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이란 말은 언제 왜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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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6.04.30. 오후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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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낱말의 습격' - 소비사회의 대중적 키워드로 떠오른 이 말의 정체와 함의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최근 들어 ‘밥’이란 말보다 더 자주 듣는 말이 ‘명품’이란 말이다. 이 말은 사회적인 함의가 아주 크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바톤 터치는 이 땅의 소비사회가 마지막 남은 근대성을 벗어제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단언은 논란이 있는 표현이지만, 문제를 명쾌하게 하기 위해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가, 정권의 선진성에 있었기 보다는 사회의식의 성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비사회의 근대성과 현대성을 가르는 핵심 키워드는 ‘명품’이란 말이었다.

물론 TV프로인 ‘진품명품’에도 보이듯, 명품이란 말이 그 이전에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약간 다른 의미로 쓰였다. 지금의 의미로 전화(轉化)한 것이 노정권의 출범 시기와 겹쳐져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전의 의미는 그저 ‘뛰어난 상품이나 이름난 물건’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명품은 그것을 넘어서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값비싼 고급제품을 가리킨다.

디올 명품백 논란 '한국 여자'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명품은 현대의 물신(物神)이다. 물건은 더 이상 물건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고양시키고 업그레이드시키는 사회적인 상징이며 가치체계이다. 보유하고 있는 물건의 값은 곧 인간의 값이 된다. 명품은 그 자체가 이름난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그 브랜드는 곧 인간을 값 매기는 강력한 ‘도장’이다. 이젠 소비자가 '평가'를 바탕으로 명성을 재는 명품이란 개념을 넘어, 생산자가 자신의 물건을 자칭하는 것으로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고급'이란 말의 최상급 표현 정도로 쓰이게 된 셈이다.

김대중정부 시절에는 명품이란 말 대신 ‘호화사치품’이란 말이 쓰였다. 정부의 고관들의 부인들이 옷로비 추문에 시달렸던 건, 그 옷이 지금의 명품이 아니라, 호화사치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화사치품은 국가 경제를 좀 먹는 탈선과 퇴폐의 상징이었다. 그녀들이 부도덕하다는 사회적 지탄을 받은 것은, 로비 자체에도 있었지만 호화사치품을 주고받고 걸쳤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그때까지 호화사치품을 애용하는 일은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부도덕이었다.

그런데 정책 및 여론 집단의 누군가에 의해 호화사치품이란 말이 사라지고 대신 명품이란 말이 등장했다. 이 말은 빠르게 사회의 전계층으로 퍼졌다. 명품은 곧 일상어가 되었다. 호화사치품이란 어감에 들어있던 부정적인 관점이 살짝 빠진 대신, 명품에는 명성(名聲)이나 명사(名士) 등에서 느끼는 썩 괜찮은 뉘앙스가 들어앉는다. 호화사치품이 명품으로 둔갑하는 그 탁월한 말장난이, 과감한 소비를 정당화한 셈이다. 그 이후 사치(奢侈)는 능력에 가까운 말로 들리게 됐다. 명품은 이 나라의 소비를 진작한 최고의 공신이다.

명품이란 말은 ‘럭셔리’라는 외국어가 어정쩡하게 번역된 것이기도 하다. ‘럭셔리하다’라는, 꽤 난도 높은 영어가 그대로 우리말처럼 쓰이게 된 것도, 물신에 대한 거리낌없는 예찬이 가능해진 이후의 풍경이다. 럭셔리와 함께 이 사회에 들어온 말은 ‘웰빙’이다. 월드컵 이후 쯤부터였을 것이다. 강남 부유층 사이에 스피룰리나, 콜라겐, 클로렐라 같은 건강식품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제품들과 함께 ‘웰빙’이란 말이 수입되었다. 무슨 말인지 초기에는 거의 아무도 정확하게 몰랐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말하나 보다,하는 짐작들이 확신이 되어 이 사회에 유행어로 유통되기 시작됐다.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건 이 유행어가 한참 쓰인 뒤였다. 대개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의 국가들에서 국민들이 이제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정신의 평온과 삶의 안정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웰빙이었다. 우리는 웰빙을 한답시고 요가를 기웃거리고 스파를 즐기고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을 하고 또 명품을 사러 다녔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진전된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이른 바 물신(物神)에 저항하는 인간의 삶의 자각 운동에 가까운 것이 웰빙이었다. 이 웰빙은 1990년대 미국의 보보스(부르주아 보헤미안), 더 올라가면 1980년대 여피(YUPPIE), 1960년대 히피의 맥락 위에 있었다. 탈사회적인 청년 운동이 젊은 도시 직장인들의 문화를 이루고, 다시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는 계층으로 발전하여, 2001년경 웰빙 트렌드로 거듭난 것이다.



명품과 웰빙은 이 땅의 마음속살 깊숙이 파고든다. ‘동창회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부인이 동창회에 다녀온 뒤 눈빛이 달라진 걸 느꼈다면, 그녀가 이 증후군인지를 살펴보는 게 바람직하다. 네이버의 사전에는 이렇게 풀어놨다.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예쁘지도 않았던 친구가 순전히 남편 잘 만난 덕에 명품 칭칭 감고 나와 잘난 척 하는 걸 꾹꾹 참고 봐주다가 돌아왔는데, 그날따라 일찍 귀가해서 밥 달라고 소리치는 남편이란 작자가 꼴보기 싫어지는 현상.’ 이게 다 명품이 만들어낸 심리들이 아니겠는가.

명품을 사고는 싶은데 그걸 못사니 짝퉁이라도 갖고 다닌다. 짝퉁은 그 직전에 이미(IMITATION)라는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샌가 이 말로 천하통일됐다. 짝퉁은 자존심 상하니 가격만 좀 내리면 안될까. 그래서 나온 것이 매스티지라는 상품이다. 이른 바 대중명품(MASS PRESTIGE)이란 희한한 이름을 달고 나와 중산층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몸에 온갖 명품을 걸쳤으나 그게 영 안받아서 없어보이는 친구를 가리켜 ‘없셔리족’이라고 부른다. 명품에 대해 대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하자, 명품은 더 뛰어올라 대중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버린다. 그게 VVIP마케팅이다.

그렇게 폼 잡는 일이 처음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그런 만족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명품족들은 슬그머니 다른 취미를 찾아나선다. 나일론족은 그런 생각의 반영이다. 뉴욕(NEWYORK)과 런던(LONDON)의 합성어인 NYLON은 뉴욕의 명품과 유럽의 문화를 동시에 향유하는 고급 계층이다. 보보스도 그 계열이다.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이 합해진 말이다. 물질적인 안정감과 유목적인 자유를 함께 누리려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보보스 대신 노블레스 노마드라는 말을 쓴다. 이른 바 귀족유목민이다. 이들은 치부(致富)에 골몰하는 대신 교양과 여행과 문화와 예술에 탐닉한다.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소사이어이티를 만들어, 즐거움을 공유하면서 키워나가는 것도 노블레스 노마드의 한 특징이다. 소비 사회의 핵심인 ‘제품 브랜드’에 대한 반격으로 즐거움을 확장하는 무리도 있다. 이른바 노노족이 그런 사람들이다. 노 로고 노 브랜드의 노노다. 획일화에 대한 반기이다. 이들은 아무 브랜드도 없는 옷을 걸치고 반문명적인 유랑의 대열에 합류해, 물신주의의 광기에서 일탈하는 즐거움을 찾는다. 이 모든 것이 ‘명품’이란 코드에서 분화되는 세상의 몸짓들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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