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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문화계 블랙리스트 `직권남용죄` 엄격하게 해석한 대법원

입력 : 
2020-01-31 00:01:02
수정 : 
2020-01-31 0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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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박근혜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 전 실장 등에게 적용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조문상 '의무 없는 일'에 대한 기준을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번 판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및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재판, 조국 전 법무장관의 '유재수 감찰무마'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법원이 늦게나마 "직권남용죄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일부 수용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직권' '남용' 범위를 놓고 기존 판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속 등의 공무원에게 특정인사 지원 배제를 지시한 것은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위원회가 각종 명단을 송부하고 수시로 공모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한 행위가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원심의 유죄 판단에는 법리오해와 심리미진의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직권남용죄를 공무원의 상하관계에 따른 지시 등 일상적 업무로까지 확대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형법 123조에 규정된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법적 명확성이 떨어지고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많았다. 권성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정치 보복에 이용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 정권 출범 후 검찰은 적폐수사 때 직권남용죄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고, 고소고발 건수도 1만건을 넘었다. 직권남용죄가 정치와 여론에 휘둘리면서 법원의 유무죄 판단마저 오락가락하고 있다.

권력을 남용한 공직자는 단죄해야 하지만 정치적 목적이나 수사 편의를 위해 직권남용죄를 남용해선 곤란하다. 특히 정권 교체 때마다 전 정권 인사들을 직권남용죄로 엮는 악순환은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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