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밥상을 넘어선 쌀

2017.09.06GQ

일본의 쌀 소비 행태는 핀메랭 그래프 각도만으로는 미처 다 알 수 없다.

일본인들이 꼽은 가장 살고 싶은 도시, 기치조지. 작년 봄, 그곳에서 내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아기자기하게 예쁜 카페도 개성 넘치는 편집숍도 아닌 한 광고판이었다. “함께 밥 먹는 사이가 되고 싶은 그 사람에게 하얀 쌀을.” 처음 본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아래로 내려가 문구를 읽어보니 화이트데이를 맞아 선물용 쌀을 판매한다는 광고였다. 연인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화이트데이 문화를 만들어낸 나라가 바로 일본인데, 이런 마케팅을 펼친다고 생각하니 왠지 낯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화이트데이만 되면 쌀 소비를 촉진시켜야 한다며 백설기 나눠주는 행사를 펼치는데, 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뜯어보니 이 광고는 공익 광고가 아니었다. 라이프스타일 숍의 광고였다. 성인 두 명의 한 끼 분량인 쌀 300그램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포장한 상품이 매장 입구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이 가장살고 싶다는 동네에서, 그것도 최신 유행을 이끈다는 라이프스타일 숍에서, 선물용 쌀을 판다니…. 연인에게 ‘쌀’을 선물하는 행위에 ‘깊은 관계를 소망한다’는 의미를 부여해 쌀을 트렌디한 선물로 업그레이드시킨 건 꽤 로맨틱한 마케팅이었다. 계산대에서 선물용 쌀을 사가는 남자를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화이트데이니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사탕이나 다른 선물을 받으리라 기대했을 여자에게 쌀을 건네는 남자. “새로운 품종의 맛있는 쌀이라는데 너와 함께 먹고 싶어서”라며 직접 밥을 지어준다면? 생각만 해도 새롭다.

선물용 쌀을 파는 건 기치조지만이 아니다. 올봄에 들른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의 ‘키쿠타야 미곡점(菊太屋 米穀店)’에서도 온갖 ‘데이(day)용’ 쌀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어머니(아버지)의 날’에는 효도의 의미를, 새해에는 좋은 쌀로 건강을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아 맞춤형 마케팅을 하면서 말이다.

요즘 일본의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아기 쌀’이 인기다. 일본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주변에서 많은 선물을 하는데, 받은 선물의 약 35~50퍼센트 정도 금액을 답례품으로 보내는게 풍습이다. 요즘 들어서는 아기 얼굴이 프린팅된 쌀 포장지에, 아기가 태어났을 때 체중만큼의 쌀을 담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란다. 고급 백화점에서는 출산한 여성에게 보내는 쌀 선물 세트를 주문 판매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쌀 선물이 대중적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진 않다. 과거 쌀이 귀하던 시절에는 출산한 산모한테 이웃들이 쌀을 선물하는 전통도 있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말이고,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쌀이 일본인의 식문화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맞지만 예전만은 못하다. 실제로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쌀 소비량이 매년 줄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주식용 쌀은 소비자의 입맛이 서구화 되고 밥 대신 빵이나 면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연간 약 8만 톤씩 감소하는 추세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최근 쌀 시장에 부는 이 새로운 바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심의 농산물 직거래 장터인 아오야마 파머스 마켓을 이끌며 일본 농업계의 스타가 된 타나카 유스케 미디어서프 부대표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동일본 지진 이후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게 건강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인식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퍼졌다”면서 “특히 주식인 쌀은 다른 식재료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만큼 어떤 쌀을 사서 어떻게 밥을 지어 먹는지 SNS에 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요즘 일본에는 돈을 더 지불하고서라도 남다른 또는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음식을 먹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런 소비자를 잡으려고 라이프스타일 숍들은 선물용 쌀 상품을 넘어 아예 음식을 테마로 삼은 매장을 열었다. 물론 그 매장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쌀이다.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은 도시 곳곳에 ‘Meal Cafe MUJI’라는 카페를 열고 음료와 함께 쌀밥도 판다. 살롱 아담 엣로페 SALON adam etrope는 ‘맛있는 패션’을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제안하며, 긴자 매장에 일식 레스토랑 긴자 사보우 GINZA SABOU를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직원들이 직접 재배한 쌀인 ‘유키호타카’로 밥을 짓는다.

니혼바시의 복합 쇼핑몰 ‘코레도 무로마치’에 있는 ‘두 타벨카 Do TABELKA’라는 카페에서는 아예 쌀에 따라 음식 가격이 달라진다. 프리미엄 쌀로 식사하고 싶으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계산대에는 300그램으로 소포장한 프리미엄 쌀을 비치해놓고 별도로 판매한다. 담당 매니저 말로는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하루에 1~2개씩은 나간단다.

쌀 소비 문화의 정점은 아코메야 AKO MEYA다. 우리나라에도 점차 알려지고 있는 이곳은 긴자 쇼핑거리에 위치한, 쌀을 테마로 만든 다이닝 라이프스타일 숍이다. 일본 라이프스타일 산업의 대표 업체인 사자비리그가 만든 곳으로 요즘 도쿄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이곳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쌀 중 맛있는 쌀 20여 가지를 선별해 판매한다. 어떤 쌀을 골라야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매장 내 밥 소믈리에가 고객이 원하는 밥 스타일에 맞춰 적합한 쌀을 추천해준다. 결정 장애 손님을 위해 한 입 먹어볼 수 있는 밥 샘플도 있다. 쌀을 고르면 직원이 즉석에서 원하는 대로 도정해주는데 도정한 정도에 따라 적합한 물의 양과 쌀 불리는 시간을 알려준다. 쌀을 보관하는 기간 및 온도도 상세히 설명한다.

이런 세심한 판매 전략 덕분인지 요리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와 이제 요리해 먹을 시간이 없는 비즈니즈맨까지 사로잡았다. 금요일 퇴근 시간대에 가게를 찾았는데도 20~30대 젊은 남자들이 북적였다. 잡지와 SNS를 통해 이곳을 알게 됐다는 나가타 사토시씨도 그중 한 명이다. 날렵한 외모의 그는 주중에는 주로 외식을 하고 주말에만 집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한 끼라도 좋은 쌀밥을 먹고 싶었단다. 그런데 뭐가 좋은 쌀이고 어떻게 지어야 밥이 맛있는지 몰라 밥 소믈리에가 추천해주는 대로 매주 아코메야에서 새로운 쌀을 사다 먹다보니 이제는 좋아하는 커피 원두를 고르듯 쌀을 골라 먹는 남자가 됐다고 한다.

그가 매주 새로운 쌀을 맛볼 수 있는 건 쌀을 조금씩 사기 때문이다. 소량 판매는 아코메야의 판매 원칙이기도 한데 매번 쌀을 주문하고 배송시키는 고객에게도 대량 판매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달 안에 다 먹을 수 있는 양만 구매하라고 권한다. 쌀을 신선식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신한테는 주로 1~2킬로그램을 추천한다. 대신 자주 오라고 쿠폰을 발급하는데, 1킬로그램을 구매할 때마다 도장을 찍어준다. 한 잔에 도장 하나씩을 찍어주는 한국의 커피숍 쿠폰과 똑같다.

일본에서 이런 트렌드가 움틀 수 있었던 것은 농가에서 쌀 품종의 다양성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일본 지진이 일본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 큰 충격을 줬다 하더라도 이런 트렌드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다. 색다른 맛 또는 스토리가 있는 프리미엄 품종이 있었기에 선물용 쌀이 나온 것이고, 쌀에 대한 취향도 다양한 품종의 쌀이 재배되고 있어 가능한 얘기다. 기껏 몇십 종류의 쌀로 취향을 논할 수 있을까? 일본은 쌀 품종만 100가지가 넘는다. 이 정도면 쌀 덕후가 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일본의 트렌드를 간접 경험해보고 싶다면 일본에서 소포장된 선물용 쌀을 사보길 권한다. 추천하는 쌀은 최근 인기가 높은 구마모토산 ‘모리노쿠마상’, 아오모리산 ‘세이텐노헤리키레키(청천벽력)’, 야마가타산 ‘쯔야히메’, 이와테현산 ‘히토메보레’, 훗카이도산 ‘나나쯔보시’와 ‘유메삐리카’다. 물론 전통 강호인 니가타 우오누마산 ‘고시히카리’는 언제나 최고다.

이렇게라도 품종에 따른 밥맛 차이를 경험해보면 우리나라 쌀을 먹을 때도 품종을 확인하게 되고 품종별 맛 차이를 알게 될 거다. 그러곤 “내 입맛에는 고시히카리보다 히토메보레가 맞아”라든지 “난 요즘 밀키퀸 먹어” 등의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일본이 쌀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듯 말이다.

일본에 대한 생각과 말과 행위에는 여전히 예민한 촉수가 도사리고 있다. 단순한 팩트일 뿐이라 해도, 가벼운 취향의 갈래라 해도, 거기엔 늘 개인적 입장과 맥락을 벗어난 것들이 고려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친일파’나 ‘한일전’ 같은 말이 여기에 조성해온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칫 덫을 피하느라 중심을 잃는 경우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두루 경계하며, 우리는 여행, 아이돌, 쌀, 자동차, 맛집, 로봇, 애니메이션 등 요동치는 단서를 두고 일본의 지금을 불쑥 들여다보기로 한다.

    에디터
    글 / 윤슬기('농민신문' 기자)
    사진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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