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온라인 쇼핑 포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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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5.01.21. 오전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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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서 온라인 쇼핑하길 완전히 포기했어요."

대런 빈 씨는 “한국 인터넷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 “엉망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대런 빈은 미국 변호사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특허 전문 변호사로 발돋움하고 싶어 2009년 2월 한국에 들어왔다. 지난해 3월부터는 서울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는 중이다. 대런 빈 변호사는 한국 온라인 쇼핑 환경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1월15일 저녁 서울 관악구 카페에 마주 앉은 그의 얼굴에서 답답함이 묻어났다.

▲대런 빈 변호사


한국은 손꼽히는 IT 강국이다. 구석구석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리고, LTE 같은 차세대 무선통신망이 상용화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한국 인터넷은 그림의 떡이다. “속도야 빠르죠.” 대런 빈 변호사는 혀를 찼다. 그는 외국인이 인터넷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도록 막는 주범으로 3가지를 꼽았다. 실명 인증, 공인인증서, 액티브X다.

대런 빈 변호사는 웹사이트에 가입할 때부터 벽을 마주한다고 얘기했다. 실명 인증이 안 되기 때문이다.

“네이버나 다음 어느 웹사이트에 가입하려고 해도 이름 입력하라고 하는데 제 이름은 언제나 틀렸다고 해요. 외국인으로 등록하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외국인 등록번호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떠요. 영어로 적어도 안 돼요. 전화해서 가입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e메일로 외국인등록증을 보내 그쪽 직원이 직접 입력해달라고 해야죠."

웹사이트에 한번 가입하는데 몇 시간에서 며칠씩 걸리는 건 작은 불편에 속한다. 작은 웹사이트는 아예 e메일을 접수할 길도 없다. 게다가 웹사이트에 가입할 때마다 주민등록등 역할을 하는 외국인등록증을 e메일로 보내는 일은 위험기까지 하다. “이렇게 번잡한 등록과정 때문에 외국인등록증을 보냈다가 그게 유출되면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저는 한국 웹사이트에 가입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큰 위험에 노출되는 거예요."

가까스로 웹사이트에 가입했다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다음 골짜기는 액티브X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생수라도 사려면 뭔지도 모를 프로그램을 계속 깔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생각조차 한 적 없는 상황이다.

“미국에선 이런 걸 설치할 때 굉장히 조심해요. 그래서 액티브X 설치하라는 메시지만 보면 저는 손이 떨려요. 컴퓨터가 갑자기 뻗어버릴까봐 안 깔려고 하죠. 하지만 한국에서는설치할 수밖에 없어요. 대학교에서 e메일만 보내려고 해도 액티브X를 3개 깔라고 해요. 한국에선 뭐 중요한 일만 하려고 들면 액티브X를 설치하라고 덤비니 미칠 노릇이죠."

대런 빈 변호사는 “액티브X를 설치하려면 컴퓨터 권한을 전적으로 내줘야 한다”라며 “보안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인데, 여기 악성코드 하나만 숨어 있어도 내 모든 정보를 내주게 된다”라고 꼬집었다.

▲네이버 웹툰 '가우스전자' 시즌2 232화 '충동구매'편 가운데


액티브X는 그나마 양반이다. 공인인증서에 비하면 말이다. 대런 빈 변호사는 국민은행 신용카드를 쓰는데 온라인에서는 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결제할 때 공인인증서를 내야 하는데, 그는 공인인증서가 없다. 외국인이 공인인증서를 받으려면 외국인등록증을 가지고 직접 공인인증기관이나 은행 같은 등록대행기관을 방문해야 한다. 온라인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 공인인증서같이 쓸 수 있는 아이핀·마이핀은 공인인증서가 있어야 발급받을 수 있다. 도돌이표다.

“지난해에 아이핀을 받으려고 해봤는데, 아이핀은 한국인만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공공아이핀을 받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핀을 받으려면 실명 인증을 하라대요? 아이핀 발급 회사에 전화했더니 온라인으로 신청하래요. 온라인으로 안 되니까 전화한 건데 말이에요. 몇번이나 전화했지만 공공아이핀은 발급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온라인 쇼핑은 완전히 포기했어요."

쇼핑만이 문제가 아니다. 요즘은 연말정산 기간이라 세금을 신고해야 하는데, 국세청 웹사이트를 쓰려면 공인인증서나 아이핀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직접 세무서를 방문해야 한다고 대런 빈 변호사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사기 거래를 사업 비용으로 치는 미국

대런 빈 변호사 얘기를 듣다보니 궁금해졌다. 미국 온라인 쇼핑은 어떨까? 소문만큼 간편할까?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국에서는 물건 사기 쉬워요. 웹사이트마다 결제 시스템은 달라도 실명인증이나 공인인증서 필요 없어요. 신용카드 정보, 내 이름, 주소, 카드 뒤에 적힌 CVS 번호만 넣으면 돼요. 물론 위험하기는 합니다. 누군가 내 주소를 아는 사람이 카드를 훔치면 나처럼 행세해 물건을 살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 노출될 위험성은 작아요."

이렇게 간단하게 카드를 결제할 수 있도록 놔두면 남의 카드를 자기 것처럼 쓰는 사기가 횡행할 것같다. 사기거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대런 빈 변호사는 미국 금융기관이 사기거래 금액을 사업상 비용으로 끌어안는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카드 범죄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규제를 세우지는 않아요. 미국 은행은 사기거래를 비용으로 칩니다. 결제를 편하게 해서 더 많은 거래가 일어나면 더 많은 돈이 돌아다니니 거래 수수료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잖아요. 정말 고도의 보안 시스템을 세워서 고객을 내쫓느니 고객을 더 많이 모아서 ‘펑크’를 메우는 쪽을 택한 겁니다."



대런 빈 변호사는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금융사고가 생겼을 때 책임을 은행이 더 많이 진다고 전했다.

“사기 거래에서 고객의 책임은 매우 적습니다. 카드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면, 고객이 60일 안에 사기 거래를 신고하면 그 금액은 모두 금융회사가 채워넣어야 해요. 그러니 은행이 사기 거래를 솎아내는 기술을 개발할 수밖에 없지요. 몇몇 금융회사는 결제 금액과 결제 위치, 상품을 보고 평소와 다른 점이 발견되면 결제를 차단합니다. 그때는 고객이 직접 은행에 전화해서 결제를 진행해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해외에 나갈 때는 미리 여행지와 예상 지출 비용을 금융회사에 알려야 봉변을 안 당하죠. 그래도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게 한국에서 소위 안전하다는 보안 프로그램을 까는 것보다 빠릅니다."

다행히도 대런 빈 변호사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했다. 자기 대신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줄 사람이라도 있다. 그는 “한국 인터넷 환경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라며 “온라인 쇼핑을 대신 해 줄 아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친구한테 매번 물건을 살 때마다 부탁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되물었다.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 덕분에 얼마나 안전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이용한 해킹도 일어나잖아요. 정말로 모든 사기를 다 막으려고 덤비는 건가요? 집에 도둑이 들까봐 걱정된다고 무장 경비 20명을 고용하면 내가 버는 돈보다 경비회사에 더 많은 돈이 들잖아요. 경제적으로 따져봐야죠. 사고를 최대한 막는 게 나은지, 사고를 감수하면서 전체 파이를 키우는 쪽이 나은지요."

인터뷰 끄트머리에 대런 빈 변호사에게 금융위원회 발표 내용을 전했다. 인터뷰 당일 아침 금융위는 보안성 심의 제도를 폐지해 각종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보안성 심의 제도는 액티브X는 물론이고 공인인증서까지 강제하던 원흉으로 꼽혔다. 이런 제도가 사라지면 대런 빈 변호사의 발목을 잡던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함께 말했다. 대런 빈 변호사는 빙그레 웃었다. "꼭 기자님 말씀처럼 되면 좋겠네요."
안상욱 기자 nuribit@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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