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부족 유엔군 성급한 평양 포기 ‘뼈아픈 실수’

입력 2016. 07. 27   16:22
업데이트 2016. 07. 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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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무 아쉬운 평양철수작전


워커 장군, 중공군 인해전술에 놀라 평양 철수 건의 맥아더 곧바로 수락

시간적 여유 충분했지만 신속 퇴각

 

중공군 보급품 부족하고 지쳐 있어

평양-원산 방어선 끝까지 사수하며 최후 결전 벌였다면 전세 역전 가능

 

 

 

폭격으로 무너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 탈출하는 피란민들. 국방일보 DB







6·25전쟁에서 가장 큰 실수는 평양철수작전이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입성하던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와 산속에 숨어 있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을 때인 10월 25일, 갑자기 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참전했다. 당시 중공군은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지휘 아래 13병단(야전군) 예하 18개 사단, 26만 명이 1차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 줄도 모르고 10월 26일 국군6사단은 ‘통일의 꿈’을 안고 압록강 변의 초산(楚山)을 점령했다. 그 순간 ‘빨리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끝없는 후퇴를 거듭함으로써 통일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중공군의 첫 싸움은 국군1사단과 맞붙은 ‘온정리전투’였다. 미 제1기병사단도 압록강 후방 60㎞ 지점에서 중공군과 만나 첫 교전을 벌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비로소 중공군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은 미8군사령관 워커(Walton Harris Walker) 중장이 지휘했고, 국군의 선봉 부대는 제1사단이었다. 국군 제1사단의 ‘온정리전투’와 미 제1기병사단의 ‘운산전투’는 중공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미 제2사단까지 ‘군우리전투’에서 붕괴하자 유엔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적은 인해전술로 압박을 가해왔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려던 유엔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중공군은 9병단 예하 12개 사단 12만 명을 증원해 총 30개 사단 38만 명으로 제2차 공세(11월 25일)를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미 2사단은 첫 전투에서 패한 후 반격에 나섰고 청천강 계곡을 따라 북상하다가 중공군 매복에 걸려 전진이 저지당했다. 국군7사단도 덕천(德川)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부대가 마비됐다. 유엔군은 부득이 11월 26일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됐다. 중공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이 대규모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됐고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됐다고 실토했다. 한편 중공군은 1차 공세 때 온정리전투에서 승리하고, 2차 공세 때 청천강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고 맥아더는 ‘평양-원산’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를 결정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전선 상황이 불리해지자 ‘평양 사수냐 아니면 포기냐’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만일 평양을 포기한다면 38선도 위협받게 된다. 그런 가운데 12월 3일, 대규모의 중공군이 성천(평양 50㎞)을 향해 밀려들자 워커 장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장군의 생각에는 평양 사수도 중요하지만, 유엔군 병력을 희생시키지 않고 구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적과의 접촉을 피하는 평양 철수를 건의했고, 맥아더는 이를 수락해 12월 3일 ‘평양 철수’를 결정했다.

유엔군은 12월 3일 평양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국군도 4일 평양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6일 중공군이 평양에 입성했다. 유엔군은 평양에서 물러날 때 시민들을 철수시킬 계획을 세우지 못해 큰 혼란에 빠졌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열렬히 환영했던 시민들은 유엔군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 자유를 찾아 엄동설한에 피란길에 올랐다. 국군이 마지막 떠나던 12월 4일 아침 대동강철교는 폭파됐고, 피란민들은 끊어진 철교를 넘어 목숨을 걸고 평양을 탈출했다.

평양을 쉽게 내준 것은 최대 실수였다. 만일 ‘평양-원산’ 방어선에서 버티며 낙동강 방어 때처럼 최후 결전을 벌였다면 전세는 역전됐을 것이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다. 즉 당시 중공군은 걸어서 압록강을 건넜고 그 후 계속되는 작전에서 피로에 지쳐 있었다. 또 유엔군이 평양-원산을 잇는 방어선에서 철통 같은 방어태세에 들어갈 줄 알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공군의 진출을 숙천(평양 북방 90㎞)에서 ‘일시 정지’ 시켰고, 정비 기간을 거친 후 힘을 충전해 평양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니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유엔군이 지레 겁을 먹고 38선까지 빠진 것이다.

중공군은 기동력이 없고 보급품도 부족해 지쳐있었다. 인해전술을 사용한다고 해도 밤낮으로 퍼붓는 미 공군의 폭격에는 공포심이 앞서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점을 유엔군 지휘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유엔군이 기동력을 이용해 수백㎞를 신속하게 철수하자 중공군은 너무 쉽게 평양에 ‘무혈입성’했다. 전투가 끝난 후 중공군의 분석에 의하면 ‘유엔군이 너무 빨리 후퇴하는 바람에 쫓아가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유엔군의 철수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격 기회를 얻지 못하고 계속 밀리자 워커 장군은 매우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조급한 마음에 전선을 시찰하다가 도봉산 부근 장수원에서 차 사고(1950년 12월 23일)로 순직했다.

당시 적에 대한 정보 부족이 대책 없는 장거리 철수로 이어진 것이 못내 아쉽다. 병력의 수보다 ‘전투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간과한 결과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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