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사람 맛난 인생] “놀부를 위해 내가 차린 밥상이 수천 번은 넘을 것”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미수(米壽·88세)를 코앞에 둔 할머니가 밥상을 차린다.

“안성 유기에 통영 칠판, 천은 수저까지 모조리 꺼내 놓고, 얼기설기 송편을 쌓고 절편은 각 잡아 올린다. 고기 산적도 부족해 쇠고기 간천엽을 양편으로 나눠 낸다. 인삼채·도라지채·녹두채 등 온갖 나물을 연신 조물조물 무쳐 낸다. 영계찜·메추리탕에 상다리가 휘는데도 백탄 숯 청동화로를 준비해 불고기까지 ‘피~, 피~’ 소리를 내며 굽는다.”

내용을 보니 간단치 않은 밥상이다. 아니 20, 30대 전문 요리사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단한 밥상이다. 그런데 몸집도 자그마한 할머니 혼자 힘들이지 않고 척척 차려 올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인 박송희(朴松熙·86) 명창의 얘기다. 눈치챘겠지만 진짜 밥상을 차리는 건 아니다. ‘흥보가’의 한 대목인데, 뒷날 박씨제비 도움으로 부자가 된 흥부의 집을 찾아온 놀부를 위해 흥부의 처가 밥상을 차리는 대목이다. 휘모리장단에 맞춰 신명나게 부르는 박 명창의 소리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해 풀어쓴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몹쓸 놈의 놀부를 위해 내가 차린 밥상이 수천 번은 넘을 겁니다. 무대에 올라가 한 것은 양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면 수가 나오겠지만 나 홀로 연습한 횟수, 제자들을 가르치며 부른 것까지 합치면 수를 셀 수 없지요.”

서울 서대문구 홍제3동의 ‘송설당 판소리 전수소’. 문턱을 넘어 나온 박 명창의 음성이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강물도 깰 것 같다. 나이로 따지면 이미 뒷방에 물러앉아 있을 때인데도 온 힘을 다해 제자들과 소리 공부에 열중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했지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요. 이 말씀을 살짝 바꿔서 소리 공부를 하는 제자들에게 ‘하루라도 소리를 안 하면 목에 가시가 돋는다’고 얘기해 주지요.”

박송희 명창 앞엔 ‘현역’이란 단어가 따라 다닌다. 1927년생, 우리나이로 올해 여든일곱이다. 대중가요계의 ‘전설의 디바’로 불리는 패티김(1938년생)도 올 10월 공연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러니 그녀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박 명창에게 ‘현역’이란 수식어는 그 어떤 훈장보다 대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제자들이나 후배들이 예우 차원에서 붙여준 게 아니다. 실제 아직도 무대에 선다. 올 6월에도 남산국악당에서 제자들과 함께 ‘흥보가’ 발표회를 가졌다.

“박송희 선생의 소리는 직선적이고 남성적입니다. 웅장하고 깊숙한 소리의 맛을 제대로 냅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해 들을 때마다 감탄합니다.” 한국고전문학연구회 회장을 지낸 김병국 서울대 명예교수의 칭찬이다.

아직도 젊은 사람들이 흉내 내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우렁찬 목소리. 혹시 따로 두고 먹는 보약이나 음식은 없는지 궁금했다.

“보약? 음식? 따로 없어요.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처럼 매일 꾸준히 소리를 하면 언제 어느 때 무대에 서도 걱정할 게 없어요. 그런데 소리는 가슴이나 목으로 내는 게 아니고 배에서 뽑아내야 해요. 소싯적 발성이 나쁘면 스승님들한테 ‘이놈아, 목젖 튀어나온다’란 지적을 듣기도 했지요.”

배고픈 제자 위해 ‘덴뿌라’ 사 주던 스승

소리에 입문한 지 70년이 넘도록 목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고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니 대단한 연습 벌레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판소리 완창처럼 큰 공연이 있을 땐 전날 아침 초란(날계란을 식초에 삭힌 것)을 준비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시고 잤다고 했다.

고향이 전남 화순인 어린 시절 박송희는 봄이면 어른들을 따라 진달래가 핀 뒷산으로 화전놀이를 자주 따라다녔다. 그곳에서 장구 장단에 맞춰 노래도 하고 춤도 췄다. 곧잘 리듬을 타고 흉내도 잘 내 어른들의 주목을 받던 재간둥이였다.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에 나선 것은 열네 살 때다. “소리를 배우면 살기가 낫다”며 어머니가 광주에 있는 권번(券番)에 입학시킨 것이다. 권번은 일제강점기에 전통 예술을 가르치는 훈련소 같은 곳. 여기에서 박송희는 2년간 소리는 물론 가야금·승무·검무·꽃춤도 배운다.

“권번을 졸업하고 ‘동일창극단’에 들어가 임방울·이동백·송만갑 등 쟁쟁한 명창들과 함께 전국 공연을 다녔어요. 열아홉 살에 극단이 만주로 간다기에 고향집으로 돌아왔지요.”

고향에 내려와 시골을 돌며 계몽운동 차원의 소리를 했다. 그러다 1년 넘게 그녀의 아버지를 쫓아다니던 전남 순천의 서정갑이란 사람과 결혼한다. 풍족하지 못한 살림, 밖으로 나도는 남편으로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박 명창의 인생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스승 박록주(朴綠珠, 1905~1979) 명창이다. 그가 앉은 자리 어깨 넘어 벽에 붙어 있는 낡은 흑백사진의 주인공이다. 주변에 자신과 제자들의 공연 모습이 담긴 컬러 사진도 있지만 박록주 스승의 사진이 가장 크다.

“시골에서 지내다가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난 뒤 아이들 넷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소리는 하고 싶고…, 무작정 선생님에게 찾아갔어요. ‘소리를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소리 공부하는 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노. 소리만 잘하면 됐제’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그는 스승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곁에서 소리를 배우고 보필한다. 아니 돌아가신 스승의 나이를 훨씬 지난 지금도, 가슴에 그녀를 묻고 지내고 있다.

“박록주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인터뷰 기사를 실을 때 선생님이랑 나랑 찍은 사진도 꼭 넣어줘야 해요.” 빈말로 건네는 말이 아니다. 억지라고 부리고 싶은 표정이다.

스승 박록주와 제자 박송희. 두 명창 사이에 그들을 끊지 못하는 두 가지 음식이 있다. 하나는 예전에 ‘덴뿌라’라고 말하던 어묵이다.

“30대 중반이었으니 가능했겠지만, 아이들 밥 챙겨 주고 저는 수돗물로 끼니를 때우고 소리 공부하러 갈 때가 많았어요. 밖에서 ‘덴뿌라 사세요’란 다라이(대야) 장사 아줌마 목소리가 들리면 안으로 불러들였죠. ‘너 이것 묵어봐라, 맛있다’라면서 사 주는 거예요. 그것 두어 개 얻어먹고 나면 들어갔던 눈이 나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든든했어요.”

스승 역시 넉넉한 살림이 아닌 데다 며느리 밥을 얻어 드시던 때인지라 굶은 제자 밥 챙겨 먹일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제자의 자존심도 배려해야 했던 것이다. 박송희 명창에게는 지금도 덴뿌라는 스승의 마음이 담긴 ‘눈물의 빵’으로 남아 있다.

또 하나는 파인애플 통조림. 스승이 병환으로 말년을 힘들게 지낼 때 제자는 독립문 집에서 면목동 댁까지 매일 문안을 다녔다. 이때 자주 사 가던 것이 파인애플 통조림.

“음식 넘기는 게 쉽지 않을 때라 국물만 따라 드리는데 아주 맛있게 드셨어요. 그런데 남은 파인애플 건더기를 놓고 나올 때면 집에서 쫄쫄 굶고 있을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박 명창에게 파인애플 통조림은 자식들을 뒷전에 둘 정도로 크나큰 보은의 정성이었던 것이다.


박 명창의 ‘흥보가’는 스승 박록주에게 고스란히 전수받은 동편제 소리다.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것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씩씩한 소리를 내는 게 특징이다. 박 명창의 소리를 들으면 받아 적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내용이 전달되는 이유다.

“판소리는 흥얼거림이 들어가면 안 되고 쭉쭉 뻗어나가야 합니다. 어단성장이 분명하고 대마디대장단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얘기랍니다.”

힘이 빠질 때까지 소리 하고 싶어

박 명창의 설명 안에 들어 있는 ‘어단성장’과 ‘대마디대장단’이 동편제의 두 가지 핵심 포인트. 어단성장(語短聲長)은 첫음절은 짧게 발음하고 마지막 음절을 길게 뽑는 것으로, 구절 끝마침을 쇠망치로 끊듯이 내는 소리다. 대마디대장단은 융통성 없게 장단의 주박(主拍)에 꼭 맞춰, 감정을 절제해 가며 멋없게 부르는 소리를 말한다. 그래서 동편제는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고, 여성적이기보다 남성적이고, 슬픈 가락(계면조)이기보다 활기찬 가락(우조)이다. 이 때문에 소리꾼의 풍부한 성량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무대에 서는 일이다 보니 젊었을 때 이런저런 유혹도 많았다. 그런데 박 명창은 네 자녀의 엄마로 꿋꿋하게 자신을 지켰다. 홀로 네 아이를 돌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창극단 시절엔 큰아이를 데리고 지방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기저귀가 마르지 않으면 잠잘 때 자신의 배에 감아 말리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가 힘들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고 잠자는 모습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우리 자식들에게 엄마는 ‘항상 깨어 있는 긍정의 화신’입니다.” 막내딸이면서 제자로 소리 공부를 하고 있는 서진경 씨의 말이다. 그의 기억 속엔 늦은 밤 자신의 머리맡에서 가만가만 소리 공부를 하던 엄마의 모습도 있다. 공연장의 우렁찬 소리를 떠올릴 수 없는 ‘속삭임’이었단다.

엄마 박송희에게 밤 12시에 빨래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 아이 도시락 싸는 일은 일상이었다. 소풍 가는 날 김밥도 직접 말았다. 가장·주부·부모 역할까지 하다 보니 하루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그래도 곧게 잘 자라 주는 아이들이 있어 고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보면 남편에 대한 불만도 많았을 텐데 “이렇게 소리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그 사람 덕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한다. 아내 박송희의 모습은 그랬다.

‘박송희 여사를 40년간 지켜봐 왔지만 거짓도 없고 요사도 없고 허세도 없으며 남을 헐뜯는 법도 없고 양보할 줄도 알고 우리나라 여성 중의 여성이지요.’ 박 명창이 1993년 첫 ‘흥보가’ 제자 발표회를 할 때 고 김소희 명창이 써준 축사 내용의 일부다. 여인, 아니 인간 박송희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음식 솜씨가 궁금했다. “음식? 소리만큼 큰 마음먹고 했으면 잘했을 걸!”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한 답을 한다.

요즘 무대에 서면 주로 제자들과 ‘흥보가’를 연창한다. 그에 앞서 반드시 ‘인생백년’이란 단가를 부르며 목을 푼다. 인생백년은 박록주 스승이 타계하기 전날 남긴 글에 자신이 가락을 붙인 것이다. “인생백년 꿈과 같네. (중략) 청춘세월을 허망히 말고, 헐 일을 허면서 지네보세”하며 스승과의 ‘사부’종사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일이다.

평상시 “쌀만 있으면 산다”고 말한다는 박 명창. 그 말은 욕심 없는 지난 세월 그녀의 삶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제 곧 여든여덟.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묻자 “힘이 빠질 때까지 소리를 할 것”이라고 답하는 박 명창. 그 말엔 큰 욕심을 부려 오는 세월을 꽁꽁 묵어 두길 기원한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