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PG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Pillars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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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5.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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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Josh Sawyer 

제작          Obsidian Entertainment 

출시          2015.3.26 

장르          Role-playing 

플랫폼        Windows, OS X, Linux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가 프로젝트 이터니티(Project Eternity)라는 이름으로 킥스타터에 성공했을 때, 대부분의 컨슈머들은 그 게임이 <발더스 게이트(Baldur's Gate)>의 세 번째 작품이며 정신적 후속작Spiritual successor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아트웍, 게임 엔진, 하다못해 UI와 게임 구조, 전투 시스템 모두가 발더스 게이트의 후속작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이 제작사를 전통적 계보의 적통으로 간주하는 소수의 게이머들은, 옵시디언이 그런 게임을 만들리가 없으며 게임의 외양은 단순히 발더스 게이트의 팬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오기 위한 전술일 것이라 낙관했다. <폴아웃 뉴 베가스(Fallout: New Vegas)>로 CRPG 게이머들의 절찬과 지지를 얻은 조시 소여가 감독으로 있는 이상, 그가 CRPG의 배신자에 불과한 발더스 게이트의 후속작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게이머들의 기대는 철저히 무너졌다. 이 게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더스 게이트였고, 단지 옵시디언의 패션과 향수와 액세서리를 치장했을 뿐이다. 


게임은 꾸준히 발더스 게이트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출시 후에는 높은 메타크리틱 점수를 받았고,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게임 매뉴얼 첫 페이지에 가장 먼저 쓰여 있는 말이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는 발더스 게이트나 아이스윈드 데일,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같은 90년대 후반에 제작된 2.5D게임들의 정신적 후속작입니다."이다. 발더스 게이트의 팬들은 만족스러움을 표시했고 트래디셔널 게이머들은 침묵했다. 발더스 게이트는 비난하면서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를 찬양하는 촌극도 찾아볼 수 있었다. 공통점은 어느 쪽 게임이든 제대로 플레이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은 철저히 상호작용이 알파요 오메가인 예술 분야다. 이 말은 게임을 플레이해보지도 않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슬라보이 지젝은 영화를 보지도 않고 평론하여 비난받았고, 피치포크 미디어는 음악을 듣지도 않고 비평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제 비평의 도구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비디오 게임도 이런 식의 희극을 연출할 운명에 놓였다. 단적으로 말해 게임은 플레이되어야 한다. 플레이되지 않은 게임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할 필요가 있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소여는 전통적 게이머들에게 그런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비주얼은 참으로 아름답다. 2D 렌더링 방식 중에서도 정말 많은 정성이 들어간 아트웍(그래픽이 아니다)을 보여준다. 저스틴 벨의 음악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하이파이적으로도 뛰어나서, 좋은 스피커를 보유한 게이머는 멋진 찰현을 즐길 수 있다. 메인 메뉴에서 바로 게임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테마를 듣는 시간을 가졌을 정도다. 발더스 게이트에서 영영 고쳐지지 않았던 멍청한 이동과 AI는 깔끔하게 고쳐져서 과거의 향수를 UI에 간직하는 정도로만 남았다. 전작(그렇다. 전작이다)을 플레이해 보았다면 아무런 무리 없이 게임에 적응하고 쉽게 진행할 수 있다. 단지 세계관이 달라졌고, D&D를 버렸으며, 전투가 보다 합리적으로 바뀌었고, 옵시디언 스타일의 팩션과 비선형적 내러티브가 도입되었다. 맨 마지막 사항을 빼면 바이오웨어가 다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근본적으로 바이오웨어가 전성기에 애용했던 인피니티 엔진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 엔진 밑에서는 의욕있는 감독이 뭘 해보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게이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름다운 렌더링 배경 안에서 대화할 수 있는 NPC와 대화를 하고, 전투를 하고, 상호작용이 가능한 오브젝트를 클릭하는 것 뿐이다. 이 엔진이 너무나 단순하다는 것은 소여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도입한 것이 PNP 스타일의 비주얼 토크다. 상호작용 요소에서 어떤 선택이 필요할 경우 따로 삽화를 늘어놓으면서 원하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것 위에 단순한 것 하나를 더 쌓았을 뿐이다. 10년도 전에 낡아서 이후로 아무도 쓰지 않은 엔진을 가져온 것은 그것이 추억팔이에 유리했기 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혹자는 옵시디언이 소자본 제작사로서 생존과 투쟁하고 있다는 식으로 변호한다. 사실이 그랬다. <스타워즈: 구공화국의 기사단2 시스 로드>에서는 이 게임의 전편을, <폴아웃: 뉴 베가스>에서는 <폴아웃 3>을, <알파 프로토콜>에서는 <매스 이펙트>에서 상당 부분을 채용하여 거기에 옵시디언의 양념을 쳐 왔다. 소자본 제작사로서 늘 인기 있었던 게임들의 재료를 활용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문제가 다르다. 킥스타터 모금액만 400만 달러에 달한다. 이 돈은 대부분 아티스트와 각본가들에게 나갔다. 소여와 아벨론은 게임을 근본적으로 새로 설계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폴아웃: 뉴 베가스>로 돌아가자. 소여가 만들어낸 모던 RPG의 명작 말이다. 어떤 컨슈머는 <폴아웃 3>과 뉴 베가스가 전혀 다른 게임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엘더 스크롤즈 3: 모로윈드>나 클래식 폴아웃의 영향으로, 시작과 동시에 마지막 보스에게 달려갈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도(라고 불리는 애매한 개념)를 가진 CRPG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좀 더 진지한 게이머들은 폴아웃 3은 훌륭한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가졌고 잡다한 중간 과정을 모두 제치고 엔딩으로 달려갈 수 있는 반면에, 뉴 베가스는 초반 스토리텔링을 강제적으로 선형적인 진행을 통해 스트립으로 유도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비선형적 내러티브narrative와 비선형적 플롯plot이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란 이야기의 기술을 말한다. 플롯은 이야기의 구조다. 스토리story라는 하나의 큰 세계 아래에서 볼 때, 플롯은 게임 안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절대 바뀔 수 없는 구조이다. 주지하다시피 저급한 영화 컨슈머들은 스포일러에 집착하는데, 이는 거시적으로 플롯에 노출당한 것이 자신이 지불한 돈과 시간에 손해를 끼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폴아웃 3은 좌우로 거미줄처럼 넓게 퍼진 서브퀘스트를 지녔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플롯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비선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러티브란 바로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을 의미한다. 즉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의 기술이 내러티브다. 어떤 영화의 스포일러를 접해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쪽을 더욱 중요하게 본다. 그리고 상호작용이 중요시되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비선형적 내러티브가 비선형적 플롯보다 훨씬 비중이 크다. 왜냐하면 플레이어가 스토리텔링의 주체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 내러티브와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완벽히 플롯을 파괴하고자 하는 게임은 그렉 코스티키안(Greg Costikyan)이 언급했듯[주1] <심시티(Sim City)>나 <개리 모드(Gary Mode)>와 같이 완구에 가까운 물건이 된다. 그러나 이조차도 미시적으로 분석하면 어떤 플롯의 흐름이 있다. 플레이어와 게임과의 상호작용이 '작은 서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뉴 베가스는 '플롯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러티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매우 비선형적인 게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2010년 당시 AAA게임들이 하나같이 외면하던 게임 디자인이었고, 전작에서 전형적인 베데스다 게임을 플레이했던 컨슈머들이 이 게임을 통해 CRPG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도 했다. 물론 베데스다의 퍼블리싱 밑에서 근본적인 게임 시스템의 한계가 있었지만[주2], 이것 하나만으로 조시 소여는 그 해 CRPG의 명인이 되었다. 주변에 제대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높게 평가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가 정신적 후속작을 자처한 발더스 게이트는 어땠나? 이 게임은 플롯만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와의 상호작용조차도 극히 선형적이다! 퀘스트마커 기능 하나만 추가하면 이 게임은 지금도 모던 RPG와 별로 다를 것 없는 편의성을 제공하며, 선택지를 고르고 전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하는 일 외에는 플레이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원시적인 빠른 이동 기능도 완비되어 있다. 지도에서 끝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플레이어는 방문했던 어디라도 로딩 시간만 투자해서 갈 수 있다. 이러한 게임플레이의 편의성들이 모여 플레이어에게 하나의 선형적인 스토리 감상을 제공한다. 


어떤 사람은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가 매우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게임에 몰입해 즐길 콘텐츠의 양이 풍부하다고 지적한다. 분명 양적 콘텐츠는 세계에 합리적인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플레이어의 내러티브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어떤가? 그것들은 라파엘 전파의 그림들이 그렇듯 기술적 뛰어남만을 과시하는 파편들에 불과할 것이다. 현대 게임들은 이런 점에서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는데, 모든 컨슈머들이 풀 보이스 더빙을 원하는 동시에 풍부한 선택지까지도 바라는 와중에 더빙에 들어가는 비용과 AAA게임에 기대되는 완성도를 함께 끌어올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최고로 많은 텍스트를 보유할 <폴아웃 4(Fallout 4)>가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 전통적 게이머가 있을까?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는 적어도 절반의 예약 구매자로부터 그런 기대를 받았다. 


어느 정도 문예비평과도 비슷한 스토리텔링의 화두를 계속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가 바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발매 전부터 계속 강조했던 것도 이 게임의 대화가 얼마나 진보되어 있는가였다. 소여는 게임온즈넷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대 RPG의 특징 중 제가 가장 싫어하는 건 대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대사입니다. 멍청하고 똥 무더기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게임에 대사를 넣고 싶고 그걸 게임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고 싶다면, 플레이어가 읽고 싶어한다는 가정 하에 좋은 대사를 쓰는 게 개발자의 일이지요. 개발자는 대사를 줄이려 하고 사람들은 넘기려 한다면, 아마 그건 그 대사들이…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저희는 대사를 쓸 때 합리적이고, 표현력 있고, 설명하는 대사를 씁니다. 사람들이 읽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고 대사를 씁니다. 만약 대사를 읽고 싶지 않으면 이 게임을 하지 마세요." 


"특정한 방법이나 특정한 캐릭터가 있어야만 끝낼 수 있는 전투 인카운터들, 그런 방법을 밝혀내고 ‘아하!’ 하는 순간들을 좋아하는 게이머들도 있지만…그런 분들에겐 신의 가호를 빕니다. 저희는 그런 건 안 만들 거예요." 


"옛날 D&D 시스템은 그리 일관성 있지 않았어요. 함정 빌드와 ‘아하’ 해야 하는 순간들로 가득 했죠. 그런 게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크게 얻는 게 없으면서 플레이어의 즐거움을 많이 제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그나드(올드 워게이머)들이야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당황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런 건 가능한 피하려고 해요. 아, 그런 게 재미있는데’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재미없어요." 


오, 신이여. 이제 와서 볼 때 이 인터뷰가 얼마나 그의 비전을 명확히 설명했는지를 계속 살펴보자. 이래도 여러분은 소여가 발더스 게이트와는 다른 게임을 만들 거라고 믿었단 말인가? 


앞서 이 게임이 전투와 대화를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실 전투와 대화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스트롱홀드같은 육성 요소를 넣었지만 시간과 돈만 갖다 주면 그냥 자동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다마고치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시스템이며 게임의 목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스트롱홀드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더라도 엔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라는 요소를 진지하게 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옵시디언의 게임을 가장 쉽게 진행하는 방법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가 그랬듯 대화의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다.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도 다를 게 없다. 빠르게 엔딩을 보고 싶다면 가급적 전투를 회피하면서 대화에 치중한 진행을 하면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대부분 이것이 게임의 자유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 해결의 방식인가? 내가 보기로 옵시디언의 대화란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에 가깝다. 뉴 베가스에서 설득과 협상만큼 게임을 편리하게 진행하는 방법이 있었던가? 심지어 몇 이상의 수치로 해당 스킬을 올리라고 친절하게 정답까지 제시해 준다! 스킬이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좀 더 퀘스트를 진행해 필요한 만큼 스킬을 올리고 오면 된다. 필요한 만큼의 수치를 만족하면 선택지가 해금되면서 얄팍한 대화들이 줄줄이 나오고 퀘스트 해결 사운드를 듣게 될 것이다. 옵시디언 게임에서 비폭력과 대화에 집중한 진행을 선택했다면, 그건 흡사 <영웅전설> 시리즈에 필적하는 편안한 스토리 감상을 즐기게 된다는 걸 뜻한다. 


이번엔 다른가? 놀랍게도 대화와 관련된 스킬은 사라졌다! 과연 의식적으로 플레이어의 의도를 반영하는 진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기대를 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성장하는 스킬skill이 아니라 타고난 스탯stat이 대화의 방향을 결정한다. 어떤 스탯이 선택지를 해금할 수 있는지 게임이 정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문제 해결에 다다르는 중간 루틴이 늘어났을 뿐 그 루틴에 개입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옵션에서 정답을 끌 수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챕터 1이 끝나기 전에 주인공이 어떤 방향으로 정답을 찍어야 할지 눈 감고도 보인다. 팩션 관계는 복잡할 것 같지만 메인 퀘스트를 돕는 수준에서 그치고, 각 마을에서 평판이 오르든 내리든 체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까닭에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의 대화 시스템은 CRPG에서 선택지 대화가 현재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선택지 대화란 키워드 대화보다 발전한 시스템이 아니라 오히려 급격히 퇴보한 것으로, CRPG의 상호작용을 비주얼 노블 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키워드 대화가 지문의 문학성을 향상시킬 수 없다는 주장은 오히려 이 시스템이 비주얼 노블의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다. 


소여는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NPC가 아닌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마저 선택지 대화로 처리했다. 멋진 삽화를 보여주면서 몇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하고 행동을 고르는 것이다. NPC와의 대화가 그나마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고민은 해야 하는 수준이라면, 이 시스템은 초등교육을 수료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실패할 수 없도록 배려되어 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찍었다면 간단히 로딩하면 된다. 화려하고 거창하게 그래픽 연출을 보여주는 컷신도 아니니 부담도 없다. Peace. 


비주얼 노블이라고 불렀는데 전혀 과장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일본 미연시인 동급생 기억하는가? 마을 맵에서 이리저리 커서키로 이동하면서 필요한 간판이 떡하니 있는 곳에 들어가 사건을 진행시키는 방식 말이다. 이 게임도 그런 방식과 완벽히 똑같다. 렌더링 방식의 배경이 아무리 아름다워 봤자 M키를 눌러 맵을 열고 필요한 간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뭘 눌러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TAB키를 누르면 되니까. 나중에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화면은 단순히 이벤트와 전투에 사용할 뿐, 실제 게임은 지도 화면에서 빠른이동을 하는 것이 전부가 된다. 


소여가 '아하!'하는 문제 해결의 기쁨을 제공할 마음이 없다고 했을 때 모든 기대를 버렸어야 했다. 이 게임의 문제 해결이란 사실상 필요한 선택지를 찾는 작업이며, 그 선택지를 개방하는 트리거는 아주 가까운 곳들에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대 컨슈머들을 머리 아프게 할 만한 퍼즐이 전무한데, 그들은 어차피 이렇게 만들어 줘도 퍼즐이 어렵다고 불평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고 D&D렐름이나 네이버, 루리웹에서 반응을 보면 된다. 


대화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제 대체 남은 게 뭔가?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D&D룰과 실시간 전투가 기괴하게 결합했던 전작의 전투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발전했다. 타임테이블이 끊임없이 합리적으로 턴을 관리하고 플레이어의 전술을 방해하지 않는다. 어떤 게이머는 가능한한 모든 정지 옵션을 켜고, 최대한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 턴제에 가까운 전투를 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전투는 초 단위다. 전작들처럼 어울리지 않는 D&D룰에 묶여 파티가 버벅대지도 않고 합리적인 이동과 방어, 공격을 한다. 오히려 피지컬이 받쳐 주는 한 실시간 전략RTS에 가까운 전투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이다. 모든 정지 옵션을 켜면 텍스트 싸움에 가까운 전투를 하게 될 텐데, 그게 전투가 반인 이 게임에 적절할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화려한 마법 이펙트들을 감상하며 피지컬이 모자랄 때 적절히 스페이스바를 눌러주는 것을 추천한다. 어느 정도 파티 전투에 익숙해지면 가장 높은 난이도라도 충분히 실시간 전투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벨이 12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모든 스킬을 써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3] 오직 전투 시스템만이 엔딩 후에도 다시 플레이를 해 볼 동기를 부여한다. 그렇다. 이 게임에서는 어차피 전투밖에 할 게 없는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면 발더스 게이트보다 오히려 아이스윈드 데일과 굉장히 친숙하다. 다만 복잡한 대화 선택지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화로 폭력적 사태를 '회피'해봐야 재미가 없으므로 그나마 재미있는 전투로 상황을 몰고 가는 편이 더 낫다. 부실한 매뉴얼은 전투의 반의 반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장비와 주문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게임 밖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 


다시 정리해 보자. 전투와 대화가 이 게임에서 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은 스토리다. 비선형적 플롯이 한 두 게임에 집중하지 않는 요즘 게이머들에게 장대한 스토리를 어필하기 힘들다는 것을 간파한 소여는, 저널을 친절하게 꾸미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실로 오토저널은 압도적으로 편의성이 뛰어나서 퀘스트의 모든 단서와 진행 순서, 해결 방법이 일목요연하고도 알아보기 쉽게 쓰여 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아예 일대기까지 차근차근 정리해서 보여준다.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갈피를 못 잡겠다면 언제든지 저널을 열어 보면 된다. 그러면 자신의 영웅담이 잘 쓰여 있을 것이다. 메모 기능도 저널 내에서 따로 제공하는데 그걸 사용할 사람이 있을까? 게임이 알아서 다 하는데. 


이 게임에서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할 만한 점은 문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텍스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의 가장 주된 장치가 영혼이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낯설게 보기Verfremdung'[주4]를 사용한다.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게임의 텍스트를 읽는 일에 피로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스토리의 주제의식을 표현방식과 결합하여 표현하고 있고, 묘사의 주체가 수없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상력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보면 여타의 CRPG보다 독보적인 텍스트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는 문예가 아니다. 제 아무리 이 게임의 텍스트가 뛰어난들 본격 모더니즘 문학에 비하면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소외 기법은 원래 청중을 무대와 분리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 게임의 플레이어를 주인공과 가장 멀리 분리시키는 것도 다름 아닌 텍스트다.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를 플레이하면서 내가 곧 주인공이며 주인공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이입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디오 게임으로서. 그 중에서도 CRPG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악수라고 봐도 무관하다. 전통적으로 파티 제작을 하고, 주인공의 배경을 다양하게 설정해 봤자 금방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게임의 중반만 이르러도 자신이 무슨 주인공을 만들었는지 까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게임이 발더스 게이트의 팬들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는 그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제공했다. 단점이 뭐가 있겠는가? 단지 발더스 게이트가 아니었을 뿐이다. 정신적 후속작은 이런 점에서 어차피 사도일 뿐이다. 옵시디언은 앞으로도 엔딩에서 몇 줄 다른 글이 나오는 방식의 게임을 만들겠지만, 내 애정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났다. 






평가 ★★☆☆☆ 






주1) 그렉 코스티키안, <말이 아닌, 디자인만이 게임을 말해 준다(I have no word and I must design)> 참조.


주2) 퀘스트마커, 빠른 이동을 전제로 한 게임 디자인, 실시간 V.A.T.S., 생존 요소의 배제 등.


주3) 확장팩에서 2레벨 증가하여 14레벨이 되었다. 


주4) 브레히트의 희곡 기법. 소외 효과로부터 청중을 끌어들여 비판적 태도를 유발하는 서사시적 기술.


변영민
변영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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