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은 또라이들과 함께 ‘결핍’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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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5.12.22. 오후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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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모던 가야그머’ 정민아


가야금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인디뮤지션’ 정민아씨가 5월2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씨클라우드 카페의 창문 밖으로 활짝 웃고 있다. 아픈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노래를 나직하게 부르는 정씨는 “알바를 전전하던 인생이 신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이라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국악관현악단 입단 실패하고
전화상담원·편의점 알바생활
전형적인 88만원 세대이지만
홍대클럽서 자작곡 노래하는
가야금 인디뮤지션으로 활약
촛불시위때 세상에 눈뜨기도

70년대 ‘세시봉’ 있었다면
2000년대 홍대엔 ‘바다비’
눅진눅진해서 오히려 정겨웠던
뮤지션들의 학교이자 아지트
‘최고의 쓰레기’들이 모여
스스로를 치유해 나간 기적


“우리가 죄인이지, 젊은 애들한테 일자리도 못 만들어 주는 어른들이 무슨 할 말이 있어?” 내 연배 사람들과 술 한잔 걸치다 보면 어느 자리든 긴 한숨과 함께 이런 탄식이 새나온다. 여기엔 두 가지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첫째, 시곗바늘을 되돌려 이 얘기를 하는 장년층이 ‘젊은 애들’이던 시절, 지금처럼 한잔할 때 나누던 얘기가 “이런 세상을 자식들에겐 물려주지 말자”였는데, 젊은이들이 느닷없이 감옥으로, 고문실로 끌려가는 세상을 물려주지 않으려고만 했지 거대한 시대적 산업적 변화에 우리 자신 대책 없이 무방비로 끌려올 줄 미처 몰랐다는 점. 둘째, 스스로 “말할 자격 없는 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이 어르신들, 젊은이만 보면 여전히 뭔가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드는 꼰대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 2030세대에 대한 4050세대의 시선은 사뭇 봉건적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자책감과 보호본능.

무능한 보호자의 시선으로가 아니라, 젊은이들 내부에서 스스로 바라보는 그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을 “모던 가야그머”라 칭하는 젊은 여성 뮤지션 정민아(1979년생)를 만나면 그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국악고와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숙명가야금연주단에서 활동한 촉망받는 국악인이었지만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전화상담원, 학습지 교사, 편의점 알바 등을 전전한 전형적인 88만원 세대. 가야금을 연주하며 자작곡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홍대 앞 클럽을 주무대로 활동하지만 용산 피해자들이나 이랜드노조, 이주노동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기꺼이 거리에 서는 “개념탑재녀.”

계산대 점원 하다 첫 무대에 선 사연

5월의 마지막 일요일, 홍대 앞 작은 공연장 ‘씨클라우드’에서 열리는 정민아 콘서트를 보러 갔다. 인터뷰 준비차 온 사람임을 알면서도, 에누리 없이(!) 입장료를 받는다. 군말 없이 티켓을 사고 카운터에 진열된 시디(CD)도 두 장 샀다. 50~60명가량 되는 관객들로 공연장이 빼곡해졌다. 나이 오십에 홍대 앞 클럽에 처음 진출했다는 사실에 자못 감격스러워하며 맥주 한 병을 들고 자리에 앉자 그녀가 등장했다. 눈망울이 크고 함박웃음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25현 개량가야금을 뜯으며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가난한 아가씨 어딜 가나요/ 부엉이는 울고 내 옷은 남루한데/ 내가 가는 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니죠…/ 사랑은 마른 낙엽처럼 이리저리 뒹굴지만/ 바람은 내 마음대로 불지 않아요./ 무심한 바람은.”(정민아 작사·작곡 ‘가난한 아가씨’ 중에서)

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뱃속에서 듣던 어머니의 나지막한 읊조림 같은 그녀의 음성이, 가야금의 영롱하면서도 끈끈한 소리와 밀고 당기며 편안히 어우러졌다. 낯선 분위기에 곧추섰던 어깨의 긴장이 나도 모르게 눈 녹듯 풀어졌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이 “25현 가야금 연주자 중에 산조적인 연주를 할 줄 아는, 가장 전통적인 연주자”라고 평한 정민아는, 이제 국악의 울타리를 넘어 가야금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듯했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편곡해 노래하는가 하면, 베이스기타와 듀오로 14분짜리 재즈풍 ‘즉흥’을 연주하고, 아코디언과 주거니 받거니 ‘미나탱고’를 들려준다. 3일 후, 정민아를 만나러 씨클라우드를 다시 찾았다.

-2006년 정규 데뷔 앨범 <상사몽>이 1만장 판매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 뒤 생활은 좀 나아졌나?

“2, 3집 때는 그리 재미 못 봤다. 사실 1집이 1만장 팔린 게 기이한 거다.(웃음) 그때는 홍대에 가야금 하면서 노래하는 애가 없었고, 걔가 어떤 신파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매스컴에서 띄워준 것 같다. ‘낮에는 전화상담원, 밤에는 가야그머’ 주로 이런 제목으로…. 사실 내 이력은 특이할 것도, 신파적일 것도 없다. 대개들 그러고 산다. 티브이에서 워낙 고급스런 것들만 보여주니까 다 그렇게 우아하게 사는 줄 착각하는데….”

-가야금을 전공할 때부터 홍대 앞 인디뮤지션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아니다. 원래는 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안정적인 월급 받고 좋은 직업, 좋은 학벌로 좋은 남자 만나서 떵떵거리고 살아야지 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비주류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된장녀였다.(웃음)”

중2 때 우연히 가야금학원 전단지를 보고 어머니를 졸라 배우기 시작한 가야금에, 정민아는 “첫사랑에 끌리듯” 빠져들었다. 자나 깨나 가야금 생각뿐이었고 한번 가야금을 펼치고 앉으면 네댓 시간은 다리를 풀지 않았다. 꽤 인정받는 실력이었지만 국악관현악단 오디션에선 번번이 낙방이었다. 대학 4년 내내 주말마다 경마장에서 티켓판매원으로 용돈을 벌었고 졸업 후에도 4년 반 가까이 홈쇼핑이며 통신회사의 전화상담원을 하며, 틈틈이 편의점 알바, 학습지 교사로도 뛰었다. 그 와중에도 음악 공부는 계속했다. 혼자서 드럼을 배우고, 실용음악학원에서 화성을 배우고, 기타와 베이스, 피아노도 배웠다. 안양의 ‘오렌지폭스’란 인디클럽에서 계산대 점원을 할 때 그가 연습실에서 가야금을 튕기는 걸 보고, 클럽 사장이 정민아를 무대에 세웠다. 정통 국악 연주자의 길에서 인디뮤지션으로 방향을 틀게 된 첫번째 전환점이었다.

-당신 정도 스펙이면 편의점 알바나 전화판매원 말고 좀 더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지 않았나? 레슨을 한다든가….

“레슨도 줄이 있어야 한다. 선생님이 자기 제자의 새끼 선생님으로 붙여준다든가 해야 자릴 얻는다. 나 말고도 같은 과 출신 중에 전화상담원 하던 애들 많다. 종일 일하면 한 달에 120은 번다.”

-그럼 낮에는 알바 하고 저녁엔 홍대에서 공연하고… 그 생활을 몇 년이나 한 건가?

“2009년까지…. 2009년에 음악에만 집중하겠다고 직장을 그만뒀는데 단독공연이 아닌 한, 클럽 공연으로는 돈을 못 번다. 출연진끼리 인원수대로 나누면 한 사람당 많아야 3만원꼴? 마침 미술 하는 친구가 마포 전철역 앞에서 샌드위치 장사를 하는데 꽤 짭짤하다고 해서 혹했다. 사전답사 철저히 하고 광화문 7번 출구 앞에 좌판을 차렸다. 그때 8번 출구 쪽이 공사중이라 목은 기가 막혔는데…. 품목도 카레주먹밥으로 정하고 젓가락도 2000개나 샀는데 일주일이 안 돼 손님이 뚝 끊겼다. 맛이 없었나 보다.(웃음)”

주먹밥 장사는 쫄딱 망했지만 그때의 경험은 3집 앨범(2011)에 익살스런 노래로 남았다.

“지긋지긋한 회사를 집어치우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만든 주먹밥/ 자유롭게 뮤지션의 본모습으로/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만든 주먹밥…/ 쉬울 줄 알았지 편할 줄 알았지/ 돈 벌기가 쉬웠으면 전 국민이 주먹밥 팔게/ 대한민국 지하철 입구마다 주먹밥만 팔고 있게/ 망했네 망했네 망했네/ 이걸 어떡하지”(정민아 작사·작곡 ‘주먹밥’ 중에서)

주먹밥과 같이 발표된 ‘은미 이야기’는 그가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던 시절 동료의 실제 사연이다. 은미의 어머니는 은미가 고등학생일 때 빚을 지고 집을 나갔는데, 백수인 오빠는 일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짜장면 시켜줘’ 심부름을 시키고, 아버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장례식 3일간 휴가를 냈다 돌아온 은미는 자리에 앉자마자 웃는 얼굴로 낭랑하게 전화를 받아야 했다.

“따르릉 따르릉 그녀의 아버지는/ 따르릉 따르릉 어제 죽었지/ 따르릉 따르릉 그녀의 오빠는/ 따르릉 따르릉 술 마시고 싸우네/ 오늘도 은미는 전화를 받아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정민아 작사·작곡 ‘은미 이야기’ 중에서)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정민아를 만든 시간들

슬픔 속에서도 낭랑하던 ‘은미 이야기’

-지금 은미는 어떻게 사나?

“시집가서 애 낳고 잘 산다. 여전히 그 회사에서 전화상담원으로 일한다.”

-당신은 역경을 이기고 꿈을 이뤘지만 세상엔 아직도 수많은 ‘은미들’이 있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나?

“무슨 기준으로 역경과 성공을 가르는지 모르겠다. 은미도 나름 재밌게 잘 살았다. 웃을 때 웃고 배고프면 밥 먹고 나랑 수다 떨면서…. 내가 ‘네 얘기로 곡 만들어도 돼?’ 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맘대로 해’ 하더라. 은미는 비참함 때문에 찌들어 살지 않았다. 그때그때 힘든 상황은 있었지만 그 시절이 은미에게나 내게나 역경은 아니었다.”

“당신이 알바 전전하던 시절이 역경이 아니었다고?” 하니 정민아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럼요!”

“역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절이 없었으면 난 세상의 가치를 하나도 모르는 바보로 살았을 거다. 처음엔 나도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지’ 자괴감이 들고 그 일과 그 일 하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한데 거기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일하다 보니 그 일도 의미 있고 보람이 있더라. 힘들 때마다 내가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늘 주변에 있었으니까. 내겐 은미도 있고 ‘바다비’ 친구들도 있었다.”

-바다비 친구들이 누구인가?

“전화상담원 시절부터 공연하러 다닌 ‘바다비’라는 홍대 클럽이 있다. 지하 카페인데 늘 냄새나고 축축해서 깔끔한 사람은 거부감 느낄 정도다. 웬일인지 난 첨부터 그 눅진눅진함이 편안하고 정겨웠다. 인디밴드들 공연이 끝날 무렵이면 바다비 사장님이 찌개를 끓이셨는데 그걸 퍼먹으면서 밤새 떠들고 울고 웃고… 그러면서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끈끈한 가족이 되었다.”

70년대 통기타 그룹한테 세시봉이 있다면 2000년대 홍대엔 바다비가 있었다. 홍대 뮤지션들에게 바다비는 삶에 대해 엉뚱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교이자 아지트, 안식처였다. 2011년 바다비 주인장이 뇌수술을 받고 클럽이 폐관 위기에 놓였을 때, ‘바다비 네버 다이’란 타이틀로 홍대 137개 인디밴드들이 11일에 걸쳐 유례없는 모금 공연을 벌였다. 바다비를 거쳐 간 크라잉넛과 십센치, 장기하와 장재인도 참여했다. 정민아는 이 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하는 데 중심적인 몫을 했다.

-바다비의 매력이 대체 뭔가?

“뭐라 할까… 최고의 쓰레기를 만난 느낌? 너무 해맑은 또라이를 만났다고 할까. 하나도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들. 그런 순수한 똘끼에 공감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뭉쳤는데 각기 나름의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이 다른 ‘결핍’이 있는 사람을 만나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정민아에게도 불행한 가족사로 인한 결핍이 있었다. 명문대 철학과 출신의 아버지는 문학에 큰 뜻을 품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결혼은 처음부터 족쇄였는지도 모른다. 불화가 깊었고 집은 늘 전쟁터였다. 어린 민아는 간혹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 “식구들이 다 죽어있으면 어쩌지”하는 불안에 사로잡히곤 했다. 결국 부모님은 황혼이혼을 하셨고 그로부터 2년 뒤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전화상담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병원에 가서 어머니 대소변 수발을 들었다.

“뇌수술 하고 머리를 다 민 모습 처음 봤다. 수술 후에 아기처럼 되는 줄 몰랐는데. 겉은 어른이지만 애들과 똑같은…. 엄마가 나를 이렇게 키웠다는 걸 알려주시려고. 내 똥을 다 받으면서 키웠다는 걸 알려주시려고 그런 시기를 준 것 같다. 전화상담원 할 땐데 심신이 정말 힘들었다.”

피를 나눈 가족이 멍에가 될 때, 바다비 친구들은 그 외로움을 달래고 치유해주는 또 다른 가족이었다. 세상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광우병 촛불집회는 정민아가 경험한 최초의 시위였다. 제일 놀랐던 건, 전경들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막고 못 가게 한다는 점이었다.

꿈이 뭐냐고? 이렇게 살다 죽는 것!

“나 여기 사는 사람인데 지들이 왜 못 가게 해? 자유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박탈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기가 발동해서 여름 내내 가열차게 집회에 나갔고 새벽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뒤로 차츰, 모르고 지났던 세상의 이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용산참사 피해자들과 이랜드 노조원들,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이주노동자를 돕는 남자친구도 그때 만났다.

-가야금 싱어송라이터로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가야금은 계속 가져갈 건가? 그게 활동을 제약하는 부분은 없나?

“내가 제일 잘하는 악기가 가야금이니까 버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가야금 빼고 정말 뭔가를 하고 싶어지면 그렇게 할 거다. 가야금이 중요한 게 아니고 정민아 음악이 중요하고, 정민아 음악보다 정민아가 중요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사명감을 얘기하는데, 난 음악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것 없다. 음악은 소통의 창구인데, 그 창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반듯하게 바로 서야 음악도 제대로 나오는 것 아닐까. 음악을 위해 사는 게 아니다. 내 삶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지금이랑 달라지지 않고 사는 것이 소망이다. 인간답게 사는 것. 난 지금이 딱 좋다. 하루하루가 재밌다. 내가 만약에 이효리처럼 유명하다면 살면서 불편한 게 많았을 거다. 그간 미디어에 약간 소개는 됐지만 아직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딱 이 정도로 살면서 내가 노래를 만들면 그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들어주시고, 좋은 사람들과 재밌게 술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이렇게만 살다 죽으면 원이 없겠다.”

개인주의와 물질주의, 좌절과 패배감으로 젊은 세대를 섣불리 일반화하는 건, 그들에 대해 장년 세대가 가지는 일종의 ‘식민사관’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수많은 “은미들”을 대표해 정민아는 말한다. 부모들이 30년 전 그랬듯 우리 역시 삶을 억누르는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에 맞서 열심히 저항하고 사랑하고 유대하며 즐겁게 살고 있으니 너무 염려들 마시라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책임을 혼자 지라고 하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우리 얘기를 겸허하게 들어보시라고. 꼰대의 훈계 말고 같이 어깨 결은 친구로 대화하자고.

“울지 말아요 고단한 사람아/ 걷다 보면 외로운 나무 하나 있어/ 지친 몸 기댈 수 있을 거예요/ 울지 말아요 늙고 병든 이여/ 그대 여기 오기까지/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웠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웠으니.”(정민아 작사·작곡 ‘울지 말아요’ 중에서)

기운 빠져 주저앉은 장년들에게 젊은 여성 정민아가 엄마의 목소리로 토닥인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녹취·정리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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