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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바람으로, 지구상 특정 지역에서 대륙과 해양의 온도 차이로 인해 일어난다. 대체로 여름에는 해양에서 대륙으로, 겨울에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풍향이 바뀐다. 인간이 항해에 도입한 최초의 기술은 풍향에 따르는 풍력(風力)의 이용이다. 그런데 풍향은 계절에 따라 항상 변하기 때문에, 계절풍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용하는 것은 범선(帆船) 항해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항해 기술이었다. 인간이 풍향과 계절의 관계를 알아내고, 일종의 기술로 항해에 도입한 것은 조선술이 일정하게 발달하고 항해 경험도 어느 정도 축적된 기원 전후의 일이다.

중국의 경우 한대에 이미 봄바람은 동풍(東風), 여름바람은 온풍(溫風), 가을바람은 양풍(洋風), 겨울바람은 맹풍(猛風)으로, 또 풍향에 따라 바람을 상풍(象風) · 명서풍(明庶風) · 청명풍(淸明風) 등 8풍(風)으로 분류하는 등 바람과 풍향 및 계절에 관한 지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서양의 경우 최초로 인도양의 계절풍을 이용한 사람은 기원전 1세기 프톨레마이오스조 말기의 히팔루스(Hippalus)다. 그는 아랍 상인들로부터 여름철에 인도양에서 부는 서남계절풍에 관한 비밀을 알아낸 후, 이것을 이용해 아라비아해 북단으로부터 마트라(Matrah) 해안을 지나 인더스강 하구까지 직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해로는 이 구간의 최초 심해로(深海路, 혹은 직항로(直航路))로 종전의 연해로(沿海路, 혹은 우회로(迂廻路))보다 항해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이것은 항해사에서의 일대 혁명이었다. 훗날 서양인들은 첫 이용자의 이름을 따서 이 계절풍을 ‘히팔루스풍’이라고 명명하였다.

당시 그리스 선박은 일반적으로 7월에 이집트에서 출항해 서남계절풍이 가장 강하게 부는 8월에 인도양을 횡단, 약 40일 만에 남인도의 무지리스(Mouziris)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약 3개월간 정박했다가 12월이나 이듬해 1월에 다시 북동계절풍을 타고 회항하곤 하였다.

계절풍의 풍향은 물론, 계절에 따른 풍력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항해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인도양이나 중국 남해상에서의 계절풍은 다 같이 여름철과 가을철(5~9월)에는 서남풍이, 겨울철과 봄철(10~4월)에는 북동풍이 불지만, 강약의 차이가 있다. 인도양에서는 여름철의 서남풍이 겨울철의 북동풍보다 강하나 중국 남해에서는 이와 정반대다. 그리고 계절풍의 전환기에는 종종 기상이변이 일어난다.

예컨대 중국 남해상에서 서남풍이 북동풍으로 바뀔 때는 자주 태풍이 일어난다. 당(唐)대에 이르러서는 지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풍향이나 풍력에 관한 연구도 심화되었다. 당나라 사람들은 풍력을 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8등급으로 세분화하였다.

① 동엽(動葉, 잎 움직임)
② 명조(鳴條, 가지 울림)
③ 요지(搖枝, 가지 흔들림)
④ 타엽(墮葉, 잎 떨어짐)
⑤ 절소지(折小枝, 작은 가지 꺾임)
⑥ 절대지(折大枝, 큰 가지 꺾임)
⑦ 절목비사석(折木飛沙石, 나무 꺾이고 모래 · 돌 날림)
⑧ 발대수급근(拔大樹及根, 큰 나무가 뿌리째 뽑힘).

이러한 풍력 분급법(分級法)은 근세 영국의 풍력 등급화보다 약 1,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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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학자, 정수일 교수. 그는 일제 강점기 연변의 가난한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북경대학을 거쳐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중국의 엘리트로 거듭났다. 그러다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북한으로 건너 가 평양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그 후 평양대학교를 떠나 10년동안 튀니지,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지의 대학에서 이슬람을 전공한 교수로 활동해왔다가 1984년 그는 한국인이 아닌 아랍계 외국인의 신분으로 남한에 돌아온다. 그는 아랍계 외국인으로서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국스러운 외모와 완벽한 아랍어 구사로 한국에서 만난 아내조차 그를 아랍인으로 믿고 있었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였고,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관계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후 단국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강의 하였고, 많은 저술 활동 및 대외 활동을 하며, 한반도의 고대문명과 아시아와 이슬람간의 문명교류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는 1996년 ‘정수일’이라는 이름의 북한공작원으로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문명교류학’이라는 그의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사형이 선도되기 전, 그는 이미 국내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였지만, 감옥 안에서 그는 자신의 얽혀버린 삶을 반성하듯 더욱 더 연구에 매진하여 200자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연구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2000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정수일은 석방, 이후 2003년 4월 30일 특별사면 및 복권되었으며 5월 14일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는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통하여 자신의 할 일을 학문에 몰두하는 일이라고 다짐한다.“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 없이, 조금도 쉼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 ”현대사의 한국이 놓여있던 갈라짐과 분열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던 학자는 사형수로서 독방에서 해왔던 것과 같이 쉼 없이 이슬람과 실크로드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있다. 어긋난 삶의 복원은 그가 추구하는 학문 속에서, 그 지식이 담긴 글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문명 교류사 연구』, 『이슬람 문명』, 『실크로드 사전』 등이 있으며, 역주서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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