꽹과리의 神 김복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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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47년 인생에서 꽹과리가 36년을 차지했다.

국악계에서는 ‘꽹과리 일인자’라 불리지만 신명나게 놀 판은 많지가 않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유명한 장면 속에는 그가 있었다. 1995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창설 50주년 축하 음악회. 정명훈 지휘로 KBS교향악단과 협연하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그가 꽹과리를 잡았다.

쇠재비(풍물놀이에서 꽹과리나 징을 맡아 치는 사람) 김복만(47). 그가 26일 오후 7시 반 서울 필동 남산국악당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생애 첫 발표회를 연다. 3만 원. 02-2261-0515. 제목은 ‘김복만 스테이지 1’이라고 붙였다. 앞으로 숫자가 계속 늘어나길 바라면서.

“이 꽹과리로 목숨 한번 걸어 보겠습니다.”

김복만이 고교 2학년 때 아버지에게 한 말이다. 정승이 몇이나 나왔다는 안동 김 씨 종갓집 3남 1녀 중 장남의 폭탄선언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상모돌리기부터 시작해 4학년 때 처음 꽹과리를 잡았다. 신탄진 중앙중과 유성농고(현 유성생명과학고)에 농악부 장학생으로 진학했지만 부모는 그저 취미라고만 여겼다.

고2 때 대전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열린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북의 울림이 놀이에 그치지 않고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격했다. ‘나도 저런 음악을 해봐야겠다!’ 집안은 난리가 났지만 마음 깊이 쇠말뚝이 박혔다.

이듬해 단국대 국악과 장학생으로 낙점받았다. 필기시험을 보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대학 입시 날 새벽,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시험은 포기했다. 아버지 생전에도 사업이 순탄치 않아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그는 대학 대신 마당패 ‘뜬쇠’를 통해 프로로 데뷔했다.

김복만은 초중고교 시절, 송순섭에게서 경기 충청 지역 웃다리농악의 꽹과리를, 전사섭에게서 호남 우도 농악의 설장구를 배웠다. 이후 김덕수에게서 경기도당굿과 사물놀이를 전수받았다.

1980년대 말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를 찾는 이도 많았다. CF에도 출연했다. 1988년 가수 이지연의 ‘보리텐’ CF에서 꽹과리를 치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 음료수를 마시는 단독 컷도 실렸다. 대우 오디오 ‘마제스타’ 광고도 찍었다. 종로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알아봤다. 우쭐했다.

어느 날 송순섭이 그를 불렀다. “복만아, 꽹과리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지 않아야 된다.” 그는 투덜투덜했다. “꽹과리에서 꽹과리 소리가 안 나면 뭐가 나야 해?” 그리고 생각이 났다. 1986년 34세에 요절한 상쇠 김용배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그에게 말했다. “복만아, 웃다리 아니면 안 되는 게 있다….”

두 스승이 던진 화두의 답은 10년이 훌쩍 지나 찾아왔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만 꽹과리를 쳤던 지난 세월이 보였다. 스승의 지적은 꽹과리를 치는 마음자세에 대한 것이었다. 마음자리가 맑아야 득음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1990년대 대중문화가 득세하면서 옛 것은 더 멀리, 저편으로 밀려났다. 해외 공연은 더러 있었지만 국내 무대는 전통음악을 촌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그와 동료들이 1991년 만든 마당패 ‘진쇠’는 지금껏 끈질기게 꿋꿋하게 길을 가고 있지만 한 달에 한 푼조차 못 벌 때도 있었다.

사물놀이는 널리 알려졌지만, 이름난 사물놀이꾼에게만 대중의 시선이 모아졌다. 젊은 후배들이 속속 나오는데 선배들이 작은 무대까지 뛰는 민망한 일은 할 수 없었다. 사물놀이의 질보다는 싼값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쓰려는 이벤트업자만 많았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감안하면 세상에 음악 할 수 있는 사람 몇 없습니다. 우리 음악이 한(恨)이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만이 가진 무한 에너지와 신명도 있습니다. 그것을 후손에게 알려주고 물려주는 것이 사명이니 힘을 내지요.”

그는 4년 전부터 이종덕(전북 무형문화재 제43호 방짜유기장)에게 꽹과리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어렸을 적 들었던 스승의 소리는 사람이 치는 꽹과리 소리가 아니었다. 그 천상의 소리를 내기 위해 직접 망치로 주물을 두드려 꽹과리를 만든다.

구리 78%, 주석 22%로 된 놋쇠를 손바닥만하게 만들어서 두드려 편다. 불 조절을 잘못해 1500도가 넘으면 금세 녹아 버리고, 너무 식으면 두드리다 깨져 버린다. 잡생각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망가져 버리는 ‘못된 쇠’지만, 오직 꽹과리에만 집중하는 순간을 선사한다.

“일평생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게 꽹과리입니다. 그만큼 꽹과리를 소중하게 여기지요. 꽹과리 잘 치는 김복만보다는 꽹과리 잘 다루는 김복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부천=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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