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속에 숨어있는 영어 단어 이야기’ 펴낸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

백승찬 기자

기발하고 활발한 ‘한국제 영어’ 만들기… “콩글리시는 미래의 잉글리시다”

한국의 스포츠 프로그램에서는 인터뷰를 마친 외국인 선수가 카메라를 보며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 갓 입국한 영국인이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본다면 굉장히 어색할 것이다. ‘파이팅’이란 말은 영어처럼 보이지만, 영국에서 사용되지 않는 ‘콩글리시’기 때문이다.

영어가 한국인의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됐다. 이제 한국은 ‘콩글리시’를 추방하고 ‘옥스퍼드 잉글리시’를 지향해야 할까. 정작 옥스퍼드대학의 조지은 교수(38·한국학 및 언어학)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신간 <한국어 속에 숨어있는 영어 단어 이야기>(박이정)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영어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한국 언중의 역동성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자와의 대화]‘한국어 속에 숨어있는 영어 단어 이야기’ 펴낸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

인류 역사에서 단어는 끊임없이 생성돼 왔지만, 인터넷 대중화 이후의 한국은 그야말로 ‘눈뜨면 새 단어’다. 영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신어에 영어가 포함되는 사례도 늘어났다. 과거엔 단어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콩글리시인 영어 신어를 무시했다. 하지만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조 교수는 “콩글리시 단어들이 펼쳐 보이는 삶은 바로 우리의 삶”이라며 “우리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위 한국제 영어 단어들인 콩글리시 단어들을 잘못되었다고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저자와의 대화]‘한국어 속에 숨어있는 영어 단어 이야기’ 펴낸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

한국은 정보통신 강국답게 이 분야 신어들이 많다. 스마트뱅킹, 스마트워치, 웹툰, 웹게임, 웹하드 등이 그 사례다. 그러나 영미권 언중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기는커녕 뜻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영미권 주류 언론에는 한국에선 보편화된 네티즌, 네티켓, SNS 등의 어휘조차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네티켓’은 2003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추가됐으나, 조 교수는 영국에 12년간 사는 동안 방송에서 이 단어가 등장하는 걸 한번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신어 사용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 특히 언어생활의 보수성과 관련돼 있다. 조 교수는 “영국에선 ‘언어는 소수의 엘리트층이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전했다. 실제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이 새 어휘를 만들어낼 생각을 하지 못할뿐더러, 미디어에서도 신어 사용을 꺼린다.

반면 한국의 신어는 익명의 대중에 의해 만들어진다. 누군가가 만들고 그 단어가 사회 현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지면 금세 인기를 끈다. ‘멘붕’ ‘썸타다’ 등의 말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져 만화, 노래, 드라마, 심지어 언론에서까지 사용된다. 조 교수는 “한국인들은 조금이라도 표현할 필요가 있으면 단어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한국에서는 콩글리시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퓨처 잉글리시’일지 모른다. 조 교수는 “언어는 누군가 ‘올바르게’ 조종할 수 없다. 언어를 두고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1937년 발간된 <모던조선외래어사전>에는 “요새 신문에는 영어가 많아서 도모지 알아볼 수가 없다”는 세간의 불평이 인용돼 있고, 1970년대부터는 잊을 만하면 ‘국어순화운동’의 깃발이 나부꼈다. 지금도 국립국어원은 외래어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말 ‘순화어’를 배포하지만, ‘파이팅’ 대신 ‘힘내자’, ‘하이브리드 카’ 대신 ‘복합동력차’, ‘아웃도어 룩’ 대신 ‘야외활동차림’을 쓰는 이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언어 생태계는 계획되거나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샐러리맨’이란 단어도 사실은 ‘일본산’이다. 샐러리맨은 영어 문법적으로는 어색하지만, 지금은 영국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 됐다. 조 교수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어 신어가 영미권에 수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특히 정보통신, 연예산업 관련 용어가 그렇다. 한국은 이런 산업 분야에서 앞서 있을뿐더러, 언중이 말을 다루는 감각이 기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선 일찌감치 익숙해진 ‘BB크림’이란 단어가 지난해부터 뉴욕타임스에도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 교수는 “한국의 언중은 새 단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으며 이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현상”이라면서 “보편적인 영어 조어법에 익숙해진다면 우리의 단어와 문화가 영어와 세계에 더 쉽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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