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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서 미술을 꽃피우다 미술가 박불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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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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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서 미술을 꽃피우다
미술가 박불똥

천마산 자락에 터를 잡은 박불똥의 작업실로 들어선다. 강인함과 꼿꼿함을 예상하다 익숙한 손길로 화목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는 그에게서 소박하고 잔잔한 움직임을 발견한 것은 작은 희열이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예명 ‘박불똥’보다 본명 ‘박상모’에 더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쓰라린 기억
어린 시절의 가난과 미술반지리산 아래 섬진강변 마을 하동(河東)에서 태어난 시골소년 박상모(朴相模)는 중3이던 1970년 겨울방학 동안에 손위 넷째 형을 따라 완행 비둘기호 야간열차를 타고 가슴설레는 첫 서울구경 길에 오른다. 그러나 여차한 사정으로 인해 귀향을 제때할 수 없
었고 그 바람에 중학졸업식 불참은 물론 고교진학도 두 해나 끊게 된다. 여차한 사정이란 다름 아닌 ‘가난한 집안 형편’ 문제였는데, 그에게 가난은 늘 소망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남달리 그림에 소질을 보인 상모 소년은 초등학교 4학년 들면서 토요일 특기적성활동으로 미술반을 선택했다가 뜻밖에도 평생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만다.

“미술지도 선생님이 기존 미술반 아이들만 친근히 돌볼 뿐 싸구려 크레용과 낱장 도화지나마 어렵사리 마련해간 ‘궁티 신입자’한테는 아예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더군요‘가난뱅이는 그림을 해선 안 되는구나!’는 생각에 씁쓸한 현실을 일찍 맛보게 됐습니다.”

그것은 불과 열 살짜리 동심에 새기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미술반에 가지 않았다. 그후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신문배달원, 리어카노점상 등 도시빈민생활을 맴돌며 사춘기를 보냈던 청소년 박상모가 이태나 늦게 고등학생이 되게 끔 학업의 문을 열어준 사람은 셋째형이었다. 그리고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다시 펼칠 수 있게 그림공부를 권유하고 배려를 해준 이는 고등학교 미술담당 함섭 선생이다.



사람살이는 흔히 인연관계에 따라 유전행로가 급선회하곤 한다. 박상모도 형제관계와 사제관계를 통해 생애 가장 큰 변화의 계기를 그렇게 맞이했던 셈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입영통지서를 받아 대학 입학 직후 곧장 군대에 가야 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비도 겪었지만 그럴 때마다 복학하면 누리게 될 미대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떠올리며 인내심과 자제력을 키움으로써 그 위기를 이겨나갔다. 애국이나 충성이니 하는 강제된 추상의 가치들보다 ‘그림’이 훨씬 더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에게 미술 내지 예술은 이미 삶의 주요한 의미요 실체였다.

저 먼 트라우마 대학생활에서 되살아나다
복학생이지만 실은 신입생이다시피 시작한 대학생활은 안타깝게도 병영생활시 줄곧 그려봤던 상상과는 많은 부분이 어긋났다.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값비싼 외제 물감을 푹푹 짜서 쓰는 학우들 옆에서 그는 늘 위축되었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학우 한 명은 질 낮은 국산 물감조차 파리똥만큼씩 아껴 쓰느라 지도교수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대학생활 중에서 그를 더욱 절망케 한 것은 교수들의 입맛에 맞춘 틀 안에서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서양에서 이미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극사실화가 국내 미술교육 현장에선 이제야 판을 치는 추세도 마뜩치 않았고, 이른바 ‘벽지그림’류 형식유희에 골몰하는 태도 또한 따분하고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교수와 학우들이 떼 지어 신봉해마지 않는 현대미술의 ‘무(無)내용 형식주의’와 그가 구사하고 싶은 ‘내용중시의 현실주의’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깊은 골이 있음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왔는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가? 그런 것들을 그림에 담지 않으면, 담지 못하면,그럼 그림이 대체 뭐란 말인가?”
결국 방황 끝에 그는 3학년 2학기를 통째 결석함으로써 자퇴까지 작심하기에 이른다.



예명 박불똥 낮은 곳을 향하는, 작고 짧되 강렬한 것 
우여곡절 끝에 4년하고도 6개월을 더 다녀졸업장을 받기는 했다. 학비를 대준 형들의 마땅한 주문을 존중한 결과였다. 통상의 주류 미술에 대한 흥미도 열의도 식어버린 채로 대학을 졸업했을 때 무명 박상모의 나이는 벌써 서른 턱에 다다랐다. 그런데 천만다행히 캠퍼스 밖 화단 현장엔 그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미술운동이 대두해 한창 논쟁의 불을 지펴가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이도록 반가웠으니, 당연히 의기투합했고 신바람이 났다.

해마다 헤어리기 힘들 정도로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신진작가들 틈바구니에서 변별성을 갖고 살아남기란 가히 ‘하늘에 별 따기’라 할 만큼 어렵다. 자기조건이 여러모로 열악한 줄 너무나 잘 아는지라 생존을 위한 방안을 나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궁리하여 나온 게 ‘박-불-똥’이다. 아무래도 튀는 이름이 유리하다 판단해 스스로 지은 예명이었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향하겠다는 작업관의 정체성이 잘 어우러져 녹아든 이름이다.

“사람의 공식 이름에다 ‘똥’자를 쓰는 건 그야말로 파격 이상의 도전이었는데, 과감했던 만큼 효과만점이었죠.”

‘박불똥’이라는 이름을 내건 첫 전시회는 1984년 2월에 정복수 외 7인과 함께 한 <토해내기>전이다. 그해 8월에는 제3회 <실천그룹>전에 참여하였고, 12월에는 동료와 후 배들을 규합해 <푸른 깃발>전을 기획한다.그는 이러한 초기 전시활동을 통해서, 대학시절 갈등했던 ‘그림은 내 삶의 현실과는 무관한 사치스런 놀이일 뿐’이라 여긴 냉소와 무력감에서 벗어났고, 그림으로도 뭔가 유의미한 관계망을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내 그림은 내 이웃들에게 과연 무엇인가?
박불똥은 1983년 데뷔 이래 순수주의나 형식주의를 탈피해 새로운 리얼리즘 미학을 반평생 추구해 왔다. 그러한 노력을 평가 받아 박불똥은 80년대 대표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였다.박불똥은 그동안 백 수십 회 국내외 단체전에 참가했고, 11회의 개인전을 가진 베테랑미술가이다. 20여 년 전 서울을 떠나 경기도 능곡으로, 일산으로 또 충청도 엄정으로, 돌고 돌다가, 다시 남양주로와, 이제 우리 앞에 선 한 화가의 지친 기색이 성성한 백발에 역력하다. 

그의 다양한 작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잡지나 신문 등 종이 매체에서 오려 낸 사진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면서 풍자의 언어를 절묘하게 배합하는 방식으로 강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포토콜라주(photo-collage) 작품들이다.매순간 치열하게 살았던 박불똥은 2004년남양주 천마산 자락에 작업실을 짓고 들어앉으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명백한 화가로서 ‘그림’에 완전 매진하기로 결심한 것.

“진짜배기 화가들은 그저 자기만의 색깔 하나 형태 하나 만드는데도 십년, 수십 년 평생을 거는 사람들이에요. 그 경지로 이르려면 부단한 노력도 물론 필요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더 필수죠. 아주 타고난 천상 화가는 생김새부터 달라요. 영판 꼬장꼬장하지요. 난,가짜 화가인걸요.”

그런데 그는 모르고 있는 듯했다. 박불똥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꼬장꼬장해 보인다는 사실을. 평생을 관통한 나름의 자기 철학의 삶의 이력으로 말미암아 이미 ‘진짜 화가’의 인상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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