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죄-조선·해운 6대 도시 ‘하청의 비명’

“바쁠 땐 쓰고 쉽게 해고…‘1회용 물량팀’으로 조선업 고속 성장”

김지환 기자

② ‘불법’ 다단계 구조 여전

전남 영암 현대삼호중공업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지난해 고소차를 타고 도장 작업 전 선박 표면의 염분을 씻어내는 물청소 작업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 제공

전남 영암 현대삼호중공업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지난해 고소차를 타고 도장 작업 전 선박 표면의 염분을 씻어내는 물청소 작업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 제공

“2015년 6월1일부터 물량팀 사용은 불법입니다.”

현대중공업 사내협력회사 협의회가 지난해 울산조선소 내에 붙인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다. 물량팀은 1차 하청업체로부터 재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일감이 생기면 모였다가 단기간에 끝내고 다시 흩어진다.

물량팀이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4년 국정감사 때였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물량팀 등 조선업의 왜곡된 재하도급 구조를 지적했고,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제조업에서 사내하청업체가 재도급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실태조사 계획을 밝혔다. 이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들이 이듬해 물량팀 신고센터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붙이는 등 노동부 조사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1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현대중공업에는 물량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겉으로는 물량팀을 색출한다고 하지만 외부 경기 변동에 따라 손쉽게 자를 수 있는 물량팀을 원청 조선소가 마다할 리 없기 때문이다. 노동부도 물량팀이 조선업 노동시장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황기 때는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으니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다단계 하도급의 끝은 물량팀

조선업은 제조업으로 분류되지만 노동시장은 건설업과 유사한 구조를 띤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작업 기간이 길고 두 산업 모두 산재 유형에 추락사가 많다는 것도 닮았다.

조선업 다단계 하도급의 일반적 구조는 ‘원청 조선소 → 1차 하청업체 → 물량팀장 → 물량팀원’이다. 2014년 산업안전보건공단의 현대중공업 종합안전보건진단 보고서를 보면 현대중공업에 등록된 1차 하청업체 296개 전체에서 물량팀을 운영했다. 원청 조선소는 특정 업무를 1차 하청업체에 내려주고, 1차 하청업체는 작업기간 단축 등을 위해 공정별로 물량팀을 투입한다. 1차 하청업체가 대략 10~30명의 물량팀원을 확보한 물량팀장(건설업의 십장과 유사)에게 재도급을 주는 방식이다.

지난 26일 울산조선소 앞에서 만난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김철성씨(가명)는 “원청이 어렵고 힘든 일을 하청업체에 주듯이 하청업체도 위험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물량팀에 외주화한다”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 해양플랜트 분야 하청업체 본공(1차 하청업체 정규직 및 기간제)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한때 물량팀으로 일했다.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본공인 변기원씨(가명)는 “젊은 연령대의 노동자들은 높은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물량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퇴직금, 연·월차, 휴업수당 등도 없고 산재 처리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본공인 장길수씨(43·가명)는 “1차 하청업체들이 물량팀을 쓰는 이유는 작업을 빨리 마무리하면 원청으로부터 인센티브를 받는 구조 때문”이라며 “일당은 세지 않으냐고 하는데 산업안전 기준을 다 지켜가면서 정상적으로 일하면 별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말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밀폐작업 등을 하는 대가로 일당을 높게 받는 기형적 구조라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죄-조선·해운 6대 도시 ‘하청의 비명’]“바쁠 땐 쓰고 쉽게 해고…‘1회용 물량팀’으로 조선업 고속 성장”

■‘사람장사’ 방치해 온 노동부

노동부는 그간 물량팀원이 임금체불로 진정을 제기하면 물량팀원의 사용자는 물량팀장이라는 행정해석을 내려왔다. 물량팀장이 1차 하청업체로부터 적법하게 도급을 받은 데다 사업자로서의 실체가 인정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노동계는 물량팀원의 사용자는 물량팀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량팀원과 물량팀장 사이의 관계는 ‘형님과 아우’ 사이에 가깝고 ‘직원과 사장’ 사이라고 보긴 어려운 게 현장 분위기다. ‘형님’에게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요구하는 것이 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태욱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조선업 고용구조를 보면 물량팀원은 원청 조선소에 파견근로를 제공(불법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분이 입증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물량팀원은 1차 하청업체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라고 말했다.

물량팀장이 자신과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인원을 모집해 1차 하청업체에 공급한 경우 직업안정법 위반이다. 직업안정법 위반일 경우 물량팀원과 1차 하청 간 근로계약 관계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직업안정법은 다른 사람의 취업에 개입해 이득을 취하는 중간착취를 막기 위해 노동조합에만 근로자 공급 권한을 주고 있다. 물량팀장이 물량팀원과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해도 1차 하청업체로부터 업무 지휘·감독을 받을 경우 파견법 위반에 해당한다. 노동부 내부에서도 특정 사례의 경우 물량팀을 직업안정법·파견법 위반으로 규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대중공업 물량팀 노동자 정형수씨(가명)는 “물량팀원의 4대보험은 물량팀장이 아니라 1차 하청업체가 들고 있고 업체 사장은 물량팀원들에게 밖에 나가면 물량팀이 아니라 본공이라고 소개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정씨는 “본공 인력으로 안 되면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하는데 언제든 물량팀을 불러다 쓸 수 있으니 비정상적인 고용구조가 고착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경기변동의 범퍼, 물량팀

물량팀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증언을 정리해 보면 물량팀은 수십년 전부터 조선소 내에 존재하는 고용형태였다. 최근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빅3가 해양플랜트 물량을 대거 수주하면서 물량팀의 규모가 급격히 불어났다. 하지만 플랜트 거품이 빠지면서 수만명의 물량팀이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됐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물량팀장은 개인도급 사업자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일감이 빠지면 언제든 ‘도급계약’을 해지해버리는 방식으로 고용을 조정할 수 있다. 바로 구조조정의 외주화다. 노동부 관계자는 “원청과 1차 하청이 전문성 있는 기능공을 내부에서 양성했어야 하는데 조선업 성장 과정에서 급격히 인력이 필요하다 보니 그때그때 물량팀을 쓰는 방식으로 대응해 온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본공인 변씨는 “국내 조선업이 세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극단적으로 유연한 고용형태인 물량팀 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주절벽 등 외부 충격이 오면 물량팀 등 하청 노동자들이 ‘방파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고속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본공인 장씨는 “원청은 하청업체 노동자의 생살여탈을 좌지우지하면서도 고용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가 갖춰져 있다”며 “필요할 때 노동자를 불러 마음대로 부려먹은 뒤 쉽게 자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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