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 명창 "국악은 마음의 약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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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4.05.05. 오전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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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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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무형문화재 제 23호 '최고의 소리꾼'
- 남원의 '아기 명창'으로 어린시절부터 두각
- 국립창극단 입단 후 주역 도맡아…'국악계 프리마돈나'
- "제대로 소리내기 위해 밤낮 없이 연습 매진"
- "대중이 국악 즐길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할 것"

안숙선 명창은 “춘향이나 심청 등 주역을 맡다보니 ‘국악계 프리마돈나’라는 별명을 붙여주더라. 이 분야에서 뭔가 결실을 이뤄냈다는 의미일 것이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프리마돈나’보다는 ‘명창’으로 불리는 게 더 좋단다(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대한민국 대표 명창’ ‘국악계 프리마돈나’ ‘우리시대 소리꾼’.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을 수 없는 별칭이다. 안숙선(65·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명창에게는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병창 예능보유자인 안 명창은 9살 때 가야금 명인인 이모로부터 가야금을 배우면서 전통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국악인으로 살아온 지 올해로 56년째. 안 명창에게 국악은 삶 그 자체다. “살다보면 주변 사람과 부딪칠 때도 있고 마음이 다치는 일도 있다. 때론 상처 때문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또 소리를 하고 있더라.”

국악계에서 안 명창은 인기스타다.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공연하며 대중들과 만나오고 있다. 이달엔 15일까지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공연되는 ‘명인동감’에서 국수호·지순자 등 국악 명인 6인과 함께 무대를 꾸린다. 안 명창은 지난 1일 첫 주자로 나서 가장 애착을 갖는 노래인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을 불렀다. ‘명인동감’ 무대 준비에 한창이던 안 명창을 서울 세곡동 자택 인근에서 만났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인터뷰에 임하는 안 명창을 알아본 시민들이 “민요 너무 좋아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떡잎부터 알아본’ 국창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안 명창의 어린시절이 꼭 그랬다. 국악 명가에서 태어나 남원에선 ‘아기 명창’으로 유명했다. 노래를 잘했던 덕에 학예회나 소풍 장기자랑에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 “능에 가면 무덤이 무대고, 강가에 가면 바위가 무대였다.” 안 명창은 그렇게 노래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소리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건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부터다. 안 명창은 이후 오랫동안 주역을 맡으며 시대의 변화와 함께해 왔다.

“국립창극단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창이나 실력파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국악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거기 있었던 거다. 매일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내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각기 색이 다른 소리를 들으니 저걸 다 배워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밤낮없이 소리 연습을 했다. 6∼7시간이나 되는 판소리 완창에서 소리를 어떻게 분배할지는 오로지 연습에서 나온다. 요즘 말로 자동화라고 하지 않나.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와야 된다. 수백번 연습을 거듭해야 비로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평생을 소리와 함께해온 터라 국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국악이 대중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엔 서글픔을 느낀다고 했다. “예전엔 다른 즐길만한 음악이 없었다. 국악이 곧 대중음악이었다.” 지금의 달라진 세태가 아쉽다는 말이다. 소리 없이 사는 것도 재미 없을 것 같단다. “슬픈 일이 있을 때 한 대목 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진다. 연습하다 창밖을 바라보면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렸다. 그렇게 사계절을 지켜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힘든 일이 있을때도 소리를 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별것 아닌 게 되더라. 마치 친구같았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 이제 후대 교육에

안 명창은 만정 김소희(1917∼1995) 국창과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인 향사 박귀희(1921∼1993) 선생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두 스승은 익숙지 않은 서울생활을 해 나가는 버팀목이자 국악인생의 활로를 열어 준 좌표가 됐다. “서울로 올라와 김소희 선생을 만나면서 국악은 내 운명이 됐다. 소리의 기술만 배운 게 아니라 사람 됨됨이까지 모두 배웠다. 연습벌레였던 내게 ‘숙선아 쉬어가면서 해라’며 몸 걱정을 해준 것도 김 선생이다. 평생의 은인이다.”

스승에게 배웠던 것을 이젠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평소엔 부드럽다가도 소리를 가르칠 땐 엄한 선생이 된다. 금방 하고 싶어도 훈련이 안 되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소리라서다. “‘제대로 끊어라’ ‘맺음을 잘해야 된다’는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다. 판소리는 1인극이다. 그 안에 있는 뜻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소리만 해선 안된다. 급한 사람은 빨리 뛰어가려 하지만 기초를 충분히 만들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야 비로소 정상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렛잇고’처럼 국악도 흥얼거릴 수 있어야”

안 명창은 ‘원조’ 한류 전도사이기도 하다. 유럽 7개국 12개 도시와 미주 7개국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영국 에든버러페스티벌에서 춘향가를 완창하는 등 해외에 우리 소리를 알려왔다.

“영국 공연 때 현지 매체가 ‘안씨라는 여성이 무대에 섰는데 고음부터 낮은 음까지 음악성이 변화무쌍했다’며 칭찬하더라. 음악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공연에서는 한인들을 만났는데 한국에 있을 땐 우리음악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렇게나 감동을 줄 수 있구나’ 싶어서 뿌듯했다.”

앞으로도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를 이어갈 예정이다. 2010년 창극 ‘춘향전’ 공연을 계기로 이탈리아 베로나와는 교류도시 협력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안으로부터의 대중화도 중요하다는 게 안 명창의 생각이다.

“판소리나 전통기악 등이 쉽게 없어질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새 애들이 ‘렛잇고’를 즐겨 부르듯 우리 음악도 어디서나 흥얼거릴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생활 민요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런걸 다 찾아내서 필요한 곳에 공급해줘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국악을 접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겠다고 늘 다짐한다.”

△안숙선 명창은…

194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두 차례 국립창극단 단장을 맡았고 2004년부터 5년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도 지냈다.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이윤정 (younsim2@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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