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하도급 대금지급을 다른 하도급업체에 떠넘긴 한국HP

2019.08.11 20:28 입력 2019.08.11 20:29 수정

공정거래위원회가 11일 하도급업체를 상대로 갑질을 한 다국적기업 한국HP에 과징금 2억1600만원을 부과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컴퓨터·소프트웨어 등을 제작·판매하는 한국HP는 2011년 시스템통합 사업용역을 11개 하도급업체에 위탁했다. 그러면서 이 중 3곳에 하도급 대금 6억4900만원을 지급하지 않다가, 또 다른 도급업체에 ‘새로운 사업 도급’을 미끼로 대금지급을 떠넘겼다. 하도급업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금을 대신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행위로, 일벌백계해야 마땅하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원청업체의 갑질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행된다. 계약서를 발급하지 않고 구두로 계약을 맺는 경우는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이번 제재를 받은 한국HP도 하도급업체를 상대로 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하물며 소규모 업체는 오죽하겠는가. 또 원청업체는 하도급업체에 ‘사업을 준다’고 유인해 계약도 체결되기 전에 돈을 들여 사업에 착수하도록 한다. 물론 사업이 어그러지면 손해는 하도급업체가 부담해야 한다. 또 부당하게 낮은 수준으로 사업 대금을 정하거나 잔금을 줄이고, 회식비나 출장비를 요구한다. 그렇더라도 하도급업체는 거절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혹시나 사업 기회가 사라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갑질은 연쇄적으로 IT 노동자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IT업계는 끝없는 하도급 구조다. 원청이 하도급을 주면 이를 받은 기업은 또 다른 업체에 하도급을 주고, 이렇게 4~5개 단계를 내려가면 예산은 반으로 줄어든다. 하도급·재하도급으로 갈수록 노동환경은 열악해진다. 하청의 먹이사슬 끝에 놓인 ‘저기술 IT 프리랜서’는 제대로 된 보상은 고사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살아야 한다. 원청업체가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하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들은 근로관계에 따른 종속성이 없고 노동법규 역시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IT 분야를 미래를 책임질 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학기술·정보통신기술 인재 4만명 양성을 말했다. 그런데 IT산업 현장은 4차 산업혁명의 메카라는 수식어가 부끄러울 정도다. 갑질이 횡행하고, 노동자의 처우는 바닥이다. IT강국으로 키우겠다는 구호에 앞서 전근대적인 관행의 혁파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혁신과 아이디어가 넘치고 미래산업이 만개하는 일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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