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롭폭격기

해군에 대한 육군의 질투로 태어나다 - 백식 중폭격기(百式重爆撃機 / 中島 キ49 呑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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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3.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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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체 이름의 유래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헬렌(Helen)이라는 코드 네임을 붙여준 이 쌍발기는 일본 육군이 운용한 대표적인 중폭격기로, 키번호(キ: 프로토타입 명칭)는 키-49(キ49)에 애칭은 돈류(呑龍)라고 불렸다. 일본군 장병들은 이 기체를 가리켜 백식 중폭(百式重爆 : 햐쿠시키 쥬바쿠)이라 불렀다. 이 폭격기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된 시기는 1940년으로, 육군에 제식 채용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41년이다. 원칙적으로 제식 채용 연도로 따지자면 1식 중​​폭격기라고 명명하는 것이 관례이겠으나, 1940년은 황기 2600년을 헤아리는 경사스러운 연도라 일본 열도가 전국적으로 축하 분위기였던 까닭에 이를 기리기 위해 100식 중폭으로 명명되었다. 별명인 돈류(삼킬 탄, 용 용)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용'이라는 의미의 진취적인 이름 같지만, 실제로는 에도 시대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키운 정토종(浄土宗)의 승려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제작 회사였던 나카지마 비행기(中島飛行機)의 공장이 자리 잡고 있던 군마현(群馬県) 오타(太田市)시에 '육아의 돈류(呑龍)'라고 했던 대광원(大光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PC 게임 <워썬더>의 일본 테크 트리에서 등장하는 100식 중폭격기

 

 

# 개발 사상
미츠비시(三菱重工業) 사에서 개발하여 먼저 사용된 97식 중폭격기(九七式重爆撃機)의 후계기에 해당하는 이 기체는 전투기의 호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고속 성능과 중무장을 겸비한 중폭격기로 설계되었다. 97식 중폭은 부대 편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일 전쟁에 투입되어 중국군은 물론 민간 거주 지역에까지 무차별 폭격을 가해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반대로 중국군 전투기의 반격에 의한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미국인 의용비행대 AVG가 요격 작전에 참가하자 그 피해는 날로 더 커져만 가고 있었는데, 후방 총좌의 사각지대인 수직 미익 뒤에 숨어서 사격을 가하거나 동체 하방에서 솟구치며 공격해오는 적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처럼 중국 전선에서 얻은 교훈에 더해, 해군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도양 폭격(渡洋爆撃)이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게 되자 육군 수뇌부 또한 자극을 받았다. 이 폭격기는 할힌골 분쟁 같은 대소련 전투에서 적의 비행장을 공격하는 항공 차단 작전에 이용하자는 구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같은 시기에 등장한 전투기에 비해 특별히 고속이라고 언급할 정도의 성능에 이르지는 못했고, 실전에서는 항상 아군 전투기의 호위를 필요로 했다.

 


오타 제작소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키-49의 목업


완성 직전인 키-49의 초호기

 

 

# 개발사
1938년(쇼와 13년)에 제국 육군 항공본부는 나카지마 비행기에 신형 중폭격기 키-49의 개발을 명령했다. 동시에 미츠비시 사에 대해서도 중폭격기 키-50(キ50)의 프로토타입 개발을 명했지만, 이 기체는 계획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육군이 주안점을 둔 요구사항은

 

1. 전투기의 호위를 필요로 하지 않기 위해 500 km/h를 넘는 최대 속도를 가져야 함.
2. 방어 무장을 강화함. 구체적으로는 20mm 기관포로 무장된 꼬리 총좌의 설치.
3. 항속 거리 3,000 km 이상.
4. 폭탄 탑재량은 1,000 kg .

 

으로, 모두 97식 중폭을 훨씬 웃도는 성능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카지마 사는 폭격기로서는 미증유의 속도인 시속 500 km 라는 가혹한 요구 사항을 달성하기 위해 코야마 야스시(小山悌) 기사를 설계 책임자로 임명하고 니시무라 세츠오(西村節朗), 기무라 히사토시(木村久寿), 이토가와 히데오(糸川英夫) 기사의 협력에 의해 다양한 설계와 고안을 가지고 임해, 1939년(쇼와 14년) 8월에 시제 1호기를 완성시켰다. 그 다음 달부터 심사가 시작되었지만, 엔진의 강화를 비롯한 다양한 개량을 더한 시제기 2대를 비롯하여 증가 프로토타입 7대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기체는 1941년(쇼와 16년) 3월에 백식 중폭격기 1형(百式重爆撃機 一型)으로서 제식 채용되었다.

 

 

100식 중폭 1형은 흐릿한 흑백 사진보다는 고이케 시게오 氏가 그린 일러스트가 나아서 그것으로 골라보았다.

 

 

# 기체 구조 / 무장
쌍발기이며, 왕복 엔진을 좌우 양 날개에 장비하고 있다. 날개 내부에 설치된 연료탱크는 자동방루식이고 기관총을 6정 갖추고 있다. 동체 상단에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다른 기총좌는 기수, 동체 좌우, 후방 동체 하부에 있었다. 방어력 뿐만 아니라 최대 속도도 I형에서 470 km/h이며, 같은 시기 해군의 1식 육상공격기(一式陸上攻撃機) 보다 뛰어났다. 폭탄 탑재량은 750 kg에서 1,000 kg으로 해군의 기체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사실 이 정도의 폭장량으로는 중폭격기라고 불리기엔 미흡한 수준이었으나 당시 일본 육군은 과다한 폭장량으로 기체에 부담을 주고 속도와 비행 성능을 낮추느니 적은 폭장량으로 여러 번 폭격을 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훗날, 이야말로 큰 착각이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개량형에 와서 장비된 하-109(ハ109) 엔진 

 

# 실전 운용
진지 폭격을 주목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중국 전선 및 남부 방면에서 활약했으며 급한 화물을 운반하기 위한 고속 수송기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기체는 성능 면에서 속도와 무장이 강화된 것을 제외하고는 97식 중폭과 별로 차이가 없고, 또 엔진인 하-41(ハ41)은 신뢰성이 부족했다. 일선에서 이런 평판이 나돌게 되자 이전부터 배치되어 사용하던 97식 중폭이 차라리 더 믿을만하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97식 중폭에 비해 성능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은 프로토타입 심사 단계에서 육군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미 성능적인 한계에 와 있던 97식 중폭에 비해 중무장인 점을 높이 사서 장래의 발전을 기대하며 "신속하게 성능 개량을 실시한다"라는 조건부를 달고 제식 채용되었다.

그런데 그 후 계속된 개량을 거치면서도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성능 향상이라곤 할 수 없었고, 새로 교체한 엔진인 하-109(ハ109)도 결코 신뢰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97식 중폭에 비해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는 못한 채 끝났다. 이것은 기체의 성능 이외에도 많은 기체가 대 소련전을 기대하고 만주와 중국 북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실전 참가의 기회가 적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원래 육군이 소련 전투에 적응해 개발한 기종이라는 점과, 엔진을 신뢰하기 어려웠던 100식 중폭은 비교적 장거리 침공과 해상 비행을 하는 경우가 많은 남태평양 전선에서 사용될 일이 드물었다. 따라서 생산수도 2,000대를 넘긴 97식 중폭과 비교하면 각 형식 모두 합쳐 813대(832대라는 설도 있음)로 그쳤다.

 

 

 

백식 중폭의 실전 비행

 

 

# 중무장에 의한 생존성의 한계
중무장하여 적 전투기의 공격을 물리치는 전술 사상은 폭격기의 방어 화력이 가진 효과를 과대평가한 오판으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다. 이것은 육군의 토류(屠龍) 같은 복좌 전투기에 딸린 후방 기관총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과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 폭격기의 방어 화력은 이 기체를 포함하여 모두 육안으로 조준하는 인력 조작식이어서 빠르고 민첩하게 비행하는 단좌 전투기에 대한 명중률은 극히 낮았다. 결국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전투기의 호위 없이 활동할 수 있는 폭격기는 실현이 불가능했고,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며 동력식 총좌까지 갖춰 일본의 전투기 파일럿들로부터 난공불락이라고까지 말해지던 B-29 조차 호위 전투기를 붙이지 않은 투입 초기에는 적지 않은 수가 피해를 입던 것이 현실이었다.

 

1943년(쇼와 18년) 6월 20일 포트 다윈을 향한 폭격 임무에서는 1식 전투기 하야부사(一式戦闘機 隼)의 호위가 붙었다고는 해도, 출격한 18대 중 16대가 46대의 스핏파이어(Spitfire) 들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었다. 이처럼 전투기와의 협동이 좋은 상황에서는 백식 중폭의 방어 화력과 방탄 장비의 효율성은 높이 평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귀환한 기체의 대부분이 대파되고 수리 불능 상태에 빠져 현지에서 폐기되었고 백식 중폭의 포트 다윈 공습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필리핀 지역에서 미군과 필사적인 공방을 펼치던 백식 중폭 부대는 글자 그대로 전멸되어버렸고, 마지막 남은 2대는 방어 무장을 전부 떼어내고 "기쿠스이대(菊水隊 : 인간어뢰 가이텐을 운용한 같은 이름의 부대가 있어서 혼동하기 쉽지만 이것은 엄연한 육군 소속이었다)"라는 특공부대를 편성해 각각 승무원 1명씩이 조종하여 특공기로 사라져 갔다.

 

백식 중폭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인 2형 갑

 

기쿠스이대 소속 지휘기로 사용된 키-49 2형 병은 전탐기(레이다)를 장비한 기체였다.

 

육군이 최후의 결전을 대비해 본토에 남겨둔 백식 중폭격기들은 대부분 하마마츠(浜松)에 주둔 중이던 교도 비행사단으로 돌려져 그곳에서 제47진무대(第四十七振武隊)라는 특공 부대로 새롭게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미 육군 항공대에는 이런 대형기를 몰 실력 있는 공중근무자가 얼마 남지 않아 미군 부대를 향해 실제로 자폭 공격을 걸어온 백식 중폭은 없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일까.  

전쟁 도중 일본군이 점령지에 남겨두고 본토로 돌아가거나 기지가 연합군에 점령되어 노획된 항공기들이 여럿 있었다. 종전 후 곧바로 인도차이나 지역에 다시 진주한 프랑스군은 3대의 비행 가능한 백식 중폭을 찾아내어 1949년까지도 이런저런 용도로 써먹었다. 인도네시아 독립군 역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백식을 찾아 무장 투쟁 당시 유용한 전력으로 잘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태국 같은 경우는 손에 넣은 1대의 백식 중폭에서 무장과 폭격 장비를 전부 제거하고 한동안 수송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46년이 지난 2001년 7월 27일, 필리핀 부근 해저에서 돈류 폭격기 1대가 발견됐다고 산케이(産經) 신문이 보도했다. 일본의 후지 TV가 패전 기념일인 8월 15일을 기념해 특집 다큐멘터리를 위한 자료 화면을 수중 촬영하다가 잠수부들이 우연히 찾아낸 이 기체는 필리핀 남부 네그로스섬 부근 해저 50m 바닥에 원형을 대부분 유지한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 파생형
1형 (一型 キ49-I)
첫번째 양산형으로 엔진은 하-41을 갖췄다. 1941년 8월부터 1942년(쇼와 17년) 8월까지 129대 생산.

 

2형 (二型 キ49-II)
엔진을 하-​​109로 환장한 성능 향상형이다. 프로펠러, 래디에이터, 기수의 형상도 개량되었다. 또한 무장의 차이에 따라 갑, 을, 병(무장을 제거한 초계기)이 있었다. 687대 생산.

 

3형 (三型 キ49-III)
하-107 또는 하-117 엔진으로 환장한 형태로, 주날개 및 꼬리 날개도 개수되었다. 테스트 기간 동안 최대 속도 590 km/h를 기록했지만, 프로토타입 및 증가 시제품 6대 생산으로 끝나버렸다.

 

키-58
2형의 폭격 장비를 폐지하고 무장을 강화한 편대 호위기로, 1941년까지 3대만 시험 제작됨.

 

키-80
무장을 강화한 지휘관기 및 고속 정찰기로 1941년에 2대 제작

 

 

D A T A

형식 / 명 칭

  쌍발 고속폭격기 / 中島 キ49 呑龍

전장 / 전폭 / 전고

  16.81 m / 20.42 m / 4.25 m

익 면 적

  69.05 m²

탑승인원 / 초도비행

  8명 / 1939년 8월 5일

공허중량 / 임무중량

  6,540 kg / 10,680 kg 

최대이륙중량

  11,090 kg

동   력

  나카지마 하-109 공냉식 성형 엔진 X 2기 (각 1,520마력)

최 대 속 도

  492 km/h

순 항 속 도 

  350 km/h

항 속 거 리 

  3,000 km

상 승 한 도 

  9,300 m

상 승 률 

  5,000 m까지 13분 39초

무   장 

  20 mm X 1문 / 7.92 mm X 5정 / 폭탄 1,000 kg

생 산 수

  813대

비   고

  1941년부터 일선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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