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유일하게 야간전투기로 태어난 아이치 덴코

프로필

2010. 12. 2. 13:59

이웃추가

제목만 본다면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무슨 소리? 육군의 토룡(토류)이나 해군에서 주력 야간전투기로 쓰인 월광(겟코)은 뭐지?" 또는 블로그에서 구일본의 군용기 리뷰를 읽어왔던 분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아니, 심지어 함상기로 개발된 채운(사이운)도 야간 요격에 투입된 적 있다고 본인이 리뷰에 써놓지 않았나?" 게다가 구일본군은 야습, 즉 야간 전투에 능숙한 군대라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참호 기습 전투에서, 태평양 전쟁에서 대전 중반기까지 벌어진 소규모 해전 등에서 알려진 바처럼 야음을 틈타 적의 혼란을 노리는 기습과 충격 효과로 톡톡이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항공 부대에 관해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차 대전 개전 직전, 일본의 육군과 해군 항공대에서는 야간 공중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 이유로는 일본 해군이 항공대 창설의 롤 모델로 삼았던 영국공군은 1차 대전부터 실험적으로 야간전용 전투기 수퍼마린 나이트호크(Supermarine P.B.31E Nighthawk : F-117이 아님)를 제작한 경험이 있었으나, 영국이 일본에 물려준 에어맨쉽과 그들 자신의 부시도오(무사도)가 합쳐져 야간 전투같은 변칙적인 전법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전천후 전투기라는 개념이 없었고 기술적으로도 어려운데다 제작비까지 많이 드는 야간 전투기는 대전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실전에 배치된 신개념의 항공기였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모든 야간 전투기들은 개전을 맞아 연합군과 싸우는 도중 임기응변식으로 급조한 병기이거나, 기존의 기체를 야간전투용으로 개량한 것에 불과했다.

항공전 사상 최초로 등장한 야간 전투기 수퍼마린 나이트호크 : 이 기체는 1차대전 말기 기존의 쌍발기를 개조해 제작되었으나, 훗날 2차 대전 중반의 유럽 하늘을 누비던 후배들이 가진 특징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었다. 쌍발 엔진에 대형의 동체를 지녔고, 무반동포를 비롯한 중무장을 갖추었으며 레이다가 없던 시절에 그것을 대신할 적기 탐색용 서치라이트를 장비한 점이다. 이 서치라이트는 그것을 작동하기 위한 별도의 발전기가 장착되어 있고 전용 조작수를 필요로 한 점에서도 복좌형 야간 전투기가 가진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에 반해, 아이치 덴코(電光)는 구일본 해군이 태평양 전쟁 후반에 접어들어 개발을 추진한 야간전용 전투기이다. 해군 제식명칭으로는 S1A1라 불렸고 18시 병 야간 전투기(18試 丙 夜間戦闘機)라는 시작명칭으로 불린 덴코는 1943년(쇼와 18년)에 B-29에 맞서기 위하여 아이치 항공기에 시제기를 개발하도록 지시한 야간 전투기(구일본 해군에서는 야간 전투기를 병전[丙戰]이라고 불렀다)로, 일본에서 순수한 야간 전투기로 처음부터 설계/개발된 기체는 이 기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기체는 개발하는 과정에서 해군의 과도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다양한 장비와 설계를 수렴한 결과, 전비 중량은 당초 예정을 넘어 10톤을 넘고 덩치는 쌍발 폭격기 은하를 웃도는 거대한 전투기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요구대로 성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가 되어, 1944년(쇼와 19년) 해군의 시작기 정리 대상에 올라 추가 시제기의 제작이 중단되었으나, 이미 목업까지 완성하고 동체 제작에 착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2대의 시작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5년(쇼와 20년)에 있었던 공습에 의해 완성 직전의 시제기 두대가 모두 피폭당하여 전소되는 바람에 종전까지 1대도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기체였다.

# 개발 배경

미국이 신형 중폭격기 B-29을 완성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해군은 강력한 방공 전투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18시 병전(18試丙) 제작을 결정했다. 제작사로 지정된 것은 그때까지 전투기 개발 경험이 거의 없는 아이치 항공기(愛知航空機)였다. 그 이유는 갈수록 극심한 항공기 소모율을 보이던 전국의 악화 때문에 기존의 전투기 제조업체(미츠비시, 나카지마, 가와사키 등)에 새로운 기술과 제작기준을 적용한 신형기를 개발할 여유가 없는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해군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1) 최대 속도 시속 685 km 이상

(2) 6000 미터까지 6분 안에 상승 가능할 것.

(3) 항속시간 5시간 이상.

(4) 비무장시 이착륙 활주 거리는 400m 미만일 것.

(5) 무장은 30 mm 기관총 및 20 mm 기관총, 그리고 동체 상부에 20 mm 기총을 내장한 원격 조작식 총탑을 설치할 것.

(6) 전탐기(레이다)를 기본으로 장비할 것.

이러한 기준은 전투기를 처음 제작해보는 아이치사뿐만 아니라, 기존의 미츠비시나 나카지마로서도 달성이 어려운 목표였지만 아이치사는 쇼와 18년 11월부터 설계를 시작하여 쇼와 19년 여름에는 목업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 기체를 개발하기 위하여 각성제를 복용하고 필로폰을 맞아가며 몸을 혹사하던 개발진들은 해군으로부터 새로운 요구사항을 추가로 전달받게 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야간 전투라는 단일 목적으로 신규 기체를 쓰는 것이 비능률적이라는 판단을 내린 겐다 미노루 중좌에 의하여 주간에는 적의 초계기나 정찰기 심지어 적 선박에 대한 대함 공격이 가능하도록 제작하라는 지시였다.

엔진은 해군의 요구에 따라 나카지마 호마레 22형(1,860 마력)을 쌍발로 장비하게 되었지만, 워낙 크고 무거운 동체로 인하여 이대로는 고고도에서 성능이 부족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장차 배기 터빈을 추가하기로 계획했다. 시작기에는 액체 산소 탱크를 탑재하여 고고도로 상승할 때는 엔진 실린더 내에 산소를 분사하여 출력 저하를 방지하는 특수 액체 분사장치를 고안하여 장비하기로 했다. 덕택에 덴코는 추가장비를 하지 않아도 같은 호마레 엔진 두개를 갖춘 육상 폭격기 은하와 맞먹는 규모의 대형 전투기가 되어버렸고, 생김새 역시 은하처럼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동체 단면을 사각형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 기체뿐만 아니라 당시 개발중이던 신기종에는 다같이 나타나는 특색이지만, 18시 병전은 생산의 간소화를 위하여 가능한 한 기존에 만들어진 제식 기계 부품을 채택하도록 하고, 기체의 일부를 나무로 제작하여 자원 절약을 꾀했다.

하지만 이러한 업체 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비 중량 10톤 이상의 기체는 요구한 성능을 내지 못했을 뿐더러 과급기와 전탐기, 그리고 복잡한 원격 조작 포탑 등 기술적으로 클리어해야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때문에 해군은 목업 심사 후 본 제품의 증가 시작형 제작의 중지를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아이치 비행기는 이미 제작 중이던 시험 제작기 2기를 연구를 위하여 제작을 속개하기로 했다.

개량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쇼와 20년 6월 공습에 의해 완성 직전의 1호기가 폭격을 맞고 불타버렸고 2호기도 다음달인 7월에 피폭되고 말아 이 거대한 전투기는 한번도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쿵디담 POWER blog
쿵디담 교육·학문

달리는 열차 위에서 중립이란 없다 - 하워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