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에 에어컨 실외기 앞에서 수박을 팔던 시절

김명희 2019. 7.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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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16)
돌아보면 예전에 수박 장사를 했을 때, 인생에서 가장 많은 공부를 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사진은 경기도 수원시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수박을 옮기고 있는 상인들. [연합뉴스]

지난주에는 초복이 지났고 내일은 벌써 중복이다. 작열하는 태양을 보면 예전에 수박 장사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돌아보면 나는 그때 인생에서 가장 많은 공부를 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때 평택과 용인 외곽에는 전자부품조립 공장이 참 많았다. 그러나 잡상인 출입은 불가능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공장 담장 밖에 차를 세워놓고 수박을 팔아볼 생각이었다. 아무 경험도 없던 젊은 여자인 내가 난생처음 시도하는 일이니 얼마나 떨렸겠는가. 공장에 몸이 묶인 주부들은 시장 갈 시간이 따로 없었다. 나는 그 틈새시장을 노린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내 생각은 크게 빗나갔다. 무작정 수박을 잔뜩 싣고 공장 앞에 차를 멈췄는데 차 세울 곳이 없다. 공장 안팎 빼곡히 주차된 직원들 차는 자동차 매매장을 보는 듯했다. 정오가 다가오자 날은 푹푹 찌고 길가 풀잎도 삶아 놓은 듯 늘어졌다. 곧 점심시간이다. 주차할 곳을 찾는데 까칠한 경비가 다가와 화물차와 수박과 나를 번갈아 봤다.

수박을 잔뜩 실은 트럭을 공장 앞에 세웠다. 잘 익은 수박을 인심 좋게 잘라놓고 '디저트로 마음껏 드세요'라고 써붙였다. 이윽고 200여 명이 되는 직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진 pixabay]

“아줌마! 뭐야?”
“안녕하세요. 여기서 잠깐 수박 좀 팔려고 왔어요.”
“팔긴 뭘 팔아! 여긴 잡상인 금지요! 저기 써놓은 글씨 안 보여? 차 당장 빼요!”
“죄송한데요. 잠깐 점심시간만 얼른 팔고 싹 치우고 갈게요. 좀 봐주세요.”
“이봐! 누구 잘리는 거 보고 싶어? 봐주긴 뭘 봐줘? 당장 차 빼라면 빼! 잡상인 안돼! 당장 빼요! 알았어요?”

포기하고 물러서기에는 내 차에 팔아야 할 수박이 300통이 넘었다.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다가 공간을 비집고 장사 준비를 했다. 잘 익은 수박을 인심 좋게 잘라놓고 ‘점심 후 디저트로 마음껏 드세요’라고 써 놓았다. 이윽고 200여 명 되는 직원이 한꺼번에 쏟아져 식당으로 향했다.

“어머! 수박 장사 왔네!” “우와! 잘 익었네!” “먹어봐도 돼요?”
“물론입니다. 실컷 드세요. 수박이 아주 달아요. 식사하시고 와서 맛보세요. 하하하.”
“우와! 친절도 하셔라. 얼른 밥 먹고 올게요.”

당장 차를 빼라는 경비 아저씨의 말에 결국 자리를 옮겼다. 뜨거운 바람이 나와서 아무도 차를 세워놓지 않은 에어컨 실외기 앞에서 장사를 이어갔다. 환풍기 팬 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진 pxhere]

잡상인 들였다고 지적당해 화난 경비아저씨의 ‘당장 차 빼!’라는 고함을 들으며 수박을 팔던 나는 전자부품 운반차가 들어와 결국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어디로 옮길까 급히 둘러보니 딱 한 곳이 있었다. 바로 캐비닛처럼 거대한 에어컨 실외기 앞이었다. 그 앞은 뜨거운 바람 때문에 아무도 차를 세우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공장에서 수박을 팔려면 딱히 방법이 없었다. 차를 그 앞으로 옮겼는데 여러 대의 환풍기 팬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다시 장사는 이어졌지만, 삼복더위에 섭씨 70도가 넘는 환풍기 앞에서의 장사는 상상을 초월했다.

서른 초반 여자가, 땀에 다 젖어 속옷 자국이 선명하니 남자들은 수군댔다. 몹시 난처했지만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어린 남매를 떠올리는 순간 견디지 못할 일은 없었다. 화상 입을 듯 뜨거운 강풍과 열기 앞이었지만, 경비에게 쫓기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속은 편했다. 그렇게 시작된 수박 장사는 여름내 계속되었다.

다음번에는 경비 아저씨께 드릴 담배와 과일을 따로 준비했다. 어느 날 그곳 부장님이 내 운전석 안쪽의 책을 슬쩍 보았는지 내게 시인이냐고 물었다. 부장님은 의외라라는 표정이다. 그 후 공장장님과 사장님까지 과일을 샀다. 현금이 없어 과일 못 산다는 직원에게 부장님은 가불까지 해주며 수박들 사라고 홍보해주셨다. 식당 이모는 내게 점심 먹고 가라고 붙들었다. 나는 매번 공짜 밥을 먹었고 과일을 선물했다. 식당에서 공장 사장님과 식판 마주놓고 나누던 인생 대화도 좋았다.

내가 점심을 먹는 동안 공장장님과 부장님이 수박을 팔고, 가까운 곳으로 배달도 해주셨다. 숨이 멎을만큼 뜨거웠던 에어컨 실외기 앞이 내게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사진 photoAC]

잡상인 단속으로 악명높았던 공장이었지만, 그분들 모두 내 편이 되어있었다. 내가 점심 먹는 동안 공장장님과 부장님이 수박을 팔고 가까운 곳 배달도 해주셨다. 기적이었다. 처음에 내가 경비아저씨의 호통에 포기하고 돌아섰다면 이런 기쁨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숨이 멎도록 뜨거웠던 에어컨 실외기 앞은, 내게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변화는 만들어가는 이의 것임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가을에는 추석 선물용 과일을 직원 집마다 배달했다. 어느 날 배달이 밀려 고민하는데 공장장님이 자기 집 방향으로 갈 물건을 달라고 했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며 배달해주겠다고 덜어가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분 호의에 너무 놀랐고, 세상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의 편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배웠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에어컨 틀고 시원하게 원고를 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의 이 바람이 시원한 것은 결코 에어컨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날 내가 인내해 온 길 위의 날들이, 그것을 잘 이겨낸 내게 선사하는 값진 선물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실패와 고난을 겪는다. 시련 없이 평생 부유하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고난과 역경도 본인 생각하기 나름이다. 아무리 힘겨워도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맨홀 아래로 추락했더라도 누군가는 바닥을 보며 좌절하지만, 누군가는 맨홀 밖 눈부신 하늘을 본다. 희망을 보고 견딘다면 끝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힘겨운 오늘을 사는 이가 있다면, 힘내시라고 손잡아드리고 싶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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