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通]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 정은하 명창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정은하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회장은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우리 민요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에 평생을 바쳐왔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시골소녀는 노래 잘하는 친구가 몹시 부러웠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놓고 몰래 연습하다가 아버지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경을 치기 일쑤였다. 어른이 되어서야 아녀자의 바깥출입을 경계했던 선친의 속마음을 이해하게 됐지만….

매일 집을 떠나 도망가는 꿈만 꿨던 소녀는 결국 열여덟 되던 해에 그토록 원하던 소리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소녀도 환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중년이 됐다. 그러나 잊혀가던 우리 민요는 그의 입과 귀 덕분에 오롯이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정은하(57) 명창이 ‘인생을 민요에 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명창 이창배`안비취 선생과의 인연

“제 피 속에 소리꾼의 DNA가 있었나 봅니다. 사춘기 때는 스스로도 노래를 참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요.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평생 노래 부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신 적이 없지만 목청 좋다는 말씀은 많이 들으셨거든요. ‘삼국지’나 ‘옥루몽’ 같은 소설을 창 하듯 읽으시는 소리를 들으려고 동네 사람들이 저희 집 사랑방에 새벽까지 모여 있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빠들도 노래 잘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정은하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회장은 완고했던 선친의 뜻에 따라 제대로 된 소리 공부를 일찍부터 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거나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상스럽다는 이유로 늘 치마만 입고, 고추장`마늘`양파도 먹지 못한 채 자랐다. 셋째 오빠가 군에 가면서 사준 전축으로 김옥심(1925~1980) 선생의 ‘오봉산 타령’을 듣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기회는 1976년에 찾아왔다. 서울에 있던 큰오빠를 졸라서 찾아간 한 방송국의 ‘민요 백일장’이 계기였다. 2007년 아리랑 20곡을 담아 그가 내놓은 ‘정은하, 영남아리랑의 재발견’이란 앨범에서 최종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정 회장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민요 백일장 심사가 끝난 후 키가 훤칠하게 커 보이는 가시내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민요를 꼭 공부해야겠심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참 대단한 열의를 가진 적극적인 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많은 것을 물어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경`서도 창 사범으로 가장 권위 있는 이창배 선생님을 소개해줬다. 정은하는 그 길로 이 선생님을 찾아갔고 제자가 되었다. 정은하는 몸이 불편한 이 선생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공부했고, 결국 이 선생님이 운명하실 때까지 늘 선생님 곁에 있으면서 민요를 공부한 최후의 제자가 됐다.” 이창배(1916~1983) 선생은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명창이다.

정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 대회에서 입상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려서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정작 경연에는 참가도 못했다.

“제가 어렸을 때 묻고 따지기를 좋아해 부모님은 저를 ‘알분단지’라고 부르셨어요. 그날도 제 성격을 아는 큰오빠가 대회 관계자들에게 사정사정해서 모든 참가자들이 다 노래를 부른 뒤에야 겨우 노래 부르는 게 허락됐어요. 다행히 최 교수님이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이 선생님을 사사하게 됐고, 타계하신 뒤에는 안비취(1926~1997`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영남민요 전승에 온 힘

아직 미혼인 그는 두 명창 아래에서 공부하는 동안 뜨개질로 돈을 벌어가며 소리를 배웠다. 우리 가락을 익히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지만 하루 4시간만 잠자며 연습하고, 또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일은 고행이었다. 그래서 그는 요즘도 손으로 만든 옷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웃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1985년 무렵이었다. 두 스승이 한결같이 ‘경상도 태생이니 경상도 민요를 연구하는 게 맞다’고 권유한 덕분이었다.

“민요가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지방마다 특색이 강합니다. 제가 이수한 경기민요는 서양 성악의 소프라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영남민요는 그런 세련된 맛은 부족하죠. 투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살랑살랑 불러야 하는 경기민요를 하니 서울 출신이신 선생님들 듣기에 좀 맞지 않다 싶으셨겠죠? 그 당시나 지금이나 영남민요 해서는 밥 먹고 살기조차 힘들지만 영남민요를 재현하고 전수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겠다 싶어 대구로 오게 됐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대학교수들과 함께 영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찾아내 전수받고 기록으로 남긴 전승민요는 수십 곡에 이른다. 예천 통명농요(중요무형문화재 84호), 예천 공처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안동 저전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2호), 구미 발갱이들소리(경북도 무형문화재 27호), 달성 하빈들소리(대구시 무형문화재 16호) 등등이다.

“민요는 작사`작곡자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어지고 다듬어지고 구전되어왔습니다. 하지만 개화기 이래 급격한 문화`생활 방식의 변화로 많은 노래들이 사라지거나 변질됐죠. 그래서 민요의 수집`조사는 그 마을에서 가장 좋은 전승자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가 틈틈이 시골을 찾으면 경로당부터 들르는 까닭이지요. 제가 알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는 어르신들을 만나면 요즘도 보물을 찾은 듯 기쁩니다.”

하지만 고생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였다. 작업을 모두 사비를 털어 해야 했기에 재정적 어려움이 컸다. 애써 어르신들을 설득해서 소리를 들어도 채록 가치가 없는 것들도 꽤 많았다. 아직도 운전면허를 따지 않아서 버스, 택시로 시골을 누벼야 하는 것은 남모를 '고민'이다.

“시골에서 선소리꾼 찾기가 갈수록 힘듭니다. 어렵게 그런 분을 찾아도 소리를 안 하시려고 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럴 때에는 술도 사 드리고 장구도 치면서 분위기를 만들곤 합니다. 가사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에게서 들은 소리를 녹음하고 이를 악보로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가사를 굳이 표준어로 적어오셔서 헛웃음을 터트린 적도 있고요. 하하하. 구미 발갱이들소리는 거머리가 다리에 붙은 것도 모른 채 농민들과 모 심어가면서 배웠고, 베 짜는 노래는 베틀을 사 베를 짜면서 배웠습니다.”

◆아리랑에 더 많은 관심을…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고통받는 민중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돼 왔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 김산(1905~1938)은 자신의 전기 소설 ‘아리랑’을 쓴 미국 작가 님 웨일스에게 우리 민족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후 7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 민족사의 고난을 상징했던 아리랑은 범정부 차원의 노력으로 지난해 12월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됐다. 잊힌 우리 민요를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쳐온 정 회장의 감회 역시 남달랐다.

정 회장은 2003년부터 매년 ‘대구 아리랑제’를 열고 있다. 올해가 벌써 11회다. 지난해부터는 대구아리랑 경창대회도 함께 개최하고 있다. 또 2007년부터는 영천에서 ‘영남아리랑축제’를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겸해 열고 있다. 그 자신도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계기로 지역의 지명`사투리를 곁들여 현대적으로 만든 ‘대구 아리랑’을 발표한 바 있다. ‘어데예! 아니라예! 핑계만 말고 좋으면 좋다고 눈만 껌뻑 하이소/ 팔공산 수태골 감도는 구름아 우리님도 내 못 잊어 그리 떠도느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라는 가사에 지역의 정서가 흠뻑 묻어난다.

“대구 동구 불로동 출신인 최계란 선생이 1936년 취입한 PS 판이 보존돼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영남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아리랑 종류가 전승되고 있어 틀림없이 대구아리랑도 있을 거라 믿고 있었거든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당시 회담장에서 영천아리랑이 흘러나오는 모습은 충격이었지요. 제 고향 영천에서는 명맥을 찾기도 힘든 노래가 일제강점기 때 중국으로 건너간 고향사람들에 의해 보전돼 왔다는 이야기에는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년 광복절에 열리는 대구아리랑축제는 특히 애국열사들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매년 주제 인물을 정하고, 그의 생애와 다양한 아리랑을 엮어 소리극으로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김구, 안중근에 이어 올해는 독립운동가 김산을 2009년에 이어 다시 조명했다.

“지난해 연말,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이를 더욱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 방안으로 아리랑축제는 물론이고 뮤지컬과 소리극 등 다양한 장르로 아리랑을 좀 더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생각이에요. 우리 가슴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아리랑이 널리 울려 퍼지게 하는 게 제 마지막 목표입니다. 하지만 지역의 아리랑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꾸준한 관심이 있어야겠지요.”

◇정은하 회장

=1956년 영천 화남면에서 7남매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976년부터 이창배`안비취 선생을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 이수자가 됐다. 2002년 제4회 상주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 명창 반열에 올랐다. 대구교대`영남대`대구예술대`경북예고 등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를 결성, 전승 민요 계승에 힘써왔다. 정 회장은 “국악 하는 사람이 일본 가면 돈 많이 번다는 유혹을 많이 받았지만 아직 일본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금싸라기 같은 우리 소리를 배우고 전하는 것만 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회고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매일영상뉴스]

ⓒ 매일신문 & www.imaeil.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