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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우하하횡성한우시장

요약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으로 불리던 횡성장의 명성을 이어받은 전통 깊은 시장이다. 상설시장과 더불어 5일장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으며 횡성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채소를 비롯해 어류와 해산물, 의류 등 온갖 물산이 거래된다.
분류 > 지역 강원 > 횡성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삼일로 4-2
시장 유형 상설시장 겸 5일장(매월 1, 6일), 문화관광형 시장
형성 시기 1980년(횡성시장조합 인가)
시장 현황 127여 점포, 시장면적 1,022m2
특산물 한우, 더덕, 황률
먹을거리 안흥찐빵, 취나물밥, 메밀총떡, 수수부꾸미
주변 볼거리 숲체원, 청태산 자연휴양림
전화번호 우하하횡성한우시장 상인회 033-342-2389

1.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개요

횡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당장 두툼하고 빛깔 좋은 한우를 불판에 올리는 생각부터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을 정육 식당이 몰려 있는 곳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은 횡성 땅에서 나는 식재료와 온갖 물품을 거래하는 종합시장이다. 전통시장답게 여러 가지 강원도 토종 먹을거리가 풍부하지만 한우를 먹으려면 시장 근처 한우프라자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한다.

횡성은 수도권에서 볼 때 강원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예부터 한양과 강원도 사이를 지나는 사람들과 물자의 왕래가 많았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시장의 규모가 컸다. 그런 사정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교차해 지나가 교통이 편리하고, 횡성5일장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1, 6일마다 열리는 5일장 날에는 횡성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시장 주위로 노점들이 빼곡히 들어찬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은 시설 현대화를 거쳐 편의시설이 정비된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5일장을 포함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5일장은 지역 주민들의 장터인 신토불이장과 외지 상인들이 장을 펼치는 민속시장으로 나뉘어 있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5일장 풍경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5일장 풍경

2.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어원

조선시대 대표적 인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강원도 서남쪽에 위치한 횡성이 고구려 때에는 횡천현 또는 어사매라고 불렸다. 지금도 횡성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어사매’라는 지명을 알고 있으며, 이 명칭을 쓰는 사람도 종종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횡성은 황천으로 이름이 바뀌고 삭주군(오늘날의 춘천)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시대에 횡천이라는 이름으로 원주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서는 태종 14년에 횡천이 인근의 홍천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인 횡성으로 바뀌었다. 횡성의 읍내장이 지금의 상설시장의 모태이며 오늘날에도 매월 1과 6으로 끝나는 날에는 5일장이 서고 있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전에는 오랫동안 횡성시장으로 불렸는데, 이는 전통시장의 이름들이 흔히 그렇듯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며, 역시 많은 시장들이 그렇듯 ‘읍내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2013년부터 시장의 공식 명칭이 된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은 횡성의 대표 이미지인 ‘한우’를 내세우면서 ‘우하하’ 하고 함박웃음을 덤으로 얻어 가는 행복한 시장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3.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탄생 및 발달 · 변천 과정

횡성에 장이 생긴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조선시대 시장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증보문헌비고》(1770)를 보면 당시에 이미 1일, 6일에 열리는 횡성 읍내장과 4, 9일에 열리는 둔내장이 개설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횡성에 읍내장과 둔내장이 개설된 것은 이 지역 행정의 중심지인 횡성과 교통의 중심지인 둔내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

일제강점기에 횡성장은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지금도 횡성 상인들에서 회자되는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때일 것으로 추측된다.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시장통계표에 실린 거래액을 기준으로 횡성장은 강원도 1위, 전국 20위 내에 드는 조선의 대표 시장이었다.

당시 횡성 상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1928년 〈중외일보〉 12월 5일자 기사에 보면 ‘횡성상업조합은 10년 전에 횡성 상업 송제 씨의 발기로 조직된 것인데, 해당 조합에서는 외부 침입 방지와 상업 가간 저자 융통과 친선을 도모한다는 2대 강령에서만 활약을 하는 바 현재에 조합 기본금은 3,000~4,000원에 달하여 상당한 규모의 상업 단체로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상인 조직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강령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외부 침입 방지’라는 항목이다. 1917년쯤 조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상인 조합으로 인해 타지 상인들은 횡성에 발을 붙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일본 상인들을 의식한 조처일 가능성이 높다.

수십 년간 곡물 가게를 운영해온 주인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는 되

수십 년간 곡물 가게를 운영해온 주인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는 되

시장 한편에서 칼을 갈고 있는 상인

시장 한편에서 칼을 갈고 있는 상인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횡성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불매운동 등을 펼친 횡성에 발도 제대로 들여놓지 못했다. 그때 이후 횡성의 상인들을 두고 ‘제2의 개성상인’이라는 말이 나왔다. 개성상인은 조선의 상인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횡성상인은 그에 필적할 만큼 상권을 장악하는 수완이 뛰어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성상인과 횡성상인에 대해서는 이런 옛이야기가 전한다. 횡성상인과 개성상인이 우연히 외딴 집에서 함께 밤을 지내게 되었다. 횡성상인은 문에 창호지를 발라 바람을 막고 개성상인은 초를 준비해서 방을 밝혔다. 초가 창호보다 싸기 때문에 개성상인은 내심 자기가 이익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황성상인은 문에 바른 창호지에 물을 묻혀 떼어갔지만 개성상인의 초는 이미 타버리고 재만 남아 가져갈 게 없었다. 횡성상인이 얼마나 이재에 밝고 재물을 잘 관리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2) 화목장과 새벽시장

횡성시장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규모가 크게 위축되었다. 물론 이는 한국의 전통시장 전체에 해당되는 일이기도 했다. 전쟁의 피해로 인해 시장에서 유통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은 물론, 휴전선이 생기고 대대적인 인구의 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휴전선에서 약 20km 이내의 지역에 속해 있는 양구와 인제 등지의 시장은 소멸되었다. 1940년대에 최고 인구 7만 9,676명을 기록했던 횡성은 1955년에 7만 6,565명으로 줄었고 이후에도 감소를 거듭했다. 그러나 다행히 휴전선 아래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 회복되었고, 아울러 꾸준히 인구를 유지하며 1960년대에는 11개의 장이 개설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이는 당시에 유행했던 ‘화목장’과 ‘새벽시장’과도 관련이 있다. 화목장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땔감이 필요한 도시에 파는 장으로, 1950~1960년대에 성행했다. 통금이 끝나는 새벽 4시가 되면 통금 해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리어카나 지게에 싣고 온 나무를 늘어놓고 팔았다. 화목장은 나무를 판다고 해서 ‘나무장’이라고도 했는데 주로 여름에 나무를 준비해 두었다가 가을이나 겨울에 팔았다. 나무를 파는 사람들은 주로 화전민들로 매일 30~40명이 나와 팔았고 횡성읍의 공무원들이나 시장 상인들이 주요한 소비자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산림법이 강화되고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면서 차츰 수요가 줄었고, 그 이후 화목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화목장과 한동안 시기가 겹치다가 자연스럽게 뒤를 이은 것이 새벽시장이었다.

새벽시장은 상인이 아닌 사람들이 새벽마다 직접 생산한 과일, 계란, 야채, 나물 등을 시장에 가지고 나와 팔고 오전 9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는 형태를 띠었다. 장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상인들이 아니라 농민들이었으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녀자들이었다. 앞서 화목장이 남자들이 주도하는 장이었다면 새벽시장은 여자들이 주도하는 장이었다.

새벽시장이 형성된 곳은 화목장과 마찬가지로 횡성 읍내장이었다.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며 장이 커지자 횡성장의 상인들뿐 아니라 원주장의 상인들까지 새벽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김장철이나 과일을 수확하는 때에는 새벽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화목장이나 새벽시장은 그 자체를 생계 수단으로 삼는 상인들과 달리 아이들의 학용품과 간식비, 용돈 같은 소소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생겨난 장이었다. 이렇게 1970년대까지 횡성의 정기시장은 읍내장과 둔내장, 안흥장을 중심으로 새벽시장과 공존하며 부침을 거듭했다.

곡물전

곡물전 콩, 팥, 녹두 등 다양한 곡물이 나와 있다.

짚으로 엮은 꾸러미에 담긴 달걀들

짚으로 엮은 꾸러미에 담긴 달걀들

3) 정기시장의 변화

1980년대에 들면서 횡성의 정기시장은 여러모로 변화를 겪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1981년에 새 건물을 세우며 횡성 읍내장이 상설시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횡성장에 장옥이라고 불리는 목조건물이 들어선 것은 1953년이었다. 비가 오면 비가 그대로 새는 매우 좁은 건물이었다. 게다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두 차례나 큰 불이 났다.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시장은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에 손실이 컸고, 상인들은 여러모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롭게 시장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에 신축 공사가 이루어져 기존의 목조건물 155개 점포를 철거하고 182개 점포가 들어갈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졌다. 다른 지역의 정기시장이 주로 1970년대에 상설시장으로 변모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셈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정기시장이 크게 약화되어 횡성 읍내장을 포함해 5개의 정기시장만 남게 된 점이다. 이는 영동고속도로 개통과 같은 주변 교통의 변화와 농촌 인구의 감소, 인근 도시 원주의 상권 확대와 대형마트의 등장 등을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안흥장은 영동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찬 서리를 맞은 시장이다. 과거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유로 흥했던 안흥장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교통로의 개설로 약화되고 말았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

3월에도 횡성의 아침은 으슬으슬 춥다. 삼삼오오 화롯불에 모여들어 손을 쬐는데 한 할머니가 가래떡을 굽기 시작한다.

현재 횡성군에는 읍내장과 둔내장, 안흥장이 남아 1770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횡성 정기시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 살아 있던 강림장은 2010년에 하나로마트 강림지소가 들어서면서 정기시장이 사라지고 말았다. 1990년대 이후 대형마트의 등장과 재래시장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일반적인 양상과 달리 최근 들어 활기를 띠는 정기시장도 있는데, 바로 횡성5일장(읍내장)이 그렇다.

횡성5일장이 열리는 횡성읍에는 군청을 위시한 행정기관과 교육기관, 병원 등의 편의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횡성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여기에 횡성의 한우가 크게 부각되어 횡성 지역이 널리 알려지면서 횡성시장은 과거의 명성에 어울리는 위상을 찾아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횡성시장이 활성화된 첫 계기는 2002년 전국 최초로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한 리모델링을 시작한 것이었다. 횡성시장은 27억여 원을 들여 기존의 낡은 건물들을 정비했고 CCTV와 안내 전광판 설치, 화장실과 주차장 정비, 화재를 대비한 소방시설을 강화했다. 이후 2013년에는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현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으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은 건물의 개보수 차원을 넘어 지역 특성을 살린 특색 있는 시장 만들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횡성 하면 한우를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 메이킹을 비롯해 2014년부터 시작된 토요장터, 2015년에 시작된 청년 프리마켓 등이 시장 활성화의 일환으로 시작된 대표적인 사업들이다. 청년 프리마켓은 젊은 상인들의 시장 유입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해마다 청년 사업자를 선정하고 2개의 점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오늘날 횡성시장을 찾는 고객의 숫자는 하루 평균 1,300여 명에 이르고 연간 매출액이 66억 원(2012년)에 이른다. 또 5일장이나 토요장터가 개설되면 수백 명에 이르는 상인들이 좌판을 펼치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찾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5일장 풍경

위에서 내려다본 5일장 풍경 색색의 파라솔과 천막이 도로에 길게 늘어섰다.

4. 횡성의 지리 · 지역적인 특징 및 생산 품목

횡성은 동으로 평창, 서로는 경기도 양평, 남으로 영월과 원주, 북으로는 홍천과 땅을 맞대고 있다. 서울에서 125.9km, 춘천 62.9km, 원주에서 17.2km, 강릉 11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이들 대도시로부터 2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또한 많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봉복산을 제외한 모든 산이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 횡성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남한강의 지류인 18개의 하천이 횡성을 지나고 있다. 횡성의 옛 이름이 강이 옆으로 흐른다는 뜻인 ‘횡천’이었던 것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2개의 큰 도로가 횡성의 남북을 가로질렀다. 하나는 동서 교통로로 한양에서 원주, 진부, 강릉으로 가는 ‘강릉대로’이며 다른 하나는 한양에서 함흥으로 가는 ‘서수라대로’였다. 이들 두 대로에서 2개의 지선이 지금의 강원도를 지났는데 춘천, 연봉, 원주를 지나는 길 사이에 횡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신작로를 건설할 때에도 기존의 이 길을 활용했다. 원주와 횡성을 잇는 5번 국도가 건설된 것은 1917~1922년이었다.

과거 횡성과 원주 사이에 5번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일곱 명이 모여야 함께 넘는다는 뜻에서 칠우고개라 불리는 험한 고개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상인들은 낮에도 위험한 이 고개를 홀로 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5번 국도가 생기기 전에 원주와 횡성을 오가기 위해서는 지금과 달리 안흥을 우회해서 가야 했다. 이는 횡성과 원주 사이에 있던 안흥의 정기시장이 활발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칠우고개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렇게 신작로가 건설되고 훗날 이 길을 토대로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횡성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현재 횡성은 영동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가고 2001년에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남북으로 지나가면서 기존의 벽지에서 교통의 요지로 거듭났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이렇게 교통 사정이 개선되면서 부작용도 나타났다.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지나가는 도로였고, 이러한 교통의 편의성 때문에 인근에 있는 원주의 영향 아래 상업 활동이 위축되었다. 원주와 횡성이 시내버스로 20~30분이면 닿게 되자 횡성 사람들이 대도시 원주에서 상품을 구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횡성의 읍내장의 상설화가 늦었던 것도 이런 사정과 맞물려 있다.

횡성 시내 전경

횡성 시내 전경 횡성은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 등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횡성은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농토보다 임야 면적이 훨씬 넓다. 다만 서남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완만해지면서 ‘횡성 앞들’이라 불리는 비옥한 땅이 펼쳐진다. 실제로 횡성군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둔내면의 표고가 평균 500m이지만 횡성읍에서는 100m 정도로 낮아진다.

임야가 80%에 가까운 자연환경 때문에 횡성의 경제활동은 산이 중심이 되고 벼농사보다 밭농사가 더 활발하다. 따라서 감자와 옥수수 같은 작물이 많이 재배되며 특산물 역시 산에서 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수성과 맞물려 해방 이후 횡성의 특산물로 등장한 것이 홉이었다. 홉은 맥주를 빚을 때 발효를 돕고 맥주의 고유한 맛을 내는 역할을 하는 작물이다. 한때 횡성은 해마다 10ha씩 수확 면적이 늘어나며 전국 홉 생산의 80%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수요가 없어서 생산이 끊기고 말았다.

횡성에서 난 감자

횡성에서 난 감자

횡성에서 난 고구마

횡성에서 난 고구마

횡성에서 홉을 대신한 것은 고랭지 채소다. 고랭지 채소는 기온이 낮고 적설 기간이 길지만 일조량이 길고 병충해가 적어 유기농 재배가 가능한 곳에서 생산된다. 여름철 높은 기온으로 채소를 재배하기 어려울 때 신선한 채소를 생산해 공급한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고랭지농업이 성행하는 곳은 횡성을 비롯해 평창과 홍천 등을 들 수 있다.

한우 사육도 고랭지산업에 잘 어울린다. 횡성의 한우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횡성의 지리적인 특성과 관계가 있다. 풍부한 산간 초지를 이용해 한우를 비롯한 가축들을 사육하는데 2009년 말 가축 사육 호수는 전체의 25.5%를 점유할 정도로 높았다. 1942년 10월 11일자 〈매일신보〉에서는 ‘제3회 축우 품평회’가 횡성에서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알리고 있다. 예부터 횡성을 비롯한 강원도에서 좋은 소를 만들기 위해 애써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또한 횡성이 예부터 우시장이 발달해 소의 거래와 소비가 활발했던 것도 횡성의 한우가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다. 우시장이 크게 열린 곳은 아무래도 소의 고기나 부산물로 만든 음식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한우는 어디서나 그 맛이 탁월하지만 청정 지역에서 신선한 목초를 먹고 자란 횡성 한우는 특히 육즙이 풍부하며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덕 또한 횡성이 자랑하는 주요 특산물이다. ‘오래 묵은 더덕은 산삼보다 낫다’는 말이 있듯이 더덕은 위와 폐, 신장에 두루 좋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횡성의 더덕은 고지대에서 생산되어 육질이 연하고 아삭아삭하며 향이 짙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생산량도 많아 전국 더덕 생산량의 26%가량을 차지한다.

횡성의 특산물 더덕

횡성의 특산물 더덕 투박한 껍질을 벗기면 뽀얀 속살이 드러나는데, 향이 깊고 즙이 풍부하다.

황률(黃栗)도 횡성의 특산물 중 하나다. 재래종 밤을 말려 껍질을 벗긴 뒤에 좀 더 말리면 노란 빛깔이 나는 황률이 된다. 황률은 공근면 청곡리와 가곡리에서 많이 생산되었는데, 비위에 좋고 피부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예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5. 우하하횡성한우시장시장의 위치와 구성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은 군청에서 멀지 않은 시내 중심지에 있으며, 횡성을 오가는 대중교통이 모두 지나는 곳이라 접근성이 좋다.

상설시장은 얼핏 보면 서쪽 변이 길고 동쪽 변이 짧은 사다리꼴 모양이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동서남북 네 군데에 있어 드나들기에 편리하다. 시장 내부는 격자무늬처럼 이어져 있는데, 음식점과 각종 소매점이 가장 많으며 농산물, 축산물, 가공물을 파는 가게들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있다.

횡성5일장은 조선시대 이래로 1과 6일에 선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을 중심으로 문정로, 읍상로, 읍상서로, 문정로 19번길 등 네 곳의 도로와 인도에 장이 선다. 장날이 되면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그 자리에 빼곡하게 상인들이 자리를 잡는다. 예전에는 시내 중심과 더 가까운 곳에 장이 섰지만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입구에서 80m 정도는 횡성에서 생산하는 곡물이나 채소 등을 파는 신토불이장이 서고 그 뒤로는 의류 및 각종 생활용품을 파는 민속장이 선다.

2015년 현재 우하하횡성한우시장에는 127개 점포가 있고 200여 명의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월 1~2만 원 정도의 회비를 낸다. 5일장의 경우 횡성의 생산물을 파는 신토불이장은 장세를 내지 않지만 그 뒤에 서는 민속장은 매번 면적에 따라 1,000~2,000원의 장세를 낸다.

신토불이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장세를 걷지 않는 것은 과거 새벽시장의 영향 때문이다. 신토불이장에서 장을 펴는 사람들은 전문 상인들이 아니라 농민들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부녀자들로, 아침 일찍 집에서 걸어오거나 버스를 타고 장에 나온다. 과거 새벽시장 때처럼 일찍 파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점심 전에 물건을 모두 팔거나, 혹여 팔지 못하더라도 그 즈음에 장을 정리한다.

상인들 중에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즉시 그 자리에서 흥정을 해 물건을 사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흔히 되넘기 장사꾼이라고 부르는데 생산자에게 물건을 도매가로 사서 다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남문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남문

6. 우하하횡성한우시장의 주요 거래 품목

1924년의 기록에 따르면 횡성장에 참여하는 상인의 수는 40여 명 정도였고, 거래액의 100분의 1을 장세로 냈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시장》(1924)에는 횡성장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통상적인 품목으로 곡물, 소가죽, 직물, 어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횡성에서 생산되는 물건보다 외부에서 들어와 팔리는 물건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횡성장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횡성은 산지가 많은 지역이라 소가죽처럼 소와 관련된 품목은 쉽게 예상할 수 있지만 곡물이나 직물, 심지어 어류는 외지의 상인들이 횡성장을 위해 운송해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에서 주로 거래하는 품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곡식이나 의류, 해산물, 축산물, 과일, 제수용품, 떡 등이다. 5일장에서 거래하는 품목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농산물과 야채 등이 주를 이룬다. 특히 5일장 내 신토불이장에서는 쌀, 잡곡, 말린 고추처럼 직접 농사지은 작물들을 비롯해 두부, 콩나물, 엿, 채소, 냉이처럼 직접 만들거나 채취한 것을 주로 판매한다. 계절에 따라 더덕, 호박, 파프리카 등의 농산물이 판매되기도 한다.

좌판 앞에 발걸음을 멈춘 손님에게 상인이 말을 붙이고 있다

좌판 앞에 발걸음을 멈춘 손님에게 상인이 말을 붙이고 있다

횡성에서 난 달래(왼쪽)와 소루쟁이(오른쪽)

횡성에서 난 달래(왼쪽)와 소루쟁이(오른쪽)

신토불이장과 나란히 열리는 민속장에는 정해진 지역을 도는 상인들에 의해 의류나 과일, 다른 지역의 특산물이 판매된다. 장사하는 이들은 횡성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원주나 제천, 서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울의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등을 떼어오거나 가락동시장 등지에서 해산물을 떼어와 장을 편다. 동해안의 어시장에서 직접 구해온 활어를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 민속장에 참가하는 상인은 2011년 기준으로 200~25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여러 지역의 상인들이 찾아오게 되면서 시장에서 거래되는 품목은 더욱 다양해졌다.

파라솔 사이로 보이는 5일장 풍경

파라솔 사이로 보이는 5일장 풍경

7. 먹을거리

횡성의 먹을거리라고 하면 한우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시장 안에는 한우를 파는 곳이 없다. 한우를 먹고 싶다면 시장 인근에 있는 한우프라자를 찾는 것이 더 편리하다. 우하하횡성한우시장에서 한우와 관련된 음식은 선지가 듬뿍 들어간 해장국과 소의 부속을 활용한 선지 크로켓 등이 있다.

그밖에도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국수나 올챙이묵, 메밀로 만든 메밀총떡, 취나물밥, 감자옹심이 같은 강원도 토속 음식들이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한다.

* 안흥찐빵
횡성에서 한우 다음으로 명성이 자자한 먹을거리는 단연 안흥찐빵이다. 횡성군 안흥면은 인구가 2,992명(2013년)에 불과한 작은 면이지만 찐빵 가게만 2015년 현재 17곳이 있어서 새삼 안흥찐빵의 유명세를 느낄 수 있다. 겨울이 되면 찐빵축제가 열릴 정도로 안흥찐빵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실 찐빵은 전국 어디에서나 사먹을 수 있는 흔한 음식이다. 그러니 찐빵을 만드는 비법이 특별하기란 쉽지 않다. 안흥찐빵의 제조 비법으로 알려진 내용도, 막걸리와 계란 등으로 밀가루를 반죽해 숙성시킨 뒤 빵을 만든 다음 5시간 이상 푹 삶은 팥소를 넣고 다시 숙성시켜 쪄내는 것이 전부다.

안흥찐빵의 유래를 알아보면 예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서울과 강릉을 오가던 사람들이 먹던 찐빵에서 비롯되었다고들 하지만 안흥찐빵이 유명해진 것은 매스미디어 덕분이다. 안흥이 치악산과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1990년 중반 안흥의 찐빵 가게가 등산 잡지와 신문에 소개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찐빵이 아니라 찐빵을 만드는 가게 여주인에 대한 기사였다.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행상을 하다가 작은 찐빵 가게를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안흥찐빵은 이처럼 고단한 삶과 저렴한 찐빵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경향신문〉에 ‘아줌마 10명이 연신 쪄대도 운 좋아야 30분 기다려 맛보는 찐빵’이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찐빵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렇게 한 집에서 시작된 찐빵 가게가 빠르게 늘어나 현재에 이르렀다.

안흥찐빵의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으나, 기계로 빵을 빚는 가게들과 손으로 빚어야 진짜 안흥찐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때문에 축제가 열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 현재 안흥찐빵은 특허청에 상표등록(2000년)이 되어 있고 미국에서도 상표등록(2008년)이 될 정도로 횡성을 대표하는 먹을거리가 되었다.

찜통에 넣고 찌기 전의 안흥찐빵

찜통에 넣고 찌기 전의 안흥찐빵

참고문헌

  •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 《東國文獻備考(동국문헌비고)》
  • 《朝鮮の市場(조선의시장)》 조선총독부, 1924년
  • 《朝鮮の市場(조선의시장)》 文定昌(문정창), 日本評論社(일본평론사), 1941년
  • 《강원도 시장민속》 국립민속박물관, 1995년
  • 한국시장사》 조병찬,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년
  • 《횡성군 오일장의 어제와 오늘》 횡성문화원, 2011년
  • 〈제3회 축우품평회〉 매일신보 1942년 10월 11일자
  • 〈횡성상업조합〉 중외일보 1928년 12월 5일자
  • 〈韓國(한국)의 장터 38 橫城場(횡성장)〉 매일경제, 1991년 2월 1일자
  • 〈찐빵아줌마 인심 빼면 단팥없는 찐빵〉 경향신문, 1998년 12월 5일자
  • 〈신강원기행 횡성군 읍상리 횡성시장 및 5일장터〉 강원일보, 2013년 5월 14일자
  • 횡성군청 : http://www.hsg.go.kr/main/
  • 횡성시장 : http://www.woohahamark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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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둥지와 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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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덕

    문화인류학 박사. 현재 대학에서 경제인류학, 아시아문화, 종교문화, 축제와 신화 등을 강의하고 있다. 쓴 책으로 《길 위에서 마주친 우리 문화》, 《인문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신화》,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고민하는 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등이 있다.

  • 사진, 촬영 박재영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전공과 관련 있는 전통건축을 주제로 오랜 시간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전통건축에 녹아 있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미적 감성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20여 년 전국을 유랑한 결과물로 '우리공간 이야기', '지붕', '선' 등 서너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집으로 《오감으로 느끼는 전통건축》이 있다.

  • 원고와 사진 정리 가디언 출판사 가디언 출판사 로고

    가디언과 시루, 2개의 브랜드로 혁신과 지속 성장에 필요한 경제 · 경영서와 실용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역사서와 인문교양서를 출판하고 있습니다. 대표서적으로 《하루 10분의 기적》, 《3불 전략》,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식객II》(전3권)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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