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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러스트 작가

그리고 동그라미는 지속된다

홍학순

홍학순 [윙크토끼 윙크하기 전] 2010
12x17cm | 혼합재료

1998년 겨울에 동그라미를 그렸어요. 그런데 동그라미마다 생김새가 다르더라고요. 연필로 이렇게 쓱쓱쓱 그리면 형태는 같지만 조금씩 다르게 생겼잖아요? 그게 신기해서 계속 그렸어요. 그리다보니까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가 있었어요. 동그라미 밖에도 동그라미가 있고요. 그리고 하나의 동그라미는 가지를 치고 자라나 다른 동그라미를 낳아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토끼 인형을 보고 기분이 묘했어요. 머리 안에서 동그라미들이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빠글빠글 움직였어요. 집에 가서 연필을 종이에 댔는데 동그라미 2개, 짝대기 4개, 점 하나로 된 토끼가 나왔어요. 이 토끼는 동그라미를 좋아해요. 자기 몸에 동그라미들을 붙이기도 하고 빼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또 다른 얘들이 태어났어요. 진짜 닭, 진짜 개, 우주말, 떠기 그리고 즐거운 여자요. - 동그라미가 여섯 친구가 되기까지

여기 동그라미가 있다. 삼각형과 사각형도 눈에 띄지만 도형이라고 부르기엔 그 형태가 자유분방하다. 뭐 하나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는 그저 ‘동그라미와 닮은 무엇’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기존의 화풍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홍학순만의 세계는 때때로 ‘낙서’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휘갈긴 ‘뜻도 없고, 기술도 없는’ 그런 그림을 일컬듯이 말이다. 알다시피 홍학순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뜻도 없고, 기술도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동그라미의 세계는 간단치가 않다. 그의 드로잉은 집요하고, 치열하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 ‘악보’처럼 구현된 일관된 질서와 아름다운 불협화음은 그만의 단단한 날인이자 궤적이다. 이른바 ‘세계’의 탄생.

어린아이의 낙서를 닮은 독특한 드로잉

“제 드로잉의 절정기는 다섯 살이었을 때였어요.” 꼬맹이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이상한 조언’을 듣고는 그림에 대한 흥미를 단박에 잃어버렸다. 고학년이 학교 교문을 사실적으로 그린 수채화를 보여주면서 “너희도 앞으로 이렇게 그리게 될 거야”라고 말해준 것이다. 그 사건 이후 학교 공부 자체에 회의를 느낀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우유각 소녀 안에 우유각 소녀] 2010
20cmx20cm, 종이에 펜

그 흔한 ‘탈선’ 한 번 하지 않은 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고요한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고 나니 스무 두 살. 더 이상 어리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청춘이었다. “그 해,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봤는데, 참 아름다웠어요. 그걸 보고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웅크리고 있던 심장은 박동하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스무 네 살에 미대에 입학했다. 대학 교육은 어땠냐고 물으니까 다행스러운 답변이 돌아온다. “선생님들이 간섭을 안 하셨어요.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까 선생님들이 배울 때 간섭을 받아서 자신들은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으셨대요.”

돌고 돌아 다시 찾은 그림의 세계였다. 그 ‘진짜’ 시작을 연 것은 1998년 겨울의 일이었다. 동그라미를 그리다 토끼가 탄생했고, 연이어 닭, 개, 말, 떠기, 즐거운 여자가 탄생했다. 자신이 한 일인지 아닌 지도 모르게 그렇게 이 녀석들이 세상에 나왔다. 진짜 닭은 삼각형을, 진짜 개는 사각형을 좋아하고, 이들은 도형을 주고받으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 모양들이 만나 조립품이 되지요. 이 조립품들은 여기저기 붙었다 떨어질 수 있는 부품들이에요. 부품들은 또 서로 만나고 싶은 얘들끼리 만나요. 그러면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져요. 이런 일들은 여섯 친구가 서로 생각을 주고받아야 가능해요. 저는 이것을 여섯 친구의 ‘생각전달’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그들의 생각들은 이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연결’이라고 불렀어요.”

[여섯친구의 방송] 2003
350cmx250cm, 혼합재료

작품을 만드는 ‘주체(홍학순)’는 어느 샌가 사라진다. 대신 캐릭터들의 다사다난한 삶이 약동한다. 분명 거기에는 인간의 삶보다 더 절절한 희로애락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가요’, ‘어, 여기에선 무척 격앙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라며 작가에게 답을 요구하자 “그건 저도 몰라요. 이 친구들의 삶인 걸요.”라고 목소리를 감춘다. 여섯 친구들이 사람들을 흉내 내고, 말을 시작하고, 또 최근엔 토끼가 윙크를 많이 해서 ‘윙크토끼’가 된 것도 그와는 무관한 일이다. “제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여섯 친구들은 나름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어요.”

드로잉으로 지은, 증식하는 또 하나의 세계

2001년 바흐의 평균율을 들으며 ‘홀린 듯이’ 완성한 몇 권의 시안북. “평생 내가 그릴 시안을 다 만들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굵기(1000페이지)’만 작정하고 시작한 드로잉이었다. 파란색 연필심을 끼운 샤프를 들고, 노트를 펼치고, 마지막 장까지 그렸다. 그것이 ‘연결’ 시리즈다. 모스 암호문 같은 ‘연결’ 시리즈를 감상하면 이것은 사람이 개입해서 이루어진 질서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자가 증식해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완벽한 균형미는 머릿속 계산으로는 불가능하다. 작품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작가조차 모르게 생성한 캐릭터들의 행위와 말들. 알려고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다. 개미나 벌의 삶을 관찰하듯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오랫동안 탐구해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인지도. “내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나이가 두 살이라고 생각해요. 내 안에서는 작품이 많이 성장해 있지만 관객들에게는 이제 시작이니까요. 이해도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안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두 살인 경우가 많아요. 자기 작품을 단 번에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무리지요.”

[0 연결page161-162] 2001
9cmx18cm, 혼합재료

홍학순은 얼마 전까지 ‘우유각 소녀’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얼굴이 네모나게 각이 지고, 예쁜 여자만 보면 얼굴이 빨개진다’는 의미에서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의 팬이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 모두가 그를 ‘우유각 소녀’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본명’ 그대로 홍학순이다. “그 이름을 진짜 ‘우유각 소녀’에게 넘겼어요. 2009년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우유각 소녀를 등장시켰는데, 그 때 저와 분리되었죠.” 드로잉 아티스트인 홍학순은 2009년 영화 아카데미에 입학, 애니메이션에 도전했다. 삼십대 중반 ‘마흔쯤에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그걸 ‘짤막하게나마’ 서른아홉에 이룬 셈이다. 영화 아카데미에서 만든 졸업 작품이자 애니메이션으로는 첫 데뷔작인 [띠띠리부 만딩씨]는 인디 애니페스트에서 ‘인디의 별’을 수상했다. 서로를 환대하는 ‘반가운’ 상황이 드러나는 이 행복한 애니메이션을 본 관객들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삐리리한’ 감수성에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것을 모티브로 한 24부작 2D 애니메이션이 제작될 예정이다. 회당 5분짜리 영상물로서 일단 올해 목표는 10편이다.

동그라미라는 소우주에 대한 탐구

그는 새로운 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가장 새로운 것이야말로 기존의 것을 가장 많이 참고한 것이라고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 것은 거의 다 따라해 봤어요. 그게 다 소스가 됐죠.” 그가 참고한 것은 그들의 ‘선’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그들이 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관점, 구축해가는 과정, 태도를 파고들었어요.” 그 때쯤 아주 조금은 이 동그라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관객의 나이가 두 살밖에 안 되는지도 수긍이 갔다. 그는 종이 위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세계를 짓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소우주’를 관통할 수 있는 짜릿한 소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 중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채찍질이 될 만한 “난처하고, 까다롭고, 어려운 질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제 고작 두 살밖에 안 된 관객이 이 복잡한 세계를 판독하는 날, 동그라미의 조물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행복)해할 것이다. 그렇게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로 복귀하고, 동그라미로부터 환태한다. 이 흥미로운 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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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순 (1973 ~ )
1973년 출생. 계원 디자인 예술대학에서 미디어아트,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1998년부터 ‘핵페이지’라는 드로잉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현재 [전우주의 친구들]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winkrabbi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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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1. 02. 15.

출처

제공처 정보

  • 김윤경 칼럼니스트

    칼럼니스트. 문화와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인터뷰를 했다.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현하고 상상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 자료협조 계간 <그래픽> http://blog.naver.com/graphicmag 로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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