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사람이다] (3) 그 남자의 앉은뱅이 토담집 도란 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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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6.02.01. 오전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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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환경운동가 차준엽 ‘토담집’

해가 지자 토담집에서는 작고 따뜻한 축제가 열렸다. 타원형 창문마다 촛불이 켜졌고, 코굴이(강원도 귀틀집의 벽난로)에서는 소나무 가지의 잔향과 함께 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흙벽에는 사람과 물건의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난로에 원두를 볶아 내린 커피와 구운 감자, 고구마가 끼니였다. 이 집에서의 저녁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으로, 고대의 어느 토굴로, 엄마의 자궁으로 들어온 듯 고즈넉하고 즐겁다. 흙과 나무, 돌, 지푸라기로만 지은 세 칸짜리 농가가 부리는 놀라운 마술.

건넌방에서 들여다본 큰방의 모습.


이 집 주인은 환경운동가 차준엽씨(67)다. 그는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 살리기 운동을 계기로 1990년대 ‘자연의 친구들’이란 단체를 이끌면서 환경운동에 헌신했다.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전적은 ‘10전10승’이라고 할 만큼 눈부셨다. 설악산 골프장과 방태산 스키장 건설을 막았고, 광릉숲 출입예약제를 도입했다. 한강 상수원인 팔당댐 보호를 위한 수변구역을 만들었다. 특히 우이령 도로 건설 저지, 수유리 민주열사추모공원 부지의 그린벨트 해제 반대 등 북한산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2000년대 초반 환경운동 일선에서 물러났다. 환경이 주요 정책 의제가 되고 환경단체가 제도권으로 들어가던 시점이었다. 그저 자연이 훼손되는 게 가슴 아파서 무작정 뛰어들어 청춘을 바쳤던 그는 조직을 운영하는데 소질이 없었다. 그때부터 자연인으로 돌아와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경기도 봉미산에서 자연농업을 해보기도 하고, 강원도 방태산에서 효소를 만드는 일도 했다. 환경훼손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배웠던 사진이 어느덧 아마추어 작가 수준에 이르러 두 차례 사진전도 열었다.

토담집의 측면에 돌을 쌓아 보강한 벽과 난로의 굴뚝.


방황과 모색의 시간이 10여년 흘렀다. 새로운 환경운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그는 아예 시골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환경 보호를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도시의 부박함 속에서 점점 자연과 멀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생활비도 훨씬 적게 들 것 같았다. 2013년 지리산 방면으로 여행을 다녀오다가 충남 논산시 대둔산 기슭의 작은 마을을 보았다. 돌담이 예뻤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동네에 있던 폐가를 연간 25만원에 임대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성한 곳이 없었다.

벽에 매립된 오디오 세트와 나뭇가지로 만든 촛대.


토담집은 100년 전에 지어졌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작은 농가나마 대들보에 건축연도를 새겼다. 불이 난 흔적이 있으나 반듯하게 지어진 초가 삼칸이다. 사방 2.4m를 한칸이라 하며 방 두칸에다 부엌 한칸이면 삼칸집이라 불렀다. 골조는 그대로 둔 채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게 현재 농가의 모습이다. 집을 세낸 그는 그동안 꿈꿨던 집을 만들어보리라 결심했다.

천장을 털어냈다. 한옥의 백미인 서까래가 드러나면서 고래 뱃속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방과 붙은 광의 벽도 없앴다. 높낮이가 다른 하나의 공간이 된 이곳은 손님을 맞고 차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는 거실이다. 다른 방 하나는 침실로 쓰기로 했다. 마당과 툇마루가 있는 집의 전면은 그대로 둔 채 왼쪽 측면과 뒷면에 친환경 벽돌로 벽을 한겹 더 둘렀다. 벽체를 보강하기 위해 돌을 주워 바깥 벽을 둘러 쌓았다. 실내에는 난방을 위해 코굴이를 놓았다.

토담집은 그의 손으로만 완성됐다. 흙을 가져다 물에 개어 손으로 벽을 발랐다. 흙이 마르면서 잔금이 가면 그 위에 다시 바르기를 네다섯 차례 거듭했다. 손맛을 살리기 위해 흙손조차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바른 집은 정갈하면서 차진 느낌이다. 흙 위에다 밀가루 풀을 바르고 천장의 경우 한지로 도배한 게 전부다. 전국의 어떤 황토집, 황토찜질방도 이처럼 접착제를 전혀 쓰지 않는 건축은 불가능하다. 숨쉬는 흙벽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창문도 일일이 손으로 뚫고 다듬었다. 벽마다 외부로 열린 창문은 길쭉한 타원형이다. 유리를 끼워서 방바닥에 앉아 올려다 보면 바깥으로 대둔산이 보인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모습, 눈비가 오거나 꽃이 피고 단풍이 드는 풍경도 볼 수 있다. 밤이 되면 이곳에 촛불을 켠다. 최소한의 전기만 쓰는 이 집의 조명이다.

난로를 집안에 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급 저택의 수입 난로는 연기가 실내로 새어나와 장식물로 전락하기 일쑤다. 토담집 코굴이는 거뜬히 연기를 바깥으로 빨아낸다. 주변 지형, 바람길, 난로의 공기역학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중간에는 무쇠판이 박혀 있다. 오랫동안 온기를 머금어 열 손실을 막고 실내를 따뜻하게 해준다.

이 집의 유용한 공간 중 하나는 벽감이다. 외벽을 보강하면서 벽과 벽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밖으로 나오면 지저분하거나 별도 수납장이 필요한 물건들이 벽감 안에 얌전하게 들어있다. 창문과 비슷한 모양의 구멍으로 손을 넣으면 물건이 잡힌다. 벽에 넣은 물건 가운데 압권은 앤틱 오디오다. 턴 테이블과 앰프, 스피커가 거실 벽에 매립돼 있다. 그가 직접 통을 만든 스피커 중 한 개는 침실 벽으로 나와 있다. LP, CD는 물론, 노트북 컴퓨터에 저장된 음원과 연결된다.

이 집에서 마시는 커피맛은 기가 막히다. 코굴이의 은근한 불에다 무쇠 프라이팬으로 커피콩을 볶아 벽에 달린 분쇄기로 갈아낸다. 버너로 물을 끓여 여과지에 내리자 도시의 어느 카페보다 맛있는 커피가 완성됐다. 주인과 손님이 마주 앉는 다실 탁자는 두뼘 남짓한 넓이로 앞의 사람과 코가 닿을 정도여서 정겹다. 이웃 작은 암자의 비구니 스님이 선물한 짚방석은 이 집과 썩 어울렸다. 천장을 털어냈을 때 서까래 위에 있던 벌집은 그대로 천연 장식품이 됐다. 동백나무 가지를 울타리처럼 둘러친 아름다운 촛대도 있다.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이 집. 처음에는 놀라 두리번거리게 되지만, 이내 내 몸처럼 익숙하다. “흙 냄새는 위, 나무 냄새는 간, 지푸라기 냄새는 기와 혈, 나무 타는 냄새는 뇌파를 안정적으로 순환시켜준다”는 게 주인의 설명이다. 자연 재료의 물리적 특성뿐 아니다. 토담집에는 직선과 직각이 없다. 나무 기둥도 흙벽도 자연의 선이다. 자발적인 가난은 누추함을 넘어선다. 이 집 부엌칸에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찜질방이 있다. 부엌칸을 나눠 방을 들이고 장작을 지피는 아궁이를 만들었다. 천장과 벽, 바닥에 황토를 발랐다. 벽에는 유리가 반짝인다. 자세히 보니 유리컵이다. 밤에 누워 촛불을 켜면 벽이 밤하늘처럼 빛나는 이 방의 이름은 ‘꿈꾸는 별’이다.

이 집을 짓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방문객의 낭만적 감흥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주인은 2년 반,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생계를 위해 동네 밭농사를 돕거나 김장배추 절이는 일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은 모두 집을 고치는 데 바쳤다. 무거운 흙을 나르고 천장까지 바르는 과정은 상상을 불허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몸에 무리가 왔다. 육체적 한계를 느낀 적도 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수행의 과정”이었다고 했다.



차씨는 토담집을 통해 “환경운동을 문화인류학적으로 구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이 집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게 무엇인지, 최소한의 소비로 영위하는 일상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그는 이 집이 널리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동안 신세졌던 사람들이 찾아와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그는 “자연이 인류 정신문화의 뿌리”라는 생각으로 자연과 일치된 예술로서의 공간을 상상했다. ‘남의 집을 이렇게 만들었다가 나가라면 어쩔 거냐’는 걱정에 묵묵부답이다.

그는 과거에 토담집의 원형을 시도한 적이 있다. 1988년 북한산 우이동 기슭의 슬레이트 시멘트 집을 임대해 코굴이를 곁들인 토담집으로 개조해 보았다. 1990년 4월 ‘자연의 친구들’ 창립식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북한산은 그의 고향이다. 서울생인 그는 어렸을 때 자하문 근처에 살았다. 자두밭, 능금나무 과수원을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느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북한산에 갔다가 파헤쳐진 나무를 보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오장육부가 피투성이가 된 사람처럼 참혹한 모습이었다. 화구를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국토개발 광풍이 불던 1970년대 자연이란 화두를 가슴에 품고 열병을 앓았지만, 그의 주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1984년 북한산에 케이블카와 궤도열차를 놓고 골프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공청회에 참여하고 언론사를 찾아가 호소했다. 대학 산악반 모임에 가서 ‘당신들 친구인 북한산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을 거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렇게 뛰어다니느라 수염도 못 깎은 그에게 ‘북한산 털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방학동 은행나무 살리기 운동은 지금 생각해봐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수령 500년인 나무의 생장에 해롭다며 1991년 4월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여 대기업이 짓던 아파트의 층고를 낮추고, 원래 있던 연립주택 2동을 철거하는 성과를 거뒀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때 피란을 가면서 치성을 들였다던 그 나무는 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지금도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차씨는 “나무 때문에 집을 헐다니… 내가 하면서도 그런 일이 생길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그의 단식농성은 1994년 11월 미 플로리다에서 열린 멸종위기동식물거래협약(CITES) 국제회의장 앞에서도 이어졌다. 협약에 가입했으면서도 웅담과 사향 보호조항을 지키지 않는 등 한국 정부의 환경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997년 UN은 은행나무와 광릉숲 살리기, 멸종위기 동식물 보호운동 등의 공적으로 그에게 환경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UNEP 글로벌 500’을 수여했다. CNN 뉴스(1997년 6월), BBC 지구환경보고서 프로그램(2003년 12월)에서도 차씨의 활동을 소개했다.

공적 활동을 접은 지금, 토담집 짓기를 통해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훨씬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다. 환경운동이 제도화하고 경제개발이 녹색성장으로 포장되면서 환경이란 의제는 더욱 모호해졌다. 친환경은 상표가 됐고 자연보호는 이미지 전략으로 변했다. 토담집은 자연이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거처라는 점을 일깨운다. 사람들이 쓰다버린 폐가인 이 집은 차씨에게 일종의 자연이다. 그는 그것을 잠깐 빌렸고, 쇠똥구리가 온몸으로 흙을 굴려 집을 짓듯 토담집을 완성했다.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집. 그 집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먹함을 느낄 것이다.


■차준엽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북한산 종합개발계획 저지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환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1990년 시민환경단체 ‘자연의 친구들’을 만들어 방학동 은행나무살리기, 멸종위기 동식물 보호운동 등 활발한 운동을 펼쳤다. 1997년 UN 환경상을 수상했고 1999년 국회 환경포럼 자문위원을 지냈다. 2009년 사진전 ‘방태산 귀틀집 산중일기’를 열었다.


<글 한윤정 선임기자 yjhan@kyunghyang.cpm ·사진 박기호 사진가 kistone9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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