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성장 해법, 라면시장에서 배워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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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라면은 한국인의 솔 푸드(soul food)다. ‘눈물 젖은 빵’을 우리말로 의역하면 ‘눈물 섞인 라면’쯤 되지 않을까. TV 채널마다 ‘먹방’들이 온갖 맛있는 음식을 보여줘도 소비자들은 여전히 라면 관련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 라면 판매량이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줄었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작년에 한국에서 팔린 봉지라면 및 컵라면은 총 25억1700만 개. 2014년보다 1.8% 감소했다. 앞서 2013년에는 1.6%, 2014년에는 3.2%나 줄었다. 역성장의 가장 큰 이유는 인구 정체에 따른 시장 포화였다. 아무리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도 하루 세끼 라면을 먹진 않는다. 건강에 대한 높아진 관심도 영향을 미쳤다.

침체 일로에 있던 라면시장에 지난해 하반기부터 큰 변화가 시작됐다. 농심 오뚜기 팔도 등이 프리미엄 짜장, 짬뽕 등의 신제품을 경쟁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럭셔리 라면’들은 일반 라면의 갑절 값인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 덕에 지난해 라면 판매 개수가 줄었지만 총 판매액은 오히려 2.4% 증가했다.

급기야 올해 1분기(1∼3월)에는 라면 판매 개수까지 작년 동기 대비 6.8% 상승세로 돌아섰다. 매출은 이보다 훨씬 높은 20.4%나 급증했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라면업계는 급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소비자단체들이 ‘변칙 가격 인상’이라 비판하지만 싼 라면이 여전히 팔리고 있고,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고급 라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싼 라면을 팔아 수익성이 개선된 라면업계는 설비 투자, 신규 채용을 늘리고 있다.

라면시장의 ‘굵은 면발 효과’는 우리 경제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출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한 비중은 지난해에 23.1%로 전년보다 9.5%포인트나 떨어졌다. 또 올해 1분기 수출은 1년 전보다 겨우 0.1% 늘었다. 세계적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조선, 철강 등 주력 수출 분야의 구조조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조만간 수출이 다시 성장을 견인하긴 어렵다.

답은 결국 내수에서 찾아야 한다. 성장의 벽에 부딪힌 라면업계가 찾은 해법은 ‘고(高)부가가치화’였다. 차별화된 맛의 고급 제품을 내놓자 소비자들은 기꺼이 두 배 값을 지불했다. 소비 침체 속에서도 더 나은 제품, 서비스에 지갑을 열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돈이 없어 못 쓴다’면서 해외여행 지출을 아끼지 않는 중산층 덕에 호황을 누리는 여행업계를 보라.

이미 장기 저성장 단계에 진입했고, 인구 증가가 멈춘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가능한 성장은 라면시장과 같은 방식일 공산이 크다. 부자라고 하루 네댓 끼를 먹진 않지만 이들이 더 고급한 세끼 식사에 훨씬 많은 돈을 쓰면 관련 시장은 커지고 일자리는 늘어난다.

4·13총선에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의 ‘경제민주화’와 국민의당 ‘공정성장론’은 형평성의 관점에서 경제를 본다는 게 공통점이다. 양극화 해소, 복지 확대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런 정책이 성장의 해법이 될 것으로 믿는 경제 전문가는 많지 않다. 고급화,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이뤄진 라면시장의 성장이 이들에게는 불평등을 야기하고, 서민의 피해만 키운 부도덕한 사례로 보일지도 모른다.

총선 직후 김종인 더민주당 대표의 경제 브레인인 최운열 비례대표 당선자가 “고용을 실제로 늘리는 방법은 서비스산업 활성화에서 찾아야 한다”며 금융, 교육, 관광, 물류 분야와 함께 의료산업 활성화를 거론했을 때 이런 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당내 강경파와 국민의당은 당장 ‘영리병원 불가’를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런 발상으로는 산업 구조조정으로 쏟아져 나올 실업자나 청년 구직자들에게 새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없다. 야권이 ‘성장담론 부재’란 오랜 비판에서 벗어나 수권세력이 되고 싶다면 먼저 라면시장 성장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라면#솔 푸드#soul 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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