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복병’ 떠오른 사내유보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산업 구조조정 재원 논란]

재계가 대기업들이 돈을 쌓아 둔 채 투자나 고용 안정은 외면하고 구조조정에만 나서고 있다는 주장에 17일 반박하고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날 ‘사내유보금이 많을수록 투자 및 고용 기여도가 높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낸 것이다. 12일 국민의당이 사내유보금에 추가 과세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 ‘기업소득환류세제 개편안’을 당론으로 정하고 같은 날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들이 시위를 하고 사내유보금을 풀 것을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

이달 말 여소야대(與小野大)의 20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벌써부터 사내 유보금을 둘러싼 양측의 대립이 첨예하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투자 및 고용 촉진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사내유보금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는 논쟁이 구조조정 풍파에 허덕이는 현 한국 경제 상황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사내유보금 둘러싼 정치사회적 논란


사측이 희망퇴직을 진행하고 있는 현대중공업(현중) 노조와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업체 노조가 함께 결성한 조선업종노조연대는 19일 국회를 찾아 기자회견을 하고 의원들과 간담회를 연다. 아직 구체적인 안건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현중의 경우 사내유보금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10일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 상견례에서 현중 노조는 사내유보금이 12조 원이 넘는 만큼 희망퇴직에 앞서 이를 풀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현중의 현금성 자산은 1조4800억 원으로 사내유보금의 11.9%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연내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금융부채 3조6086억 원의 상환을 위해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상황이다. 나머지 사내유보금은 이미 설비나 연구개발(R&D) 등에 재투자됐다.

다른 기업도 상황은 비슷하다. 국내 기업들의 사내유보금 중 80% 이상은 이미 설비나 R&D 등에 재투자됐다. 코스피 및 코스닥시장 1707개 상장사의 지난해 기준 사내유보금 831조5000억 원 중 재투자 금액을 뺀 현금성 자산은 155조4000억 원(18.7%)이었다. 강병민 경희대 회계학과 교수는 “사내유보금을 풀라는 것은 이미 투자한 자산을 처분한 뒤 다른 곳에 투자하라는 이상한 요구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내유보금 논란이 산업 구조조정 정국과 맞물려 ‘반(反)기업 정서’로까지 번질 것을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급기야 전경련이 17일 “대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등한시하면서 사내유보금을 쌓았다”는 정치권 및 노동계 비판에 수치를 들이대며 맞받아쳤다. 전경련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중 사내유보금이 많은 상위 10개 기업의 지난해 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54.1%가 늘어난 반면 하위 10개사는 45.1% 줄었다.

반면 4·13총선으로 거대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사내유보금을 법인세 인상의 근거로 삼고 있다. 지난 정권 때 법인세 인하로 얻은 이익을 대기업이 배당이나 근로자 임금 인상 및 고용 안정에 쓰지 않고 회사 배만 불렸다는 게 주요 골자다.

○ 현금성 자산은 미래 준비금


기업의 현금성 자산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도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황에 따라 즉시 동원 가능한 현금성 자산이 꼭 필요할 때가 있어서다.

삼성전자는 2013년 사내유보금 중 현금성 자산의 비중을 23.3%까지로 끌어올렸다. 전년 대비 9%포인트 이상 늘린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를 기반으로 이듬해 10월 경기 평택시의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 공장에 15조600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최근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이 정부 주도 아래 100조 원대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삼성의 선제 투자는 빛을 발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발표한 베트남 호찌민의 소비자가전(CE) 복합단지 건설 계획에도 삼성은 2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반대로 현금성 자산이 부족해 흑자도산을 한 기업도 여럿 있다. 전자부품 업체인 ㈜우영은 199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흑자를 이어 왔지만 무리한 설비투자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2008년 2월 최종 부도를 냈다. 한때 연매출 1조 원을 넘나들던 중견 액정표시장치(LCD) 업체 태산LCD도 253억 원의 영업이익을 낸 2008년 외환파생상품 ‘키코’ 계약에 따른 손실(270억 원) 탓에 흑자도산 했다.

한편으로는 지난해 기업소득환류세제가 내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된 뒤 세금 역풍을 피하기 위해 배당만 집중적으로 늘린 기업들도 비판을 피해 가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또 대기업 오너나 경영진이 기업의 경영적 판단이 아니라 그룹 지배력 강화나 사적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현금성 자산을 쌓아 두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연강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주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내유보금으로 지인의 회사나 사업과 관련성 없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등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중요하다”며 “그러나 이는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가 아닌 법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해외에도 과도한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는 제도가 있긴 하다. 미국은 조세 회피 목적으로 설립된 경우만 적정유보초과세를 부과하고, 일본도 동족법인(3인 이하 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이 50% 이상)에 한해 10∼20%의 누진적정유보초과세를 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치권의 ‘투자 및 고용 촉진을 위한 사내유보금 과세’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김지현 기자
 

:: 사내유보금(Retained Earnings) ::


기업이 창출한 이익 중 주주들에게 배당하고 난 뒤 설비, 연구개발, 부동산 등에 재투자하거나 현금 및 단기 금융상품으로 ‘사내(社內)’에 남긴 누적 금액을 말한다. 재무제표나 법조항에는 등장하지 않는 회계학 용어다.
#구조조정#사내유보금#산업#재원#대기업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