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드라마제작사인 스튜디오드래곤은 최근 자사 소속 ‘스타PD’인 박호식 책임프로듀서(CP)가 독립 제작사를 만드는 작업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CP가 설립하는 신생 회사에 거액을 투자하는 방식이다. 이 결정은 타사에서 영입 제안을 받은 박 CP를 붙잡기 위해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박 CP는 연내 독립할 계획이다. 국내 제작사가 자사 PD가 독립해 세우는 회사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박 CP 모시기’ 경쟁은 그가 그간 선보인 작품들을 통해 출중한 기획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는 증강현실 게임을 접목한 판타지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비롯해 메디컬 범죄 수사극 ‘신의 퀴즈’, 범죄물 ‘나쁜 녀석들’, 로맨틱 코미디 ‘로맨스가 필요해’ 등 다양한 장르에서 히트작을 냈다. ‘나쁜 녀석들’은 올 추석시즌 영화로도 나온다. 박 CP는 시대 흐름에 맞는 테마와 콘셉트를 제시하고 신진 작가들을 발굴해 작품을 완성해내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
스튜디오드래곤의 박호식 책임프로듀서가 기획한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스튜디오드래곤의 박호식 책임프로듀서가 기획한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작가에서 기획PD로 무게중심 이동

국내 콘텐츠업계에도 ‘기획 프로듀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프로듀서들은 기획과 연출, 제작 역량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아이디어를 콘텐츠로 만들어내고 있다. 덕분에 이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그동안 ‘작가’가 지배해온 드라마계에 지각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제이콘텐트리가 지난 2월 이재규 감독의 필름몬스터를 200억원에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드라마 ‘트랩’과 영화 ‘완벽한 타인’(529만 명) 등을 기획 제작한 이 감독의 안목을 높이 평가해서 내린 결정이다. 필름몬스터는 현재 마블에 버금가는 슈퍼히어로물을 개발하고 있다. 이 감독은 “작품의 성격에 따라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한다”며 “장르 한계에 갇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KBS 드라마 PD 출신인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한 제작사와 범죄스릴러를 개발 중인 것도 또 다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소속사와 상관없이 좋은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협업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시도다.

위기에 몰린 지상파 소속의 일부 역량 있는 프로듀서들도 독립제작사를 세우는 작업을 물밑에서 진행 중이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프로듀서들이 독립하면 기회가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OCN 시즌제 드라마 ‘보이스 3’.
OCN 시즌제 드라마 ‘보이스 3’.
시즌제 드라마, 영화 흥행 몰이

채널 경쟁이 가열되고 넷플릭스, 디즈니 등 대형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업체들이 진입하면서 프로듀서 역량은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등 장르 경계가 무너지고 소비자 취향이 다양해진 데다 내수 시장을 벗어나 세계 시장에서도 통하는 콘텐츠를 제작할 필요성도 커졌다.

지상파 드라마들이 케이블방송에 밀리게 된 이유를 PD들의 기획력 부족에서 찾는 목소리도 나온다.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지상파 PD들은 스스로 작품을 개발하지 못한다”며 “프리랜서 작가나 외주 제작사가 가져오는 대본을 단순히 선택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스튜디오드래곤이 성공한 배경에는 20여 명의 팀장급 책임 프로듀서들이 조직을 이끌면서 신인 작가를 발굴하거나 집단창작으로 히트작들을 만들어낸 데 있다.

시즌제 드라마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콘텐츠의 확장성이 커졌다. 혐오와 차별의 공포를 다룬 ‘보이스’, 종교의 광기를 추적한 ‘구해줘’ 등은 할리우드의 마블 스튜디오처럼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인물과 공간 등을 변주해 인기를 끈 시리즈물이다.

할리우드는 이미 기획 프로듀서 전성시대다. 영화 ‘세븐’ ‘나를 찾아줘’ 등을 연출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넷플릭스의 시즌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기획 제작해 흥행을 거뒀다. 공포영화 ‘컨저링’ ‘애나벨’ 등을 제작한 제임스 완 감독, ‘겟아웃’ ‘23아이덴티티’ 등을 연출한 제이슨 블룸 감독은 일련의 장르영화들로 세계 시장을 점령했다.

유재혁 대중문화 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