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이번에 소개할 VTL의 MB 450 마크 3을 듣는 순간,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망망대해가 그려졌다. 물결이 잔잔히 일고,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사이즈의 스케일 앞에 내 자신은 하나의 작은 조각배가 되어 그 안에서 천천히 노닌다고나 할까?
 

그러나 대형기답지 않은 순발력과 민첩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마치 소출력 앰프를 듣는 듯 한 치밀함과 디테일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무시무시한 힘을 안에 숨기고 있다. 만일 강력한 임팩트와 저역 컨트롤을 필요로 하면, 본 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슬슬 넘겨버린다. 이래서 대출력 파워 앰프를 쓰는 것이로구나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언젠가 오디오 관련 인사를 한 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회사는 앰프는 물론, 스피커, CDP, 케이블 등을 골고루 만든다. 다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이렇게 물었다. 오디오 컴포넌트 중에 뭐가 제일 만들기 힘듭니까? 나는 스피커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의 답은 파워 앰프란다. 
 

얼핏 생각하기에 파워 앰프는 그냥 출력을 적당히 정해놓고, 기존에 나와 있는 숱한 서킷 중 하나를 채택해서 만들면 되는 게 아닐까? 이건 상당히 무식한 발상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만일 소출력에 약간의 험이나 하자가 있다고 하자. 이를 대출력으로 만들면 그 부분이 똑같이 증가한다. 이를 억지로 제거하려면 회로가 복잡해지고, 음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만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본 기를 듣고 놀란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별다른 험이나 왜곡이 없이 지극히 스무스하게 스피커를 드라이브하는데, 동시에 민첩함과 기민함을 아울러 갖춘 것이다. 승용차로 치면 B&W의 750과 같다고 할까? 분명 덩치가 크고, 기름도 많이 먹지만, 이른바 지그재그, 아무리 복잡한 길도 휙휙 빠져나간다. 자동차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이런 표현밖에 할 수 없어서 뭐 하지만, 아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더구나 진공관 앰프의 경우, 태생적으로 피할 수 없는 약점들이 몇 가지 있다. 발열이나 험, 진동에 취약한 점, 전원 상태에 예민하고, 바이어스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래서 골치가 아프고, 늘 조마조마해서 음악에 열중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본 기에는 그런 약점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대출력이라 발열 문제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는 사용자 친화적이어서 일반 TR 앰프를 쓰는 기분으로 접근해도 문제가 없다. 혹, 출력관에 이상이 생길 경우, 정확히 해당 관에 장착된 라이트가 깜빡깜빡 거리므로, 그것만 갈아주면 된다. 꼭 페어 매칭이니 뭐니 신경 써서 갈아줄 필요도 없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이런 기술적인 부분을 발전시켜온 것이 VTL의 역사라 할 수 있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창업자인 류크 맨리가 부친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개량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계통의 기술자들을 모집하고, 외부 용역을 주고 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음과 기술적 완성도를 차근차근 배양한 것이다. 그 때문에 VTL의 신제품 발표는 더딘 편이다. 그러나 일단 내놓으면 역시 VTL이구나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확실한 퀄리티를 보장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나온 TL 7.5 시그너처 3라는 프리앰프를 보자. 본 기와 제짝을 이루는 제품인데, 무려 8년 만에 나온 신작이다. 그 정도로 제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정성이 대단하고, 소비자들은 그 완벽주의를 높이 사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본 기에 새로 투입된 기술 몇 가지를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우선 언급할 것은 더욱 짧아진 신호 경로. 실은 업그레이드라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이 부분은 전작을 무시하고 아예 새롭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대형기임에도 불구하고 스피디한 음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원부에 대한 부분도 언급해야 한다. 특히 이런 대출력 앰프는 전원에 민감한 바, 이를 위해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구애받지 않도록 특별히 안정화시키는 대책을 강구해서, 앰프에 속한 모든 부분이 일체 영향을 받지 않고 작동하도록 했다.
 
음질에 관련, 네거티브 피드백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부분도 특기할 만하다. 이를 통해 중간에 거치적거리는 콘덴서들의 존재가 사라졌으므로, 더욱 음성 신호의 순수성이 보장되고, 해상도가 높아지며, 빨라지게 되었다.
 
부품에 관해 언급할 것은 바로 문도르프 실버 오일 콘덴서의 도입. 이를 통해 더 스위트하고, 풍부한 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들어 앰프뿐 아니라 스피커쪽에서도 문도르프의 부품을 앞 다퉈 채용하는 추세인데, 본 기의 음을 들으면 그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댐핑 팩터를 사용자가 직접 조정할 수 있게 한 점이다. 이 부분은 총 4개의 옵션으로 구성된 바, 로, 메드, 하이 그리고 맥스로 나뉘어 있다. 아무래도 댐핑 팩터를 낮추면 음이 부드러워지고, 편해지지만 임팩트가 약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임팩트는 좋아지지만 약간 신경질적이 된다. 자신이 가진 스피커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조정할 수 있으므로, 여러모로 편리한 기능이라 보인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VTL 특유의 3극관 및 4극관 동작 선택이다. 이럴 경우 전자는 225W를 내고, 후자는 425W를 낸다. 사실 225W만 해도 대단한 출력이지만, 4극관 동작을 들으면 또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음악의 성격에 따라 표정이 완전히 바뀌므로, 한 마디로 골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소편성이나 여성 보컬은 3극관이 낫고, 대편성이나 재즈, 팝 등은 후자가 낫다. 어쨌든 앰프 하나로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한 메리트라 보인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다질의 프리앰프에 린데만 825를 붙였고, 스피커는 XTZ 100.49 및 소너스 파베르의 아마티 푸투라를 각각 동원했다. 스피커마다 가끔 3극관 및 4극관 교체 실험을 했으므로, 실제 모든 내용을 쓰자면 방대해질 수 있으므로 이 부분은 간략하게 줄이도록 하겠다. 참고로 음원은 필자가 편집한 음반에서 골랐으며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야니네 얀센(바이올린)
-조수미 《도나 도나》
-오스카 피터슨 《You Look Good to Me》
-듀크 엘링턴 《Mood Indigo》
 
우선 멘델스존을 들으면, XTZ이 다소 스케일이 크고 호방한 반면, 푸투라는 보다 응축되고, 질감이 풍부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기호 차이여서 뭐가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단, 푸투라의 약간 고전적이면서 격조 있는 음이 VTL과 더 좋은 궁합을 이루지 않나 싶기는 하다. 특히 얀센의 바이올린에 포커스가 맞춰져서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이나 표정이 마치 현미경처럼 세심하게 포착되는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스케일로 따지면 XTZ의 매력도 버릴 수 없다.
 
조수미의 경우, 역시 3극관 동작으로 하니 매력이 쑥 살아난다. 다소 음장이 작아지는 면은 있지만, 여러 악기의 질감이나 보컬의 다채로운 테크닉은 쏙쏙 귀에 들어온다. 또 음색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연주가 시작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도 그냥 푹 빠져들고 만다. 그러나 결코 착색이 있는 음은 아니고, 약간의 멋을 낸 정도라고나 할까? 특히 푸투라와의 매칭에서 큰 재미를 봤다.

오스카 피터슨은 3극관보다는 4극관이 낫다. 훨씬 베이스의 양이 깊고 풍부하며, 스피커를 구동하는 힘 자체가 차이가 난다. 그러나 피아노의 영롱함이나 디테일한 부분은 3극관쪽도 버릴 수 없다. 한편 연주가 진행되면서 점차 열기를 더할 때의 모습에서 과연 VTL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스피커를 완전 장악해서 전대역에 걸쳐 골고루 음을 쏟아내고, 엄청난 스케일로 리스닝 룸을 사로잡는 데에서 가벼운 탄성까지 나올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듀크 엘링턴을 들으면, 약간 남성적이고 호방한 느낌을 추구한다고 할 때 XTZ이 좋았다. 테너 색스의 전설 콜맨 호킨스가 등장해 특유의 구성지고 낭랑한 폼으로 연주할 때의 스케일은 단연 압권이며, 뒤에서 백업하는 관악기들과 드럼, 베이스 등의 존재감은 넉넉하기만 하다.
 
본 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결국 음은 에너지가 아닐까, 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오디오에 몰두하고 음에 파묻히려면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서 본 기가 들려주는 드라마틱한 표현력은 단연 발군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