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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숙 우신피그먼트 대표 - 38년 한우물, 한국 안료 시장을 대표하는 기업인 

 

최영진 포브스 차장 사진 오상민 기자
지난 3월 한국염료안료공업협동조합은 신임 이사장으로 장성숙 우신피그먼트 대표를 선임했다. 여성 CEO가 이사장을 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38년 동안 안료 부문에서 한 우물을 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2살의 나이에 겁 없이 안료 시장에 뛰어들어 38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장성숙 대표.
22살의 그 젊은 여성은 겁이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1977년 당시 마포 산자락 집 한채가 200만원이던 시절, 60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쓰러져가는 안료 업체인 대성사를 인수한 것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줄줄이 짐을 쌌지만 이 ‘무모한’ 여성은 직장을 옮기는 대신 자신이 운영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사건’을 접한 이들은 하나같이 ‘6개월이면 문 닫을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다.

70년대 후반에 600만원이면 20대 여성이 만져보기 힘든 거금이었다. 친언니에게 얹혀사는 처지라서 부탁할 사람이 친언니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번에 거절당했다. 1주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굶어 죽겠다는 무언의 시위를 한 것이다. 언니가 결국 두 손 들었다.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받은 퇴직금을 몰래 동생에게 줬다. 600만원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업체를 인수한 직후부터 후회의 연속이었다. 업체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악성재고 제품과 전화기 3대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수의 연속이었다.

38년이 지난 지금, 그 20대 여성이 한국 안료(pigment)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성공했다. 한국염료안료공업 협동조합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여성 CEO가 이 분야의 이사장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성숙(59) 우신피그먼트 대표가 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77년, 600만원 들고 쓰러져가는 안료 업체 인수


색의 기본 물질은 색소다. 색소는 크게 염료와 안료로 나눌 수 있다. 염료는 물이나 기름에 녹여 사용하고, 안료는 분말형태의 착색제로 이해하면 된다. 안료는 모든 분야의 착색제로 통한다. 도료·인쇄·잉크·그림물감·화장품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된다. 장 대표는 “화장품부터 스마트폰 액정까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안료가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신피그먼트는 안료 분야의 강자로 꼽힌다. 국내외 500여개 기업에서 우신피그먼트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에버랜드나 리움미술관 등에 설치된 제품에도 우신피그먼트의 친환경 안료가 사용됐다.

화학산업 분야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땅이었다. 1977년, 장 대표는 우신피그먼트를 설립한 직후 차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영업을 위해 기업체을 찾으면 돌아오는 말이 ‘술 한잔 하자’였다. “처음에 많이 울었다”며 장 대표는 웃었다. “영업전선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생을 많이 했다. 여성 차별이 별로 없는 대기업 영업에 올인한 이유다.” 지금까지 치마와 하이힐을 신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나 회사 점퍼를 입고 영업을 했던 것이 익숙한 탓이다. 우신피그먼트에 ‘접대 문화’가 없는 것도 장 대표의 이같은 고집 때문이다.

동종업계의 예상과 달리 장 대표는 빠르게 안착하기 시작했다. 1977년 첫 계약을 따낸 곳이 새한미디어였다. 한때 재계 20위권에 오른 대기업이 우신피그먼트라는 조그마한 안료업체를 선택한 것은 장 대표의 열정 때문이었다. 영업을 위해 몇 번이나 새한미디어를 찾아가자 그 열정에 마음이 통했는지 “새한미디어가 IBM에 수출하는 모니터 케이스 컬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당시 새한미디어 공장이 인천공단에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작업해서 요구하는 색깔을 만들어냈다. 당시 집이 서울 마포였는데, 차가 끊겨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총알택시를 탔는데, 그렇게 위험한지 처음 알았다. 죽는 줄 알았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선한다.”

새한미디어를 시작으로 우신피그먼트는 대기업 영업에서 조금씩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 안료가 필요한 페인트 회사나 플라스틱 제조회사들이 비싼 가격에도 일본에서 수입해 쓰던 시절이었다. 일본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장 대표는 다시 한번 겁없이 일을 저질렀다.

1980년 세계 최대 무기안료 공급기업인 독일 바이엘의 자회사 란세스(Lanxess) 문을 두드린 것. 다짜고짜 ‘기술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름도 없는 한국 업체 대표의 요청을 들어줄 기업이 아니었다. 란세스는 단번에 거절했다. 장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백 kg의 안료 완제품을 들여와놓고 겨우 됫박 단위로 팔아서 연명하는 구멍가게는 언제든지 망할 수 있었다. “완제품을 수입해 파는 것으로는 일본 기업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반제품을 들여와서 완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장 대표는 설명했다.

장 대표는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해외에 나갈때마다 독일로 날아가 란세스 문을 두드렸다. 란세스도 장 대표의 열정에 반했다. 란세스는 우신피그먼트와 계약을 체결했다. “운이 좋았다. 란세스로부터 반제품을 들여오고, 우리의 기술로 완제품을 팔 수 있게 됐다. 란세스와 계약을 하면서 지금의 우신피그먼트가 있게 됐다.”

란세스가 해외에 수출하는 완제품 안료는 20~30가지. 우신피그먼트는 란세스에서 들여온 반제품을 가지고 200가지가 넘는 안료 완제품을 만들고 있다. 수입 안료의 국산화에 성공한 것. 우신피그먼트의 경쟁력도 높아졌다. 장 대표는 “우리가 직접 완제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 판매가를 30% 낮출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한국이 아닌 글로벌이다. 기술과 가격 경쟁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란세스에서 반제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가공한 후 우신피그먼트는 지올러(GEOLOR)라는 독자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다. 란세스와의 인연으로 기술력도 계속 좋아졌다. 1997년에는 란세스와 기술협력을 통해 친환경 수성 액상안료를 개발했고, 2006년에는 무독성 유무기복합안료를 개발해 국내 시장에 공급했다. 2008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유겸용 액상안료 아쿠알러(AQUALOR)까지 개발해 경쟁사를 놀라게 했다.

1977년 사장과 직원, 두 명이 전부였던 우신피그먼트는 연간 4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직원도 50여 명으로 늘었다. 2013년 말에는 전북 익산에 제2 공장도 설립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설비를 갖춘 공장이다. 우신피그먼트는 국내 안료시장의 40~50%를 점유하고 있다. “2020년까지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 목표다.”

2008년 국내 최초 수유겸용 액상안료 개발

장 대표는 이 모든 성공을 직원들의 공으로 돌린다. 우신피그먼트는 직원 복지가 좋은 기업으로 꼽힌다. 사내 근로복지기금으로 임직원 자녀 장학금 및 학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장 대표는 “처음 복지기금을 만든다고 관계기관을 찾아갔는데 허락을 안했다. 중소기업이 복지기금을 만든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3번 정도 찾아간 후에야 복지기금을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자녀가 있는 직원에게는 자녀 한명당 매월 50만원의 양육수당을 지급한다. 대학생까지 학자금 지원을 하고 있다. 우신피그먼트 설립 25주년이 됐을 때 전 직원에게 동남아 여행을 선물했다. 30주년에는 유럽, 35주년에는 특별 상여금이 직원 선물이었다. “40주년에는 어떤 것을 선물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며 웃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신피그먼트 당기 순이익의 10%는 직원들의 성과급으로 지급된다. 2년에 한 번씩 직원과 가족들이 함께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다. 직원 부모도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야근도 없다. 65세 정년으로 퇴직을 해도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다. 이직률이 낮을 수 밖에 없다. 장 대표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일과 가정 생활의 균형이다. “나도 어머니이자 아내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정말 힘들었다. 남편이 도움을 줘서 그나마 버텼던 것 같다. 직원들이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배려를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장 대표가 높은 수준의 복지혜택을 마련한 것은 가난을 알기 때문이다. 장 대표를 설명할 때 흔히 나오는 단어가 ‘백령도의 딸’이다. 장 대표의 부모가 백령도라는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은 것은 피난민이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4남3녀 중 막내. 어머니가 43살에 낳은 귀한 딸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어머니가 얼굴을 씻겨 줄 정도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오빠 때문에 한참 나이가 들어서 중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 고 3때 취직을 했다. 그곳이 바로 대성사였다. 안료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가난한 피난민의 막내 딸은 한국 안료 시장을 대표하는 기업인이 됐다. 그의 눈은 이제 한국을 넘어서 세계를 보고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안료의 힘이다. 이 분야 최고의 글로벌 전문 기업이 돼서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내 꿈이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201506호 (201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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