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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LIVE 인터뷰 part 3] "내가 공부한 것, 노력한 것으로 인정 받고 싶었어요"

☞  2부에 이어


- 7살 때 끝나 버린 음악적 기반의 완성 

조: 박진영씨 미국 별명이 'Asiansoul'이죠. 소울에 대한 이야기를 뺄 수 없을 텐데. 어릴 때 미국 가서 흑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런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죠. 그 때 음악적 기반이 다져진 거 겠네요? 

박: (음악적 기반의 완성이) 끝나버렸어요. 7살 때 끝났어요, 이상하게도. 제가 평생 사귄 여자들 사진을 모아 놓으면 아마 기절할 거예요.
 
조: 왜죠.

박: 다 똑같이 생겼어요. 이상하게 여자도 음악도 영화도 극단적으로 딱 한 종류만 좋아하고 나머지는 좋아하지 않아요. 어릴 때 좋아했던 여자의 타입이 지금까지 이어지듯, 어릴 때 소울이 저에게 끼쳤던 영향은 막대해요. 솔은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데, 다른 장르는 안 일으켜요. 

조: 박진영씨가 프로듀서로서 가장 상업적 성공을 한 시절이 원더걸스의 영어 제목 3부작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박진영이 작두를 탔구나' 했었어요. 이전의 작업들과 다르다고나 할까. 본인이 해 왔던 작업들 중에서 이 3부작만 도드라지는 느낌이 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박: '100% 운'이었어요. '섹스 엔 더 시티' 스타일리스트, 아무로 나미에의 '70 80 90년대 3부작'을 함께 했던. 패트리샤 필드라는 할머니 스타일리스트가 하는 파티에 간 거였어요. 그게 80년대 파티였죠. 음악이 80년대 노래들만 나오는데,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어요. 저같이 흑인음악 취향, 완전히 팝, 록 취향, 나이 성별 다 다른데, 모두가 다 좋아하는 거예요. '80년대에는 다 들어 있었구나' 락적인 요소, 팝적인 요소, 한국적인 요소, 글로벌한 요소... 다 들어 있던 거죠 그래서 80년대는 한국 음악 시장 점유율의 대부분이 팝이었던 거죠. 그 필을 받아서 그날 밤에 와서 노래를 만들었어요.

일단 아무 악기 없이 베이스라인부터 찍었어요. 노래를 베이스라인 하나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복고 컨셉트가 그렇게까지 터질 줄 몰랐어요. 원더걸스 멤버들은 가이드를 듣고는 '이게 뭐냐, 왜 이걸 우리가 해야 하냐'고.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회상하는 정욱 대표: "운 멤버도 있었지...") 원더걸스도 이해가 가는 게, 듣도 보도 못한 음악을 하라고 하니까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자기들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음악이니까. 게다가 춤은 또 이게 뭐야. 자기들이 이때껏 연습 해 온 춤이 있는데. 그러나 결국... 80년대 복고 3부작을 하면서 결과 때문에 행복한 것도 있었지만 제가 스스로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 음악적인 풍성함을 표현하는 게 행복했죠. 쓰지도 않던 옛 악기들, 트라이톤, 무그 베이스 등 다 꺼내고. 신나~는 음악 축제였어요. 그런데 그것도 좀 하니까 질리더라구요.

- 무모한 도전인가 50%의 확률인가


조: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원더걸스를 데리고 무모해 보이는 모험을 했단 말이죠. 미국 진출. 

박: 위험한 도전을 했을 때는, 잘될 때는 어마어마한 찬사를 얻게 되고, 잘 안 됐을 때는 당연히 비난을 받게 되죠. 결과적으로 큰 성과가 없었다는 것 때문에 무모한 도전이 돼 버렸는데, 사실 처음 미국 진출할 때, 확률이 50%는 넘는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가장 핫 한 밴드 조나스 브라더스의 50개 도시 순회공연의 오프닝을 한다는데, 이건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수퍼 스타의 오프닝이라는 게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회당 몇 만명의 관객 앞에서, 그것도 조나스 브라더스의 매니저인 아버지에게서 직접 연락이 와서 매니지먼트까지 함께 하자는데.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높은 시청률의 전국 방송 토크쇼 출연과 당시 가장 핫 했던 'So You Think You Can Dance'같은 프로그램에 출연 하게 됐고, 메이저 레이블의 도움 없이 빌보드에 진입 했고. 결과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빨리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원더걸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나왔고. 과연,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일까요? 제 눈 앞에 50%가 넘는 성공 확률이 보였는데, 도전하지 않았다면 그게 비난받아야 했을 일이라고 생각해요. 

조: 비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박진영씨에 대한 대중의 비난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계속 따라다니는 꼬리표, 표절이란 말이죠. 

박: 작사 작곡가가 제 이름으로 있다가 어느날 미국 사람 이름으로 바뀌어 있는 게 캡춰 돼 있죠. 그 사진은 물론 사실이예요. 중요한 건 이게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있었던 일이라는 거죠. 당시 작곡가들 사이에서 무지에 의한 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샘플을 쓰더라도 그 곡을 이용해서 새로 만들면 새 곡'이라는 소문이 있었죠. 

조: 저도 그런 관행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들 몰라서 그랬던.

박: 게다가 당시엔 저작권 협회에 샘플링이라는 표기를 하는 란이 없었어요. 지금은 있죠. 샘플링에는 세 가지 별도의 절차가 있어요. 원 저작자로부터의 허가, 음반에의 표기, 그리고 저작권 관리 회사에의 등록. 저 뿐 아니라 당시 샘플링을 했던 모든 저작자가 빠트렸던 부분이예요. 일단 음반에의 표기는 음반 제작사에서 빠트렸어요. '춤이 뭐길래' '관찰' '어머님께' 모두 마찬가지였죠. 저작권 획득 책임은 음반사에 있는데, 거기서 안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저작권료 빼았길 때, 음반사에서 저에게 보상을 해 줬어요. 말하자면 저도 피해 보상을 받은 사람이예요. 제가 잘못 했다면 피해 보상을 제가 했겠죠. 너무 슬프게도 2000년대 들어서 직배사들이 들어와 샘플 쓴 모든 작곡가들에게 내용증명을 다 보냈어요. 그 세 가지 절차를 몰라서 모두가 저작권료의 100%를 빼앗긴 거죠. 절차대로 했으면 합리적인 선에서 결정되는 요율만 주면 되는 건데. 무지에서 온 슬픈 이야기죠.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엔 그런 일이 다신 없었어요. 

조: 박진영씨의 표절 논란은 단지 샘플 논란 뿐 아니라 유사성에 대한 논란도 있죠. 

박: 표절 논란의 가장 중요한 건 의도적으로 베꼈느냐 아니냐 인데. 일단 동기 없이 범행을 저지를 리는 없죠. 표절의 동기가 뭐겠어요? '곡이 안 써지니까' 겠죠? 저는 표절 재판 중 주간 차트 1위 곡을 다섯 곡 썼어요. 모두 큰 논란 없이. 그 다음, 의도적인 표절은 '안 걸릴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거죠. 첫째, 유명 드라마의 주제가를, 유명 가수가 부르는데, 이걸 다른 '한국' 작곡가가 만든 곡을 베껴서? 이 노래를 대중은 물론 가수, 제작자, 그 작곡자의 주변 사람 등 수많은 사람이 듣고 결국 걸릴 게 뻔 한데 왜 베끼겠어요? 그렇다면 그런 우연한 유사성을 막는 방법은 필터링 밖에 없죠. 저는 그 장치가 있거든요. 사내에 16명, 사외에 20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는 곡은 필터링이 안 돼요, 문제가 됐던 곡은 아무도 모르는 곡이었죠. 아무도 모르는 곡은 전문가들의 필터링을 거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종합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만든 500곡 중 1위곡은 48곡인데, 그중 표절 논란 있던 곡은 아주 소수예요. 대부분은 아무 논란 없었어요. 그 비율로 봐 주시면 좋겠네요. 

- 인생을 지배한 음반 세 장 


조: 그럼 다시 음악 이야기로, 미쓰에이가 나올 때 셔플 리듬이 등장했죠. 그 셔플이 지금 선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셔플에 꽃인 출발점은 뭐 였어요?

박: 우연히 들은 셔플에 중독됐어요. 뭐였지? 휘트니 휴스턴 노래, 'I'm Your Baby Tonight', 오랜만에 들으니 셔플이 몸에서 반응을 하는 거죠. 그래서 셔플 리듬에 악기들이 많이 없는 'Bad Girl Good Girl'을 만들었으나 또 회사의 반대, 멤버들이 역시 거의 울면서 하기 싫다고. 모르는 음악을 하라고 하니 말이죠. 수지도 원래 힙합 소녀였고, 민은 말할 것도 없고, 페이와 지아 역시 어디서 들어본 바 없는 음악이니 힘들었겠죠. 

조: 그러나 역시... 대 성공 했죠. 그 이후로 셔플로 만든 곡들이 반응이 계속 좋은데... 

박: 셔플도 셔플이지만, 제 머리 속에 있는 5인 악기 밴드 구성이 잘 안 빠지는 것 같아요. 제가 평생 처음으로 산 세 장의 앨범이 결국 제 음악이 됐어요. 미국 살던 시절, 어머니께서 나가시면서 10달러를 주셨어요. 앨범 3달러하던 시절. 학교 가서 우연히 마이클 잭슨을 보고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세 장의 앨범을 산 게.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쿨앤더갱의 'Celebration' 도나섬머의 'Radio' 였어요. 그렇게 26년 지나서 돌아보면 (옆에서 관심 없는 척 하고 있던 정욱 대표: "36년 아니야?") 아 그래, 36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이 세장의 앨범만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 온 거예요. 아시다시피 이 세 장의 앨범은 밴드 구성의 댄스 뮤직이거든요. 이런 음악들이 바로 저를 만든 거죠. 그게 바로 '그녀는 예뻤다'고, '허니'고, 심지어 지금 나온 선미의 '24시간이 모자라'죠. 앨범 세 장으로 오래 잘 먹고 사는 거죠. 

-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


조: 박진영씨는,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박: 제일 좋았던 순간 중 하나가 기억나네요. '그녀는 예뻤다'라는 노래를 만들어 놓고 별로 자신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가성으로 부른 노래도 드물었고, 거기다 댄스 뮤직이고. 그렇게 자신이 없었는데, (대중적으로) 터졌단 말이죠. 그 해 겨울에 1997년 서울 가요대상이라는 시상식이 있는데,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정원영 형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최우수 편곡상'을 받았어요. 제가 가장 받고 싶은 상이, '최우수 편곡상'이었어요. 지금도 많은 가수들이 작곡을 하지만, 편곡은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바로 '타고 난 걸로 먹고 산다'는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일 싫었던 게 '춤 잘 춘다'는 말이었어요. 노력하지 않은 거니까.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춤을 잘 출 수 있으니까. 그래서 '공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편곡을 악착같이 했어요. 편곡 잘 했다는 소리 꼭 듣고 싶었어요. 내가 공부한 것, 노력한 것으로 인정 받고 싶었거든요. 정원영 형이 저한테 와서 "편곡 진짜 잘 했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을 때, 와 정말 뛸 듯이 기쁜 거예요. 제 첫 밴드 음악을 듣고 전문가가 좋은 평가를 해 줬을 때의 그 행복, 그게 인정받는 기분이죠.

그리고 또 한 번 인정 받아서 기뻤던 순간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옛날에 음악 이론을 새로 하나 배울 때 그걸 이용해서 곡 하나를 썼어요. 사실 음악 이론을 다 배워 놓고 시작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게, 새 이론을 알았을 때 흥분이 되잖아요. 1집 '날 떠나지 마'를 쓸 때는 그 이전까지, '화성의 길'이라는 것이 있는 지 몰랐어요. 이게 아무 데로나 가는 게 아니라 문법처럼 '가는 길'이 있더라는 거죠. 언어에도 문법이 있듯이. 화성에도 문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흥분이 된 거예요. 5도 진행이니 2-5-1이니 하는 그 진행대로 가 보니까 후벼 파는 훅이 나오더라구요. '날 떠나지 마' 때 그 흔한 (건반을 연주하며) 여기서 5도로, 이런 진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곡을 쓰면서 흥분이...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뻔한 진행인데, 그 '화성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충격이 그 곡을 만들게 한 거죠. 그런 식으로 새로 알게 된 음악 이론 하나로 만든 노래들 많아요. '사랑 일년'은 (건반 치며) 이게 하프 디미니쉬 코드인데, 디미니쉬를 배우고 나니까 꼭 디미니쉬가 들어간 곡을 쓰고 싶은 거죠. 그래서 '사랑 일년'을 만들고...

조: 저도 분수 코드로 베이스 반음씩 내려가는 진행을 윤상 씨 노래에서 처음 알고는 집에 뛰어오자마자 그것으로 흥분해서 노래 하나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 그 기분 알죠. 가슴 뛰니까... 나중엔 '근음 치환'으로 '청혼가'를 만들었고, '그녀는 예뻤다'는 '대리 코드'를 처음 배운 거예요. 똑같은 멜로디에 코드만 바뀌는 거죠. 그걸 만들고는 김형석 형한테 "형~ 나 대리 코드 썼어!" 자랑하고, 이런 걸음마 수준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었던 거예요. 4집에서는 처음엔 '음계 개념'을 가지고 곡을 만들었어요. 하루는 형석 형이 어딜 간 사이에 혼자서 청음을 따다가, 이 곡이 장조인 것 같아서 장조로 따는데 안 따져요, 그래서 단조인가보다 하고 단조로 다시 청음을 하는데, 안 따져요. 그러던 와중에 형석 형이 왔어요. 형, 이거 단조도 안 되고 장조도 안 되네, 그러니까 형석 형이 껄껄 웃더니 "진영아, 이게 블루스라는 거야. 블루스는 장조와 단조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음계야" 이러면서 블루 노트와 함께 블루스 음계를 가르쳐 준 거예요. 

나는 '세상에 이런 게 있다니!' 하면서 감탄했어요.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블루스였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던 것이 음악적으로 뭔지를, 그 때 알게 된 거에요. 야, 이게 3도가 장3도와 단3도를 교대로 쓰면서 이런 멋진 음악이 나오다니. (건반을 연주하며) 3도 음을 장조로 쓸 수도 있고, 단조로 쓸 수도 있고, 심지어 동시에! 쓸 수도 있다니! 이걸 알고는 거의 이성을 잃은 거죠. 집에 가서 각 악기 별로 '베이스, 너는 단3도를 써, 기타, 너는 장3도를 써', 불협이 안 나는 범위 내에서 어레인지 하는데, 그 때의 쾌감이란... 세상의 어떤 것도 장3도와 단3도를 어레인지하던 기쁨에 비교할 수가 없죠. 

그렇게 음악을 발표하고 큰 히트도 했는데, 사람들은 이게 블루스 곡이라는 걸 모르죠. 그냥 댄스 곡이죠. 그 노래는 바로 '허니', 이건 댄스곡이라고 부르지, 어떤 대중도, 어떤 기자도 블루스 곡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모 방송사에서 순위 프로그램 끝나고 무대에서 걸어 나가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형과 전태관 형을 만난 거예요. 이 분들이 지나가면서 딱 제 어깨를 잡더니, "아, 블루스를 그렇게 하나?" 그러고는 가셨어요. 아... 내가 우러러보고 자랐던 저 분들이 알아주는구나, 이게 블루스 음계이고, 내가 악기 하나 하나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아 주시는구나. 내가 음악 하면서 제일 기뻤던 두 번이, 바로 정원영 형이 편곡 잘 했다고 했던 그 날, 그리고 김종진 형이 방송사 복도에서 그 말을 해 준 날이었어요. 그 두 번이 어떠한 상을 받았을 때, 어떤 큰 돈을 벌었을 때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두 분 다 기억 못 할지도 모르지만.

조: '음악 이야기'를 하니까 가장 신이 나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대중들에게도 그런 인정을 받고 싶은 건가요? 


박: 내가 항상 말했던 부분인데, 대중들이 내 음악이 음악성 있다 없다 의식하는 게 싫어요. 대중으로부터는 그냥 '박진영 음악 좋네' 라고 평가받는 게 좋고, 전문가들에게는 '이거 사실은 잘 만든 음악이야' 라는 평을 듣는 게 목표였거든요. 그러고 나서, 제가 음악이 한 번 크게 바뀌죠. '리프' 쪽으로 바뀌어요. 네 마디 같은 진행을 돌리는 음악 취향으로 확실히 바뀌었어요. 그게 한 250곡쯤 썼을 때, 음악 생활 중간 쯤에, 기승전결이 있는 전개가 갑자기 싫어지더라구요. 그렇게 리프 음악으로 들어가니까, 같은 걸 도돌이표로 계속 돌리면서 얻어지는 자극에 빠져서 몇 년이 가 버렸죠. 첫 곡이 '난 여자가 있는데'인데 기타 리프 하나를 끝 없이 돌리면서 나오는 곡이죠. 예전에 신중현 선생님은 그런 음악을 한 적이 있지만 90년대 2000년대 음악에서는 드물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리프 음악을 하면서 아무도 같은 네 마디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 잘 만든 곡이 되는 것이거든요.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Take Five', 그게 5/4 박자라는 걸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았으니까 위대한 거지, 들으면서 '박자 왜이래?' 하면 잘 만든 곡이 아니었을 테죠. 한국 사람들이 편안하게 듣기 힘든 리프 음악으로 히트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해서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좋아했었죠. 그런데 사실 걱정도 많았어요. 대중성 없을 줄 알아서. 부족한 대중성을 보완하려고 탭댄스까지 추게 된 거죠. '니가 사는 그 집'도. 리프 음악, 'No Love No More'까지 리프였다가 다시 기승전결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너뿐이야'였어요. 아주 신나는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몇 년 단위로, 뭐에 미쳐 있다가 뭐에 미쳐 있다가. 사실 이런 이야기는 어떤 공식석상에서도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인터뷰어 조원희 프로필
1994년 계간 '리뷰'를 통해 대중음악과 영화를 아우르는 평론 활동 시작, 월간 '박스'와 주간 '시네버스' 등의 잡지에서 기자 생활. GQ, 보그 등의 컨트리뷰터. 1990년대 홍대 앞에서 인디 뮤지션으로 활동했으며 2010년 장편 영화 '죽이고 싶은'으로 영화 감독 데뷔, '옥희'로 2013년 롯데시네마 시나리오 공모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영화화 준비중. '창작과 비평' '영화와 음악'이라는 쌍칼 두 개를 휘두르는 4도류를 구사한다.

글 : 조원희
사진 : JYP 엔터테인먼트 제공


☞[박진영 LIVE 인터뷰 part 1] "저는 누가 예쁘면, 그 사람이 잘 되는 걸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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