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우수한 커피, 87개 종족의 ‘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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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5.07.25. 오전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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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커피 발상지 에티오피아
시멘트 바닥에 진녹색 나뭇잎이 깔렸다. 머릿수건을 곱게 쓴 여자가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손바닥만 한 팬에 깨끗하게 씻은 연둣빛 커피 생두를 올려 천천히 볶기 시작했다.생두 알갱이는 이내 연한 노란색에서 퍼석한 흙색을 거친 뒤 윤기가 흐르는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잘 볶아진 커피 원두를 절구에 찧어 가루를 내고, 주둥이가 좁은 주전자에 끓여 커피를 우린 뒤 에스프레소잔 크기의 커피잔에 따르는 과정은 모두 손님 앞에서 진행된다. 손님에게 환대와 우정을 표현하는 에티오피아의 전통 의례 ‘커피 세리머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모두 석 잔의 커피를 낸다. 이 중 마지막 잔은 축복을 상징한다. 손님은 석 잔을 천천히 모두 비워야 한다. 커피를 볶아 갈아 마시는 이 모든 과정은 최소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세리머니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로 여겨진다고 한다. 지난달 21부터 닷새간 에티오피아에 머무르면서매일같이 향기로운 환영을 맛봤다.

지난달 24일 에티오피아 시다모 지역의 한 가정에서 여주인이 손님들을 위해 커피 생두를 숯불에 볶고 있다.


■ 전 국민 하루 4잔, 커피가 ‘빵’인 나라

커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는 9세기경 지금의 에티오피아인 아프리카의 고원지대에 살던 목동 칼디의 이야기다. 어느 날 자기가 기르던 염소가 어느 나무에서 밝은 빨간색의 열매를 따 먹은 뒤 잠을 자지 않고 흥분해 날뛰는 모습을 본 칼디는 시험 삼아 이 열매를 따 먹어 보고 온몸에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칼디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근처 이슬람 사원의 성직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성직자는 이 열매가 악마의 것이라며 불 속에 집어던져 버렸다. 불 속에서는 곧 어디서도 맡아본 적이 없는 향기가 퍼져나왔다. 성직자가 불 속에 던진 것은 물론 커피 열매였다. 향이 없는 생두를 불에 익히면 풍부한 향기가 나는 커피가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셈이다. 성직자들은 이내 커피를 갈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법을 터득했다. 이후 커피는 홍해 건너 예멘을 통해 아라비아반도로 퍼졌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칼디 이야기는 에티오피아에서 구전되다 한 로마인 교수에 의해 1600년대에 문서로 기록됐다. 물론 이 이야기가 단지 전설에 불과할 수도 있고, 구전되다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수도 있지만 에티오피아가 커피의 발상지이며 에티오피아인들이 오래전부터 커피를 마셔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원지대에 위치해 연중 서늘한 기후를 띠는 에티오피아는 커피나무가 자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오늘날에도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널리 마시는 음료이자 에티오피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그 ‘무언가’다. 전 국민이 하루에 커피를 4잔씩 마신다는 통계도 있다. 동네 작은 가게에서도 저울을 갖춰놓고 생두를 판다. 커피에는 보통 옥수수를 즉석에서 튀겨 만든 펜디샤(팝콘과 같은 음식)를 곁들인다. 볶은 커피콩을 간식처럼 씹어먹기도 한다.

사용자의 습관과 일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언어에도 커피의 흔적은 많이 묻어 있다. 에티오피아의 공식 언어인 암하라어로 된 속담 중에는 ‘부나 다보 나우’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커피는 우리의 빵이다”라는 뜻이다. 커피가 식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서 “식사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의례적인 인사말이듯,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마시다”라는 표현은 행위 그 자체를 넘어서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나는 커피 한잔 할 사람도 없다”는 말은 “속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다”라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커피는 87개 종족이 모여 사는 연방국가 에티오피아를 문화적으로 하나로 묶어주는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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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커피 한 잔값, 에티오피아 ‘일당’

하라, 예가체프, 시다모… 커피 브랜드로 유명한 이 이름들은 사실 에티오피아의 지역 이름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커피들은 신맛과 과일맛, 꽃향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우수한 품종으로 전 세계 커피 애호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최대 커피 생산국이고, 전 세계에서도 브라질과 베트남, 콜롬비아, 인도네시아에 이어 5번째로 커피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다. 지난해 원두 19만t을 수출했고, 커피 수출로 얻은 수익은 약 7억달러에 달했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의 24.2%가 커피를 팔아 번 돈이다. 올해의 목표는 20만t 이상을 수출해 10억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에티오피아에는 5000여개의 커피 품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 24개의 아라비카 커피 품종을 수출하고 있다. 커피가 자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에티오피아 정부는 1950년대부터 커피를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을 마련해뒀다.

커피 농사는 아직까지도 매우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최근 많이 현대화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커피 재배 방식은 100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재배부터 수확과 건조, 가공까지 모든 과정을 사람이 손으로 직접 한다. 에티오피아 인구 9500만명 중 약 1500만명이 커피산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먹고산다.

에티오피아는 농업에만 의존하는 산업구조를 다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국 커피를 고급화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국적 기업들과 종종 충돌하기도 한다. 2000년대 중반 에티오피아 정부는 커피 원산지 브랜드화를 놓고 스타벅스와 한판 싸움을 벌였다. 커피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해 시다모와 하라, 예가체프 등 고급 커피 원산지를 상표로 등록하려 했는데 스타벅스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국제 커피 가격이 역사상 최저로 떨어졌던 이 시기, 원두를 싼값에 들여와 35배 부풀린 가격에 팔던 스타벅스는 상표권이 등록되면 커피 매입가가 올라갈 것을 우려해 “원산지 인증은 부여하겠지만 상표권 등록은 안 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이 분쟁은 다국적 기업의 탐욕과 에티오피아의 가난만 부각시켰다. 세계 최고의 커피를 생산하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에티오피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500달러 수준으로 전 세계에서 217위, 꼴찌에서부터 따지면 14번째다. 커피 판매의 이익은 농부들이 아니라 네슬레와 스타벅스 같은 거대 식품공룡들이 독차지한다. 커피로 유명한 시다모 지역의 한 마을의 작은 식료품점에서는 생두 1㎏을 70비르(약 4000원)에 판다. 에티오피아에서 해외로 팔려나가는 최고급 품종의 생두 가격도 1㎏당 2~3달러 수준이다. 하지만 원두가 10g도 들어가지 않은 뉴욕 스타벅스의 커피는 한 잔에 2달러에 가깝다. 대규모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일당은 2~3달러 수준이며 커피 가공창고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임금은 더 낮다. 부모가 벌어오는 돈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아이들이 학교 대신 농장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일부 농부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커피 대신 마약의 일종인 ‘카트’ 재배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국제 비정부기구(NGO)들을 중심으로 스타벅스가 세계 최빈국 농부들을 착취하고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빈곤을 조장한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자, 결국 스타벅스는 백기를 들고 상표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사건은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공정무역 운동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시다모(에티오피아) | 글 남지원·사진 강윤중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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