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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부르트는 아픔…고통에서 피는 '꽃' 가야금

[오마이뉴스 곽진성 기자]

 가야금 연주 중인 이예랑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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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끝자락,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진다. 듣는 이의 어깨가 들썩인다. 흥에 겹다. 박수치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연주자 이예랑의 꿈이 한 발 더 앞으로 더 나아간다. "한강 수면 위를 가야금 소리로 젖게 만들겠다"는 그의 꿈이 담긴 연주, 가락을 타고 봄을 물들인다.

워싱턴 DC 무대에서 가야금 알린 가야랑 

지난달 26일 경희대 캠퍼스에서 만난 이예랑(32), 그의 이력은 범상치 않다. 최연소 가야금 대통령상 수상자이자 중요무형문화제 제 23호 이수자. 가야금 명인의 기운이 감돈다.

이런 이름 값에 어깨가 으슥할 법도 하지만, 이예랑은 무게를 과감히 내려놨다. 대신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을 택했다. 2008년 쌍둥이 동생 이사랑과 함께 국내 1호 가야금 듀엣 가야랑을 결성하며, 가야금 대중화를 위해 나선 것이다.

 가야랑의 이예랑
ⓒ 곽진성
국악계라는 둥지를 벗어나 대중 가요계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은 가야랑의 도전은 5년여 동안 계속됐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가야금 소리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전파했다. 우륵선생의 고향으로 알려진 의령과 고령의 명예군민으로 위촉(2012년)된 것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인터뷰 중간중간, 이예랑은 가야금을 연주했다. 떨어진 꽃잎 위로 흐르는 가야금 가락이 귓가를 그윽하게 메웠다.

올해 5월, 가야랑은 그 오랜 도전에서 의미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 8일,  미국 워싱턴 DC 워너 극장에서 열리는 '세계평화축제 아리랑'에 참가해 우리 가야금 소리를 세계에 전파한 것이다. 이번 행사는 한미 정상회담과 맞물려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 '세계평화페스티발 아리랑', 어떤 무대인지 소개해 주시죠.
"'세계평화페스티발 아리랑'은 6.25 정전 60주년 참전 용사들을 초청한 행사입니다. 저희(가야랑)도 이번 공연에 참가해 가야금을 전파했고, 뜻 깊은 행사가 된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가야금 연주를 전하는 기분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우리민족교류협회에서 워싱턴 행사를 시작으로 6.25 참전 21개국을 도는데, 저는 홍보대사로 참가하고 있어요. 대학생때 한 기관의 대한민국 대표연주자로 해외 연주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 역시 대한민국 가야금 대표자로 무대에 선 느낌입니다. (웃음) "

- 오랜 시간 가야금과 함께 했습니다. 이예랑에게 가야금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가야금은 제게 '공기' 같은 것이에요. 일상생활에서 공기가 없으면 죽잖아요. 제게는 가야금이 그래요. 가야금은 제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공기 같은 존재예요. "

"한강 수면 위를 가야금 소리로 젖게 만들겠다"

 가야금 연주중인 이예랑
ⓒ 곽진성

가야랑의 이사랑(32)은 쌍둥이 언니 이예랑의 '가야금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지금부터 11년전의 일이다. 당시 대학생이던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 이사랑은 언니인 이예랑이 혼잣말 하듯 던진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언니(이예랑)가 한강을 지나는 지하철에서 문득 그러는 거에요. '사랑아, 언젠가는 가야금이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꽃 피어져서 한강 수면이 덮여지는 날이 올거야"라고요. 당시 같은 대학생이었던 저는 컴퓨터, 핸드폰 어떤 것을 살까 고민 하던 때인데, 언니는 저와 근본적인 고민 자체가 달랐던 거죠.(웃음) 말도 안되는 일 같았지만, 힙합, 발라드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가야금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을 나온 이예랑은 2005년 전국 가야금 최고를 가리는 대회로 손꼽히는 15회 김해 전국 가야금 경연대회 일반부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인으로 우뚝섰다. 동생 이사랑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대 인류학과를 거친 후, 성남시립국악단 기획홍보일을 맡는 재원이 됐다.

각자의 분야에서 명인(이예랑)과 전문가(이사랑)로 만족스러운 삶을 산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은 20대 초에 가졌던 꿈을 잊지 않았다. 2008년 이예랑과 이사랑은 가야금을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는 꿈을 안고 대중가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야금 장인, 국립국악단 직원이 아닌, 가수  가야랑으로 세상에 문을 두드린 것이다.

당시 왜 어려운 일을 도맡느냐는 주위에 반대는 많았다. 그로 인해 힘들었던 순간도 있다. 하지만 가야랑은 최선을 다해 뛰었다. 가야랑의 노력에, 세상도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가야랑은 KBS <인간극장>을 비롯해 <아침마당>, SBS <스타킹>등에 출연, 가야금 알리기에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어느덧 주위의 반대는 응원과 칭찬으로 변했다. 가야랑의 열정은 5년이란 긴 시간동안 한결같이 뜨거웠다. 그들은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가야금 알리기에 더욱 땀과 열정을 쏟을 생각이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을 해요. 가야금, 그리고 가야랑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선이 많이 사라졌어요. 저희 집에는 가야금을 배우고 싶다고 오는 분들이 많이 생겼어요. 이름이 알려진 한 록가수는 가야금을 배우면서, 장르를 국악으로 하고 싶다고 할 정도죠. 더 많은 분들이 가야금에 대해 알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가야금은 흉내낼 수도, 모방할수도 없는 악기"

가야랑은 가야금이 '김치'같다고 말한다. 내 몸이 닿아야 나는 소리, 마음을 담아내야만 온전히 나오는 소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야랑의 이예랑
ⓒ 곽진성
가야랑은 특히 가야금 특유의 '농현'은 타국의 악기, 연주가들이 흉내낼수도, 모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심오함이 담긴 소리라는 것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오른손 연주 3년, 왼손 30년을 연습해야 나올 수 있는 소리'라고 강조한다.
가야랑의 가야금 애찬은 계속됐다. 이예랑은 가야금이 가지는 상징성을 통해 가야금이 다른 나라 악기와 다른 점에 대해 설명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도 Zither(치터)악기 형태는 있지만, 손가락으로 직접 연주하는 악기는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거문고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Zither(치터) 악기는 손가락으로 직접 연주하지 않고 대부분 기구를 사용해요. 일본 같은 경우는 손톱에 기구를 끼고, 중국 역시 쇠로 된 기구를 껴요. 그냥 연주하면 아프기 때문에요. 하지만 우리나라 악기는 아픔을 감내해요. 아픔을 참으며 손가락의 감각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손가락이 부르트고, 아프지만, 나중에는 도구를 이용할 때랑은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손가락의 감각으로 연주를 한다는 것, 우리 전통 악기 연주가들에게는 큰 자부심이다. 아픔을 온전히 견뎌내야, 또한 그런 고통을 딛고 수없이 갈고 닦아야만 좋은 소리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같은 가야랑 멤버인 이사랑은 언니 이예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륵이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가면서 지켜냈던 굳센 우리 문화의 1500~1600년 전통을 이예랑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큰 신뢰를 보낸다. 가족이자, 동료 그리고 가야금 장인인 이예랑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다.

인터뷰의 끝, 이예랑은 꽃잎 떨어진 나무 아래서 가야금을 정성들여 연주했다. 가야금 특유의 가락이 봄을 물들이는 듯, 아름다웠다. 듣는 이의 어깨가 들썩인다. 흥에 겹다. 호기심과 감탄이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 사이로 연주자 이예랑의 꿈이 빛났다. "한강 수면 위를 가야금 소리로 젖게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이전보다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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