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실에 금강 기효간의 묘갈명 세워졌다
아치실에 금강 기효간의 묘갈명 세워졌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2.31 14:4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년 전 김매순이 남긴 명문장 ‘후세 귀감’
조선 인재 산실 ‘아치실’에 또하나의 볼거리
아치실에 또 하나의 명물 등장25일 장성 황룡면 아치실에서 열린 금강거사 기효간의 묘갈명 제막식행사는 김매순의 명문장이 200년 만에 묘비명으로 탄생했다는 의의를 담고 있다. 행주기씨 금강문중은 지난 10월,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적류와 고문서 2749점을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해 후학들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아치실에 또 하나의 명물 등장25일 장성 황룡면 아치실에서 열린 금강거사 기효간의 묘갈명 제막식행사는 김매순의 명문장이 200년 만에 묘비명으로 탄생했다는 의의를 담고 있다. 행주기씨 금강문중은 지난 10월,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적류와 고문서 2749점을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해 후학들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장성 인재산실 '아치실'을 아십니까? 
호남 추로지향의 대명사‘전국 위상’    

아치실 출신…그 이름 하나로 자부심 

호남에서 지역성을 특정할 때 “장성(長城) 가서는 글 자랑하지 마라”는 말을 흔히 한다.

이 말은 장성이 호남을 대표하는 거유(巨儒)와 수많은 절의 청렴 선비들과 효열부가 태어나고 학문을 연마하며 숭상해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성 고을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니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니 하는 말로 그 위상을 대신해왔다. 추로지향이란 말은 맹자가 태어난 추(鄒)나라와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이름을 합하여 부르는 말로서 그 지역만큼 훌륭한 인물들이 태어난 고을이란 칭송이다.

그런 장성 고을을 대변해주는 장소의 하나가 바로 아치실이다.

아치실은 장성읍에서 5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구역상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다. 현재 아곡 마을은 크게 북너매, 아치실, 하남, 상잘로 이루어져 있다. 아치실은 그 뜻을 한자로 새길 때에는 소곡(小谷)으로 썼고, 그 음에 따라서는 제곡(弟谷), 아찬곡(阿飡谷), 아곡(鵝谷) 등으로 썼으니 모두 작은 골짝이란 뜻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에는 예의범절을 알아 공자 일행을 꾸짖은 여인이 살았던 아곡(阿谷)에 비겨 쓰기 시작하였다.

아치실 일대는 성현명인(聖賢名人)이 줄지어 태어난 관계로 호남의 추로지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며, 문불여장성의 상징터이다. 

아치실 하남 마을에 문중이 자리잡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행주기씨 기원의 참판공의 묘. 이하 후손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치실 하남 마을에 문중이 자리잡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행주기씨 기원의 참판공의 묘. 이하 후손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치실서 어떤 인물들이 나왔는가? 

아치실 일대는 울산김씨와 행주기씨 문중을 비롯해 인제이씨, 태인박씨, 광산김씨, 창녕조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중 마다 걸출한 인물을 배출, 호남의 명문가로 명성을 얻으며 인물을 배출했다.

역사서를 통해 확인되는 가장 빠른 두드러진 행적을 지닌 인물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관 직제학을 지내고 사신으로 대마도에 다녀오기도 했던 인제이씨 이견의(李甄義)이다.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홍길동이 아치실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창작할 때 모티브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후 세조 때에는 밀양박씨 박시형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도 입격하여 밀양부사와 교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명종 때 청백리에 뽑힌 정혜공 박수량(1491~1554) 선생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박수량은 높은 관직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지 못할 만큼 빈곤한, 청렴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이를 기리는 공직자와 관광객들이 청렴을 상징하는 아치실 백비를 찾아 기리고 있다.

호남의 유종(儒宗)으로 불리는 두 분을 들자면 한 분은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이고, 다른 한 분은 성리학의 대가 노사 기정진(1798~1879) 선생인데 하서는 아치실 남쪽 5리도 못되는 맥호리에서 나고 묻히셨다. 노사는 순창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텃자리가 아치실이고 어려서부터 아치실에서 자라 일생동안 가장 오랜 기간 거주한 곳이다. 노사 선생은 조선 후기 6대 성리학자로 ‘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야(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也)’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장본인이다.

건너편 제청산 묘역이 군부대로 가로막히자 15년 만에 이장하여 새롭게 단장한 하남 마을 묘역.
건너편 제청산 묘역이 군부대로 가로막히자 15년 만에 이장하여 새롭게 단장한 하남 마을 묘역.

행주기씨, 금강 문중의 빛나는 행적 

경기도 고양과 서울에 살던 행주기씨가 호남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뽑힌 기건(?~1460)이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부터이다. 이후 기건의 후손이 대단히 번창하여 성현(1439~1504)이 《용재총화》에서 동방의 거성으로 꼽을 정도였다. 기건의 손자 기찬이 영광군수를 지낼 때에 어린 하서에게 붓을 주어 격려한 일도 있었으니, 필암서원에 그 붓이 전한다. 기찬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 기준(1492~1521)이 기묘사화에 사사되자 그 형 기원(1481∼1522)과 기진이 호남으로 내려오며 호남의 기씨가 형성되었다. 기원의 후손은 아치실에 세거하며 그 손자인 금강 기효간(1530∼1593) 선생과 선무공신 기효근(1542~1597) 이후 대단히 번성하였고, 기진은 광주 광산구에 자리잡았고 아들 고봉 기대승(1527~1572)을 비롯한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며 번성하였다.

기효간은 당숙인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일재 이항(1499~1576)의 제자로 대단히 학문이 높았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해 호남의 은덕군자로 불렸는데 바로 그가 바로 장성의 하남 마을 일대에 뿌리 내린 금강문중의 비조이다. 이후 출중한 기씨 후손들이 출현했다.

이후, 금강거사 문중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권율 등과 함께 18공신에 뽑힌 기효근(1542∼1597), 송시열의 문인으로 호남의 유학을 중흥한 기정익(1627∼1690), 조선 후기 6대 성리학자로 알려진 기정진(1798∼1879), 학자이자 의병장인 기우만(1846∼1916), 호남창의회맹소대장 기삼연(1851~1908), 을사오적 암살을 실행한 독립운동가 기산도(1869~1928)등 걸출한 인물을 잇달아 배출했다.

근대에는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명의 의병을 모아 마을 인근 수연산에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의병활동을 시작한 호남 유림 의병의 뿌리인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기삼연(1851~1908)이 태어난 곳이고 묘소도 이곳에 있다.

장성 아치실의 행주기씨들에 따르면 아치실에서 28진사가 배출됐다고 하는데 이는 장성 관내 전체 진사의 3분의 1에 근접한다.

이날 묘갈명 제막식에는 행주기씨의 금강공의 여러 문파 후손들이 참석, 제례를 올리며 뜻을 기렸다.
이날 묘갈명 제막식에는 행주기씨의 금강공의 여러 문파 후손들이 참석, 제례를 올리며 뜻을 기렸다.

김매순의 묘갈명 ‘명문장’ 빛나다  

지난 24일 장성 아치실 하남마을에서 거행된 ‘행주기씨 선영 이장에 따른 고유제와 금강거사 묘갈명(墓碣銘) 제막식’은 향토사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선물하고 있다.

그동안 행주기씨 기원 참판공 후손들은 예전부터 선영이 있던 황룡면 관동리 뒷산인 제청산 묘역이 2004년 국방부 산하 군부대로 편입되면서 후손들이 묘소를 찾고 싶어도 마음대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5년 만에 문중의 의론을 모아 이번에 금강거사가 살았던 산기슭인 아곡리 하남마을의 보룡산 아래 묘역을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금강거사의 묘갈명은 병조참판과 홍문관대제학을 지낸 대산 김매순(1776~1840) 선생이 약 200년 전에 남긴 문장이지만 이제야 제자리를 잡고 그 글을 새긴 묘비명이 세워져 큰 의미를 주고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난 김매순은 금강 선생의 덕행과 공로에 대해 하서선생이 주창한 대의를 비춰 ‘백이(伯夷)에 필적한다’고 적었다. 김매순은 묘갈명에서 ‘하서 선생의 문하에 으뜸가는 걸출한 분, 선생의 영원한 명성 공과 함께 영원하리’라고 새겼다.

이번에 묘갈명 제막식을 주관한 금강거사의 14세 종손 기준서 회장은 “할일을 했을 뿐이다. 문중의 오랜 과제를 뒤늦게나마 풀어내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소회를 밝히고 제막식에 물심양면으로 크게 기여한 기우근 후손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행사를 진행한 기노확 씨(전 교장)은 “이번 행주기씨 금강문중의 선영이 하남 마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비단 문중의 경사 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학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며 “역사를 기록한 현장으로 남아 훗날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홍길동 2018-12-03 16:54:49
현행 : ~기건의 손자 기찬(1444~1492)이 영광군수를 지낼 때에 어린 하서(1510~1560)에게 붓을 주어 격려한 일도 있었으니, 필암서원에 그 붓이 전한다. 기찬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 기준(1492~1521)이 기묘사화에 사사되자 그 형 기원(1481∼1522)과 기진이 호남으로 내려오며 호남의 기씨가 형성되었다. ~
변경(안) : ~기건의 손자 기찬은 영광군수를 지내고, 그의 막내 아들 복재 기준(1492~1521)이 남녁 시골에 내려왔다가 어린 하서를 만나(1518) 붓을 주며 격려한 일도 있었으니, 필암서원에 그 붓이 전한다. 기준이 기묘사화에 사사되자 그 형 기원(1481∼1522)과 기진이 호남으로 내려오며 호남의 기씨가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