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노무현이 '막가파' 국정원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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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3.06.29. 오후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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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희동 기자]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25일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1면
ⓒ 이주영

결국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됐다. 고인을 욕보이며 꽤 오랫동안 '종북몰이'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던 보수세력들의 '절대반지'가 드디어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록을 대하는 보수세력들의 태도는 일사불란하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조중동의 6월 25일자(날짜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닐 거다) 신문 1면 제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으로 도배됐으며, 새누리당은 민주당에게 사과하라고 '거품'을 물었다.

盧 "NLL 바꿔야… 金위원장님과 인식 같아" <조선일보>
"NLL 바꿔야… 난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 <중앙일보>
 盧 "NLL 바꿔야… 위원장님과 같은 인식 <동아일보>

만천하에 공개된 보수세력의 '절대반지'

사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된 한 사람으로서 분노보다는 착잡한 마음이 앞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해석은 둘째 문제고 무엇보다 이번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가 국익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 가늠할 수 없는 파괴력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정상회담이라 하면 외교의 꽃 중의 꽃이다. 두 국가의 정상이 만나 이야기하는 만큼 그 시대 그 사회의 모든 역량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정상들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쥔 채 상호 간에 머리 싸움을 할 것이며, 이를 온갖 현란한 외교적 수사들로 포장할 것이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전장인 셈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와 같은 정상회담을 한낱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렸다. 2007년 남북한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함으로써 다른 나라에 대한민국은 정상들 간의 비밀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언제든지 공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위키리크스나 해야 하는 일을 국가의 정보조직이 버젓이 자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비밀을 지킬 수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과연 이런 국가를 상대로 어떤 국가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며, 허심탄회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국가 지도자들의 회담 내용을 낱낱이 공개할 수 있다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그 내용을 반드시 알아야 할 회담은 수도 없이 많다. 박정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얼마나 굴욕적인 외교를 펼쳤었는지,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같은 골프 카트를 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양보했었는지, 또 박근혜 대통령은 2002년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등등.

그러나 궁금증에도 불구하고 그 회담들의 회의록이 공개되지 않은 것은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국익에 부합된다는 암묵적 합의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식 중의 상식을 정부가 나서서 깨버렸다.

 지난 2005년 1월 20일 국정원을 방문, 직원들과 함께한 오찬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 노무현재단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NLL과 관련된 대화 내용이 그 동안 새누리당이나 보수 세력들이 호들갑 떨어왔던 것처럼 특별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제사회의 관례를 깨면서 회의록을 깠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등 보수 세력들이 그동안 그토록 주장했던 내용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회담 내용을 보건대 노 대통령의 NLL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차라리 외교적 수사에 가깝다. 어차피 남한 국민의 정서상 NLL을 현실적으로 양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던 바, 대신 NLL의 생성과정이 일부 잘못 되어 있음을, 그래서 북한이 억울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 줌으로써 자신이 북한의 목소리 또한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적절하게 드러낸 것이다.

또한 중국에 가면 마오쩌둥을, 베트남에 가면 호찌민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할 정도의 외교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노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미국에 대해 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을 지렛대로 '서해평화협력지대'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효과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번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 감각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장의 위기 모면을 위해서라면 국정원, 청와대, 새누리당 등이 국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었다. 그 동안 NLL발언과 관련하여 '노무현이 그래도 혹시' 했던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한 적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국정원이 아주 오래 전부터 국내 정치에 개입해 왔음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겨우(?) 댓글 알바 등 선거개입과 관련된 국정조사를 피하고자 비밀 정상회담 내용마저도 막가파식으로 공개하는 국정원. 그러나 중요한 건 그 회의록 내용이 아니다. 어차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인이 되었고 당시 정책은 폐기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국정원이 왜 이 시점에서 이런 무리한 물타기를 시도했느냐는 점이다. 과연 그들은 지금과 같은 역풍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 필자는 국정원이 NLL문제를 전격적으로 들고 나오기 전까지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물론 국정원의 댓글 알바 등이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은 분명했지만, 지난 대선 이후 아직까지 TV뉴스도 보지 않는 입장에서 다시금 현 시국에 강한 관심을 갖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 국정원이 공개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  지난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여야 의원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의 표지.
ⓒ 권우성

그러나 이번 국정원의 전격적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그런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나마저도 의심케 만들었다. 다시 뉴스를 보게 만들었다. 그들의 남북정상회담회의록 공개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의 외교적 관례를 뛰어 넘어 너무 큰 피해를 감수하는, 뜬금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소위 'NLL' 카드가 보수 세력의 '꽃놀이패'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민주당은 정치적인 파장을 우려해 회의록을 전격으로 공개하자고 할 수 없는 것이 뻔한 상태에서 지금까지 새누리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은 최고의 만병통치약이었다. 실체는 없지만 정국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소위 '반노'를 기반으로 '종북몰이'를 획책할 수 있는, 최소한 2014년 지방선거부터 시작해서 이후 총선, 대선까지도 효과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최고의 히든카드였다.

그런데 국정원이 갑작스레 이 카드를 뽑아버린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절대 부정'을 하며(절대 부정은 곧 긍정이다), 국정원의 자부심을 운운하며 말이다. 과연 언제부터 그들이 양지에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던 조직이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물론 보수 언론들은 그것이 맥락상 'NLL 포기'라고 우기지만 이제 NLL 카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괴력을 발휘할 수 없다. 내용 자체에 대한 해석이 하나의 논쟁이 되는 순간 그 절대적인 힘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포커 게임에서 소위 '뻥카'를 보자. '뻥카'를 까는 순간 그 플레이어는 무조건 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상대방은 그의 위협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척간두에 서 있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도대체 왜 국정원은 '꽃놀이패'까지 까 보이며 현재 시국을 물타기 하려고 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은 두 가지 뿐이다. 첫째, 현 정부가 아직 국정장악을 완벽하게 하지 못해 부서 간 혼선으로 우왕좌왕하고 있거나 둘째, 국정원이 댓글 알바와 관련되어 국정조사를 당하면 뭔가 더 큰 것이 발견되기 때문에 작정하고 물타기를 하려는 경우.

물론 우리가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가능성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를 1970년대로 되돌릴만큼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예 대놓고 국내 정치에 개입하였으며,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를 결정적으로 훼손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촛불을 다시 들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과거 '중앙정보부'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는 본능적인 불안감 때문이다.

설마 우리의 역사가 30년 전으로 돌아가겠냐고? 방심은 금물이다. 우린 벌써 그 가능성을 지난 5년 동안 충분히 확인했다. 

올 여름은 이후 5년의 역사가 좌우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야당은 중지를 모아 무엇을 지키기 위해 누구와 싸워야 할지 전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하며, 여당은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는 일을 스스로 멈추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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