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법구경 210.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만+ 2007.04.16.

법구경 16장은 쾌락인데 209~220까지입니다. 제가 거듭하여 읽어보니

 

209. 게송이 하나고

210~216까지가 내용이 비슷하고

217~220까지가 내용이 비슷합니다.

 

제가 궁금한것은 210~216까지인데요. 아래에 적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니 잘 읽어야 하는데 세속에 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읽기가 힘듭니다.  저번에 숫타니파타를 읽었을때 무소의 뿔인가 하는 경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말하는 구절들을 본것 같습니다. 마침 법구경 16장에 많이 나와서 질문드립니다.

 

일체개고가 허무주의로 오해하여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아래의 게송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사람들이 인용한다면 꽤 그럴듯한 오해로 둔갑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이해해야 할것인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210게송에 대해선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부처님 말씀이라 함부로 토를 달기가 힘듭니다.

 

제가 아래 게송들을 잘 이해할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법구경 16장 [쾌락] 중에서 일부분입니다. 법정스님의 법구경입니다.

 

210.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날라.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도 괴로움이다.

2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도 재앙이니까. 사랑과 미움이 없는 사람은 집착이 없으리.

212.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에서 벗어난 이는 근심이 없는 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215. 애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애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에서 벗어난 이에겐 근심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216. 욕망에서 근심이 생기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욕망에서 벗어난 이에겐 근심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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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r****
영웅
불교 31위 분야에서 활동

법구경 209-220까지   거해스님의 법구경이야기 (고려원출판)를 옮깁니다. 

 

법구경이 탄생하게 된 인연담을 읽으면, 짧은 법구경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알수 있을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좀 긴글이지만 이야기처럼 편안합니다.  질문자 덕분에 법구경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법구경 게송 209~211 세 수행자 이야기


어느 때 사왓티에 아들 하나를 둔 부모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가정을 떠나 빅쿠가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아들을 뒤따라 빅쿠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도 집을 떠나 빅쿠니가 되었다.


이들은 그렇게 출가는 했지만 서로 간 애착이 대단했기 때문에 같은 수도원 안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음식도 함께 먹고 잠자리까지도 같은 건물 안에 마련했다. 그랬으므로 수행을 한다기보다 그저 생활하는 장소를 수도원으로 옮긴 데 불과했다.


마침내 빅쿠들은 그들에 대해 부처님께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일단 가정을 떠나 빅쿠와 빅쿠니가 되었으면 더 이상 같은 장소에서 살아서는 안 되느니라. 무릇 사랑하는 이를 보는 것도,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라. 그러므로 수행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 세 편을 읊으시었다.



209번 게송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고

행해야 할 것은 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감각적 쾌락에 얽매여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저버리나니

헛되이 남이 이루어 놓은 선정만 탐낸다.



210번 게송

사랑하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 말라.

사랑치 않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함은 둑카

사랑치 않는 사람을 봄 또한 둑카이기에.



211번 게송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사랑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은 괴로운 일이기에.

사랑도 미움도 아예 없는 사람에게는

그 아무런 고통도 없으리.



법구경 게송 212 한 부자 이야기


사왓티에 사는 한 부자가 아들을 잃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들의 무덤에 가서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써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부자를 보시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빅쿠 한 사람을 거느리시고 그 부자네 집을 찾으시었다.


집 주인은 부처님께서 오시자 그저 평범한 방문이시겠거니 생각하며 안으로 모셔들였다. 부처님께서 집 안에 들어오시어 자리에 앉으시자 그는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옆자리에 앉았다. 이때 부처님께서 물으시었다.


“재가 신자여, 그대에게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


“예, 저는 오직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재가 신자여, 슬퍼하지 말지니라. 죽음이란 어느 한 장소나 한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니라. 죽음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 죽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이니라. 그대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들은 그 어느 것도 필경 죽지 않는 것은 없느니라. 그러므로 자식의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무릇 바른 수행자는 죽음을 똑바로 직시하여 이같이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즉,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이를 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육신은 죽음에 최후가 되는 것이니 나는 죽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다스려 나가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하느니라. 재가 신자여, 자식을 잃고 슬퍼하다가 어느 사이에 그대 또한 숨이 멈추고 말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대는 이 일로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놀라지 말라. 무릇 슬픔과 공포는 애정과 애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2번 게송

사랑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사랑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사랑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그 부자는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였다.



법구경 게송 213 위사카 이야기


손녀 수닷따가 갑자기 죽자 위사카는 매우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녀는 위안을 받으려고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부처님을 찾아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위사카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위사카여, 너는 사왓티에서 매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만약 네가 사왓티에서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너의 손녀로, 혹은 아들로, 손자로 생각한다면 너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잠시라도 마음은 편안치 않으리라. 위사카여, 한 어린아이의 죽음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라. 무릇 슬픔과 두려움은 지극한 애정 때문에 일어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3번 게송

귀여워함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귀여워함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귀여워함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법구경 게송 214 릭차위 왕자들 이야기


어느 축제일에 부처님께서는 많은 빅쿠 대중을 거느리시고 웨살리성으로 들어가시었다. 이때 릭차위 왕자들이 부처님 일행의 맞은편으로부터 화려한 옷을 입고 오고 있었다. 그들과 마주쳤을 때 부처님께서는 빅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따와띵사 천상세계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여기 릭차위 왕자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잘 보아두도록 하여라. 천상의 화려함과 아주 흡사하구나.”


왕자들이 가고 있는 곳은 축제가 열리고 있는 환희의 동산이었다. 그런데 그 동산에 도착한 왕자들은 서로 유녀를 차지하려고 심한 언쟁을 벌였고, 결국은 치고받는 싸움으로 발전했다. 그러자 화려하고 장엄하던 왕자들의 품위와 위신은 형편없이 추락되어 버렸다. 그들의 옷은 모두 찢겨졌으며, 어떤 왕자는 피를 흘리며 들것에 실려 갔고, 어떤 왕자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되돌아갔다.


바로 이때 부처님과 빅쿠 일행이 성 내에서 공양을 끝내고 돌아오시다가 이 같은 왕자들의 모습을 보시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왕자들의 비참하고, 추하며, 부상당하여 들것에 실려 가는 모습 등, 마치 전쟁에서 돌아오는 패잔병 같은 광경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과, 그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모든 슬픔과 두려움이 일어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4번.

집착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집착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집착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은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게송 215 아닛티간다 이야기


아닛티간다는 사왓티에 사는 젊은이였다. 그는 만다스 국의 사갈라라는 도시에 사는 어여쁜 처녀와 결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부가 친정을 떠나 신랑 집이 있는 사왓티로 오다가 도중에 병이 들어 그만 죽고 말았다. 신랑은 그 소식을 듣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 신랑이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할 시기가 되었음을 아시고 직접 그 젊은이의 집으로 가시었다. 젊은이의 부모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끝내신 뒤 아들을 데려오라고 이르시었다. 이윽고 젊은이가 부처님 앞으로 나와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옆에 앉자 부처니께서는 그 젊은이에게 물으시었다.


“너는 어찌하여 그토록 슬픔에 빠져 있느냐?”


젊은이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오, 아닛티간다여, 슬픔은 강한 욕망에서 일어나며, 두려움은 무엇을 구하려는 마음과,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려는 데서 일어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5번.

갈망은 슬픔을 태어나게 하고

갈망은 또한 두려움을 낳는다.

갈망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은

슬픔도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아닛티간다는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였다.

 

 


게송 216 한 브라흐민 이야기


사왓티에 아직 불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브라흐민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가 머지 않아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할 것을 아시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를 찾아가시어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누시곤 하였다. 그러자 농부는 자기가 불교 신자가 아닌데도 부처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매우 고마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농부는 부처님께 이렇게 청했다.


“고따마 사마나시여, 이 논에서 수확을 하면 제가 먹기 전에 당신께 먼저 햇곡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께 햇곡식을 바치기 전에는 단한 톨의 곡식도 먹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브라흐민 농부가 올해에는 이 논에서 수확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므로 그런 농부의 제안에 대해 다만 침묵하시었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브라흐민 농부가 벼를 거두어들이려는 바로 전날 밤에 엄청난 소낙비가 쏟아져서 곡식이 모두 홍수에 휩쓸려가 버리고 말았다. 브라흐민 농부는 이로 인해 고따마 사마나께 햇곡식을 바치지 못한 것을 상심해 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 브라흐민 농부를 방문하시었고, 농부는 홍수에 대해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농부에게 말씀하시었다.


“브라흐민이여, 그대가 겪고 있는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대는 아마도 잘 모르리라. 그러나 여래는 그 원인을 아나니, 그대에게 슬픔과 두려움이 일어난 원인은 바로 욕망 때문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6번.

욕망은 슬픔을 낳고

욕망은 두려움을 낳는다.

욕망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은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브라흐민 농부는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고, 곧 부처님의 재가 신자가 되었다.

 

 


게송 217 오백 소년 이야기


라자가하에 축제가 있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여러 빅쿠들을 거느리시고 성 내로 탁발을 나가시었다. 그리하여 이 집 저 집을 돌며 탁발을 하시던 부처님께서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환희의 동산으로 가는 오백 명의 소년들과 마주치시었다. 소년들은 빵을 잔뜩 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부처님이나 빅쿠들에게 그 빵을 공양하지 않았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빅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너희들은 오늘 저 소년들이 가지고 가는 빵을 먹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빅쿠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잠시 휴식하시었다. 그때, 빵이 든 바구니를 들고 까싸빠 테라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소년이 까싸빠 테라에게 오더니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다음 빵을 모두 테라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까싸빠 테라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의 훌륭하기 이를 데 없으신 스승께서 여러 빅쿠들을 거느리시고 건너편 큰 나무 아래에서 쉬고 계시니 너희들은 그분께 가서 공손히 인사를 올린 다음 이 빵을 바치도록 하여라.”


그래서 소년들은 부처님께 가서 인사를 올리고 가져온 빵을 부처님의 받따에 담아 드렸다. 이리하여 부처님과 빅쿠 일행은 그 빵을 공양 받고 나서 탁발을 계속하시게 되었다.


탁발 도중 빅쿠들이 부처님께 아무래도 그 소년들은 까싸빠 테라를 흠모하는 것 같다고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만약 어떤 빅쿠가 여래의 아들 까싸빠와 같다면 그는 모든 인간과 천상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흠모를 받게 되느니라. 그리하여 그는 빅쿠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옷, 음식, 수도원, 의약품)을 풍족하게 공양 받게 될 것이니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7번.

계행과 내적 지혜를 갖추어 진리를 잘 이루고

담마의 뜻 깨달아 자기의 의무를 지키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게송 218 아나가미 테라 이야기


한 테라가 있었는데, 그는 제자들로부터 스승께서는 어느 경지에 이르셨느냐는 질문을 받아도 도무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테라는 아나가미 막가(아나함도)로서 성자로서 세 번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는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즉 도의 네 번째이자 최고의 경지인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자기의 경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테라는 결국 아라한이 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테라는 자기가 아나가미 막가에 도달했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셈이었다.


테라의 제자들은 스승이 아무런 도(道막가)나 과(果팔라)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여 스승을 매우 가엾게 여겼다. 그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자기들의 스승이 어디에 태어났는지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너희 스승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나가미를 이루었기 때문에 지금은 숫다왓사 브라흐마 천에 태어났느니라. 너희 스승이 그 경지에 올라 있었으면서도 자기의 경지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스스로 그 정도의 경지밖에 성취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생전에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려 했던 때문이니라. 너희들의 스승은 이제 머지 않아 모든 집착과 감각적 쾌락을 해탈하는 더욱 향상된 경지로 올라가게 될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218번.

그는 으뜸가는 진리 닙바나를 성취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마침내 그 경지에 이르러

감각의 세계를 벗어났고, 또 집착으로부터도 벗어났다.

그는 이미 생사윤회를 벗어났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그 빅쿠들은 모두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였다.




게송 219, 220 난디야 이야기



난디야는 바라나시 시에 사는 부자였다.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수도원을 지어 상가에 바치면 큰 복이 된다는 말씀을 듣고 자기 재산으로 이시빠따나 숲에 마하위하라라는 이름의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 수도원은 첨탑을 세우고 일신을 포갠 듯한 모양으로서 아름답고 웅장하며 갖가지 장식을 한 것이었고, 건물 내부의 시설도 훌륭했다. 난디야가 그렇게 수도원을 부처님과 빅쿠 상가에 헌납해 올리자, 그와 동시에 따와띵사 천상에도 난디야를 위한 훌륭한 대저택이 건립되었다.


어느 날 마하목갈라나 테라는 따와띵사 천상세계를 방문하였다가 거기에서 이시빠따나의 마하위하라 수도원 건립자인 난디야를 위한 대저택을 보았다. 마하목갈라나 테라는 천상에서 내려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착한 공덕을 행한 사람이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는데 천상세계에 그 사람을 위한 훌륭한 대저택과 그에 따르는 물건과 가구들이 준비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여래의 아들이여, 너는 왜 그같이 묻는 것이냐? 너는 네 두 눈으로 따외띵사 천상세계에 가서 난디야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들을 직접 보지 않았더냐? 천상세계는 착하고 너그러이 베푸는 사람을 기다리기를 마치 집을 떠난 자식을 학수고대하는 가족들과 같이하는 곳이니라. 이 인간계에서 착한 행동을 하며 공덕을 지은 사람이 수명이 다하여 죽게 되면 천상에서는 그를 즐겁게 맞이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 두 편을 읊으시었다.

 

219번.

한 사나이가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어느 날 무사히 돌아오면

가족과 친구와 이웃 사람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 환영한다.


220번.

이같이 이 세상에서 착한 공덕을 쌓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향할 때

그의 착한 행위가 그를 환영케 하나니

마치 가족들이 사랑하는 이의 귀가를 반기듯이.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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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한국 위빠사나 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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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gh****
지존
불교 18위 분야에서 활동

법구경 16장은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부분인데 질문자님께서 한장 전체를 물으셨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버거운 질문이라고 느꼇습니다. ^^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할 용기가 없었는데, 질문자님이 이 질문을 미해결에 넘어가기 까지 두신것을 보고 크게 용기를 내어 긴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제 거친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둘째치고, 부처님이 남기신 법구경의 게송을 이렇게 집중하여 공부하게 만들어주신 rockshake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님 덕분에 예전의 미혹한 눈으로 알지 못햇던 것들을 알게되고 공부하게 되니, 이러한 공부가 앞으로 제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될것같습니다.

 

()()().

 

 

법구경 209~211게송. 일체세간을 애착과 증오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유행하다.

 

법구경 209~211게송의 인연담은 부처님 당시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같이 한 사원으로 출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가족의 출가는 지금 읽어도 참으로 희유하고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이 일가족이 승가의 규율을 해치면서 생활을 하게된것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재가신자라면 부처님은 전혀 나무라시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가 출가의 본뜻을 되새기지 못하고 세속의 인연에 연연하여, 스스로들의 귀중한 출가정신을 살리지 못하고 또한 승가전체에 바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엄하게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은 먼저 이것이 출가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반드시 유념하고 받아들여야 하겟습니다. “너희가 일단 가정을 떠나 빅쿠와 빅쿠니가 되었으면 더 이상 같은 장소에서 살아서는 안 되느니라. 무릇 사랑하는 이를 보는 것도,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라. 그러므로 수행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느니라.”

 

209 210 211게송을 인연담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그 게송만으로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210번 게송의 빠알리어 원문은 초전법륜경의 고성제에서 말씀하신 애별리고 원증회고부분과 거의 유사합니다. 고성제의 애별리고와 원증회고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좋아하는 대상, 일체의 싫어하는 대상을 원래 의미하므로 더욱 210게송과 더불어 209 211게송을 살펴봐야 겟습니다.

 

 

209번 게송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고

행해야 할 것은 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감각적 쾌락에 얽매여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저버리나니

헛되이 남이 이루어 놓은 선정만 탐낸다.

=> 209게송은 부처님이 댓구를 사용하여 말씀하신것을 알수 있습니다. “해서는 안될것을 행한다는 것”은 바로 “감각적 쾌락에 얽매여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저버리나니”의 뜻입니다. 오욕락을 즐기거나 감각적욕망의 세계에 집착함으로 해서 그 맛에 취해 위험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는것을 말합니다. “행해야 할 것은 행하”는 것은 이러한 감각적욕망의 맛에 취하지 않고 그 위험을 알고 벗어나기 위해 선정을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210번 게송

사랑하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 말라.

사랑치 않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함은 둑카

사랑치 않는 사람을 봄 또한 둑카이기에.

=> 210번 게송은 반드시 빠알리어 원문에 대한 참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빠알리어 원문이 초전법륜경의 고성제 부분(대념처경의 법념처부분에도 나옵니다)과 같은 부분이 있음을 바르게 아는것이 좋겟습니다. 핵심은 사람으로만 번역하면 그 의미를 너무나 축소하는 것이고 갈애가 어디에서 일어나는 가를 바르게 알기 어렵게 합니다. 물론 사람은 사랑할만한 것(대상 형상 소리 냄새... 법)에 들어가지만 좀더 바른 의미를 위해선 “사랑하는 것과 만나지 말라”라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210게송에 대한 빠알리어 원문과 직역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210. Mā piyehi samāgañchi, appiyehi kudācanaṃ;

piyānaṃ adassanaṃ dukkhaṃ, appiyānañca dassanaṃ.

좋아하는 것과 만나지 말라.

싫어하는 것과도 언제라도 [만나지 말라]

좋아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괴로움이요.

싫어하는 것을 보면 [괴로움이다]

이러한 부분은 대념처경에도 나오는데 위에서 piyehi appiyehi라고 한것을 그대로 볼수 있습니다 단지 단어만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사실 210게송의 바른 의미를 알기위해선 초전법륜경의 고성제 의미(대념처경에도 나옴)를 알아야 겠습니다.

 

387. ...appiyehi sampayogopi dukkho, piyehi vippayogopi dukkho ...

18.“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대념처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설합니다. 원증회고를 보통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잇는데 좀더 넓은 의미가 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396. “Katamo ca, bhikkhave, appiyehi sampayogo dukkho?

그리고 수행자들이여! 싫어하는 것을 만나는 고통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어딘가에서 유쾌하지 않은 것, 원하는 것이 아닌 것을 발견할 때마다 혹은 싫어하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접촉할 때마다 혹은 마음에서 나쁜 생각이 일어 날때마다 혹은 누군가 자신의 불행과 해로움, 어려움 혹은 불안 등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 할 때마다, 이러한 것들과 만나게 되거나 이러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겹쳐서 나타날 때, 이것을 싫어하는 것을 만나는 고통이라고 한다.

주) 이 번역은 vri 대념처경의 한글역에서

 

 

대념처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설합니다. 애별리고를 보통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잇는데 좀더 넓은 의미가 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397. “Katamo ca, bhikkhave, piyehi vippayogo dukkho?

그리고 수행자들이여!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유쾌하고 원하던 소리, 맛, 소리, 생각, 그리고 누군가 자기의 행복과 행운, 번영, 안락감, 안전등을 원하는 사람, 즉 부모, 형제자매, 친구 동료, 친지들과 같은 사람들과 헤어진다면, 만날 수 없게 된다면, 그것들과 교류하지 못한다면, 수행자들이여, 이것을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헤어지는 고통이라고 한다.

주) 이 번역은 vri 대념처경의 한글역에서

 

 

그러므로 210게송은 아래의 의미로 되새겨져야 할것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만나지 말라.

싫어하는 것과도 언제라도 [만나지 말라]

좋아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괴로움이요.

싫어하는 것을 보면 [괴로움이다]

 

=> 12연기에 의하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입니다.

육입에 의해서 우리는 대상을 접촉합니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뜻으로... 이렇게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수(受,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느낌은 좋아하는 느낌, 싫어하는 느낌,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느낌과 함께 이것은 사랑할만한 대상이다. 이것은 미남이다. 이것은 뚱뚱하다. 이것은 추녀다. 이것은 섹시하다. 이것은 두려워할만한 대상이다. 같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단계가 지나가 좋아함을 자꾸 뒤돌아보고 탐하다 보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 갈애가 됩니다. 싫어하는 것을 자꾸 되새기다보면 그것을 증오하는 것이 갈애가 됩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바로 이러한 것을 알아차리라고 하신것입니다.

 

12연기에 의하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에서 느낌이 갈애와 취착으로 넘어가지 말것을 말씀하시는것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과 만나지 말라.

=> 눈귀코혀몸뜻에서 즐겨할만한 것이 있더라도 애착하지 말고 갈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과도 언제라도 [만나지 말라]

=> 눈귀코혀몸뜻에서 싫어할만한것이 있더라도 미워하지말고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괴로움이요.

=> 좋아하는 것에 묶여 집착이 되면 그것과 끊어질때 괴로움이 되고

 

싫어하는 것을 보면 [괴로움이다]

=> 싫어하는 것에 묶여 집착이 되면 그것과 같이 잇을때 괴로움이 됩니다.

 

 

211번 게송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사랑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은 괴로운 일이기에.

사랑도 미움도 아예 없는 사람에게는

그 아무런 고통도 없으리.

 

=> 그러므로 211번 게송은 좋아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싫어하는 것에 동요하지 않고, 일체법들을 평온하게 바라보는 해탈의 마음을 설하신것입니다. 아라한은 생과 사가 끊어져 불생불멸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아라한은 갈애하는 마음(사랑하여 애착하는 마음, 싫어하여 증오하는 마음)이 끊어져, 싫어할만한 사람 중생 대상에 싫어하지 않고 평온하고, 사랑하고 즐겨하고 가지고 싶을만한 물건 음식 중생 대상에 대해 애착심이 없이 평온함을 말합니다. 자비희사 4무량심으로 가득하있고, 물방울이 묻지 않는 연꽃처럼 사랑과 증오가 묻지 않은체 일체세간을 유행합니다. 아라한은 ... 부처님은... 불제자들은 그 배움의 길을 닦습니다.

 

 

212~216게송. 갈애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이 일어난다. 갈애가 소멸하면 근심이 없으니 어찌 생사윤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것인가.

 

212~216게송은 각각 인연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먼저 일어야 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게송만을 두고 보면 이렇게 생각해볼수도 있습니다.

 

사랑, 귀여워함, 집착, 갈망, 욕망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사랑, 귀여워함, 집착, 갈망, 욕망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사랑, 귀여워함, 집착, 갈망, 욕망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거해스님은 마지막을 욕망이라고 번역하셧는데 원문을 참조해보면 갈애를 의미하는 tanha라고합니다.

그러므로

 

갈애때문에 슬픔과 두려움이 일어난다.

갈애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겐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라고 게송들을 간단히 생각해볼수도 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부처님은 갈애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갈애의 종류는 감각적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갈애는 어떻게 나타나는가하면 바로 눈귀코혀몸뜻에서 끊임없이 즐거움과 좋아할만한것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갈애가 더해지면 그것이 지금에도 그렇고 끊임없이 근심(슬픔)과 두려움을 생기게 합니다. 두려움은 왜 생깁니까? 괴롭기 때문입니다. 의지할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지않기를 바라지만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슬프고 죽음이 두려워집니다. 늙을 수밖에 없는데 늙지 않는것을 구하다 도저히 얻을수 없음을 알고 슬퍼하다 늙음이 오면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괴롭고 의지할것이 없어 마음이 끝없이 동요하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해탈한사람은 갈애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눈귀코혀몸뜻에서 즐겨할만한 대상만 찾아다니다 애착하고 증오하고 슬퍼하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체의 대상들이 영원한것도 아니고 괴로운것이고 실체가 없는것이라 거기에대해 나다 나의 것이다라고 목숨걸고 덤비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체법들이 일어나고 생멸하는것을 연기법으로 보는 자에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217게송과 218게송.  아라한이 되거나 아나함이 되거나... 천상에 태어난다.

 

 

217게송과 218게송은 위에서 설명한것처럼 행하지않을것을 행하지 않고 행할것을 행하면 아라한(현세에서 해탈한 가섭존자)과 아나함(현세에선 아라한을 이루지 못했으나 정거천에 태어나 아라한을 이룰 스승)을 비롯한 성인의 반열에 들것임을 보여줍니다. 219게송과 220게송은 이러한 수행을 닦은 사람이 비록 아라한과 아나함을 이루진 못한다 하더라도 선업공덕을 쌓았으므로 천상의 선처에 태어날것임을 설하시고 있습니다.

 

217번.(현세에서 아라한이된 가섭존자)

계행과 내적 지혜를 갖추어 진리를 잘 이루고

담마의 뜻 깨달아 자기의 의무를 지키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218번.(정거천에 태어나 아라한을 이룰 스승)

그는 으뜸가는 진리 닙바나를 성취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마침내 그 경지에 이르러

감각의 세계를 벗어났고, 또 집착으로부터도 벗어났다.

그는 이미 생사윤회를 벗어났다.

 

 

219~220. 선업공덕을 쌓아 천상에 남.

 

219번.

한 사나이가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어느 날 무사히 돌아오면

가족과 친구와 이웃 사람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 환영한다.

 

220번.

이같이 이 세상에서 착한 공덕을 쌓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향할 때

그의 착한 행위가 그를 환영케 하나니

마치 가족들이 사랑하는 이의 귀가를 반기듯이.

 

 

200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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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100위, 동양화 분야에서 활동

210.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날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 애욕이 생기므로 만나지말고,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죄를지으니 만나지말라는 이야기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8고중 하나요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도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8고중 하나요

 

2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도 재앙이니까. 사랑과 미움이 없는 사람은 집착이 없으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보이기위하여 탐욕을 일으키고 집착을 하므로 사랑과 미움을 일으키지말라는이야기입니다. 

 

212.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에서 벗어난 이는 근심이 없는 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215. 애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애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에서 벗어난 이에겐 근심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216. 욕망에서 근심이 생기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욕망에서 벗어난 이에겐 근심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사랑, 애욕, 욕망에 집착을 한다는것은 내몸에 집착을 하는것입니다.

내몸에 집착을 하니깐 두려운 것입니다.

누가 자기를 해하려하면 두려운것이지 집착이 없다면 누가 죽인들 두려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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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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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쉬운 예로 집안에 화재가 나거나 홍수로 휩쓸려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집안에 대한 집착이 있는 사람(재물이나 가족)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겠지요.

불교의 이야기 중에 집뜰에서 놀다가 화재를 만난 아이에 대해 부모는 집밖에서 부를 생각(어떻게 하면 나오게 할까?)만 합니다.

현실적으로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왜 가르침에는 위기에서 안들어갈까요?

가족관계는 영원한 시간중에 스쳐가는 찰나입니다. 그 집착에 의해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추상적 개념으로 파악해서는 안됨)

218~220도 추상적으로 해석하면 문학 작품 해석하는 것입니다.

같은 비유라도 왜 그러한 비유를 했는지까지 파악못하면 얻는것이 없습니다.

반복하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뜻을 해석한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를 기본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왜 "먼지는 먼지요 수증기는 수증기이다"라는 말과 다른지를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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