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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발굴 중인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의 소유권을 두고 사찰과 정부가 갈등을 벌인 적이 있다. 사안에 따라 상반된 판결이 나오는 등 아직 명확하게 결론지어진 건 아니지만, 이따금 절을 찾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다. 특히 대규모 중창불사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달라지는 절 주변의 경관을 보노라면, 출토 유물을 넘어 절이 과연 특정 종단의 것이냐는 '불경스러운' 생각마저 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은 종단의 소유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절을 종단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절은 종교적 공간임과 동시에 2천 년 가까이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 곧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전국 방방곡곡 절이 소유한 수많은 유물과 유적들을 국가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지정 보호하고 있는 것일 게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3층 법당 미륵전과 방등계단은 금산사를 대표하는 보물이다. 이들만으로도 금산사는 충분하다.
▲ 금산사의 두 상징물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3층 법당 미륵전과 방등계단은 금산사를 대표하는 보물이다. 이들만으로도 금산사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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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김제 금산사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공교롭지만 갈 때마다 굴착기와 출입금지 팻말이 보였다. 절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경내는 시나브로 넓어졌다. 워낙 터가 넓어 큰 건물 몇 채 더 짓는다고 답답한 느낌은 솔직히 없다. 더구나 기존의 건물들 대부분이 원래 제 자리인 것도 아니어서 우후죽순 세워지는 새것들을 딱히 나무랄 것도 못 된다.

주 법당인 대적광전과 미륵전, 보제루 등에 에워싸인 안마당 크기만 해도 웬만한 절보다 넓다. 다층탑과 석등, 석대좌 등 석물들과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황량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오죽하면 안마당을 동서남북 방향의 십자로 가로질러 궁궐의 어도처럼 넓고 반듯한 돌길을 냈을까. 덕분에 비온 뒤 질퍽거리는 경내를 흙 묻히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안마당의 서쪽에 자리한 대장전 건물도 본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3층의 미륵전 옆에 있었던 걸 옮긴 것이고, 그 앞 석등 역시 함께 이사해온 것이다. 대적광전 뒤 조사전과 함께 호위무사처럼 세워진 나한전은 원래 방등계단 위에 있었던 것이고, 옮겨온 그 자리에는 통도사 등에서 벤치마킹한 적멸보궁이 세워졌다. 하긴 안마당의 석물들조차 제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대적광전 앞에 '흩어져 있는' 석물들은 휑한 안마당을 나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모두 원래 제 자리는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 금산사 안마당의 석물들 대적광전 앞에 '흩어져 있는' 석물들은 휑한 안마당을 나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모두 원래 제 자리는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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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금산사는 절이라는 느낌보다 거대한 노천 불교 박물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인근의 절터 등에서 가져와 성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경내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수만도 무려 11점이나 된다. 금산사에서는, 속된 말로, 발에 차이는 것이 국보고 보물이다. 모르긴 해도, 불국사나 실상사 정도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듯하다.

아무리 절집 배치의 '태생'이 그렇다 해도, 금산사 주변의 경관 변화는 낯설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하다. 유서 깊은 큰 절이라는 느낌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어수선한 풍경 탓이다. 공사 중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향후 완공되면 지금보다 더욱 시끌벅적해질 것만 같다. 절 아래의 북적이는 식당가와 경내의 '심리적'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고나 할까.

1킬로미터 남짓 주차장에서 경내에 이르는 길은 일찌감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자동차 차지가 됐다. 다만 주차장은 무료지만, 매표소를 지나 차를 가지고 경내에 들어가자면 돈을 내야 한다. 아예 입구에서부터 유료와 무료 팻말을 세워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운전자들을 '배려'하고 있다. 자동차에 밀려난 사람들을 위해 그 길과 나란히 시멘트로 포장된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보행자들을 위한 산책로를 닦을 자리가 부족해서였을까. 과거 길을 따라 돌돌거리며 굽이 흐르던 계곡은 물길을 곧게 펴는 직강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자리를 시멘트 블록으로 비스듬히 덮고 있었는데, 실개울처럼 흐르는 물의 양으로 보아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건 아닌 듯했다. 분명 절로 향하는 길이되, 초행길이라면 과연 절로 가는 길 맞나 싶은, 그런 길이 돼버렸다.

돌과 물풀 사이를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하긴 경내에서 채 200미터도 떨어져있지 않은 길가에 야영장이 운영되고 있는 현실이니 애초 산사에 오르는 고즈넉함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곳 야영장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금산사 홈페이지로 곧장 연결되는 걸로 보아 절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수익사업인 듯하다.

겨울이라는 계절 탓인지 작동이 멈췄는데 바위 벼랑 맨위쪽은 돌 질감의 플라스틱을 얹어놓은 듯 엉성하다. 아래는 직강공사 중인 금산천 계곡.
▲ 금산사 입구의 인공폭포 겨울이라는 계절 탓인지 작동이 멈췄는데 바위 벼랑 맨위쪽은 돌 질감의 플라스틱을 얹어놓은 듯 엉성하다. 아래는 직강공사 중인 금산천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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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이 시멘트로 덮이는 판에 주변이 멀쩡할 리 없다. 홈페이지에서조차 자랑하는 '14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행 도량'의 코앞에 생뚱맞게 인공폭포가 만들어졌다. 그나마 바위 절벽의 느낌을 살리려 애썼지만, 하도 엉성해서 언뜻 보면 플라스틱처럼 보인다. 날이 풀릴 때쯤 모터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쏟아지게 하면 질감이 가려질지도 모르겠지만, 흉물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인공폭포를 지나 경내에 조금 못 미친 길가엔 큼지막한 한옥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잘게 칸이 나뉘어져 있는 구조와 규모로 보아 언뜻 요사채 같다. 절 관계자에게 용도를 캐물으니, 템플스테이를 위한 체험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템플스테이를 매일 상시 운영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린 경내에는 아직 단청조차 입히지 않은 새뜻한 대형 기와집이 여럿이다.

압권은 금산사의 일주문 역할을 하던 견훤석성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리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던 무지개문(홍예)은 이제 어엿한 성문으로 탈바꿈되어 그 어떤 역사적 상상력도 허락하지 않는다. 급기야 견훤석성이라는 옛 이름도 사라지고, '개화문(開化門)'으로 새롭게 명명되었다.
사실 견훤석성은 애초 모든 게 '추정'일 뿐이었다. 견훤이 세웠을 거라는 주장과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왜군에 맞서 쌓았을 거라는 주장이 맞서는가 하면, 절의 방어를 위해서 만든 거라는 주장과 산성의 외성 역할을 했다는 주장 등, 시기든 용도든 모양이든 어느 하나 분명히 밝혀진 게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견훤석성은 더욱 돋보이는 금산사의 보물로 자리매김했다.

정답이 없는 만큼 누구나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고, 어른이고 아이고 오며 가며 자신들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십년 전쯤 이곳에 함께 답사를 왔던 고2 아이는 이 성을 두고,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되었을 거라고 주장하며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였지만, 듣고 있던 모든 친구들의 박수를 받았다.

"처음 쌓은 건 신라 말이고, 고려시대에 크게 고쳐지었다가, 일제강점기 허물어진 게 틀림없어요. 신라 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왕실의 비호를 받은 절을 공격하기도 했다는데, 이를 막기 위한 자구책을 성을 쌓았던 거죠. 고려는 불교 국가였으니, 교세를 확장하면서 당연히 기존의 건물을 보수했을 테고요. 이후 일제가 신작로를 내고 곳곳에 신사를 지으면서 필요한 자재를 가까운 절이나 성벽 같은 곳에서 가져다 썼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절과 직접 연관이 없는 이런 성벽이 맨 먼저 일제의 사냥감이 됐을 거예요."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금산사의 독특한 볼거리였던 견훤석성은 '개화문'으로 재탄생했다. 이름도 모양도 주변 풍광과 어울리지 못하고 무척 데면데면하다.
▲ 견훤석성이 사라진 자리의 개화문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금산사의 독특한 볼거리였던 견훤석성은 '개화문'으로 재탄생했다. 이름도 모양도 주변 풍광과 어울리지 못하고 무척 데면데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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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새뜻하게 지어놓았을까. 매표소의 직원에게 찾아가 부러 여쭤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몇 해 전 무지개문 아래로 한 탐방객이 지나가다가 부서진 돌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칠 뻔했단다. 붕괴 위험이 크다고 판단한 절과 당국은 전면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사료를 수소문했다고 한다. 그때 근거로 제시된 것이 19세기 말에 그려진 소치 허련의 <금산사> 그림이다. 그림의 맨 아래 부분에 누각을 갖춘 견훤석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증할 수 있는 그림이라도 남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겠지만, 왠지 아쉽다. 그냥 무너지지만 않도록 보수할 수는 없었을까. 성벽을 당장 해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위험했던 것일까. 옛 견훤석성의 석재는 속에 꽁꽁 감춘 듯 단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무지개문부터 성벽, 누각까지 모든 게 새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지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개화문'이라는 이름도 새것이다. 당시 금산사의 조실 스님이 직접 지었다는데, 금산사가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취지야 나무랄 데 없지만, 그것이 옛 견훤석성이 담고 있는 역사와 얼마나 부합될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개화문은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는커녕 천년 고찰이라는 이름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은 데면데면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절 안에 야영장을 만들고, 멀쩡한 계곡에 콘크리트를 치는가 하면, 느닷없는 인공폭포를 만들어 시끌벅적한 '유원지'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일까. 템플스테이를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절 안팎에 건물들을 채우고, 세월의 더께를 입은 미스터리한 성문 유적을 하루아침에 새것으로 덧씌워버리는 결정은 대체 누가 한 것일까. 물론, 이곳 금산사만의 모습은 아닐 테지만, 자꾸만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과 겹쳐지는 건 나만의 억측일까.

절이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입지와 풍광, 조건들을 여가활동과 복지 차원에서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자는 취지라면 딱히 반박할 능력은 없다. 아무리 수행 도량이라고는 하나 절을 운영하기 위한 수익사업이 필요하다는 점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나 산사의 고즈넉한 정취만큼은 간직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절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템플스테이를 홍보하는 현수막에 적힌 '나는 쉬고 싶다'라는 글귀가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과연 지금 금산사에, 나아가 '늘 공사 중인'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에 진정한 '쉼'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태그:#금산사, #템플스테이, #견훤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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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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