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달려오는 미래,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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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5.01.17. 오후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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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빅퀘스천'의 저자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과 김대식 교수/남강호 기자

4년 전쯤이었다.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뇌과학 여파에 대한 기획 기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타이틀이 꽤나 거창했다. ‘제4의 혁명 브레인 웨이브’. 취재하다가 한 교수로부터 새로운 전문가를 소개 받았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이 분야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인데 카이스트에 있어요.” 그러면서 단서를 달았다. “그 선생 우리말이 서툴러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간신히 연결은 됐다. 하지만 들려오는 발음이 난감한 수준이었다. 꼭 갓 입국한 교포 같았다. 아니, 한국어를 갓 배운 외국인에 가깝다고 할까. 이대로는 긴 대화가 어렵겠다 싶었다. 상대도 질문을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바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말이 불편한 듯했다.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실물을 접했을 때도 그랬다. ‘별난’ 사람임이 분명했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 원색 운동화에 찢어진 청바지, 옆은 치고 위는 세운 ‘헤어’만 보면, 교수 맞나 싶었다. 나로서는 김용옥 고대 교수 시절 두루마기 패션 이후 최대 파격이었다.

그의 ‘별스러움’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어느 순간 중앙 언론과 방송에 출몰이 잦더니, 급기야 최근엔 고전학교 설립에 나서고, 묵직한 인문학 에세이집까지 출간했다. 제목부터 중후장대다. ‘빅 퀘스천’(동아시아).

책장을 펴 보니 더 가관이었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시간은 왜 흐르는가’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인가’ ‘인간은 왜 필요한가’…. 질문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만나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그는 바빴다. 작년 말에 청한 인터뷰가 해가 바뀌고 한 주가 더 지나서야 성사됐다. 학교가 있는 대전과 서울 사이를 하루가 멀다고 KTX로 오가는 사람.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는 이날도 연구실에서 실험하다 나온 조교 같은 차림이었다.

다행히 그의 우리말은 유창하게 변해있었다. 그동안 신문이나 책에서 접한 글을 봐도 일취월장하던 터다. 이게 다 뇌과학을 연구하다 보니, 뇌를 쓰는 비결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정작 그의 두뇌는 또다른 ‘두뇌’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공상과학(SF) 영화에서나 봤던 그 인공지능 말이다.

-동정 소식만 봐도 분주하게 사는 것 같다. 어떻게 다 소화해 내나?

사실은 내가 게으르고 잠도 많은 사람이다. 어쩌다가 요즘 일복이 터져서 바쁘게 지낸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이동 중이거나 기다릴 때 쪽잠을 많이 잔다.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편이라서 별 문제는 없다.


-요즘은 뭐가 제일 큰 일인가?

연구 과제를 많이 한다. 알다시피 뇌과학, 그 중에서도 인공지능 쪽을 연구하는데, 우리 실험실에서 근래 재미있는 결과가 많이 나왔다. 응용의 여지가 많아 기업들도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인공지능 분야 중에서도 ‘깊은 학습(Deep Learning)’이라는 거다. 여러 곳에서 하고 있는데, 이걸 잘 발전시키면 20~30년 안에 말로만 듣던, 인간처럼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아주 흥미진진하다.

-카이스트 연구실만의 성과인가?

‘깊은 학습’이라는 게 큰 패러다임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것만 해도 사실은 몇 년 전만 해도 공상과학소설(SF)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했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근본적인 문제 몇 가지가 풀렸다. 이제는 될 것 같다. 작년부터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이젠 오히려 인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현실화하면 인류에게 본질적인 문제가 생긴다. 스티븐 호킹이나 엘런 머스크 같은 사람이 우려하는 목소리도 보도된 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기술의 최고 트렌드를 보는 분들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상 중대한 변화의 시기를 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류는 과거 사냥을 하면서 살다가, 정착해서 농업으로 살기 시작했다. 가장 최신의 변화가 산업혁명이었을 거다. 이게 몇 백 년, 몇 천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변화인데 우리가 지금 그런 시기를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50년, 100년 지나고 나면 아마도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은 잘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의 변화는 어느 한두 개가 아니라, 프레임이 변하다 보니 모든 게 리셋되는 상황이다. 기계가 지능을 가지기 시작하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게 리셋되지 않을까. 사실 아무도 모른다. 이제 호킹이나 머스크 같은 사람이 뭘 걱정하는지 나는 충분히 안다. 하지만 막연히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예방할 수 있는 것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좀 하고 있다.

-기계의 깊은 학습이란 게 빅데이터와 관련이 있나?

그렇다. 결국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강한 인공지능.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류다. 기계가 연산만 하는 게 아니라 독립성도 있다. 가끔 자아도 생겨서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것으로도 나온다. 지금으로서는 이건 영화고 공상이다. 실현 가능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내 느낌으로는 아주 먼 미래에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약한 인공지능이 있다. 기계에 빅 데이터를 집어넣어주면 학습을 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두뇌를 모방한 방법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고양이나 개에 대해 따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구분할 줄 안다. 동화책과 TV를 보고 학습한 결과다. 그런 식으로 기계에 빅 데이터를 집어넣어 학습을 한 결과 사람과 비슷한 사고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최근 획기적 진전(breakthrough)이 있었다. 그래서 20년 안에 인공지능이 가능하다고 많은 사람이 믿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있다가 본격적으로 물어보겠다. 카이스트 연구 수준은 외국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가?


단순 비교는 어렵다. 내가 말한 ‘깊은 학습’ 분야는 세계에 다양한 실험실들이 있는데, 우리도 세계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분야 자체가 생긴 지 얼마 안됐고, 모든 성과들이 개방돼 있어 접근 가능하다. 따라서 어느 한 곳이 특별히 우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걸 리드하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알고리듬이나 데이터를 퍼블릭 도메인으로 두고 있어서 접근할 수 있다. 제일 앞선 팀이 인식률 95%라면 다른 팀은 93~94% 그 정도다. 다들 엇비슷하게 잘 하고 있다.

-학문 이력이 남다르다. 독일에서 초중고대를 나오고 미국, 일본을 거쳤는데.

1979년 열두 살 때 가족을 따라 독일로 이민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독일에서 시작해 중고대를 나왔다.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미국 MIT로 가서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대학 교수로 일했다. 그 중간에 1년 정도 일본 연구소에 있었다. 5년 전에 한국에 귀국했다. 어릴 적 생활은 한국에서, 교육은 대부분 독일에서, 직업 생활은 미국에서 했으니 세상을 한 바퀴 돈 셈이다.

-한국 사회 기준으로는 ‘돌연변이’인 셈이다.

완전 돌연변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적응 못하고 살고 있다.(웃음)

-그래서 색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별나서라기보다, 인생 편력이 그렇게 되면서, 다양한 관점을 접한 결과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나는 쉽게 내리는 결론이나, 편견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갖는 편이다. 지금 여기서는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다른 곳이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썼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용병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니, 저마다 자신이 믿는 게 진실이라고 믿으며 사는 게 의심스러웠던 거다. 그래서 다 의심하고 남는 게 뭔가. 봤더니 내가 생각한다는 것만은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나도 사람마다 세상을 달리 해석하고 다른 견해를 갖게 되는 메카니즘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뇌과학을 시작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

-어린 나이에 외국 가서 힘들지 않았나?

처음엔 힘들었다. 내가 입학한 학교에 한국인은커녕 외국인도 잘 안 보였다. 애들이 처음엔 내게 돌도 던지고 그랬던 것 같다. 중국애 왔다고. 사실 아이들의 잔인함이라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새로운 것에 대해 처음 보이는 반응이 그런 거다. 생각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난다. 한 달 지나서 축구를 같이 하면서 금세 친해졌다. 하지만 어른은 다르다. 겉으로는 잘 해줘도 속은 다를 수 있다. 어릴 때 갔으니까 말도 비교적 수월하게 배웠고, 나중에는 편하게 잘 지냈다.

커서는 달랐다. 프랑크푸르트 근처 작은 도시에 살다가 대학을 가기 위해 다른 도시로 갔는데 재밌는 경험을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당연히 독일에서 살 거라고 여겼다. 대학에서 신입생 파티를 하는데 한 학생이 다가왔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어디어디 출신”이라고 했더니, “그거 말고 진짜 어디서 왔냐”고 되물었다. 그제서야 알아듣고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곧바로 “너 언제 한국에 돌아갈 거니”라고 했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대부분이 그걸 물어봤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독일인의 나라고, 너는 손님이니 교육 받았으면 돌아가라는 뜻으로 이해됐다.

반면, 미국 학회에 가서 리셉션이나 파티에서 사람을 만나면 달랐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곧바로 “너 언제 미국 올거냐”고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게 미국이 세계에서도 첨단을 걷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받아준다는 느낌을 준다. 어디서 왔든지 능력과 실력이 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한 사회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의 풀은 일정량 정해져 있다. 가우스 분포로 보자면, 탁월한 사람 5%, 아주 떨어지는 사람 5%는 늘 있게 마련이다. 비율(%)이 정해져 있다면 전체 풀의 크기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 미국은 전 세계 인재 풀을 다 쓰는 반면, 독일은 자국 것만 쓰는 셈이다. 나도 15년 독일에서 살았지만 박사 학위 끝나고 미국으로 가서 한동안 독일은 가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과학에 관심 있었나? 뇌과학은 언제부터?

어릴 때는 수학과 미술 두 가지에 관심 있었다. 열 살 때부터 과학자가 되겠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날 때 그림도 꽤 잘 그리고, 학교 지원 시스템도 좋고 하니까 한동안 미술에 빠졌다. 미술 선생님이 “독일 미술계를 바꿀 수도 있겠다”고 칭찬도 해서 나혼자 괜히 신이 나 어머니한테 미대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혼줄이 난 후에 결국 공대를 갔다.

지금은 어머니한테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면 예술가로서는 살아남기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정말 최고 1%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데 쫓기면서 예술을 하면 좋은 게 나오기 어렵다. 반면에 공학이나 과학은 50% 정도 안에 들면 먹고 살 수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미술이랑 정치에 관심을 갖다가 수학을 잠시 놓쳤다. 성적이 안 좋았다. 다시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데 내 실력으로 물리학 전공은 할 수 있겠지만 인류에 도움될 일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영향을 준 책이 두 권 있다. 하나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학교에서 방송으로 보고 다들 천체물리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또 하나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셰, 바흐’였다. 뇌과학과 음악을 융합한 아주 두꺼운 책이다. 우연히 접했는데 너무 재밌었다. 음악도 좋아하고 수학 논리도 좋아하는데 수학으로 인간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니까, 이런 쪽으로 공부해야겠다 싶었다. 그때 대학에 뇌과학이라는 학과는 따로 없었고 의대를 가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인지뇌과학이나 계산뇌과학 쪽이다 보니, 결국 심리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때 정치에 관심 가졌다는 것은 무슨 얘긴가?

1980~90년도 독일은 사회적인 긴장이 대단히 높았다. 냉전이 극으로 치닫았을 때였다. 중학교 때 우리는 다들 서른 살이 못 될 거라고 생각했다. 곧 3차 대전이 터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동서 긴장이 심했다. 그때 나는 핵무기 밑에서 사는 인생을 겪어봤다. 그래서 사실 지금 우리나라 사람이 북핵에 태연한 걸 보면 놀라울 때가 있다.

알다시피 독일인들은 계획성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문제를 회피하는 성향이 있다. 독일은 끝까지 분석한다. 당시 소련이 새로 핵탄두 미사일을 만들고, 미국은 거기에 대응해 스타워즈 계획(미사일방어시스템)을 발표하면서 긴장이 굉장히 고조됐다.

그 무렵 독일 언론에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전쟁대응계획 비밀문서를 폭로 보도했는데, 이걸 보면 어떤 시나리오 하에서라도 나토는 이기되 독일은 희생시키는 식이었다. 공산권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군이 탱크로 독일 깊숙이 들어오게 한 다음 핵폭탄을 사용한다는 구상인데, 독일 국민은 사실상 다 죽는다는 얘기였다. 데모가 일어나고 난리였다.

나중에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선언했을 때, 역사는 이런 거구나, 아무도 예측할 수 없구나 싶었다. 독일 통일은 독일이 잘해서라기보다, 역사에서 ‘골든 타임’의 창문이 잠깐 열렸을 때, 소련이 무너지면서 기회가 허락된 것이었다.


-석박사를 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는 ‘노벨상 사관학교’로 불린다. 어떤 곳인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 학자들 사이에도 과학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장이 되면 과학자로서 어떤 자리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다. 연구소 시스템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00% 독립이 보장돼 있다. 예산 지원이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절반씩 부담한다. 정부는 돈만 주고 간섭할 수 없다. 인사 행정 모두 자율이다.

또 하나는 연구소장을 뽑을 때 오랜 시간을 두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뽑는다. 선임된 후에는 은퇴까지 일절 간섭 안 한다. 매년 고정 예산이 나오고, 강의 부담도 없고, 연구 과제 신청을 안 해도 된다. 논문을 안 써도 된다. 그냥 무조건 믿고 30년 가까이 두는 시스템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10명 중 9명은 나태해진다. 하지만 한 명은 노벨상을 받는다. 그게 누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기초과학 연구의 핵심을 독립성과 자유로 보는 거다. 일본의 이화학(RIKEN)연구소와 우리 기초과학연구원(IBS)이 그걸 본딴 거다. 우리는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나?

IBS는 이미 응용 쪽으로 많이 갔다. 국가가 어젠더를 정해주면서. 처음엔 독립성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돈을 주면서 간섭하고 있다.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비결은 세 가지다. 소장 중심으로 절대 권한과 절대 자유가 주어진다. 지원 시스템이 아주 좋다. 연구자는 귀찮은 잡무에서 해방된다. 행정서류 작업은 상근 직원들이 한다. 연구에 필요한 인프라가 잘돼 있다. 실험실 기계부터 전자랩까지 필요한 것 다 만들어 준다.

반면 우리나라는 하드웨어는 만들어줘도 운영 인프라를 안 만들어준다. 흔히 나라에서 뭘 한다고 하면 몇천억 투자해서 멋진 건물을 짓는다. 하지만 운영비는 말도 안되는 수준이다. 상근 직원도 부족하다. 완공식 하고 테이프커팅만 하면 끝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연구는 그때부터 시작이고, 눈에 안 보이는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데도. 그런 건 본인들에게 빛이 별로 안 나는 일이다 보니 관심 밖이다. 비싼 돈 주고 BMW를 사줬지만 기름값을 안 줘서 제대로 못 타는 꼴이다.

셋째, 학생들이 훌륭하다. 독일 대학 수준은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영국과 비슷했다. 하지만 타격을 크게 두 번 입었다. 2차대전 후 둘로 나뉘면서 베를린의 우수한 대학들의 상황이 안 좋아지고, 그곳에 있던 학자들도 흩어졌다. 그래도 그후에도 그나마 우열은 있었는데, 1968년 학생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대학 개혁이 이슈로 떠올랐다. 2차대전 때 나치 부역 교수들을 일소하라는 요구가 컸다. 결국 1972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나오면서 대학이 평준화됐다. 대학도 성적이 아니라 시험 후에 추첨으로 간다. 의대만 빼고.

그 결과 대학 수준이 하향평준화했다. 전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독일 대학은 거의 보기 어렵다. 대학은 교육기관일 뿐이고, 연구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학생은 다 막스플랑크연구소로 간다. 근래에는 다시 대학에 투자하고 평가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니 똑똑한 학생들은 막스플랑크로 갈 수밖에 없다. 막스플랑크는 별도의 전형 없이 소장이 직접 선발한다. 나만 해도 대학 들어가서 배우고 싶은 걸 안 가르쳐줘서 답답해 하던 차에, TV를 보니까 볼프 싱어(Wolf Singer) 당시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장이 뭔가를 설명하는데 바로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곧바로 편지를 썼다. “나는 이런이런 사람인데 뇌를 연구하고 싶다, 도와달라”고 했더니 답장이 왔다. 한번 놀러 오라고. 갔더니 “왜 왔냐”고 해서, “뇌를 연구하고 싶어 왔다”고 하니까, “왜?”라고 되물었다. “우주가 뇌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아서 알아보고 싶다”고 하니까, 소장이 킥킥 웃더니 “알았다”면서 그날로 책상을 줬다.

싱어 소장은 지금 교황청의 자문 과학자 중 한 명으로 활동 중이다.

-대학 들어가서 뇌과학을 처음 알게 된 거네?

고등학교 때 뇌나 인지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다. 의대는 가기 싫었고, 심리학과 컴퓨터 쪽인 것 같아서 입학했는데 둘 다 내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심리학은 너무 인문학적인 걸 가르치고, 컴퓨터는 너무 기술적인 것만 가르쳤다. 나중에 막스플랑크연구소 가보니 내가 생각했던 걸 이미 하고 있었다.

-MIT에서 박사후 과정 마치고는 계속 미국에 있었나?

박사후 과정 마치고 일본에 갔다. 이화학(RIKEN) 연구소라고 일본에서 노벨상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사실 그때 한국에 갈 생각이 있었다. 제의도 있었고. 하지만 외국에 오래 살았던 터라 한국에 바로 갈 엄두가 안 났다. 한국과 가장 비슷하면서도 발전된 곳이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라이징 선(Rising Sun)’이라고 해서 일본이 아주 잘 나갈 때였다. 록펠러센터 빌딩도 사들이고. 미국은 망해가고 있었고, 일본은 지금 중국 같았다. 뇌과학에도 어마어마하게 투자했다. 국제 휴먼프론티어스를 만들어서 전 세계 똑똑한 사람들 다 데려 갔다. 나도 그때 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세계화가 잘된 분야 사람이 프로축구 선수와 과학자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언어가 영어와 수학이어서 어딜 가도 통한다. 국제적으로 두세 나라 옮겨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그럴 필요도 있고. 그때 일본에 가서 1년 있다가, 연구소 분위기가 도저히 맞지 않아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미국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10년 간 했다. 경험했던 세 나라를 비교하면?

국제적인 명성은 MIT가 높지만 막스플랑크가 더 알차다고 생각한다. 정작 MIT를 가봐도 교수진은 대부분 유대계 아니면 유럽인이다. 박사후 연구원도 대부분이 인도, 대학생은 아시아계 이런 식이다. 일본 리켄 연구소는 100년 전 막스플랑크 시스템을 모방했는데, 너무 과하게 모방을 했다. 과학자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와 시간을 주는 감이 있다. 막스플랑크는 자유와 약간의 기율을 함께 부여하는데, 리켄은 게을러지게 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 성과가 많이 안 나왔다. 또 내가 그때만 해도 젊을 때였다. 절대 타협을 안 했다. 지금은 성격이 아주 좋아진 거다.(웃음)

-과거에 비해 성격이 순해졌다고 했는데, 패션은 여전히 튄다. 이유가 있나?

두 가지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나는 복장과 그 사람의 내용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편한 걸 좋아하고 남 신경을 안 쓴다. 두 번째는 내 나름의 메시지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귀국해서 보니까, 콘텐츠와 포장을 혼돈하는 분들이 많이 보였다. 아주 멀쩡하게 옷을 입고 점잖게 말을 하는데, 들어보면 어린애 같은 수준의 발언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가령 “북핵 아무 문제 없다”거나 “독재도 필요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더라. 이건 진보 보수를 떠나서 어린애 같은 말이다.


나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해야 하고, 사실과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어붙여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게 아닌 분들이 많더라.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사실이나 논리와는 동떨어진 말을 그럴싸하게 한다. 멀쩡하게 차려 입었지만 어린아이 수준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거꾸로 어린애처럼 옷을 입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요컨데, 내 외모가 아닌 콘텐츠를 보라는 ‘미니 어젠더’가 숨어있다.

-그 메시지를 알아주는 것 같나?

아니. 악플만 붙더라.(웃음)

-평소 책읽기나 글쓰기에 대한 관심도 남다른데.

독일에서 자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독일이 워낙 책 위주 문화다. 어릴 때부터 내 고향이 아닌 낯선 세상에서 살았고, 내 성격도 그다지 외향적인 편이 아니다 보니, 항상 혼자서 꼼지락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독일에서 사춘기를 지내는 동안, 어느 한순간부터 세상이 참 후지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도 다르고, 대부분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보이는 게 부조리했다.

우주인을 달나라에 보내는 마당에, 국경선을 조금만 넘어가면 굶어죽는 사람이 천지라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고, 결국 책으로만 해소가 됐던 거다. 중학교 때부터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소설, 과학책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루 일과가 아침에 학교 갔다가 오후 일찍 끝나면 서점에 가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점 주인과도 아주 친했다. 내 책 ‘빅 퀘스천’ 같은 데서 쓴 고전 내용이 대부분 그때 읽은 거다.

-인용되는 고전이 상당히 다양하다.

독일은 김나지움 시스템이어서 고전을 많이 읽혔다. 고교 시절 주임 선생 한 분은 프랑크푸르트대 철학박사였는데 아도르노 밑에서 공부했다. 중고 시절에 비트겐슈타인을 읽히고 플라톤도 그리스어로 가르쳤다. 희랍어, 라틴어도 조금씩 배웠다. 김나지움은 19세기 시스템인데 아직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안 좋은 것도 있다. 지금은 글로벌 기준에 맞춰서 없애려고 하지만 나는 혜택을 많이 봤다. 그 덕에 내가 지금 서울대 배철현 교수 같은 분들과 고전 중심 교육과정인 ‘건명원(建明苑)’도 시작할 수 있게 된 거다.

-지금 굳이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10년 전부터 방송되고 있는 막장 드라마가 있다고 치자. 이미 수백 편이 방영됐다. 그런데 누가 102편부터 보기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드라마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회분은 이해할 거다. 하지만 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왜 싸우는지, 그 전편의 이야기들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만 알아서는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 왜냐면 모든 과거가 누적되고 통합되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세계 문명사라는 것은 3000년, 1만년 전부터 계속 누적돼 내려온 것이다. 철학도 과학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걸 주도적으로 시작한 나라가 아니다. 어찌 보면, 딴 나라는 3000년 전부터 해온 것을 우리는 70년 전, 광복 후부터 중간에 끼어들어간 셈이다. 드라마를 중간부터 보기 시작하다 보니 왜곡이나 오해가 적지 않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지금만 알아서는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거다. 예측을 못하면 새로운 것도 할 수 없다. 해놓은 것을 좇아갈 수는 있어도 새 길을 못 연다. 철학만 해도 국내 학자들은 현대철학도 잘 알고 능력도 대단한데, 다음의 큰 질문이 뭔지 알아내는 것은 힘들어 한다.

우리 정부가 말하는 창조도 핵심은 질문이다. 안 가본 길을 간다는 것은 무작위가 아니라, 그전에 있었던 것과 점으로 연결이 돼야 한다. 서구는 3000년이라는 점을 계속 연결시킨 결과, 어디로 가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가 있다. 주식 등락 그래프만 봐도 현재의 한 점만 보면 오름세인지 내림세인지 모른다. 앞의 점들을 연결시켜 봐야 알 수 있다. 그게 우리는 잘 안돼 있다.

내가 고전을 배울 때는 왜 중요한지도 모르고 배웠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를 거쳐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넓은 폭으로 이해해야 한다.

-독일의 책읽기 문화를 좀 더 설명해 달라.

독일도 다양해서 싸잡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내가 아는 서독을 중심으로 개괄하자면, 북클럽이 도시마다 많다. 학생들을 위한 북클럽이 있어서 주말마다 가면 유명 작가가 와서 책을 읽어주곤 한다. 독일의 북클럽 개념은 작가와의 문답이나 낭송회 중심이다. 어떻게 그런 책을 쓰게 됐나, 그런 궁금증이 해소된다.

-평소 책은 어떻게 얼마나 읽나?

어렸을 때는 마구잡이로 다 읽었다. 고전이나 소설도. 이제는 나이가 들고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는 안 된다. 고전은 대부분 이미 가지고 있어서 틈틈이 다시 읽고, 새로 읽는 책들은 거의가 전문서다. 요즘 가장 많이 읽는 게 당연히 과학책이고 그 다음은 역사책이다. 개인적으로 고대사에 관심이 많다. 메소포타미아나 바벨로니아, 앗시리아, 그리스, 후기 로마 비잔틴 문화 도서들. 대부분 영어권 책이라서 아마존에서 주문을 많이 한다. 아마존이 알고리듬으로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을 추천해서 읽기도 한다.

-관심이 인공지능 같은 미래와 동시에 인류 문명의 시원 두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맞다. ‘빅 퀘스천’을 쓰면서 느꼈는데 양쪽에 관심이 다 가있다. 가장 미래적인 첨단의 기술과 과학, 일어날 것들과, 이런 것들을 만들어낸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 중간의 것들은 연결시키면 된다. 그래서 요즘 내 관심사 중 하나가 빅 히스토리다. 빌 게이츠도 후원하는 통합 역사관이다. 옛날에 역사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역사로 나눠서 봤는데, 사실 세상은 그렇게 나눠진 적이 없다. 우주에서 시작해서 계속 연결된 거니까. 하나의 연결된 빅 히스토리로 보는 거다.

-책읽기뿐만 아니라 글쓰기도 활발한데, 짧은 한국 생활에서 오는 불편함은 없나?

아주 불편하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읽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만. 나도 독일에서 말도 안되는 소설도 써서 출판사에 보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다. 독일에서 어릴 때는 학교신문에 글을 쓰고 미국에서도 방송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한글을 쓰는데, 내가 읽어봐도 ‘초딩’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때 떠났으니까 그럴 밖에. 너무 슬펐다. 내 생각을 내가 사랑하는 한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처음에는 이메일까지 영어로 써야 했다.

우연히 조선일보에 뇌과학 칼럼을 쓰게 됐다. 처음엔 고사했는데 계속 권해서, 어차피 잘못돼도 망하는 것은 언론사일테니까,(웃음) 한글 연습 삼아 시작했다. 그 뒤로 많이 늘었다. 처음엔 1000자 쓰는 데 2~3주 걸렸는데 지금은 몇 시간이면 된다.

-글쓰기의 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동안 칼럼을 통해 뇌과학의 주요 키워드를 우리 사회에 많이 던졌다고 생각한다. ‘브레인 리딩’ ‘인공지능’ 같은 것들이다. 다른 과학과 달리 뇌과학이나 진화심리학은 지금 당장 우리 일상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상당 부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이 있다. 대부분 우리 상식을 뒤집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이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았다. 가령 많은 분들이 북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뇌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어떤 큰 일이 닥쳐 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쉽게 찾는 방법이 그걸 외면하고 자기가 풀 수 있는 다른 작은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남편한테 늘상 맞는 아내가 청소에 집착해서 집을 깨끗히 하는 것과 같다.

-가끔 국가나 사회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선을 넘는다는 느낌도 준다.

그런 얘기 많이 듣는다. 하지만, 어차피 내 연구가 국민 세금으로 하는 것이고,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뇌과학이라면 그 연구 결과와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도 지적해주는 게 의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치 칼럼이 돼서는 안되겠지만.

-글 읽기/쓰기와 뇌의 상관관계는 뇌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나?

내 전문이 아니라서 조심스럽긴 한데, 이 세상에는 정보가 너무 많다. 이걸 있는 그대로 마구잡이로 뇌에 저장할 수는 없다. 기억하고 정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게 돼 있다. 선택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뇌과학적으로 봤을 때 저장이 가장 잘 되는 방법은, 동일한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본 것을 만져도 보고 생각도 해보고, 써보고, 다시 읽어보고 하면 그만큼 저장이 잘 된다. 밖에서 보는 행동의 차원에서는 똑같은 정보지만 뇌 안에서는 눈으로 본 정보와 글로 쓴 정보가 다르게 처리된다. 정보 저장이 입체적으로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는 가능하면 펜을 들고 여백에 메모를 하는 게 좋다. 특히 논픽션일 경우 그렇다. 소설은 내용보다 느낌이니까 그냥 읽으면 되지만, 정치 역사 과학책은 읽고 생각해야 한다. 책에 담긴 것은 남의 생각이고, 읽기만 하면 그 생각에 세뇌당하는 꼴이지만, 내가 생각하고 뭔가 주석을 달면 그 지식은 내 것이 된다. 내가 다시 한번 소화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아이, 로봇'은 인간에 맞먹는 지성과 이성을 지닌 로봇이 보급된 미래를 그렸다./'아이, 로봇' 스틸컷

-전자책은 불리하겠네?

장단점이 있다. 전자책의 최대 장점은 저장성이고 두번째는 연결성이다. 여기서 하던 것을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다. 가장 좋기로는 전자책에 직접 메모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마존 킨들이 이걸 왜 안 하는지 모르겠는데, 펜으로 줄도 긋고 메모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물론 지금 멀티 모드 관점에서 봤을 때 문제는 있겠지만. 솔직히 내 경우는 소설은 전자책으로 읽지만, 논픽션류는 여전히 아날로그로 읽는다. 쉽게 필기를 해야 하니까.

-요즘 과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 실감하나?

요즘 영화 ‘인터스텔라’에 관객이 천만 명 드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 방송이 국민을 좀 깔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학 프로그램에서 가끔 섭외가 들어오는데 주문이 우스운 수준이다. 최대한 쉽게, 최대한 예능오락같이 해달라고 한다. 아직도 “풍선에 방귀를 집어넣으면 뜰까요” 이런 걸 하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이제는 우리 국민도 우주의 진화라든가 인류의 기원 같은 데 대해 진지한 관심들이 있다. 그런데도 진지하게 만들면 망한다고 한다. 아니다, 당신들이 제대로 안 하니까 망하는 거지, 제대로 하면 된다. 문제는 그런 것 만드는 사람이 진지하게 제대로 잘 할 자신이 없으니까, 쉽고 편하게 오락 위주로 가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면 악순환이 된다. 관심 있는 시청자는 어차피 볼 것 없다고 외면하고, 남은 사람은 쉽고 오락적인 것만 보려 하고, 또 거기에 맞추고 하는 식이다.

-과학자로서 요즘 인문학 열풍은 어떻게 보나?

당연히 인문학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라는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 우리 인문학 열풍이 조선시대 같은 ‘공자왈 맹자왈’로 가는 것이다. 지금의 인문학 열풍이라는 게 그동안 지나친 실용주의와 이과 공부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으로 시작된 것 같다. 제대로 된 인문 교육을 받아야지, 이과식 문제 풀이만 하다 보면 새로운 것을 못한다는 말도 하는데,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는 이과는 진짜 이과가 아니다. 이과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거다. 진정한 이과는 절대로 그냥 문제를 던져주고 풀라고 안 한다. 진정한 이과라면 왜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모든 현대과학 문명이 그리스에서 시작됐다면 3000년 전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수식으로, 어떤 사람은 말로,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어떤 사람은 시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결국 핵심은 질문이고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빅 퀘스천’을 썼더니, 어떤 분은 왜 과학자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게 과학이라고 했다. 과학은 무슨 미분 방정식에 답을 달거나 하는 게 아니다. 지구의 모든 현상을, 가령 달이 뜨거나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수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표현할 수 있으면 그걸로 끝이다. 답은 기계가 해도 되고, 중국에 하청 줘도 되는 거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그래서 지금 인문학의 인기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과학 없는 인문학’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어디선가 교수보다 초등학교 교사 월급을 더 줘야 한다고도 했다.

그 말 했다가 많이 혼났다.(웃음) 분명히 덧붙이자면, 월급을 많이 받는 만큼 실력도 더 있어야 한다. 좀더 정확히 수정하자면, 초등 교사들이 대학 교수보다 실력도 더 있고 더 잘 가르쳤을 때 대접을 더 잘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인공 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는 꾸준히 제작돼 왔다. 왼쪽부터 영화 A.I., 바이센테니얼 맨, 엑스 마키나 포스터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다. 인간의 뇌는 발달 과정에서 기능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다. 대학 시절에는 교수가 잘못 가르쳐줘도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 어차피 교수가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도 찾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초등학교나 유치원 때 잘못 가르치면 고치기가 어렵다.

자꾸 북한 예를 들어서 미안한데, 70년 간 북한에서 나서 자란 사람은 자라면서 받은 이념 교육을 나중에 바꾸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뇌과학의 관점에서, 통일이 되더라도 상당한 부적응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어른들도 교육을 어느 정도 시킬 수는 있겠지만 상당히 어려울 걸로 본다. 아마 한 세대가 걸려야 할지도 모른다.

-상당히 결정론적인 입장인데, 미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나?

그건 정치적 결정이고. 냉정한 현실은 아무리 불편해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가야 한다면 최대한 그런 위험요소를 작게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통일 후 성인 교육에 대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뇌과학도 참 다양한데 간단히 설명해 달라. 그 중에서도 뭐가 전문인가?

워낙 범위가 넓어 사람에 따라 정의도 다를 수 있다.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첫째, 신경생물학에서는 뇌가 말 그대로 머리 안의 고기, 세포 덩어리다. 세포 구조를 가진 신경생물학적 대상을 기초과학의 개념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그걸 응용해서 망가진 뇌를 고치는 것이 뇌의과학이다. 이 쪽만 해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분야다. 다음은 인지뇌과학이다. 뇌는 특이하게도 그 존재성이 여러 수준에 걸쳐 있다. 가령 심장은 하나의 수준에서 존재할 뿐이다. 펌프운동을 할 뿐, 더이상 뭘 만들어내지 않는다.

반면, 뇌는 세포 덩어리이면서도 동시에 지능을 만들고, 사랑의 감정도 만들어낸다. 세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발생시킨다. 어떻게 세포가 지능을 만들어내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러니까 우리 둘도 대화를 할 수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뇌를 연구하는게 인지뇌과학이다.

세 번째는 계산뇌과학이다. 인지뇌과학적이고 신경생물학적인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연구하는 분야다. 궁극적인 목표는 뇌와 비슷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나. 두세 가지 이유가 있다.

나도 인지과학과 계산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공학자라면 이론이 맞는지 증명을 해야 한다. 만약 내가 다리를 짓는 사람이라면, 내 이론이 맞는지 증명하는 방법은 실제로 다리를 지어서 안 무너지면 된다. 수학자는 수식으로 증명하면 끝이지만, 뇌과학은 수학적으로 이론을 만들어도 맞는지 틀리는지 증명할 수가 없다.

결국 뇌에 대한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편한 방법이 만들어 보이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인공지능(AI)이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의 현실적인 필요성은 우리가 아는 뇌에 대한 모델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두 번째로 또하나 매력적인 이유가 있다. 인류는 역사상 많은 일을 했다. 철학 역사 정치 다방면에 걸쳐. 이게 다 뇌로 한 거다. 우주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이게 다 우리 머리 안에서 이해되는 것들이다. 신기한 것은 이런 걸 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껏 우리밖에 없다는 거다. 우주인을 본 적이 없으니.

1999년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로빈 윌리엄스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 로봇을 연기했다./'바이센테니얼 맨' 스틸컷

따라서 철학적으로 재미있는 문제가, ‘지능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인가, 아니면 많은 것들 중 하나인가’라는 것이다. 지능이라는 게 인간만의 고유한 것인지, 훨씬 더 보편적인 성능인지 여부다. 가장 좋은 증명 방법은 지능있는 외계인을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봤을 때, 인간이 아닌 지능, 즉 인공지능의 개발 여부가 관건이 된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이 에볼라 바이러스에 걸려 죽었다고 치자. 물체들은 그대로 있겠지만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이 없으면 MP3플레이어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바하의 선율이 흘러나와도 그건 음악이 아니라 공기의 압축일 뿐이다. 음악의 아름다움이나 의미란 것은 누군가 받아들여 인식하면서 머리 안에서 뭐가 벌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 봤을 때, 우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는 문제는 이것이다. 그걸 인간만이 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만 가능하다면 우주가 아주 외로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넓은 우주에서 얼마 안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람 많다고 불평하지만, 우주에 지구인들 다 흩어놓으면 한 사람 만나는데 수천만 광년(계산을 안 해봐서 모르긴 해도)은 걸릴 것이다.

내가 다른 지능, 즉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뇌과학 외에 요즘 진화생물학도 발언권이 커졌다. 둘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하다. 뇌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고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뇌에 대한 설명 역시 진화생물학의 영향을 많이 받게 돼있다.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을 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지나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진화에서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개구리의 행동은 100% 진화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인간은 몇만 년 전에 문명을 만들었다. 진화의 규칙에서 약간 빠져나온 것이다. 그 점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생명체다. 그리고 어머어마한 업적을 쌓았다. 따라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진화생물학의 토대를 깔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런 점에서 뇌 안에서 일어나는 상당 부분은 진화적 이유가 있겠지만 문화 자체가 뇌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한다.

-진화생물학은 문명 이전의 설명이고, 인간의 뇌에서 의식이 발생한 것과 더불어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는 뜻인가?

그렇다. ‘롱 히스토리’를 하는 분들 주장이 그것이다. 인간 존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뭘까. 처음엔 물리, 다음은 화학, 다음은 생물, 다음은 인지, 지금은 문명/문화라는 얘기다. 맞는 것 같다. 처음엔 입자들이 어떻게 해서 뭐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 화학적 반응에 의해 뭐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 생명체에 의해 뭐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 인지적으로 뇌에서 뭐가 일어나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뇌과학자이지만, 사회 모든 현상을 뇌과학으로 설명하려 들면 안된다.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몇 천 년에 걸쳐 만들어낸 문명을 무시하는 처사다. 뇌라는 것은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것도 많다. 사회적인 개념이 그렇다. 그런 현상들을 모두 뇌로만 설명하려는 것은, 마치 사회 현상을 100%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게 기반이긴 하지만 상위 현상까지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진화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 뇌과학도 그렇다. 현상은 샌드위치처럼 쌓이는 거다.

-요즘 국내에도 뇌과학이 유행이다. 거품이나 오해는 없나?

거품이라기보다 잘못된 통념이 있다. ‘좌뇌와 우뇌의 차이’라든가, ‘인간은 뇌의 10%밖에 안 쓴다’는 말들이다. 유럽 출장 가다가 비행기 안에서 영화 ‘루시’를 보다가 어이가 없었다. 여주인공이 뇌를 100% 다 활용하면서 시간을 늘려 쓸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인데, 말도 안되는 얘기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뇌과학의 대가’라고도 하는데, 물론 대가도 아니지만 그런 표현 자체가 적절치 않다. 뇌과학은 무슨 두목이 있고 한 게 아니다. 과학에서는 다 똑같다. 대가도 괴짜도 천재도 없다. 진짜냐 사이비냐 두 종류밖에 없다. 지금 뇌과학에는 사이비가 상당히 많다. 교보문고에 가 보면 뇌과학 섹션에 책이 엄청나게 많다. 절반 정도는 사이비다.

뇌과학을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이 2차 문헌만 보고 쓴 책들이 많다. 맞을 수도 있겠지만 믿을 수 없다. 뇌과학을 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다. 과학은 수학과 좀 다르다. 진실이 벽돌처럼 쌓이는 게 아니다. 나무처럼 자란다. 몸통이 있고 가지들이 여러 갈래 옆으로 뻗어나간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석은 아니다.

정석은 어디까지나 교과서다. 교과서는 아주 임팩트가 큰 결과를 낸,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학술지에 의해 공인된 이론들을 싣는다. 학술지 논문도 사기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곁가지 중의 하나가 굵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숱한 가지들 중에는 한때는 잘나가다가도 낙엽처럼 떨어지는 게 많다. 사이비라는 것은 아주 비주류거나 본인만 믿는 이론을 마치 교과서처럼 세일즈하는 책들이다. 일반인은 구별하기 어렵다. 나도 강연을 할 때는 교과서적인 의견과 내 의견을 구분해서 밝힌다.

-지금까지 뇌에 대해 알려진 것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말도 하는데?

그렇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논쟁거리다. 우리의 목표는 뇌를 이해하는 것인데,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다. 뇌의 100%를 이해해야 이해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자동차의 부속품 몇 만 개를 다 알아야 차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자동차에 다양한 기능과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핵심은 엔진으로 바퀴를 돌려 물체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도 다양한 걸 할 수 있지만 핵심은 자아를 만들고 지능을 만드는 것이다. 뇌의 핵심 원리를 이해하면 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절대적 기준에서 보자면 뇌과학을 100년 했는데 아는 게 ‘이것밖에 없다’고 하겠지만, 나는 좀 더 희망적으로 본다.

‘요 만큼’이라는 게 뇌의 원리는 이해할 만한 수준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 나는 좀 바쁜 사람이어서 200년 후에는 뇌를 이해한들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좀더 지름길을 가보고 싶다는 입장이다. 최대한 모든 걸 다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기본 원리만 이해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기계들과 인류저항군의 싸움을 그렸다./영화 '터미네이터3' 스틸컷

-그래서 인공두뇌를 연구한다는 것인데, 인공두뇌 개발 자체를 두고도 찬반론이 있다.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인공지능 분야는 강한 인공지능과 약한 인공지능 두 분야가 있다. 완벽히 다르다. 후자는 정보를 인간 수준으로 이해하는 기계를 뜻한다. 독립성은 없다. 강한 인공지능은 독립성도 있고 어쩌면 자의식도 있는 기계다. 둘은 분리해서 토론하는 게 좋다.

약한 인공지능의 경우 기술적으로는 전문가들 대부분이 가능할 거라고 본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10~30년 내 가능하다는 견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상당수가 경험할 것으로 예상한다.

-체스게임에서 인간을 누른 IBM 컴퓨터 ‘딥블루’ 같은 것 말인가?

그렇다. 약한 인공지능의 임팩트는 뭐냐. 사람이 필요없을 수 있다는 얘기다. 200년 전 산업혁명 때 나온 기계는 사람의 팔다리를 대체했다. 약한 인공지능은 우리 머리를 대체할 수 있다. 대부분의 화이트컬러 일들이 정보를 읽고 분석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이다. 기계가 그것까지 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은 뭘 할까. 많은 이들은 막연하게 걱정 말라고 한다. 200년 전에도 기계가 나오면 인간은 실업자로 전락한다고 공장 부수고 했지만 지금 봐라 잘 살지 않느냐고 한다. 일자리가 사라져도 더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내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나이브한 생각이다. 첫째, 과거 딱 한번 있었던 일을 가지고 미래에 그대로 적용해서 예측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두 번째, 좀더 논리적으로 보면 1차 산업혁명과 2차 기계혁명은 큰 차이가 있다. 1차 혁명 이후 나온 기계들은 수동적이다. 사람이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더 좋은 차는 사람이 설계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업그레이드 속도도 선형적이다. 사람이 계속 개입해야 하니까.

인간도 뇌의 한계 때문에 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선형으로 좋아질 수밖에 없다. 기하학적으로 똑똑해질 수는 없다. 노력을 엄청나게 하면 기계보다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형으로 좋아질 뿐이다. 200년 전 우리가 공교육을 시작하고 난리를 쳐서 지적인 수준을 끌어올렸다. 선형 수준으로 좋아졌다. 기계에 대한 우위를 지켰다. 그 격차만큼 인간은 기계 위에서 사무 관리직을 맡는 식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다.

문제는 인공지능 기계들은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학습이 가능하다. 인간과 같은 능력이 있는데, 학습 방식은 선형이 아니다. 기계는 죽지를 않는다. 또한 인간보다 빠르게, 모든 정보를 흡수할 수 있다. 그 결과 기하학적으로 학습 개선이 가능하다.

인간이 기계와의 격차를 지금은 어느 정도 벌려두고 있는데, 양자의 상승곡선이 교차점을 지나고 나면 기계는 기하학적으로 좋아지게 되는 반면 인간은 좇아갈 수 없게 된다. 그 포인트를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부른다. 그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 어느 시점부터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지적으로 기계를 못 좇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뭘 하고 먹고 살까. 큰 문제들이 생길 것이다. 그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지금 미국과 유럽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해법이 있다. 미국은 자유시장에 맡기는 방식이다.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과거 코닥이나 GE는 수조 원 매출에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요즘 인스타그램이나 오쿨루스 경우는 매출은 수조 원인데 30~50명이 일한다. 생산성은 높아지고 GDP는 계속 늘겠지만,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얘기다.

지난번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다 보니, 19세기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앞으로 닥칠 진짜 걱정은 자본과 노동 간의 불평등이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불균형이다. 이건 추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모델처럼 그냥 두게 되면 수퍼 하이퍼 불평등으로 가게 된다. 1%대 99%가 아니라 0.000001%대 나머지가 될 것이다.


유럽식 접근법은 사람에게 필요없는 일이라도 하게 하고 나라에서 돈을 대겠다는 것인데 이 모델은 국가 재정 부담이 너무 커진다. 결국 미국도 유럽도 해법이 적절치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요즘 우리나라가 이 문제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약간 희망적인 게, 우리나라 사람은 제일 잘하는 게 빨리 배우는 것이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제일 탁월했던 게 빠른 학습이었다. 우리가 문제를 제시하지는 않아도 있는 문제를 빨리 배우는 데 뛰어났다. 그걸로 먹고 산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은 200년 걸릴 것을 우리는 불과 30~40년에 해냈다. 따라잡는 동안 빨리 공부하는 걸 배웠다.

약한 인공지능이 도래할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잘 모른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스탠퍼드대에서 최근 ‘인공지능 100’이라고 해서, 앞으로 인공지능이 100년간 미칠 영향을 공부하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해를 해야 답도 찾을텐데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가르칠 것도 별로 없다. 따라서 배우는 자세가 상당히 중요하다. 유럽 친구들 보면 아직도 가르치려고 한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도 배움의 자세가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여전히 학습하는 모드이기 때문에 미래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잘 학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을 갖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정책 대응이 앞으로는 바뀌어야 한다는 얘긴데, 아직 뾰족한 생각들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교육만 봐도 우리는 여전히 학교에서 국영수를 가르친다. 바로 200년 전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시작한 교육이다. 왜 그랬나.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사람이 문맹이었다. 다 농부였다. 공장에 데려다 일을 시키려고 하니 글 읽고 계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국영수를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다 화이트컬러가 된 거다. 지금 우리도 교육을 그렇게 시작한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잘했다. 하지만 지금 인공지능 전문가로서 예측하자면, 앞으로는 기계가 인간보다 국영수를 더 잘 한다는 거다. 그것도 훨씬. 기계의 특징은 알고리듬을 알고 나면 제곱으로 훨씬 더 잘 한다.

불도저가 나오는 순간 사람이 아무리 삽질을 잘해도 기계보다 더 잘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아이에게 삽질을 가르쳐 줬다가는 큰일 난다. 그렇게 봤을 때, 지금 초등학생에게 국영수만 가르쳐줬다가 20~30년 후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기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걸 가르쳐줘야 한다. 그게 뭔지를 우선 찾아야 한다.

두 번째, 사회보장제도도 바꿔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일을 안 해도 되는 시대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노후 대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현재 사회보장제도는 대부분 사람이 일을 하고, 실업률은 5~10% 정도일 때를 가정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세금을 내고, 일하는 사람이 은퇴자보다 많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이런 기본 전제가 다 깨질 판이다.

-기계와의 경쟁 연장선 상에서 ‘트랜스휴먼(Trans-human)’ 담론이 나온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기계가 인간을 추월한다면 인간도 변해야 하지 않나 하는 걸로 이해한다. 레이몬드 커즈와일 같은 사람은 머리 속 자아를 업로드하고, 자신을 기계와도 연결시킨다는 말도 했는데,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걸로 문제를 풀 수 있을 걸로는 보지 않는다.


이 문제는 결국 강한 인공지능하고 관련이 되는데. 강한 인공지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과학자들 사이에 아직 합의점이 없다. 가능한지 여부조차도. 기계가 독립성과 자아를 가질 수 있을까. 상당히 많은 철학자들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내 느낌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50~100년 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만일 강한 인공지능까지 가능하다고 하면, 이 문제는 정책적인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 문제가 바로 스티븐 호킹이나 엘론 머스크가 걱정하는 것이다. 인류의 존엄성을 위협하게 된다. 그 순간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약한 인공지능만 해도 나는 인류가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긴 하지만, 풀수 있는 수준의 문제다. 잘 풀면 정말 멋지고 신나는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반면, 강한 인공지능은 우리가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면 더이상 우리가 푸는 게 아니라, 우리가 풀릴 문제의 대상이 돼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니라 기계가 그 문제를 풀겠지. 우리 운명은 기계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인류보다 지능이 훨씬 뛰어난 데다 독립성까지 있다면 그것과 인류의 관계는 뭐가 될까. 약한 인공지능 하에서는 여전히 인류가 주인이고 기계는 노예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도구이니까. 하지만 자의식이 있는 강한 인공지능은 절대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평등해질까? 아니면 기계들이 대장이 되고 인간이 노예가 될까. 인간은 필요없다고 없애버리지는 않을까. 그런 상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강한 인공지능이 현실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개념적으로 이미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휴머니즘에 흠집을 낸 것 아닌가?

휴머니즘의 핵심이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행복은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고 믿는 거다. 독일 헌법도 첫 문장이 ‘인간의 존엄은 절대적’이라는 거다.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스탈린이 생기고 나치가 생기는 거니까, 그냥 그렇게 믿으라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우리 인간들끼리는 서로 다 인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계에게는 아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기계는 왜 인간이 필요한지 물을지도 모른다.’빅 퀘스천’의 한 챕터도 ‘인간이 왜 도대체 있어야 하느냐’이다.

그 질문을 하기 싫지만, 장차 기계가 그 질문을 할 거라면, 우리가 미리 좋은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막연히 기다리다가 기계들한테 당하는 것보다는. 왜냐. 내가 기계라고 가정해 보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인간이 없는 지구가 더 좋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동안 인간이 에너지 다 쓰고 환경 오염 다 시켜놓지 않았나. 공리주의적으로 보더라도 수천년 동안 전쟁하고 강간, 고문하고 온갖 불행을 만들지 않았나. 기계가 봤을 때 인간 없는 지구가 더 좋겠다는 가설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인간 있는 지구가 더 낫다는 걸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요즘 많이 생각한다. 그 변론 중 하나는 인간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류가 이제 진정한 계몽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책에 써놓은 것 하고 일상 행동이 너무 차이가 크면 기계들이 볼 때 언행 불일치를 문제삼을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다면, 그 역시 양면에서 협공받고 있다. 인공지능과 더불어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고등생물도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진화생물학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 법원은 동물원의 오랑오탄이 자기 의사에 반해 갇혀있어서는 안된다며 풀어주라고 판결했다.

우리가 예전에 동물 실험을 할 때 원숭이도 실험했다. 얘들은 의식이나 자아라는 게 없다고 봤다. 그게 있다면 실험하고 죽일 수 없다. 물론 얘들이 세상을 인식은 하겠지만 인간처럼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아픔을 느끼는 일은 없을 거라고 봤다.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많은 뇌과학자들도 생각이 바뀌었다. 적어도 영장류는 그게 있는 것 같다고 본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예전에 고양이로 실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매일 아침 데려가서 실험하는데, 아침에 가서 밥도 갖다줬다. 친구가 하나씩 데려가서 안 돌아오는데도 밥을 주러 가면 나를 반겼다. 그런데 원숭이 실험을 할 때는 달랐다. 한마리씩 데려가서 안 오니까, 나중에 내가 가면 바나나를 던지고 화를 냈다. 섬뜩했다. 얘들은 정신이 있구나 싶었다. 내가 온 걸 기억하고, 한마리씩 데려가서 안 돌아오는 것과 추론해서 내가 나쁜 놈으로 해석하고, 친구한테 일어난 일이 자신한테도 일어날 거라는 걸 상상한 거다. 그건 인간과 똑같은 거다.

사실 인간도 서로 간에 정신이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내가 정신이 있다는 것은 나 자신만 알 수 있다. 상대는 모른다. 머리 속에 들어가볼 수 없으니. 우리는 서로 믿어준다. 외양으로, 행동으로 미루어 믿어준다. 인종주의자는 같은 인간도 달리 보지만. 인간은 서로 간에 같은 정신이 있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 안의 원숭이가 원숭이가 아니라 어린 아이이고 같은 행동을 했다면 풀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원숭이 실험을 할 수 없었다.

영장류를 보면 의식은 사람만 가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의식에 어떤 단계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뇌과학자들은 불교철학으로 간다. 모든 생명체에 의식이 있다는 식으로. 하지만 증명을 할 수가 없다.

-휴머니즘 자체가 상당히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 같다.

휴머니즘이라는 게 인류 역사에서 우리를 시공간, 도덕의 중심으로 두고 본 거다. 하지만 점차 바뀌었다. 우주에 우리만 있거나 우리가 중심에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도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는 과정이 계몽의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공간이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다음 시간이었다. 우주가 빅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깨달음이다. 그 다음, 도덕적으로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한 거다.

그래도 여전히 인간만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 정신이었다. 우리만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원숭이는 실험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휴머니즘의 마지막 남은 근거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과학적으로 봤을 때는 조만간 무너지지 않을까.

낮은 수준의 의식이 있을 수도 있지만, 더 높은 의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인공지능을 통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500년 휴머니즘에서 마지막 기반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될 거다. 사실이 아닌 것을 고집할 수는 없지 않나. 포기할 건 포기하는 게 낫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난 뒤에도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우리가 유일한 의식으로 존재해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게 좋다. 다양한 의식이 있으면 더 풍요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 수도 있다.

-‘빅 퀘스천’에서 큰 질문을 많이 제기했다.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하나?’라고 묻고서는, “삶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문제”라고 썼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것인가?

그것은 내가 권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 질문을 던진 이유는, 모든 인문학 강연이 다 삶은 이거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의미라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

과연 의미란 좋은 걸까. 청소년 시절에는 ‘삶에 의미가 없어, 자살하고 싶어’라고들 한다. 이때는 의미가 없으면 나쁘다는 생각을 당연시한다. 의미가 없는 것도 나쁘고 나쁜 의미를 추구하는 것도 나쁘니까, 좋은 의미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 질문은 의미라는 게 진짜 그만큼 좋은 걸까. 의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것의 의미가 뭐냐’라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다.가령, 망치의 의미는 기능을 뜻한다. 기능이 정해져 있다면 좋은 망치와 나쁜 망치를 구별할 수 있다. 못을 잘 박는 망치가 좋은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좋은 삶은 뭐냐라는 것은 삶에 어떤 기능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종교적 해석을 배제하고 과학으로만 보자면, 현재로서는 진화론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유전적 다양성과 나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생명의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는 내 유전자의 보존과 확산이 인생의 의미일 것이다.

특히 젊었을 때는 그런 의미가 뚜렷하다. 이 때는 자연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 계속 성공을 부추긴다. 네 유전자를 많이 뿌리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런가 하면 나이를 먹고 나면 자연은 우리에게 무관심해진다. 이제는 진화적 기능 면에서 쓸모가 없고 끝이 났으니까. 원시 시대에는 서른다섯이면 다 끝났다. 일부러 죽이는 게 아니라 자연이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게 노화다.

노화는 몸을 많이 사용해서 늙는 게 아니다. 많이들 오해하는데 자동차가 오래 쓰면 망가지는 것처럼 우리 몸도 오래 썼으니까 망가져서 늙는 게 아니다. 생명체의 핵심은 재생(Regeneration)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또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인간도 노화하면서 세포가 계속 생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쪽으로 진화만 했다면.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이미 다 써먹은 사람이 계속 재생하도록 진화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연이 그때부터는 우리를 그냥 둔 것이다.

요컨데, 삶의 의미가 젊었을 때는 뚜렷히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면,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의미니까. 하지만 우리가 나이를 먹은 후에는 달라진다. 자연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니까 주름도 생기고 뇌가 망가지는데 동시에, 우리는 ‘애니씽 고즈(Anything Goes)’가 된다. 우리 맘대로 해도 된다. 마치 부모님이 나간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격이다. 부모님 밑에 살 때는 별 수 없이 말을 들어야 했지만 노후에는 해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결국 삶의 (생물학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리 나쁜 게 아니다.

-노화와 더불어 오히려 자연의 구속에서 해방이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우리가 과거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보듯, 밖으로 나갔다가 너무 밝아서 다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죄인들도 감옥에 너무 오래 있으면 더 편하게 생각한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처음엔 외롭고 불편하게 느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좋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뇌 연구자로서, 우리 두뇌에 좋은 습관 몇 가지를 조언한다면?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 뇌도 몸의 일부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몸에 좋은 게 뇌에도 좋다. 뻔하지만, 다양한 운동, 신선한 공기, 멀티비타민, 오메가 3, 충분한 수면, 건강한 음식과 가급적 소식 같은 것들이다.

그 다음, 뇌에 인지적으로 좋은 게 있다. 뇌는 예측한 정보와 현실을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으면 무시하거나 추가 정보처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복된 생활이나 뻔한 생각들보다는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좋다. 정보를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적(active)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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