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 음악은 발효음식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익혀야 참맛이 난다. 젊은이가 부르는 국악도 예쁘고 감동적이지만, 참된 국악의 맛은 긴 세월을 두고 무르익었을 때 느낄 수 있다.”



- 국악과 함께한 지난 인생을 되돌아본다면 어떠했는지요.

“정가는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이자, 삶의 자리였다. 겨레의 오랜 숨결인 정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정가라는 우리 예술의 소중함을 알았고, 거기에 녹아 있는 겸양과 미덕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정가는 노래 이전에 인간이 지녀야 할 덕목을 함께 아우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소수의 이수자, 전공자들에 의해서만 불리고 있는 정가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 그래서 우리 민족의 반듯하고 기품 있는 정신을 복원시키는 것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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