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한량춤 대가 김진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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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3.04.05. 오후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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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춤의 대가, 김진홍 선생이 연습실에서 춤 인생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늘 그렇듯 연습하고 무대에 서는 춤꾼 인생 살고 있죠"

처음으로 무대가 아닌 곳에서 춤꾼 김진홍(77) 선생을 만났다. 무대 위에선 여전히 가벼운 몸놀림이지만 무대 밖에선 영락없이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이다. 도포와 갓을 벗고 마주한 선생은 구부정한 허리, 백발의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띈다. "할아버지 맞아요! 사람들이 할아버지라고 불러요"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는 김 선생. 춤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대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부산 춤판의 가장 큰 어르신으로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4호 한량춤 보유자인 김진홍 선생을 만났다.

■운명처럼 만난 춤, 평생 동반자가 되다!

"오늘처럼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몸이 좀 아파요." 부산 동구 범일동에 있는 '김진홍 무용학원'에서 만난 김 선생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6·25 전쟁 때 야전으로 위문 공연을 다니며 너무 고생을 한 탓이다. 당시 얻은 허리 디스크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이후 혹독하게 춤 연습을 하며 무리를 한 탓도 있다. 선생이 연습을 가장 큰 스승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몇 번이나 수술을 권유받았지만, 자연스러운 춤사위가 나오지 못할까 싶어 수술을 하지 않았다. 오롯이 춤을 위해 고통을 친구 삼아 살아왔다고 했다.

서울·전북 정읍 공연 예약
동래 민속관 전수자 교육 등
공연·제자 키우기 여념 없어
"이렇게 행복한데 더 뭘 바라?"


이처럼 김 선생에게 춤은 곧 자신이자 인생 전부이다. 사실 춤과의 첫 만남은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시작됐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는데 6·25가 터지자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고 손을 놀리기 싫어 타자를 배웠다. 그게 계기가 돼 미군 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고 미군 부대에서 처음 접한 춤 공연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후 우연히 알게 된 무용콩쿠르에 참가해 미군 부대에서 본 동남아 춤을 흉내 냈는데 덜컥 입상을 한 것이다. 춤을 제대로 배워 보지도 못한 그가 무용 콩쿠르에 입상을 했으니 그의 몸 안에는 이미 춤이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매방 선생이 찾아오셨더라고요. 당시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매방 선생을 통해 한국춤에 입문했죠." 이렇게 김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이매방류 승무 이수자 1호가 되었다.

■60년 부산을 지키며 김진홍류 춤을 완성하다!

한량춤 공연 장면.
이매방 선생을 만나 한국춤의 세계를 알았지만 김 선생은 이매방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만의 춤, '김진홍류'를 만들어 냈다. 복식과 춤사위가 현란한 이매방류와는 다른 묵직한 내면의 춤이었다. "안으로 삭일 수 있는 춤, 내면 세계가 깊이 있게 녹아 있는 춤이 바로 이 고장 춤이지." 60년 부산 춤판을 지킨 김 선생이 생각하는 부산춤의 정의이다.

부산 춤판의 가장 큰 어르신으로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이매방 선생에겐 섭섭한 마음도 있다. '나와 똑같이 추면 그것은 원숭이 재주일 뿐이야. 자기 것이 있어야지'라고 하시던 분이 언제부터인가 '저건 내 춤이 아니야'라며 관계에 선을 그어 버렸다. 사제 관계가 지나치게(?) 분명한 한국 전통 무용계에서 거장으로 커 버린 제자는 스승에게 더 이상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 선생은 "춤은 춤일 뿐이지. 종교나 정치가 아니야. 스승은 교주나 권력자가 아닌 거지. 스승이 '교주'처럼 군림하려고 하고 제자들이 교주처럼 받들어 주길 기대한다면 틀렸어. 그걸 벗어나지 못한다면 전통춤은 앞으로 길이 없어." 팔순을 바라보는 김 선생이지만 예술에 대한 생각은 요즘 젊은이 만큼이나 혁신적이다.

김 선생은 국악뿐만 아니라 라틴음악, 재즈, 힙합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했다. 전통춤뿐만 아니라 힙합댄스, 벨리댄스, 심지어 스포츠댄스도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 TV에서 방송되는 연예인의 스포츠댄스 도전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는 말도 한다.

■겸손과 절제의 미, 한량춤을 만나다!

김 선생은 이제 팔 하나만 올려도 그대로 춤이 되는 경지에 왔다. "반병신이 되어도 좋으니 춤만 잘 추게 해 달라"고 빌며 죽을 만큼 연습했더니 어느 순간 몸이 저절로 춤을 추고 있더란다. 춤을 추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돌아가 춤이 추어졌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자신을 지워 버린 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추는 춤, 겉멋이 아니라 속멋이 담긴 춤이 나왔다.
부산 동구 범일동 '김진홍 무용학원' 연습실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특히 그가 보유한 한량춤은 독보적인 자리에 올라 있다. 호방하고 남성적인 한량춤을 출 때는 시 한 수를 꼭 떠올린다고 했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가 되어 모든 걸 비워 낸 춤을 춘다. 애잔한 살풀이 춤사위 때는 모가지가 길어 슬픈 '사슴'을 떠올린다. 긴 장삼 자락 휘날리며 공중에 한 획 글씨를 쓰는 듯 몸을 움직이는 '승무'를 출 때는 조지훈의 '승무'를 생각한다.

"간혹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거요. 마치 '유체이탈'을 하는 것 같은 체험입니다." 아마도 김 선생의 춤은 이제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다.

해탈의 경지에 오른 그에게 요즘 춤꾼, 춤판은 어떻게 보일까. 다들 욕심이 너무 많고 그게 춤에 드러나서 문제라고 지적한다. 춤꾼들이 지식은 많아졌는데 개념은 없다고 꾸짖기도 했다. "예쁜 것만 보여 주려 하고 너무 많이 담으려고 해. 힘을 빼고 자기를 비워야 채울 수 있지. 기교로 춤을 추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춤을 춰야 해. 그래야 관객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어." 특히 김 선생은 '내가 최고'라며 다른 춤꾼을 인정하지 않는 춤판의 풍토가 아쉽다고 지적한다. 부산춤이 무엇인지, 부산문화의 색깔에 대해 고민이 적어지는 것도 안타깝다.
부산 동구 범일동 '김진홍 무용학원' 연습실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김 선생은 늘 그렇듯 연습하고 무대에 서는 춤꾼의 인생을 살겠다고 한다. 올해도 벌써 서울 국립국악원 공연과 전북 정읍의 '명인명무전' 무대가 예약돼 있다. 동래 민속관의 전수자 교육도 계속 이어진다. 춤을 출 수 있고 무대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데 더 뭘 바라느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사진=김경현 기자 view@

*사진 촬영을 위해 연습실 무대로 나서던 김 선생은 장시간 인터뷰 때문에 거동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도포를 입고 부채를 들고 한량으로 변신한 김 선생은 갑자기 날기 시작했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사뿐사뿐 무대를 뛰는 거장의 몸짓에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건강을 염려한 기자가 "대충 추시는 흉내만 내셔도 된다"고 말렸지만 춤에 빠진 선생을 막을 수가 없다. 대가의 몸짓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영광을 주신 김진홍 선생에게 감사 드리고 싶다. 



김진홍이 걸어온 길

1935년 경남 하동 출생

1955년 부산 동구 범일동 김진홍 무용학원 개설

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무용부문 장원(승무)

1987년 부산광역시 문화상 수상

1991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93년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상임 안무자

1994년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장

1996년 부산동아시아 경기대회 및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 문화식전 전문위원

2008년 부산예술상 대상

현재 부산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 한량춤 예능 보유자

㈔우리춤협회 고문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 고문

부산민속예술 보존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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