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의 ‘불만덩어리’ 얼룩무늬 배낭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무늬 배낭을 메고 휴가를 나온 병사들이 서울역 국군철도수송지원반 앞에서 공중전화를 이용하고 있다./이상훈 기자

·2011년 디지털무늬 전투복이 보급되면서 휴가ㆍ외출ㆍ외박 때 쇼핑백 지참 금지령이 내려졌다. 단지 신형 전투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울며겨자먹기로 자비를 털어 배낭을 구입해야 하는 병사들은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성격 별난 맏선임도 100일 휴가 전날의 이등병에게는 긴 잔소리와 욕설 대신 외출복의 줄을 잡아주는 친절을 보였다. 훈련소에서부터 받아온 편지뭉치나 선임병들이 맡긴 ‘오바로크’ 칠 전투복을 담아갈 때 쓰라고 쇼핑백 하나를 건네주는 센스도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린 휴가의 마지막 날, 부대로 복귀하는 병사의 손에도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쇼핑백 속 내용물은 대체로 ‘사제’ 양담배나 미녀들의 사진화보가 실린 남성잡지, 그리고 선크림과 보습크림 같은 화장품이 주종을 이뤘다. 선임병들이 사오라고 부탁하는 주요 품목들이었다. 휴가의 시작과 복귀가 엇갈리는 터미널에서 제각기 쇼핑백 하나씩을 든 병사들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쇼핑백을 든 군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각군 일선부대에서 휴가 또는 외출·외박 시 쇼핑백 지참을 금지하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간단한 소지품을 넣고 다닐 도리가 없어진 병사들은 대신 디지털 얼룩무늬 배낭을 메고 위병소를 출입하게 됐다.

문제는 이 배낭을 병사 개인이 주머니를 털어 사야 한다는 점에 있다. 2011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디지털 무늬의 신형 전투복에 맞게 휴가·외출 시 소지하는 가방도 디지털 무늬를 채용한 배낭을 메라는 주문이 윗선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복무 부대에 따라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지난해 연초부터 이와 같은 내용의 지시사항이 전군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것이 전투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용량ㆍ색상에 따라 7만원대 제품도

취재과정에서 만난 현역 및 예비역 병사들 가운데 대부분은 디지털 무늬 배낭을 자신의 사비로 구입했다고 말했다. 흔히 피엑스(PX)라 불리는 부대 내 매점이나 군장점에서 배낭을 살 수 있다. 가방의 용량과 색상에 따라 3만원대부터 비싸게는 7만원대까지 가기도 한다. 올해 초 인상된 병사 월급액수는 상병 기준으로 13만4600원이다. 일반 병사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적잖은 돈이 나가는 셈이다.

“자대 배치받고 나서 100일 휴가 나가기 전에 선임이 가방 사야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짐 들고 나갈 때나 복귀할 때 필요한 물건 넣어올 때도 필요하니까…. 쇼핑백 들고 들어오다 위병소에서 걸려서 군기교육대 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나까’ 말투가 입에 밴 육군 모 사단 소속 김모 이병의 등에도 디지털 무늬 배낭이 있었다. 귀향하기 위해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김 이병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군장점에서 배낭을 샀다고 말했다. 강요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병 입장에서 고참의 권유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권유한 선임병 역시 관물대 한구석에 휴가용 배낭을 보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역 이병보다는 역시 최근 전역한 예비역 병장이 ‘쇼핑백 금지’ 지시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줬다. “내가 알기론 2013년 초에 어느 신문에서 ‘쇼핑백 들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는 글이 올라온 뒤 사단 아니면 군단 차원에서 지시사항이 내려온 걸로 기억한다.” 현재는 대학생인 예비역 병장 김지훈씨(23)의 말을 듣고 해당 칼럼을 찾았다. 2013년 1월 9일자 <국민일보>에서 조용래 논설위원은 “2011년부터 새로 보급한 디지털 무늬 신형 군복에 멋진 베레모를 쓴 군인이 백화점 종이쇼핑백을 들고 있거나 비닐봉지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걷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고 썼다. 김 병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칼럼을 본 지휘관이 내용에 공감해 쇼핑백 지참을 금지시켰다는 말이 된다.

국방부 관계자도 현재 전군 대부분의 부대에서 쇼핑백 지참을 제한하는 지시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휴가나 외출 시 전투복을 입는 육군뿐만 아니라, 별도의 근무복이나 외출복을 입는 해군·공군·해병 역시 병사들에게 쇼핑백을 들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등 군 장병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에서 지켜본 결과 공군이나 해병 병사들도 전투복을 입고 나왔을 때는 같은 무늬의 배낭을 메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선 부대에서 쇼핑백을 들지 말라는 지시는 있는 것으로 아는데 디지털 무늬 배낭을 메야 한다는 지시는 없었다. 실제로 배낭 메라는 지시는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보급받은 가방을 들고 나가는 경우도 많다.”

국방부 측은 국방부 차원의 지시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각 부대 차원에서 비슷한 지시가 내려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육군 역시 육군본부 차원에서 지시를 내린 적은 없다고 밝혔다. 육군의 공보담당자는 “각 군단이나 사단 단위로 예하부대에 지시사항을 내린 것으로 안다”며 “부대별로 지시를 내린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어느 시점부터 조치가 이뤄졌는지는 일일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강원도 철원군 6사단 DMZ 철책에서 육군 장병들이 경계순찰근무를 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방부ㆍ육군 “예하부대 차원 지시일 뿐”

그러나 상부의 지시를 무시할 수 없고 어떻게든 이행해야 하는 군 조직의 특성상 ‘쇼핑백 금지’ 조치는 배낭 구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보통의 병사가 입대 후 지급받는 물품 중 가방은 흔히 ‘더플백’이라 부르는 의류대 가방밖에 없다. 이마저도 특별한 경우 외엔 영외로 출입할 때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부피가 작은 사소한 소지품을 들고 출입할 때도 새로 가방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시가 내려온 뒤 초기엔 ‘전령 가방’이라는 까만 가방을 들고 나갔다. 이 가방은 육군 ‘호국이’ 마크가 붙은 걸로 봐서 보급나온 가방이긴 한데, 오래 돼서 뜯어진 데도 많고 중대 인원에 비해 개수도 적어서 각자 배낭을 사는 쪽으로 바뀌었다.” 예비역 김 병장이 말한 가방은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지급된 비닐(PVC) 소재 메신저백이다. 당시 국방부는 10억1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이 휴가용 가방을 지급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육군에서는 전방부대를 중심으로 2만3600개의 가방을, 해군과 공군이 각각 4317개, 1만2221개의 가방을 병사들에게 지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추가적인 가방 지급은 없었다. 50만명을 헤아리는 육군의 병력을 생각하면 이 가방을 든 휴가 병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결과다.

병사 개인이 배낭을 구매하지 않고 각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배낭을 사서 돌려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도 ‘짬이 안 되는’ 후임병이 공용 배낭을 들고 나가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부대 운영비로 소대당 배낭 5개씩 사서 휴가 나가는 사람이 쓰기로 했는데, 휴가자가 많은 철에는 경쟁이 치열하다. 보통 ‘짬 순’으로 가져가지만 후임들이 다들 먼저 들고 나가 있으면 아무리 말년이라 해도 당연히 가져갈 수가 없다. 결국 말년이건 신병이건 편하게 나가려는 사람은 배낭을 산다.” 서울역에서 만난 육군 최모 상병은 마침 휴가자가 많지 않아서 부대 마크가 붙어 있는 공용 배낭을 메고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임과 후임 사이에 눈치싸움도 벌어진다. “제대 얼마 안 남은 고참은 돈 주고 배낭 사기 아까워서 후임 것을 빌려쓰고 싶어한다. 그런데 후임이라고 제 돈 내고 사고 싶지는 않으니까 자기보다 더 계급 낮은 후임들한테 빌리려고 하고, 결국 막내급 애들 가방만 일부 고참들이 돌려쓰는 반은 공용 가방 비슷하게 된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많은 선임들이 전역해 ‘군번이 풀린’ 편인 최 상병은 미안해도 빌려 써가면서 전역 때까진 배낭을 안 사고 버틸 계획이다. “복귀해서 냉동(식품) 한 번 사주긴 해야죠.”

배낭을 메라는 데에는 신형 디지털 무늬 전투복과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작 장병들이 메고 나온 배낭의 색상과 크기는 제각각이다. 각기 다른 육군·해병대·특전사·미군의 디지털 무늬 패턴을 적용한 가방이 뒤섞여 있다. 가방의 용량 역시 30ℓ에서 60ℓ까지 각기 다르다. 배낭 제작업체는 이 배낭들에 야전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다양한 기능을 넣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이 ‘사제’ 가방은 휴가용으로 쓰일 뿐이고, 정작 훈련 시에는 아직 디지털 무늬로 교체되지 않은 구형 군장 배낭을 쓰는 부대가 적지 않은 실정이다.

“아무 지원도 안 하면서 까라면 까라는 식”

각기 계급은 다르지만 병사들이 느끼는 불만은 동일했다. 최 상병은 “병들은 지시가 내려오면 그대로 해야 할 의무만 있다. 의무를 다하려면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다들 아무런 지원 없이 까라면 까야 된다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예비역 김 병장의 의견 역시 비슷했다. “나라에 시간을 바치는 데도 그만한 대우는 없고 윗사람들 보기에 맘에 안 든다고 제 돈까지 들여가며 단장해야 하나? 군인들 딴에는 전투화 광 내고 옷에 줄 잡아도 민간인들은 아무 관심 없다는 거 다들 알잖나.”

성인남성 중 대다수가 병사생활을 경험한 예비역인 한국 사회에서 현역 병사들이 겪는 부담에 공감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실질적인 개선 움직임은 더딘 형편이다. 전역군인단체인 평화재향군인회의 김환영 사무처장은 “의무복무를 하는 군 병사들에게 현실적인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복무 중 일상적인 활동에 필요한 물품 지급은 차질 없이 이뤄져야 한다”며 “예를 들어 고위 장교들이 이용하는 골프연습장에 쓰일 국방예산을 말단 병사의 복지를 위해 쓰기만 해도 일선에서 고생하는 병사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모바일 경향 [경향 뉴스진 | 경향신문 앱 | 모바일웹] | 공식 SNS 계정 [경향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세상과 경향의 소통 커뮤니티]

- ⓒ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정치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