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05-17 11:33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chevron_right
일반기사

【양진성 임실 필봉농악 보존회장】아홉살 꽹과리 소년, 代 이어 인간문화재

중학생 때 김용배·김덕수씨에 기능 전수 세계 각국 돌며 한국 농악 우수성 알리다 부친 작고 후 고향 정착 필봉문화촌 세워

철부지 어린 소년의 나이는 아홉살, 남들은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그는 어른들이 노는 굿판에 어울려 꽹과리를 잡았다.

 

흥겨운 춤사위와 농악소리에 소년의 심장은 마냥 뛰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국내 최고의 명인이라는 인간문화재로 성장했다.

 

지금은 필봉농악을 짊어지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예술인으로써 후학양성과 고향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양진성(48) 회장이 주인공이다.

 

전주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국내 최초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인물들이 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지난 87년 호남좌도농악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도상쇠 양순용씨가 그의 부친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찌기 농악에 눈을 뜬 양회장은 초등학교부터 전국 어린이 농악대회에 출전, 3년 연속 개인연기상을 휩쓸었다.

 

80년 섬진중 시절에는 국내 사물놀이 창시자로 알려진 김용배씨와 김덕수씨로부터 기능을 전수받아 농악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더 많은 실력을 쌓기 위해 고교는 서울국악고와 남해고, 임실서고 등을 전전했고 우석대가 국악과를 신설하면서 전문교육의 기틀도 다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국내 각종 행사에 농악대표단으로 활동했고 러시아와 미국, 캐나다 및 유럽 등지를 돌며 한국농악의 우수성을 알렸다.

 

하지만 95년에 이르러 어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온 양회장은 고향인 필봉마을에 정착, 현재의 필봉문화촌을 세웠다.

 

지금은 6만여㎡의 부지에 연습실과 공연장을 비롯 강연장 및 숙박시설을 두루 갖추고 농악을 전수했지만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초대 단체장인 이형로 전 군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문을 연 문화촌은 현재까지 전국 각지에서 10만여명의 전수생이 필봉농악을 익혔다.

 

필봉굿의 정수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서, 도내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체험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또 필봉전통문화체험학교도 연중 상시적으로 운영하고 풍물과 난타, 탈춤 등 다양한 배울거리와 만들거리를 비롯 즐길거리 등도 제공하고 있다.

 

한켠에 마련된 필봉한옥촌에는 가족과 계절, 모임프로그램을 통해 다도와 먹거리 등 다양한 한옥체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즈음에 그는 대학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8년에는 인간문화재 국내 최연소라는 기록도 갈아치워 부친의 유고를 받들었다.

 

양회장의 직접 참여를 통해 필봉문화촌에서는 5월에서 9월까지 필봉굿과 마을굿, 퓨전국악 등을 상설해 공연하고 있다.

 

더불어 한옥의 자원활동을 위해 야간상설공연으로'웰컴 투 중벵이골'을 운영중에 있고 필봉농악 전수교육은 연중 신청을 받고 있다.

 

특히 그는 고향사랑과 지역발전을 위해 강진장날이면 필봉농악 무료공연을 실시, 방문객 유치에도 기여하고 있다.

 

지금도 전국 유명단체와 기업, 공공기관 등에서 거액의 수강료를 제시, 강연과 교육 등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지만 그는 필봉문화촌을 굳게 지키고 있다.

 

양회장은"돈을 벌려고 작정했으면 서울 거주나 해외공연에 전념했을 것"이라며"필봉문화촌이 자랑스런 관광자원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혼신을 바치겠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정우 parkjw@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