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전 간첩에 죽은 어머니 “국가여, 진실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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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홀로 진상규명 나선 김병집씨
대구에 사는 김병집씨(33)는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984년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이후 김씨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김씨를 키웠다. 할머니는 김씨 부모에 대해 “외국에 가 있다”고 했다가 나중엔 “사고로 죽었다”고 둘러댔다. 김씨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결국 부모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2014년 할머니의 폐질환이 급격히 악화됐다. 할머니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예감한 듯했다. 그때 할머니는 김씨에게 처음으로 부모에 대한 진실을 털어놨다. “네 엄마는… 간첩 손에 죽었단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김씨는 충격에 휩싸였다.

김병집씨가 32년 전 ‘대구 무장간첩 사건’ 당시 살해됐던 어머니가 운영했던 식당 터 앞에 서 있다. 김병집씨 제공



김씨 어머니 전갑숙씨(사망 당시 29세)는 1984년 9월 이른바 ‘대구 무장간첩 사건’ 당시 한 식당에서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남성에게 살해됐다. 전씨는 이 식당 주인이었다. 이 남성은 식당 종업원도 죽인 뒤 시민들과 격투를 벌이다 음독 자살했다. 당시 검찰은 그 남성이 소지한 북한제 각종 무기들을 근거로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씨 할머니는 신문에서 오려 모아놓은 기사들을 보여줬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도 있었다. 당시 할머니에겐 국가의 지원이 절실했다. 전씨가 사망한 뒤 한순간 생계가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당시 할머니가 여기저기 도움을 구해봤지만 손 내미는 곳이 없었다더라”고 말했다. 그때는 범죄피해자구조법(1987년)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할머니는 이후 생업에 집중하면서 피해 구제에 더 이상 신경쓰지 못했다. 간첩과 관련된 가족사라서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야 김씨에게 한(恨)을 털어놓은 것이다.

할머니가 사망한 후 김씨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졌다. 진상을 정확히 알면 보상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국가보안법상 보안법을 위반한 자의 신고 또는 체포와 관련해 사망한 경우 그 유족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김씨는 당시 신문 기사를 찾고 무작정 국가정보원 등에 연락해 자료 열람을 요구했다. 문서 한 장을 받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각종 국가기관을 찾아다녔다. 사건 초기 경찰은 김씨 어머니가 부산 미문화원 앞에서 장사를 했던 점 등을 들어 간첩과의 관계를 의심했다. 또 사건 두 달 전 식중독을 호소하며 숨진 김씨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꺼내 독살 혐의를 살펴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씨 어머니는 간첩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어머니가 간첩에게 저항하거나 신고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김씨의 몫이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건 자체를 뒤늦게 알게 된 그에겐 국가기관에 진상규명을 요구할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다. 민변 과거사청산위원회 박갑주 변호사는 “사건 당시 신고 또는 체포와 관련됐는지가 명확하지 않고,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미 시효가 완성됐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보상이 어렵다”고 말했다.

섬유공장에 다니면서 매달 160만원을 버는 그에게 각종 법적 자문·대행에 소요되는 비용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김씨의 진상규명 의지는 여전하다. 김씨는 “그때 어머니가 죽은 전말이 명확하게 규명된다면 분명히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언젠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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