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5.18관련 수사 기록물 열람
비공개 조회수 23,004 작성일2020.05.05
요즘 5.18에 관한 이슈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재점화되고 있더군요.. 여태까지 배웠던거완 상반되는 말들이 많던데 정확하게 팩트체크 하고 싶습니다..
5.18사태 당시 수사기록을 일반인이 열람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인터넷으로 되면 더 좋구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9 개 답변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BugTent
지존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995.7.18 5.18 검찰 수사결과 전문

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6106&page=4

목차

Ⅰ. 조사 경위

1. 조사 착수 경위

2. 피의자

3. 조사 상황

Ⅱ. 당사자 주장의 요지

1. 고소·고발인들의 주장 요지

2. 피의자들의 변소 요지

Ⅲ. 사건의 전말

1.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 시국 상황

(1) 정치 사회 학원 등 동향

(2) 보안사령부 동향

(3) 계엄 확대 이전 군 동향

2.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국 장악

(1)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격 추진

(2) 정치인과 재야 인사의 체포·연금

(3) 국회 점거·봉쇄

3. 광주 시위의 진압

(1) 계엄 확대 이전 상황

(2) 계엄 확대와 계엄군 배치

(3) 5월 18일 상황

(4) 5월 19일 상황

(5) 5월 20일 상황

(6) 5월 21일 상황

(7) 5월 22일 상황

(8) 5월 23일 상황

(9) 5월 24일 상황

(10) 5월 25 - 27일 상황

(11) 후속 처리 상황

4.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운영

(2)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기소·재판

(3)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4)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5.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운영

Ⅳ 수사 결과

1. 사건의 성격

2. 법적 판단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

(1)발포 경위

(2)광주 파견부대 지휘권 이원화 여부

(3) 무기 피탈 고의 방치 여부

(4) 헬기 기총 소사 여부

(5) 대검 및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6) 광주 외곽지역 피해 관련 진상

(7) 사망자 수

Ⅰ. 조사 경위

1. 조사 착수 경위

o 검찰은 5·18사건과 관련하여 1994.5.13. 정동년 5·18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김상근 5·18 진상규명과 광주항쟁 정신계승 국민위원회 공동대표 등 616명으로부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군지휘관 35명(현역 군인 11명 포함)에 대한 고소·고발장를 접수하고, 10.24. 이신범 환경관리공단 이사 등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22명으로부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군 관계자 10명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하고, 10.28. 장기욱 민주당의원 등 민주개혁 정치모임 관계자 29명으로부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23명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는 등 1995.4.3.까지 사이에 피고소·고발인 48명에 대하여 총 70건의 고소·고발장을 접수하였음.

o 검찰과 군검찰은 이 사건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정치적 대사건(大事件)인 만큼 이제 그 진상을 밝히고 이 사건을 둘러 싼 갈등과 대립을 청산해야 할 시대적 당위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서울지방검찰청 장윤석 공안제1부장검사와 국방부 검찰부 김조영 고등검찰관을 각 주임검사와 주임검칠관으로 하는 전담 수사반을 편성하여 면밀한 수사 계획에 따라 지난 1년간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수사를 진행하여 왔음.

o 검찰과 군검찰은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고, 이번 수사가 국가기관에 의한 최종적이고 완벽한 진상규명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유념하여,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최대한 공정하게 조사를 진행함은 물론, 가능한 많은 관련자들의 진술을 듣고 관련자료를 빠짐없이 수집, 검토하는 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음.

2. 피의자

(1) 전두환(당시 국군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2) 노태우(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육군 소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3) 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 육군 소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 이희성(당시 계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5) 진종채(당시 제2군사령관, 육군 중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6) 소준열(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육군 소장)

(7) 박준병(당시 제20사단장, 육군 소장)

(8) 신우식(당시 제7공수여단장, 육군 준장)

(9) 최 웅(당시 제11공수여단장, 육군 준장)

(10) 최세창(당시 제3공수여단장, 육군 준장)

(11) 정수화(당시 제20사단 제60연대장, 육군 대령)

(12) 김동진(당시 제20사단 제61연대장, 육군 대령)

(13) 이병년(당시 제20사단 제62연대장, 육군 대령)

(14) 권승만(당시 제7공수여단 제33대대장, 육군 중령)

(15) 김일옥(당시 제7공수여단 제35대대장, 육군 중령)

(16) 안부웅(당시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장, 육군 중령)

(17) 이제원(당시 제11공수여단 제62대대장, 육군 중령)

(18) 조창구(당시 제11공수여단 제63대대장, 육군 중령)

(19) 임수원(당시 제3공수여단 제11대대장, 육군 중령)

(20) 김원배(당시 제3공수여단 제12대대장, 육군 중령)

(21) 변길남(당시 제3공수여단 제13대대장, 육군 중령)

(22) 박종규(당시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 육군 중령)

(23) 김길수(당시 제3공수여단 제16대대장, 육군 중령)

(24) 이병우(당시 제20사단 제60연대 제1대대장, 육군 중령)

(25) 윤재만(당시 제20사단 제60연대 제2대대장, 육군 중령 )

(26) 길영철(당시 제20사단 제60연대 제3대대장, 육군 중령)

(27) 차달숙(당시 제37사단 감찰참모, 육군 중령)

(28) 정영진(당시 제20사단 제61연대 제1대대장, 육군 중령)

(29) 김형곤(당시 제20사단 제61연대 제2대대장, 육군 중령)

(30) 박재철(당시 제70훈련단 작전참모, 육군 소령)

(31) 강영욱(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전략정보과, 육군 소령)

(32) 오성윤(당시 제20사단 제62연대 제1대대장, 육군 중령)

(33) 이종규(당시 제20사단 제62연대 제2대대장, 육군 중령)

(34) 유효일(당시 제20사단 제62연대 제3대대장, 육군 중령)

(35) 김인환(당시 육군대학 재학, 육군 소령)

(36) 남덕우(당시 국무총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37) 신병현(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38) 노신영(당시 외무부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39) 서연화(당시 내무부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0) 오탁근(당시 법무부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1) 주영복(당시 국방부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2) 이규호(당시 문교부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3) 이광표(당시 문공부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4) 유병현(당시 합참의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5) 김종곤(당시 해군참모총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6) 윤자중(당시 공군참모총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7) 백석주(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육군 대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8) 김경원(당시 대통령국제정치담당특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49) 유학성(당시 제3군사령관, 육군 중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50) 윤성민(당시 제1군사령관, 육군 중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51) 황영시(당시 육군참모차장, 육군 중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52) 차규헌(당시 육군사관학교장, 육군 중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53) 김정호(당시 해군제2참모차장. 해군 중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54) 이학봉(당시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장, 육군 대령)

(55) 허화평(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대령)

(56) 허삼수(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육군 대령)

(57) 전주식(당시 제33사단장, 육군 소장)

(58) 정진영(당시 제33사단 제101연대장, 육군 대령)

3. 조사 상황

o 검찰과 군검찰은 1994.11.23. 고소인 대표 정동년 5·18광주민주항쟁연합 상임의장을 조사한 것을 시작으로 1995.5.17.까지 김상근 5·18 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 공동대표, 이신범 환경관리공단 이사, 장기욱 민주당 의원 등 고소·고발인 18명을 조사하고, 1994.12.5.부터 1995.7.10까지 민관식 당시 국회의장대리, 신현확, 박충훈 당시 국무총리, 김종환 당시 내무부장관 등 국무위원, 최광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안종훈 당시 군수사령관 등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참석 군지휘관, 나동원 당시 계엄사령부(이하 계엄사라 함) 참모장 둥 계엄사 간부, 권정달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라 함) 정보처장, 한용원 당시 보안사 정보처 정보1과장 등 보안사 간부, 윤흥정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하 전교사령관이라 함), 정 웅 당시 31사단장, 이기백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라 함) 운영분과위원장 등 참고인 193명을 조사하였으며, 1994.12.13. 소준열 당시 전교사령관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1995.7.4.까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 이희성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이학봉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단장, 허삼수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등 피고소·고발인 58명을 조사하는 등 이 사건 관련자 총 269명을 조사하였음.

o 또한 검찰과 군검찰은 육군본부(이하 육본이라 함)·2군사령부, 전투병과사령부(이하 전교사라 함)의 각 작전상황일지, 전교사·특전사령부(이하 특전사라 함)·31사단·20사단의 각 전투상보, 육군사 및 관련 부대사 등 군 관계자료, 국무회의 회의록, 민주화합추진위원회 국민화합분과위원회 회의록, 국회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와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및 청문회와 현장검증 등 조사 자료와 국방부·총무부 제출자료,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5월민중사료선집」, 5·18 광주민중항쟁유족회 편 「광주민중항쟁비망록」,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5·18 광주민중항쟁자료집」, 광주시 작성의 「5·18 사태 상황 및 조치사항」, 전라남도 작성의 「광주사태 수습개요」, 육본 작성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 전교사 작성의 「광주소요사태 분석 교훈집」, 국보위 작성의 「광주사태 진상조사 보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수사·재판기록, 5·18 관련 사망자 검시자료 및 보상금지금결정 관련 서류, 광주시내 주요병원의 진료기록부, 이 사건과 관련된 각종 단행본 책자(돌베개 발행의 「광주민중항쟁」, 동광출판사 발행의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동아일보사 발행의 「남산의 부장들」, 중앙일보사 발행의 「청와대 비서실」, 조선일보사 발행의 「한국의 대통령」, 한국일보사 발행의 「지는 별 뜨는 별」, 사계절 발행의 「10일간의 취재수첩」·「광주민중항쟁 연구」, 풀빛 발행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등), 잡지 기고문, 신문, 연감, VTR 자료 등을 빠짐없이 수집하여 참고자료로 활용하였음.

o 다만 최규하 전 대통령은 검찰의 수 차례의 방문조사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이 재임중 국정행위에 대하여 조사를 받는 것은 헌정사에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기게 되고, 이러한 과거사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는 것이 보다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진술을 끝내 거부하여 조사를 하지 못하였음.

Ⅱ. 당사자 주장의 요지

1. 고소·고발인들의 주장 요지

o 고소·고발인들은, 피의자 전두환 등이 1979.12.12. 대통령의 재가 없이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사건 연루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 으로 군병력을 동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여 내란방조 혐의로 구속,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수도경비사령관(이하 수경사령관이라 함), 특전사령관 등 정승화 총장 계열 장성들을 강제 전역시킨 후 군내 핵심 요직을 차지하여 군권을 장악 함으로써 정권 탈취의 기반을 확보하고,

o 1980.2. 피의자 등의 집권 기도에 저항하는 시위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수도권 및 후방 주요 부대에 소요 및 폭동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강화 실시하는 한편,3월 중순 'K-공작계획'을 마련하여 집권을 위한 언론 공작을 실시하고, 4.14. 피의자 전두환은 국내 민간 정보와 중앙정보부의 예산을 장악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장서리직을 강점하였으나,

o 학생들과 재야 민주인사들이 일제히 군부와 유신 관료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규탄하며 피의자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고, 정치권에서도 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임시 국회의 소집에 합의하는 등 계엄상황을 이용한 집권계획이 난관에 부딪치자,

o 대학가의 시위가 중단되고 북한의 남침 동향이 없음에도 남침위기설을 조작하여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강행하고, 이를 구실로 계엄군을 동원하여 대학과 국회를 점거, 봉쇄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는 등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예상되는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을 투입하여 의도적으로 학생, 시민들을 잔훅하게 진압하여 유혈사태를 야기하는 등 비상 상황을 조성하고,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초헌법적 비상기구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대통령과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켜 정권을 탈취할 목적하에,

o 1980.5.14. 계엄 확대 실시에 따른 군병력 배치를 사전 준비한 다음 5.17. 오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비상기구의 설치 둥을 결의하고, 동일 19:50경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라 함) 병력들을 국무회의장 주변에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임시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에 대한 국무회의 의결을 강제하여 5.17. 24:00부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하게 하고,

o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를 발령하여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전국 대학에 군병력을 투입, 학생시위를 사전 봉쇄하는 한편, 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을 요구하는 여야 정치인과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등 재야 민주인사, 학생 대표들을 체포하고,

o 5.18. 33사단 101연대 병력을 동원, 국회를 점거하고, 5.20. 국회에 등원하는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저지하여 임시국회의 개회를 무산시키는 등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5.18. 7공수여단 병력을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한 후 계엄 확대와 김대중 공동의장 체포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그들의 공분과 저항을 유발, 대규모 소요 사태를 유도하고, 소요 진압을 명분으로 11공수여단,3공수여단, 20사단 병력을 순차적으로 투입하여, 정식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보안사, 특전사의 지휘에 따라 발포하고, 치안 회복이라는 미명하에 무자비한 광주 재진입 작전을 감행하는 등 유혈 진압으로 일관하여 수많은 시민들을 살해하고,

o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살해할 의도로 계엄 확대와 동시에 재야 인사들을 영장 없이 체포, 장기간 구금하면서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강요하여 내란음모 등 사건을 조작한 후 군법회의, 대법원에서 김대중 공동의장에게 사형이 선고되도록 하였으나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징역 20년으로 감형하고,

o 5.31. 대통령 자문·보좌기구라는 명목으로 실질적으로는 내각을 조정·통제하는 국보위를 설치하여 상임위원장 또는 상임위원으로 그 실권을 장악하고, 공무원 숙청, 삼청교육 등 사회악 일소 조치, 과외금지,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와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주도함으로써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내각의 기능을 대신하여 이를 무력화하고,

o 8.16.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피의자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한 다음, 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피의자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9.1.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고,

o 10.27. 대통령령에 의하여 설치된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입법 권한이 없는 국보위를 명칭만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임의로 제정하고, 초헌법적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1981.4.10.까지 국가보안법 등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하여 국회의 기능을 대신함으로써,

o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하여 내란하고, 그 과정에서 군을 정권 찬탈의 목적에 이용하여 군형법상의 반란 등을 함과 동시에 살인 및 살인미수 둥의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음.

2. 피의자들의 변소(辨疎) 요지

o 이에 대하여 피의자들은, 1980년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제반 사건은 당시 국정을 담당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이 국헌을 수호하기 위하여 취한 정당한 국가통치권 행사였으며, 피의자들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의 권력 공백기에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국방부장관, 계엄사령관 등으로서 상황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거나 지시에 따라 또는 맡은 직책상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던 것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국가지도자로 부각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헌법 절차에 따라 집권을 하게 된 것이지, 정권 탈취를 위한 사전 계획이나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변소하고 있음.

o 즉, 충정훈련은 군에서 매년 해오던 폭동 진압 훈련으로, 다만 그해에는 신학기를 앞두고 대학가의 시위가 예상되어 육본 자체 판단으로 강화 실시한 것일 뿐이고,

o 'K-공작계획'은, 보안사 정보처 언론반이 언론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계엄하에서의 군의 역할을 이해시키고, 국가 안보와 사회안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입안한 언론반의 운영계획에 불과하며,

o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은,최규하 대통령이 10·26사건 이후 사실상 와해 상태에 있던 중앙정보부의 기능 정상화를 위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적임자로 판단, 인사 발령한 데 따른 것이고,

o 비상계엄의 확대 선포와 정치활동의 금지 조치는, 북한 군사 동향과 국내 치안 상황을 보고받은 최규하 대통령이 국가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국가 기강과 사회 안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계엄사령관, 국방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통치권 차원에서 단행한 비상조치이며,

o 계엄 확대 조치와 병행하여 시행된 여야 정치인과 재야인사의 연행·체포는, 사회 혼란과 정국 불안의 원인이 일부 정치인과 재야인사, 복학생, 학생대표들로 연결된 소요 배후조종 세력과 부정 축재 세력에 있다는 보안사 정보처의 정세분석 판단보고를 받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그들을 의법 처리한 것이고,

o 광주에서의 군병력의 시위 진압과 발포는, 전국이 비상계엄하에 있음에도 시가지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여 공수부대원들이 진압을 하게 되고,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 등으로 뜻하지 않게 충돌이 확산되면서 시위대가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을 공격해 오자 위험을 느낀 현장 병력이 자위 목적에서 우발적으로 발포한 것이며, 유혈사태가 빚어지고 군과 경찰이 외곽으로 철수하여 광주시가 치안 부재 상태에 이르자 법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의 승인하에 재진입작전을 단행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나 그와 같은 사태를 사전 계획하거나 의도적으로 유발한 것이 결코 아니며,

o 국회의원의 국회 등원 저지는, 계엄사의 작전명령에 따라 시설 보호 경비 차원에서 국회에 배치된 계엄군이 국회의원, 기자 등 3백여명이 집단으로 국회에 진입하려 하므로 이들을 통제하였던 것이지, 군병력이 임시국회의 개원을 무산시키기 위해 출동한 것은 아니고,

o 국보위는 전국 비상계엄 하에서 내각과 계엄군 당국 간의 협조를 원활하게 하여 혼란 수습과 안정 회복을 위한 조치를 효율적으로 입안, 시행할 수 있도록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설치된 대통령 자문·보좌 기구로서, 국가 위기상황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으며,

o 위와 같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일련의 주요 조치들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자연스럽게 국가지도자로 내외에 부각되고,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직책 수행에 한계를 느낀 최규하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하자, 다른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시대적 여망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며,

o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후 설치된 과도 입법기구로서 국회 권한을 대행하도록 규정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근거한 한시적 기구이므로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고 변소하고 있음.

Ⅲ. 사건의 전말

1.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 시국 상황

(1) 정치 사회 학원 등 동향

O 1970.10.26.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17. 04:00를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이희성 육군참모차장을 각 임명하였음.

O 12.1. 국회는 만장일치로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의 해제를 정부에 건의하였고,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12.6.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12.8. 바로 대통령긴급조치9호를 해제하고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부 등 긴급조치위반자 68명을 석방함과 동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에 대한 가택연금을 해제하였으며, 12.10. 후임 국무총리에 신현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명하였음.

O 한편 군에서는, 소장 군부 세력의 지도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10·26사건 수사와 군 요직 인사 등과 관련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과 마찰을 빚고 있던 중, 12.12. 저녁 자신에 대한 인사 조치를 차단하고 소장 군부 세력의 군내 입지를 보전할 목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정승화 총장을 10·26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연행, 내란방조 혐의로 구속하고, 이에 동조하지 아니한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우 특전사령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육군 핵심 장성들을 체포하는 한편,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를 육군참모총장, 황영시 1군단장을 육군참모 차장, 노태우 9사단장을 수경사령관, 정호용 50사단장을 특전사령관 등 요직에 각 중용시켜 일거에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음.

O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유신헌법 개정을 통한 정치 발전 약속 등으로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11.26.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이하 개헌 특위라 함)를 설치하는 등 국회 주도의 헌법 개정을 추진한 한편, 최규하 대통령은 12.21. 취임사를 통해 정부도 별도로 헌법 개정에 대한 연구와 검토를 할 것임을 밝힌 데 이어, 1980.1.18. 연두기자회견에서 헌법상 개헌안의 발의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개헌 작업을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80.3.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것임을 밝혔음.

O 1980.2.9. 신민·공화 양당은 대통령중심제, 대통령 직선, 임기 4년, 1차 중임을 골격으로 하는 헌법 시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회 개헌특위에 제출할 예정임을 발표한 반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한상이군경회 등 4개 단체의 현시국에 관한 건의에 대한 회신을 통하여 정치 발전이 안보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되며, 무분별한 정치과열은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음.

O 2.29. 최규하 대통령은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 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윤보선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위반자 등 687명에 대한 사면·복권읕 단행하였고, 이로써 항간에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다고 운위되기에 이르렀음.

o 3.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3.5.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내란방조사건 첫 공판이 개정되었으며, 3.6.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흥주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고, 3.13.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음.

o 최규하 대통령은 3.14. 중앙청 회의실에서 열린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 개회식에서, 국가권력이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집중된 정치 제도와 과열된 대통령 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정부가 절충식(浙衷式) 정부형태를 구상하고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짐에 따라 정치권으로부터 민주화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헌법 개정 등과 관련하여 언론에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 개헌론이 보도되어 정치권에 파문을 던지고 그런 와중에서 친여 신당설(親與 新黨說)이 뚜렷한 근거도 없이 유포되었음.

o 4.7. 신민당 입당 여부로 관심을 모아오던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는 신민당이 자신과 재야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며 신민당 입당 포기를 선언하였고, 이에 대하여 윤보선 국민연합공동의장은 김대중씨가 국민연합에 돌아와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은 환영하나 신민당 입당 포기는 성급한 것으로 유감임을 밝혔음.

o 최규하 대통령은 4.14. 오전 내외 정세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원 소란 사태와 사회 일부의 국민 단합 저해 언동에 우려를 표명하고, 자제와 화합으로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고 호소하는 한편, 동일 오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하였으며, 일각에서는 군 최고 실력자로 알려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 발령과 관련하여 안개 정국 운운하는 등 민주화 또는 정치 발전에 대한 비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음.

o 전두환 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사실에 관하여, 국가안보적 견지에서 중앙정보부 기능을 정상화할 필요성이 있어 공석을 메웠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미국, 일본의 유수한 언론에서는, 뒤에서 계엄 행정을 지원해 온 전두환 장군이 전면에등장한 것으로 그가 어떤 진로를 선택할 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거나, 전두환 중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완전한 군부 내의 실권을 잡은 것이라고 논평하였으며, 4.16. 오전 학원사태와 노사문제를 협의하는 총리 주재 정례 주요각료 간담회에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서리 자격으로 참석하였음.

o 4.16. 최규하 대통령은 여야 국회 간부들과의 만찬에서 정치일정은 정부가 밝힌대로 진행해 나갈 것이고, 정부의 개헌안 골격은 공청회에 제시될 것이며, 항간의 친정부 신당설은 사실무근임을 밝혔으나, 야당 의원들은 조속히 국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국회 개헌안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등 헌법개정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노정하였음.

o 신민당 입당을 포기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4.16. 한국신학대학에서 복권 이후 첫 대중 강연에 나서, 학생들은 어쩔 수 없는 사태가 오기 전에는 폭력 행사를 자제해야 하며,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읕 강조하였고, 4.25.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민주회복이 급선무라고 하면서도 대통령 출마 의사와 신당 가능성을 분명히 하고 이른바 이원집정부제나 중선거구제는 반민주적 발상이므로 단호히 배격한다고 하였으며, 4.29. 윤봉길의사 추모제에 참석, 민주화촉진 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음.

o 한편 유신체제가 붕괴된 후 그 동안 억눌렸던 사회 전 분야의 다양한 주장과 욕구가 급격히 분출하는 가운데,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면서 학원민주화를 거부하는 총·학장 퇴진을 요구하며 21개 대학에서 시위·농성을 벌였고, 24개대학에서 어용 교수 퇴진을, 12개 대학에서 재단 비리 척결을, 11개 대학에서 학교 시설 확충 둥을 요구하는 시위·농성을 하는 등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내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으며, 4월 중순에 접어 들면서 병영 집체훈련 거부 문제가 투쟁 이슈로 전면에 등장하였는데, 그 와중에서 일부 학생들이 학장실 점거, 기물 파괴, 화형식, 교수 폭행 등 과격화 조짐을 보였고, 4.24. 서울시내 14개 대학 교수 361명은 족벌 운영 사학 경영자 퇴진, 군사 교육 개선, 교수 재임용제 철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학원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음.

o 5.1. 서울대 총학생회는 철야 회의 끝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입영훈련 거부투쟁을 철회하는 대신, 계엄령 즉각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신현확 사퇴, 정부 주도 개헌 중단과 노동3권 보장 등 정치 문제를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5.2. 서울대학생 1만여명이 5.2.부터 5.13. 까지를 민주화 투쟁기간으로 정하고 교내 시위와 철야 농성에 들어감을 분기점으로 하여 대학가의 시위는 정치문제에 관한 시국 성토로 확산되었음.

o 5.6. 최규하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다시 정부의 정치 발전 일정에 아무런 변함이 없고 안개 정국 주장은 근거가 없는 오해임을 강조하였으며, 한편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이 제의한 민주화촉진 전국민운동 참여 문제에 관하여 윤보선, 함석헌 공동의장과 김대중 공동의장 간의 의견 차이로 진통을 겪은 국민연합은 5.7.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계엄령 해제, 정부주도 개헌 포기, 전두환 퇴진, 정치일정 단축 등을 요구하고,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 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음.

o 대학가의 시위가 학내 문제에서 시국 문제로 급선회하고, 시위양상도 교내 시위·농성에서 가두 집단 시위로 확산되어 경찰과 충돌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5.8. 김옥길 문교부장관은 전국 대학총학장에 공한(公翰)을 보내 대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하고 교문밖 집회·시위는 민주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있음을 전달하였고, 5.10. 전국 85개 대학 총학장은 교외 시위에 단호히 대처하며 혼란이 계속되면 휴업, 휴교 조치할 것을 결의하였음.

o 한편 근로자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지기 사작하여, 4.9.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 농성투쟁을 신호로 하여 4.29.까지 전국에서 71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고, 4.21.에는 강원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광업소 근로자 3천5백여명이 사북 경찰지서, 사북역 등 사북읍을 점거하는 사북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사북사태가 진정된 이후에도 90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고, 5월에 들어서도 노사분규는 계속 확산되었음.

o 대학가 시위가 가열화되고, 학생들은 물론 일부 대학 교수들도 선언문을 통해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가운데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5.9. 기자회견에서 혼미한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계엄령 해제, 정부의 개헌작업 중지, 임시국회 즉각 소집 등을 촉구하였고, 그 동안 임시국회 소집, 계엄령 해제 등에 소극적 입장을 보였던 공화당도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계엄 해제 문제도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음.

o 5.10. 최규하 대통령은 7박8일 일정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중동 2개국 공식 방문을 위하여 출국하면서 출국인사를 통해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안정을 위한 국민의 깊은 이해와 적극적인 노력을 다시 한번 간곡히 당부하였음.

o 동일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은, 5월 중순 북괴가 남침할 가능성이 짙다는 이른바 북괴남침설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하였고, 5.12. 임시국무회의가 긴급 소집되어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출석, 북괴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군과 경찰에는 비상경계체제 돌입령이 시달되었음.

o 동일 여야 총무는 5.20. 제104회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개헌특위가 마련한 헌법개정안읕 접수하여 정부에 이송하고, 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 현안 문제를 다루기로 합의하였고, 신민당은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는 한편 계엄령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며, 정부는 5.12.부터 5.28.까지 전국 12개 도시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개헌 공청회를, 주요도시의 치안 상태나 학원 사태로 보아 질서있게 진행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기 연기하였음.

o 한편 그 동안 비폭력적 교내시위를 표방한 가운데 간헐적으로 교외 시위를 시도하던 대학가는 5.13. 연세대학생들이 주축이된 서울시내 6개 대학 대학생 2천5백여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야간 가두시위를 벌이고, 고려대학교 등 시내 7개 대학이 철야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5.14. 서울 지역 27개 대학 대학생 7만여명이 총학생회 대표들의 전면적 가두시위 결의에 따라 동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히 화신앞, 남대문, 서울역, 광화문 등 서울 중심가를 메우면서 22:15경까지 가두 시위를 벌이자,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신현확 총리에게 경찰력만으로 서울시내 일원의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다며 군의 투입을 건의하는 한편, 이희성계엄사령관에게도 군이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 임무를 맡아 줄것을 요청하였음.

o 5.15. 14:00경 서울역 앞 광장과 도로에는 서울시내 35개 대학 대학생 10만여명이 집결하여 3일째 시가지 시위를 벌였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둥 지방에서도 24개 대학 대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감행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서울역 앞 시위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 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음.

o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동일 19:50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늦어도 년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에 양대 선거를 실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추호도 변동 없이 지켜가고 있으며, 정치 일정을 최대한 단축하고 계엄령도 사회가 안정되면 즉시 해제할 것이므로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과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였으며, 중동 순방을 마치고 말레이지아에 기착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은 5.16. 22:30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하였음.

o 격렬한 시위를 마친 서울대 등 서울 시내 23개 대학과 24개 지방대학 총학생회장들은 5.15. 자정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일단 가두 시위를 중지하고 정상 수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함에 따라 5.16. 서울,부산, 대구, 전주 등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정상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전남대, 조선대 둥 광주시내 9개 대학 대학생 2만여명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야간에는 횃불 시가 행진을 벌였음.

o 5.16. 09:30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비상계엄 즉시 해제, 정부주도 개헌작업 포기, 정치일정 연내완결 확정 발표 등 6개항의 시국수습 대책을 공동발표하였고, 국민연합은 5.7.자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에서 요구한 사항에 대하여 5.19.까지 정부가 답변을 하지 않으면 5.22.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제2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이화여대 동창회관으로 자리를 옮긴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5.19.까지 전두환·신현확 퇴진, 비상계엄 해제 및 연내 정권 이양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민연합이 전국주요 도시에서 동시 개최하기로 한 민주화촉진선언 국민대회일인 5.22.부터 대규모 가두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음.

대학생들의 잇단 대규모 가두시위로 형성된 불안한 데모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5.17.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여야 국회의원 186명의 요구에 따라 제104회 임시국회를 5.20. 10:00에 소집할것을 공고하였고, 국민들은 5.16. 밤 급거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이 시국수습을 위하여 어떤 단안을 내릴 것인지를 주목하고 있었음.

(2)보안사령부 동향

o 10·26 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및 포고령위반사범 등에 대한 수사와 각종 정보·수사기관의 업무 조정·감독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계엄사에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에 취임하고 보안사 처장들이 합동수사본부 각 국장에 임명됨으로써 보안사는 중앙정보부, 경찰 등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조정·통제하는 핵심기구로 등장하였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12사건으로 군의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력 공백기에 있어 최고 실력자의 한사람으로 부상하였음.

o 1980.2.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 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민간 정보의 수집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대민사찰(對民査察) 업무를 박탈당한 채 방산처로 개편되었던 보안사 정보처를 복원하였음.

o 2.20. 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사건 수사 브리핑을 하는 비공식 기자간담회에서, 군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은 절대 없으며 합동수사본부장 일이 벅차 하루 빨리 계엄이 해제되길 바란다는 뜻을 표명하였고, 2.24.경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지시, 신민당 이용희 의원을 통하여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과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3김씨 중 김대중씨만 만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대신 이학봉 대공처장과 권정달 정보처장이 2.26. 09:00경 광화문 소재 보안사 안가에서 동인을 만나, 사면·복권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하더라도 시국 안정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음.

o 2월 중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보처 산하에 이상재 준위를 반장으로 하는 언론대책반을 구성하여 계엄사 보도검열단의 보도검열 업무를 조정·감독하는 한편, 3월 중순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의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수립하여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하여 안정세로 전환한다는 취지로 언론계 중진들과의 개별 접촉을 실시하였음.

o 3월 말경 최규하 대통령은 공석중인 중앙정보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임명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신현확 총리로부터 민간인을 임명하여 정보기관을 양립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도 합동수사본부장의 업무가 과중할 것이므로 당분간 윤일균 차장으로 하여금 관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으나, 4.14.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 발령을 단행하였음.

o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4.29. 첫 기자회견에서, 중앙정보부장직을 장기간 공석으로 두는 것은 중대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다고 판단한 대통령의 준엄한 하명으로 겸직을 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정치 발전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의 억측은 기우에 불과함을 강조하였음.

o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월 초 학내 문제로 시작한 대학가 시위가 최규하 정부와 군부를 상대로 한 정치 투쟁으로 변모하면서 가열되자,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시국수습 방안」검토를 지시하였고, 5.10.경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정보처 정세분석반의 보고에 따라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단장에게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들을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음.

o 5.16.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은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회의를 소집하여 5.17. 24:00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시위의 주동자와 배후조종자들을 일제 검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음.

(3)계엄 확대 이전 군 동향

o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따른 비상계엄 선포로 수도내 계엄 업무 지원차 육본으로 출동하였던 9공수여단은 12.8. 원 주둔지인 부평으로 복귀하였고, 태능으로 출동, 대기중이던 20사단은 1980.2.5. 원 주둔지인 양평으로 복귀하였음.

o 1979.12.18.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이고, 정치는 애국심과 양식있는 정치인에 의해 발전되어야 하며, 군은 조속한 시일내에 계엄목표를 완수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 갈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음.

o 신학기 개학을 앞둔 1980.2.18.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1/4분기 이전에 폭동진압 훈련인 충정훈련 실시를 완료하도록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3.6.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특전사령관, 1, 3, 5, 9 공수여단장, 20, 26, 30 사단장, 수도기계화사단장, 치안본부장, 서울시경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80년도 제1차 충정회의를 개최하여 수도권 소요사태 대비태세를 점검하였는데, 회의 결과 대규모 학생 시위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을 이상주의적 맹목 저항 세력으로 규정하고, 문제 학생과 교수는 사회로부터 격리하며, 군투입을 요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강경한 응징 조치가 요망된다는 결론을 내렸음.

o 4월 중순 사북사태가 발생하자 11공수여단이 원주 소재 1군 하사관학교로 이동, 대기하였으나, 4.24. 분규가 해소됨으로써 군이 투입되지는 아니하였음.

o 4월에 들어 대학생들이 병영집체(兵營集體) 훈련을 거부하고 사북사태 이후 노사분규가 확산되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4.30. 긴급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학원 및 노동계의 폭력이나 소요사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일부 학생과 정치인들이 사회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학원을 정치 선전장화하는 행위는 규탄받아야 하며,불법적 행동이 계속된다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천명하는 한편, 계엄군은 조속히 계엄목표를 달성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는 1979.12.18.자 담화내용을 재확인하고, 예하 부대에 소요진압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음.

o 5월에 접어들어 대학 시위가 시국성토로 변모하면서 가열되자, 육본은 5.3.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5.6. 국방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 진압부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한편, 5.6.부터 5.9.까지 2군 및 수도권 지역 전부대를 대상으로 소요 진압 준비태세를 점검하고, 5.8. 01:00 포천군 이동에 주둔하고 있던 13공수여단을 서울 거여동 3공수여단 주둔지로, 5.10. 01:00 화천군 오음리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여단읕 김포 1공수여단 주둔지로 각 이동배치하였음.

o 육본은 5.9.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추가로 소요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5.13. 1군 경장갑차 26대를 수경사에, 3군 경장갑차 24대를 수도군단에 각 배속 조치하였음.

o 5.13. 대학생들이 가두로 진출, 시위를 벌이자, 육본은 5.14.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지시를 하달하여, 수경사는 특전사 예하 1, 5, 11, 13의 4개 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북지역의, 수도군단은 9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남지역의,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2개 연대를 작전통제하여 부산, 대구, 광주지역의 각 소요사태 진압을 준비하도록하는 한편, 동일 17:30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배치하고, 18:25 청와대, 중앙청 등 특정경비지역 방어를 위하여 광화문 지역 경찰 저지선 뒤에 수경사 6개 중대를 배치한 데 이어 20:29 전국 방송국 및 중계소에 경계 병력을 배치하였음.

o 서울 시내 대학생 시위가 계속 가열되자, 5.15. 12:00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61, 62연대가 잠실체육관과 효창운동장으로 출동하였고, 이어 20사단 60연대는 5.17. 00:01 태릉으로 출동하였으며, 5.16. 오후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7. 10:00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였음.

2.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국 장악

(1)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격 추진

o 일정을 하루 앞당겨 1980.5.16. 22:30 김포공항에 도착한 최규하 대통령은 23:00경부터 1시간 가량 청와대에서 최광수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신현확 국무총리, 김종환 내무부장관, 주영복 국방부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으로부터 그 동안 국내에서 있었던 학생 소요 등 시국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데,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경찰력으로 시위에 대처하는 데는 한계에 와 있어 어려운 형편이라고 보고하였고,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가 입수되었으며 군에서 내일 대비책을 강구할 예정임을 보고하였음.

o 5.17. 09:30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을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보내,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시국수습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임을 통보하고, 계엄 확대 등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 사항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10:00경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대통령 부재중의 안보상황과 국내 치안상황을 보고하면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 등 시국수습 방안과 소요 배후조종 및 권력형 부정축재 험의자 체포·조사 계획을 보고하였음.

o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시작 전 주영복 장관은 장관실에서 유병현 합참의장에게, 외부로부터 요청이 있어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안건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라며 의견을 물었으며, 유병현 합참의장은 국회 해산 문제를 군이 관여할 수는 없으며 군의 정치 개입은 헌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을 군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표명하였고, 이어 이희성, 김종곤, 윤자중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합석한 자리에서도 같은 의견을 개진하였음.

o 11:00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유병현 합참의장, 조문환 국방부차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윤성민 1군사령관, 진종채 2군사령관, 유학성 3군사령관, 차규헌 육군사관학교 교장,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둥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었음.

o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최성택 합동참모본부 정보국장의 북한동향 및 국내외 정세 분석 보고에 이어 참석자들의 발언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계엄 하에서 학원 소요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과열·폭력화되어 가고 있고 북괴의 동향도 심상치 않으므로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자 하니 의견을 개진해 달라고 하였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계엄 확대에 이견이 없다는 발언을 한 가운데,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국민의 합의와 총화에 의해 하여야 하는데 시기상조라며 반대 의견을 표명하자,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사회 안정을 위하여 군이 나설 것을 주장하였고,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은 그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였음.

o 참석자들의 발언이 끝나자,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전군 주요 지휘관들의 의견을,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것으로 요약하여 결론을 내리고,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로부터 연서명(連署名)을 받았음.

o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친 후, 회의 참석 군 지휘관들의 연서명(漣書名)을 휴대하고 16:2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신현확 국무총리를 찾아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방안과 아울러 대통령을 보좌할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정계 정화를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는 내용의「시국수습 방안」을 보고하였고, 신현확 국무총리는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은 반대하고,비상계엄 전국 확대 여부는 대통령이 결심할 사항이라는 이유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하였음.

o 16:50 육본은 1, 2, 3군 및 관구, 사단 작전참모에게 정위치에서 육본 작전참모부장의 지시를 받을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고, 17:00경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수경사 작전참모에게 중앙청에서 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내외곽 경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하였으며, 19:00경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의 지시에 따라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전군에 부대 출동명령을 하달하였음.

o 17:10경 신현확 국무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위와 같은 시국수습 방안을 보고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의 의견을 묻는 등 장시간 논의한 끝에 19:00경 계엄 확대 방안만을 수용하고 신현확 총리에게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하였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별도로 소요 배후조종 및 권력형 부정 축재 험의자에 대한 체포·조사 계획을 보고하였음.

o 19:35 중앙청 외곽에는 수경사 30단 소속 장교 18명, 사병 324명이 배치되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2층 계단과 복도둥 중앙청 내부에는 수경사 헌병단 소속 장교 17명, 사병 236명이 약 1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었으며, 21:42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참석한 가운데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제42회 임시국무회의가 개최되어,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하에 있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제출한 계엄확대 선포안이 찬반토론 없이 8분만에 의결되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23:40경 정부 대변인인 문공부장관이 5.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하였음.

o 22:30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군에 소요 진압부대 투입 작전명령을 하달한 데 이어, 5.18. 01:00경 보안사에서 입안한 정치활동 규제 조치 방안에 따라 모든 정치 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고,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였음.

o 육본은 5.18. 02:30경 전국 92개 주요 대학과 국회를 포함한 1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천여명을 배치하였는데, 서울지역은,수경사 작전통제하에 1공수여단을 연세대·명지대에 5공수여단을 고려대에 11공수여단을 동국대에, 13공수여단을 성균관대·서울의대에, 20사단을 서강대·홍익대·단국대·산업대·한양대·건국대·경희대·국민대에 각 배치하고, 수도군단 작전통제하에 9공수여단을 서울대에, 1야포단을 중앙대·숭전대에 각 배치하는 등 1·5·9·11·13공수여단과 20사단을 18개대학에 배치하였고, 부산·경남지역은 2관구사령부 작전통제하에 39사단과 해병 1개 연대를 부산대·동아대 등 12개 대학에,대구·경북 지역은 5관구사령부 작전통제하에 50·36사단·해병 1사단을 경북대·영남대 등 9개 대학에, 충남북지역은 3관구사령부 작전통제하에 32·37사단·7공수여단 2개 대대를 대전대·충남대 등 8개 대학에, 전남북지역은 전교사 작전통제하에 31·35사단과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조선대·전남의대·광주교대 등 30개 대학에, 경기지역은 33사단 등을 인하대 등 4개대학에, 강원지역은 1군수지원사령부 작전통제하에 강원대 등11개 대학에 각 배치하였음.

o 5.18. 08:00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접견실에서 5·17 조치에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고, 계엄사령관의 중앙관서에 대한 감독권 행사 방안을 연구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고, 13:00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중앙정보부장서리, 해군 및 공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차장,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을 초청, 오찬 회동을 가졌음.

o 5.18. 09:00경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 최광수 비서실장의 조찬 회동에서 계엄 확대 선포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성명 발표 문제가 논의되어, 국방부에 필요한 자료를 보내도록 조치하였고, 동일 오전 보안사에서 자료를 마련해 오자, 최규하 대통령은 16:40경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의 무책임한 경거망동 등으로 국가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어 국가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 수호를 위하여 일대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어 관계법 규정에 따라 지역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 선포하고, 국가 기강과 사회 안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누차 천명한 정치 발전은 착실히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내용의 5·17조치 관련 특별성명을 발표하였음.

(2) 정치인과 재야 인사의 체포·연금

o 1980. 5월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학원 소요사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생들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정치인과 재야 인사, 복학생 및 재학생 대표들을 검거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장에게 그들에 대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으니 그들에 대한 조치 방안도 아울러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음.

o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으로부터 관련자료를 협조받아, 5.13. 검거 대상을 학생시위 배후조종자에 대해서는 국기문란자로, 부정·부패 행위자에 대해서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분류하기로 하고, 이를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한 다음 권정달 정보처장과 함께 대상자 선정작업을 마무리하여, 이른바 국기문란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선정 기준, 명단, 혐의 내용 등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 5.15.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최종 보고하였음.

o 5.17. 오전 합동수사본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소요 배후조종 및 권력형 부정 축재 험의로 김대중, 김동길,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등 주요 인사를 체포·조사하겠다는 보고를하였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동일 10:00경 청와대에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정치인 둥의 체포·조사계획을 보고하였음.

o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11:00경 보안사로 중앙정보부, 경찰 등 합동수사단 관계자들을 소집, 조치 배경을 설명하고, 중앙정보부 수사국은 소요 배후조종자 중 국민연합 관련자들을, 보안사 대공처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경찰은 소요 관련 복학생과 재학생 대표들을 각각 검거·수사하도록 조치하면서, 대상자 검거 시각은 5.17. 22:00로 하되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가지고 시행하도록 하는 한편, 전국 각 지역 보안부대에도 검거대상자 명단을 보내 일제 검거를 지시하였음.

o 이에 따라 5.17. 18:00경 이화여대에서 회의중이던 전국 대학총학생회장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치안본부와 서울시경 수사관들이 출동하였으나 검거 소식이 사전에 노출되어 대부분이 도주하고 10여명만을 검거하였고,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수경사 헌병들에 의하여 23:00경 자택에서, 복학생 정동년은 24:00경 광주지역 합동수사단 수사관들에 의하여 광주 소재 자택에서,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23:00경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하여 자택에서, 김상현 의원은 5.18. 04:00경 제주도 친지 집에서 각각 체포되었음.

o 5.18. 12:00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로 김종필 공화당총재·이후락·박종규·김진만 의원·김치열 전 내무부장관·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제2수석비서관·김종락 코리아타코마 사장·장동운 전 원호처장·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 등을, 사회흔란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관련 배후조종자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예춘호 의원·문익환 목사·김동길 연세대 부총장·인명진 목사·시인 고은태·이영희 한양대 교수 등 모두 26명을 연행 조사중이라고 발표하였음.

o 비상계엄 확대와 병행하여 실시한 이른바 예비검속 과정에서 총 2,699명이 검거되어, 2,144명이 훈방되고 404명이 공소제기되었는데, 그 중 소요 배후조종 험의로 연행된 김대중, 문익환, 김상현, 예춘호, 이해찬, 한승헌, 한완상, 인명진, 고은태, 이신범 등 24명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음.

o 5.18. 오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정무회의를 주재하여 연행자석방, 계엄군 철수 둥을 요구하였고, 5.20. 09:00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려 하자 동일 07:20경 상도동 자택에 수경사 헌병단 병력 31명이 출동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며, 김영삼 총재가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던 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강행하자 외부인의 김영삼 총재 자택 출입과 김영삼 총재의 외부 출입을 금지하여 이른바 가택연금 조치를 취하였음.

o 5.22.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김대중씨는 정식 영장 발부에 의한 구속이 아니라 포고령위반으로 연행조사중에 있으며, 조사결과에 따라 법에 의해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음.

o 6.18. 합동수사본부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공직에서 사퇴하므로 형사처벌을 유보한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하였으며, 부정축재 내용은 김종필 공화당 총재 216억여원, 이후락 의원 194억여원 등 총 853억여원으로 이들이국가에 헌납한 금액은 국민복지기금으로 활용할 방침이며, 관련기업인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음.

o 6.23.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6명의 공직 사퇴서가 우송되었고, 7.2. 김종필 공화당 총재 둥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 연행자 9명이 연행 46일만에 석방되었으며, 7.3.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5.17. 이후 제출된 김종필, 이후락, 김진만, 박종규, 이병희, 예춘호, 이택돈, 손주항, 김녹영(金祿永)의원 등 9명의 국회의원 사직서를 수리하였음.

o 합동수사본부는 7.17.경 김용태·구태회·길전식·신동식·장영순·현오봉 둥 공화당 고위 간부 6명, 정해영·고흥문·송원영·김수한·박영록·박해윤·최형우·김동영 등 신민당 간부 8명, 전 내무부장관 구자춘·김현옥·전 건설부장관 고재일 등 고위관료 출신 3명 등 17명을 정치적 비리와 부패행위로 국가 기강을 문란케 하였다는 험의로 체포하였고, 8.19. 이들에 대한 수사전모 발표를 통해 부정 축재 금액을 김용태 형제 150억원·정해영 77억원·구태회 21억원·고흥문 20억원·박영록 19억원 등 총 288억원이라고 밝히고, 이들로부터 재산을 헌납받는 동시에 공직사퇴서를 받았음.

(3) 국회 점거·봉쇄

o 신민당의 계속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회 소집에 소극적이던 공화당의 태도 변화에 따라 1980.5.12.여야 총무는 계엄 해제 등 정치 현안을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였고, 5.17.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김용호, 이해원, 황낙주(黃珞周) 의원 둥 의원 186명의 요구에 따라 5.20. 10:00 제104회 임시국회 소집을 공고하였음.

o 5.17. 20:00경 육본 지시에 따라 수도군단은 예하 33사단에 101연대 1대대를 100훈련단 작전 통제하에 국가 보안목표인 국회의사당, 한국방송공사에 투입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고,비상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5.18. 00:20 1대대 2, 3중대에 한국방송공사와 국회의사당에 출동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01:45 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장교 3명, 사병95명은 연대 본부로부터 경장갑차 8대, 사단 전차중대로부터 전차 4대를 지원받아 국회의사당에 진주하였음.

o 03:15 계엄사로부터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를 금지하는 내용의 계엄포고 제10호가 33사단에 접수되었고, 군병력의 국회 진입 소식을 듣고 나온 길기상 국회 사무차장에게 이상신 1대대장은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라는 상부의명령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길기상 사무차장의 요청에 따라 민관식 국회의장대리와 국회 직원은 출입을 허용하였음.

o 5.20. 09:00경 5·17조치를 비난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상도동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던 황낙주, 손주항 의원과 의원비서관, 보도진 등 3백여명이 10:15경 국회 정문에 도착,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상신 1대대장은 100훈련단을 통해 수도군단, 육본에 상황을 순차 보고한 다음 출입 통제지침에 따라 국회의원 등의 국회 출입을 저지하였고,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대대장의 요청을 받고 이들에게 해산을 종용하였으며, 그 무렵 국회 상황을 보고받은 수도군단은 9공수여단 병력을 국회에 추가 투입하려 하였으나 상황 종료로 취소하였고, 17:00경 박노영(朴魯營) 수도군단장은 육본으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방문, 국회 상황에대하여 지휘 보고를 하였음.

o 이후 제104회 임시국회는 개회되지도 못한 채 6.18. 자동 폐회 되었고, 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는 6.27. 24:00 일부 병력과 경장갑차 4대만 남기고 1차 철수한 다음,8.30. 완천 철수하였음.

o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후인 9.20. 제105회 정기국회가 개회되어 9.22. 남덕우 국무총리와 이한기 감사원장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처리하고 휴회에 들어갔으나, 10.27.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5조 제1항에 따라 제10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종료됨으로써 제10대 국회는 해산되었음.

3. 광주 시위의 진압

(1) 계엄 확대 이전 상황

o 5월 3일 전남대생 3,000여명이 처음으로 시국성토대회를 열었고, 5월 9일 조선대생 2,000여명도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5월 13일 광주지역 7개 대학 학생대표자회의에서 5월 14일 연합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하였음.

o 5월 14일 10시경 교정에 모여 성토대회를 하던 전남대생 2,500여명은 전날 서울 6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4시 50분경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시내로 진출, 18시경까지 전남도청 앞에서 첫 대규모 가두 정치 집회를 열었음.

o 동일 10시 45분 장형태 전남도지사는 도지사실에서 31사단장, 경찰국장, 전남대 및 조선대 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원사태 대책회의를, 14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 웅 31사단장, 신우식 7공수여단장을 불러 학생 가두시위대책 합동작전회의를 각각 열고 시위 대책을 협의하였음.

o 5월 14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 명령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전북 금마소재 7공수여단에 전북대·충남대·전남대·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출동시킬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고, 정 웅 31사단장은 동일 19시 예하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을 광주 소재 MBC·CBS·KBS·전일방송 등에 배치하는 한편, 5월 15일 정 웅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2개 대대 숙영시설(宿營施設)로 전남대·조선대 교정에 천막 24개동을 가설하였으며, 506 항공대대로부터 31사단에 지휘용 500MD 헬기 1대가 지원되었음.

o 5월 15일 오전 광주시내 대학생 15,000여명은 교내 시위를 마친 다음 14시 30분경 교외로 진출, 전남도청 앞에 모여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생회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릴 경우를 대비해 다음날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투쟁방침을 전달하였음.

o 5월 16일 16시경 광주시내 9개 대학 대학생 3만여명은 전남도청 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집회를 마친 다음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이고, 다시 20시경 도청 앞에 모여 시가지 횃불 시위를 벌인 다음 5·16 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하였음.

(2) 계엄 확대와 계엄군 배치

o 5월 17일 10시 40분 2군사령부는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16시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31사단에서 작전통제 하도록 지시하였고, 19시 40분 전교사에 5월 18일 00시 01분부로 충정작전이 유효하며 대학점령은 5월 18일 04시 이전까지, 불순분자 체포는 5월 18일 00시 01분 이전까지 완료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고, 20시경 7공수여단에 5월 17일 20시 01분부로 2군사령관 작전통제 아래 전남대 조선대 등을 5월 18일 02시까지 점령하고 04시 01분까지 소요 주모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음.

o 광주지구 보안부대는 보안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5월 17일 23시경부터 시위 주동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권창수·오진수·이승룡·유재도 등 8명을 체포하였음.

o 계엄사의 소요진압부대 투입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 여단본부 소속 장교 10명·사병 76명, 33대대 소속 장교 45명·사병 321명, 35대대 소속 장교 39명·사병 283명은 5월 17일 22시 37분 주둔지인 전북 금마를 출발, 5월 18일 01시 10분 33대대는 전남대에, 35대대는 조선대에 각 배치되고, 배치와 동시에 31사단 96연대에 배속(配屬)되었으며, 한편 7공수여단 31대대는 01시 29분 전북대에, 32대대는 02시 50분 충남대에 각 배치되었음.

o 한편 31사단 장교 14명·사병 1,132명도 소요 진압을 위하여 전남도내 16개 대학 및 중요시설에 배치되었는데, 광주지역 대학들 중, 전남대와 조선대를 제외한 나머지 8개 대학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했고, 나머지 병력은 전라남도 16개 대학 및 주요시설에 투입되었음.

(3) 5월 18일 상황

o 5월 18일 01시 10분경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1개 지역대가 학내(學內)를 수색하여 잔류 학생 69명을 체포하였고, 조선대에 배치된 35대대는 11지역대 1개 중대가 건물을 수색하여 잔류 학생 43명을 체포하여 06시경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하였음.

o 03시 05분 2군사령부로부터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지시가 하달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교사는 예하 부대에 무기고 안전대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하여 5월 18일 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 4,717정과 탄약 116만 발을 회수하였고,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에 대하여는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지휘관이 재량 실시하도록 지시하였음.

o 5월 18일 - 전남대학교 앞, 일요일인 5월 18일 09시경 전남대 정문에는 등교하는 학생과 출입을 통제하는 7공수여단 33대대 간에 시비가 벌어진 가운데 10시경 휴교령이 내릴 경우 학교 정문에 모여 시위를 하기로 한 행동지침에 따라 학생들이 200여명으로 증가하고,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33대대장은 귀가를 종용하면서 불응시에는 강제 해산하겠다고 경고하였음.

o 학교 출입을 제지당한 학생들은 계엄 확대와 휴교 조치에 항의하면서 돌을 던졌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하였는데,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다친 데 분개하여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하였음.

o 10시 30분경 전남대 후문 쪽에서는 야유를 보낸다는 이유로 시내버스에서 내리거나 시내버스를 타고 있는 학생을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더러는 연행하여 꿇여 앉혔으며, 공수부대원들에 쫓긴 학생들은 도청 앞에 모이기로 한 투쟁지침에 따라 대열을 이루어 광주역, 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로 진출하였음.

5. 18 - (광주시내 상황)

o 5월 18일 10시 30분경 학교 출입을 거부당한 전남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대학생 1,000여명이 광주 시내 금남로에 집결하여 '계엄 해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진압을 시도하고, 시위대는 돌과 화분을 던지는 등 경찰과 학생들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졌는데, 시위대 200여명은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여 충장로파출소에 몰려가 돌을 던져 파출소 창문이 파손되었음.

o 동일 오후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12시 45분경 산수동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13시 20분경 시위대가 돌을 던지면서 기습하자, 학생회관 정문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전경들이 도주한 사이에 시위대는 경찰 페퍼포그차를 전복(顚覆)시키고 방화하여, 페퍼포그차 1대가 전소(全燒)되었음.

o 14시 40분경 금남로 일대에는 1,500여명으로, 충장로 일대에는 1,6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향하여 보도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졌으며, 15시 50분경 시위대 300여명이 동산파출소에 투석을 하였고,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교사에 군병력의 투입을 요청하였음.

o 5월 18일 10시경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지역에서만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학생들 간 충돌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및 작전 지도 차 광주를 방문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4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으니 빨리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정 웅 31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가서,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경찰이 수세에 몰려 있다면서 16시에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되, 도청 앞은 경찰이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였음.

o 한편 동일 09시부터 전남대 앞 충돌 상황 등 광주상황을 보고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명에 불과하여 추가 병력 투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1개 공수여단의 투입을 지시하고,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14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정에 따라 11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15시 11공수여단을 수경사 작전통제로부터 해제함과 동시에, 11공수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부 작전통제하에 소요 사태를 진압하라는 작전명령을 시달하였음.

o 15시 30분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 웅 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으나 고전을 하고 있다면서, 광주에 가서 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지시하고 최 웅 11공수여단장은 즉시 여단 작전참모와 61대대 1지역대 병력을 선발대로 하여 16시 30분경 성남비행장을 출발하였고, 61대대 잔류 병력과 62·63대대는 17시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광주로 출발하였음.

o 정 웅 31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15시 35분경 전남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3대대는 유동 삼거리를 거쳐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금남로 끝 부분으로 이동,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 16시경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宣撫) 방송에도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33대대장은 시위진압 명령을 내렸음.

o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에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 시위대를 압축해 나가다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는데,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진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음.

o 조선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5대대는 16시경 광주전화국 부근과 광주일고 부근 천교에 도착, 시위진압 작전에 들어갔는데, 35대대장은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1,000여명의 시위대에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을 하였으나 시위대가 계속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지 아니하자, 대대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음.

o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대각선으로 등 뒤에 메고, 방독면을 차고, 방석망은 내린 채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여 해산을 시도하였고, 35대대의 시위 진압은 시위대를 추적, 체포하는 과정에서 부근 공용터미널 일대에까지 확대되었음.

o 18시 전남북계엄분소는 광주시내 통금시간을 1시간 앞당겨 21시 - 04시로 발표하였음.

o 17시 50분 광주공항에 도착한 11공수여단 선발대인 61대대 1지역대는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하면서 시내 상가지역에서 위력시위를 하였고, 18시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5월 19일 00시부로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음.

o 19시 정 웅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35대대장으로부터 시위 진압을 완료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그후에도 23시경까지 한일은행 뒤·노동청 앞·카톨릭센터 앞 등지에서 2,000여명의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음.

o 이날 시위대는 모두 273명이 체포되어 31사단 헌병대에 인계되었으며, 시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김경철(남·28세·제화공)은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으로 5월 19일 03시 사망하였고, 이종남(남·27세)등 광주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음.

o 이날 광주지역에는,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음.

o 정 웅 31사단장은 5월 18일 21시 31사단 상황실에서 작전평가회의를 열고, 7공수여단 33, 35대대 병력을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주요 시설 및 교차로 등 거점에 배치, 시위대가 집결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22시 30분 - 23시 20분 사이에 경찰 지, 파출소와 도로 교차지점을 중심으로 33대대는 17개 거점에, 35대대는 19개 거점에 각각 장교 1명, 사병 10명으로 구성된 공수부대 1개 지대와 경찰 2개 분대 24명씩을 배치하였으나,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에 따라 23시 40분 다시 작전회의를 열어 33, 35대대 배치 거점을 11공수여단에 인계하고 33대대는 전남대로, 35대대는 조선대로 각 복귀하였음.

(4) 5월 19일 상황

(11공수여단의 배치 및 시위 상황)

o 5월 19일 00시 50분 11공수여단 62, 63대대가 광주에 도착, 31사단의 작전통제 하에 02시 10분 조선대로 이동 하였고, 06시 30분 11공수여단은 7공수여단 35대대를 배속 받아 광주 동구권 지역을 담당하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31사단 예비대로 배속 전환하는 내용의 사단 작전명령이 하달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남도청및 광주남부지역은 경찰이, 광주 서부 일부및 북구권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하게 되었음.

o 08시 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유포시키고 있으니 전단 공중살포 등 역대책(逆對策)을 강구하여 선무할 것을 지시하였고, 09시 30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을 요청하였음.

o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 요소 요소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상가는 대부분 철시 상태에 들어갔으며, 관공서나 기업체, 초·중·고교에서도 정상 업무나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동요하기 시작하였는데, 대동고·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공수부대 철수와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하여 교내 시위를 벌였음.

o 금남로는 교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전남도청 앞에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거점에 배치되었던 11공수여단 61대대는 조선대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09시경부터 다시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시위 예상지역을 선제 점령하여 도로에 열을 지어 늘어서는 방법으로 시위대의 집결을 차단하고, 62, 63대대는 10시부터 장갑차를 선도로 차량 30대에 부대원을 탑승시켜 시내 일원에서 위력시위를 전개하였음.

o 10시경 학생 등 시위대 200여명이 기습적으로 충장로 파출소를 포위하고 경계근무중인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 3중대의 1개 지대 병력에 화염병과 돌을 던졌고, 10시 30분경 카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0여명이, 10시 40분경 충장로 일대에 시위대 2,000여명이 모여 화염병과 돌·보도블록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위력시위중이던 62, 63대대가 금남로에 합류, 61대대 및 경찰과 합동으로 시위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음.

o 금남로 사거리·광주은행 본점 및 광주관광호텔 앞·충장로 1가·충금 지하상가 등지에서 시위대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쫓아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의 다방·여관·민가 등을 수색하고, 검거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차고, 도망을 막고 시민과 시위대를 구별한다는 이유로 옷을 벗겨 연행하였는데, 11시경 카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대 3,000여명을 해산시키면서 200여명을 체포하고, 11시 10분경 관광호텔 앞에서 돌과 각목으로 군경과 대치하던 시위대 300여명을 해산하면서 107명을 검거하여 광주 동부경찰서 및 서부경찰서로 호송, 인계하였음.

o 12시경 전남도청 주변에서 시위중이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쫓겨 YWCA로 들어가자, 공수부대원들은 직원이 내린 셔터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가 진압봉으로 가격하면서 학생들과 신용협동조합 직원들까지 끌어내 도로에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땅에 쳐박게 하였고, 건너편 무등고시 학원에서 이를 목격한 학원생들이 때리지 말라고 고함을 치자 공수부대원들은 학원으로 몰려가 학원생들을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가격하고 밖으로 끌고 나와 트럭에 실어 연행하였음.

o 14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도지사·교육감·검사장·광주시장·중앙정보부 분실장·지방노동청장·우체국장·31사단장·11공수여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지역 기관장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지역기관장들은 군의 진압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면서 연행자 전원 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 웅 31사단장과 최 웅 11공수여단장에게 가혹한 진압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라고 지시하였으며, 그경 진종채 2군사령관이 작전 지도차 광주를 방문하였다가 17시경 복귀하였음.

o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철수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다시 시위대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3시 30분경 시민·학생 등 시위대 4,000 - 5,000명이 카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일부 시위대는 부근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 있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키고, 가로변(街路邊)의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들고 돌을 던지는 등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였음.

o 정 웅 31사단장과 최 웅 11공수여단장은, 병력을 중대 또는 지대 단위로 분산 운용하는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오후부터는 대대별로 집결 운용하기로 결정하고, 15시경 11공수여단이 61, 62, 63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를 다시 출동시켜, 61대대는 공용터미널, 62대대는 한일은행 앞, 광주고교 앞, 35대대는 광주소방서 앞을 거점으로 하여 시위를 진압하도록 조치하였음.

o 15시경 다시 공용터미널에 시위대가 모이자, 공수부대는 투석과 화염병으로 맞서는 시위대를 대량의 최루탄으로 해산시키는 등 공방전이 계속 되었고, 그 후 공용터미널 앞에 모인 시위대 2,000 - 3,000여명이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이는 중 수십명의 시위대가 공수부대원에 쫓겨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자 이를 쫓아간 공수부대원들이 대검, 소총 개머리판,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였음.

o 15시 15분경 카톨릭센터 7층에 있는 기독교방송국 경계 병력인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 9명을 공수부대원으로 오인한 시위대가 이들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카톨릭센터측이 공수부대원이 아니라고 하자, 시위대는 차고에 있던 승용차 4대를 불태우고, 분말소화기를 뿜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7층까지 밀고 올라가 경계병력의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지는 등 방송국을 점거하였으며, 공수부대 병력이 다시 시내에 투입되었다는 말을 듣고 해산하였으나 일부 시위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음.

o 15시 27분경 문화방송국 앞에 집결한 시위대 3,000여명은 광주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의 태도에 격분, 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 문화방송 사장이 직영(直營)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자제품점 문화상사에도 불을 질렀음.

o 15시 55분경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도 출동하여 광주역, 공용터미널, 광주공원 등지를 착검한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였고,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투석하던 시위대 9명을 체포하여 18시 30분 전남대로 복귀하였음.

o 16시경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집회 후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고, 금남로에 있던 시위대는 군경의 진압작전에 밀려 현대극장, 전남의대, 공용터미널, 계림동파출소 등으로 분산되면서도 투석전으로 대항하였음.

o 16시 15분경 장동 전신전화국 앞 사거리에 1,500여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였다가 공수부대의 진압에 밀려 분산되었고, 16시 40분경 광주터미널 앞에서 시민·학생 1,000여명이 합세하여 가드레일과 공중전화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고, 그경 광주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의 시위 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되었으며, 북동사무소 앞에서는 공수부대원 300여명이 가택 수색을 하면서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였음.

o 17시경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 제보를 받고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길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의 강력한 포위 공격과 최루탄 연기로 인해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감각을 잃고 보도 턱을 들이받고 정지하자, 시위대 수명이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뚜껑을 열고 장갑차 속으로 던져 넣으려 하였고, 이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M16 소총으로 위협 사격(威脅 射擊)하였는데, 그 와중에서 김영찬(19세·조대부고 3년)이 대퇴부 등에 총상을 입었음.

o 17시 30분경 광주일고 앞 광주공과기술학원에서 밖을 내다보던 학원생과 사무원 등 40여명을 공수부대원들이 연행하였고, 금남로2가 카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백여명이 재집결 하자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앞세우고 강력한 진압을 실시하였으며, 공용터미널 부근과 광주역에 각 5백명의 시위대가 계엄군과 대치하고, 금남로에 다시 2,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여 들었으며, 17시 40분경 공용터미널 앞에 시위대 1,000명이 집결하였으나 계엄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하였음.

o 18시경 광주공원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여 전두환 타도 구호를 외치고 시위하다 해산하였고, 18시 30분경 공원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을 입힌 채 기합을 주었고, 19시 30분경 공용터미널에 시위대 1,000여명이 공수부대와 대치하다가 해산하였음.

o 19시 45분경 시위대는 유동에 세워진 석탄절 봉축 대형 아치에 방화 하였고, 20시경 중흥동 광주고속터미널 부근 청과물시장 앞에서 시위대 1백여명이 경남 화물차 1대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시켰으며, 20시 30분경 진압에 밀려 도주하던 시위대 5백여명이 북구청에 투석하였고, 누문동파출소, 역전파출소, 임동파출소, 양동파출소 등 4개 파출소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아 파괴 또는 점거되거나 방화로 전소되었음.

o 21시경 7공수여단 33대대가 광주역에 다시 출동하였으며, 21시 55분경 시위대 60여명이 역전파출소를 재점거하고, 22시경 KBS 광주방송국에 시위대 1백여명이 침입하여 기물을 파괴하자, 22시 25분경 군경 시위진압 병력이 역전파출소 점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북구청 주변의 빌딩, 여관, 다방, 주택가에 대한 수색을 실시하여 파출소 방화 관련자 13명을 검거하였으며, 22시 50분경 33대대는 전남대로 복귀하였음.

o 23시경 누문동파출소에 서부경찰서 소속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고, 양동파출소에 경찰기동대와 31사단 96연대 1대대 병력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음.

o 7공수여단 35대대는 금남로에서 시위 진압 작전에 참가한 후 전남도청, 전남여고, 광주전화국, 광주소방서를 거쳐 5월 19일 21시 20분경 공용터미널에 도착하여, 5월 19일 밤은 그곳에서 11공수여단 61대대와 함께 숙영하였고, 61대대는 5월 20일 새벽에 전남도청 앞 금남로 2가로 이동하였음.

o 육본((陸本)은 1개 공수여단을 광주에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한 다음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건의에 따라 3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하고, 18시 2군사령부에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추가 작전통제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고, 23시08분 3공수여단에 광주 투입 명령을 하달하였음.

o 23시 31사단 기밀실에서 정 웅 31사단장은 예비군 훈련단장·최 웅 11공수여단장·경찰국장·31사단 96연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지휘관회의를 개최하고, 5월 20일 오전에 증원되는 3공수여단은 전남대를 기지로 하여 전남도청 서쪽을 맡고, 11공수여단은 조선대를 기지로 하여 전남도청 동쪽을 분담하여 작전을 수행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할 것을 지시하였음.

o 5월 19일 23시 40분 2군사령부는 도시 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 형태에 대비, 대대 단위 기동타격대 보유, 조기(早期)에 분할 타격·체포, 소요군중의 도피 방지책 강구, 과감한 타격을 내용으로 하는 군 충정작전지침 추가 지시와 계엄군의 이상적 행동 강구, 이적행위자 단호 조치, 선량한 학생 및 시민 보호 등을 내용으로 하는 2군사령관 훈시문을 시달하였음.

o 이날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김안부(남·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하였고, 군경 24명과 학생·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 중 최승기(남·20세·학생), 김인윤(남·21세), 이인선(남·27세), 최미자(여·19세)외 1명은 자상을 입었음.

5. 19 - (보안사 조치 상황)

o 5월 19일 보안사는 광주지구 보안부대의 상황 보고 및 조치가 미흡하다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적에 따라 보안사 기획조정처장 최예섭 준장을 광주에 파견하였으며, 16시경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한 최예섭 준장은 이재우 광주지구 보안부대장의 건의를 받고 보안사에 연행자 조사요원과 예산의 지원을 요청하였음.

o 최예섭 준장은 전교사 부사령관 부속실과 광주지구 보안부대장실 옆방에 머물면서 광주 상황을 보안사에 보고하고, 전교사 작전회의에 참석하거나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과 함께 시민 협상대표를 만나는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광주 재진입 작전 직후인 5월 27일 오후 보안사로 복귀하였음.

o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은 계엄확대와 동시에 치안본부 수사업무 조정을 위해 합동수사단에 파견나와 있던 홍성진 1군단 보안부대장을 광주로 보내 상황을 파악할 것을 지시하였음.

o 5월 20일 08시경 광주에 도착한 홍성진 대령은 09시 30분경 광주 시내로 들어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고, 5월 21일 이후에는 시내에 은신하면서 시위대의 위치, 무장 상황, 이동 및 공격상황, 시민들과 수습대책위원회의 동정 등을 파악, 보고하였고, 5월 24일 14시경 광주지구 보안부대로 귀대하여 지원업무를 계속하다가 6월 8일경 보안사로 복귀하였음.

o 5월 22일 부터 보안사에서 최경조 대령이 파견되어 광주지역 합동수사단장으로서 합동수사본부에서 파견된 수사요원 30명과 현지 수사요원 10여명을 지휘하여 시위 관련자에 대한 수사업무를 수행하였음.

(5) 5월 20일 상황

(오전 - 3공수여단 추가 투입 및 계엄군 배치 상황)

o 5월 20일 00시부로 31사단에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추가로 작전통제 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01시 02분 3공수여단 소속 장교 255명·사병 1137명이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 07시 광주에 도착하여, 이로써 광주지역에는 공수부대 3개 여단 10개 대대가 투입되었음.

o 광주역에 마중나온 정 웅 31사단장은 역장실에서 최세창 3공수여단장과 대대장들에게 광주시내 상황을 설명한 다음, 전남대에서 숙영(宿營)하면서 광주 서북부 지역을 담당, 시위진압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1공수여단은 7공수여단 33대대를 추가 배속받아 광주 동부지역을 담당하도록 변경 조치되었음.

o 전교사(戰敎司)는 05시 500MD 헬기 3대를 지원 요청하고, 05시 30분 2개 공수여단의 병력의 증원을 요청하였으며, 09시 31사단은 재차 광주시내 예비군 무기 6,508정, 실탄 42만 발을 군부대로 회수 조치하는 한편, 미회수 총기(銃器)는 공이와 노리쇠를 제거하고, 탄약은 매몰하는 등 긴급조치를 취하였음.

o 06시경 11공수여단은 작전담당 구역인 광주 동부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61대대는 금남로 2가 상업은행 일대에, 62대대는 충장로 광주우체국 일대에, 63대대는 금남로 3가 광주은행 일대에, 7공수여단 35대대는 금남로 4가 한일은행 일대에, 7공수여단 33대대는 광주역에 배치되었다가 오후에 계림동 일대로 이동하였음.

o 전남도교육위원회에서 광주 시내 중·고등학교에 대해 임시 휴교조치를 한 가운데, 상가(商街)는 절반가량 철시하였고, 10시경 대인시장 주변에 1,000여명의 학생·시민들이 집결하여 공수부대원들의 강경 진압을 성토하면서 금남로 방면으로 진출하였으나,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밀려 산개되었음.

o 10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소집한 2차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에서 기관장들은 공수부대를 철수하든가, 철수가 불가능하면 공수부대 복장을 일반군인 복장으로 교체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음.

o 10시 30분경 7공수여단 35대대가 배치된 한국은행 맞은편 카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30여명의 남녀(男女)를 체포하여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진압봉으로 가격하였음.

o 12시 30분경 전남대에서 식사를 마친 3공수여단 병력이 광주시내에 투입되었는데, 작전담당 구역인 서북부지역을 중심으로 11대대는 황금동 일대에, 13대대는 공용터미널에, 15대대는 양동사거리 일대에 배치되어 시위진압 임무를 수행하였고, 12대대는 광주시청에 대기하면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16대대는 전남대에 잔류하면서 여단 예비대 임무를 각 수행하였음.

o 12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와 전교사 상황실에 설치한 7공수여단 지휘부에 들러 여단장 등을 격려하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을 만난 후 오후에 귀경(歸京)하였고, 특전사는 전교사 기밀실에 상황판을 설치하고 전교사 건물 옥상에 전용무전기를 설치하여 공수여단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음.

5. 20 - (오후 - 차량 시위 및 공수여단 시위 진압 상황)

o 3개 공수여단 10개 대대가 광주시내 일원에 배치된 후, 오전에 비교적 평온하던 상황과는 달리 오후에 들어 시위는 다시 격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죽은 인원이 수십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 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라는 등의 내용이 쓰인 유인물(油印物)이 곳곳에 뿌려졌고, 시위대들은 계엄 철폐, 연행 학생 석방, 공수부대 철수,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음.

o 13시 20분경 상업은행 앞에 200여명, 14시 20분경 충장로 지역에 200 - 300명, 전남도청 앞에 200여명, 계림동 지역에 2,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는 계림동 광주고교 쪽으로 밀려 가면서 인도(人道)에 설치된 대형 화분과 가드레일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경(軍警)과 격렬하게 대치하였음.

o 15시 40분경 조흥은행 앞에 200여명, 15시 50분경 금남로 2-3가에 5,000여명, 금남로 4가에 3,000여명이 운집하였고, 금남로 4가에서 1가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를 경찰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쓰면서 저지하였으나 경찰이 밀리기 시작하였으며, 금남로 1가 쪽에서 공수부대가 진격하자 다시 시위대가 후퇴하는 등 공방을 계속하였는데, 16시경에는 전남도청 인근 지역에 집결한 시위대가 2-3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대열 앞에 드럼통과 화분대 등을 굴리면서 군경의 저지선으로 접근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돌·화염병·쇠파이프·각목·칼 등을 소지하고 시위를 벌였음.

o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 기사들이 50여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시위를 하였고, 18시경 무등경기장에 100여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軍)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고,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광주역과 공용터미널을 거쳐 19시경 금남로 쪽으로 진입하여 전남도청 앞 관광호텔까지 진출하였음.

o 금남로 1가 전남도청 앞에 저지선(沮止線)을 치고 있던 경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로변에 있는 장식용 대형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차량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선두 차량 10여대가 계속 도청 쪽으로 전진하자,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차량 저지 특공조는 선두차량에 접근, 차량 유리창을 파손하여 차량의 전진을 저지하고, 시위대의 차량이 가로수와 바리케이드를 충돌하는 사이에 차 안으로 최루탄을 던져 넣고 차 안으로 쳐들어가 운전자와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타격하고 검거하였음.

o 19시 30분경 다시 공용터미널 쪽에서 1만여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와 합세하자,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면서 저지하였고, 경찰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시위대의 도청 쪽 진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음.

o 19시 45분경 문화방송국 앞에 모인 5,000여명의 시위대는 방송사에 저녁 8시 뉴스시간에 광주 상황을 보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도가 되지 아니하자, 20시 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방송사 직원들은 셔터를 내리고 소화기로 진화(鎭火)하고,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경계 병력도 소화탄을 던지면서 진화를 계속하였으나, 21시 45분경 문화방송국 건물은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고, 경계 병력은 후문을 통해 전남도청으로 철수하였음.

o 20시경 노동청 앞·MBC·KBS 앞·공용터미널 부근·전남매일신문사 앞 등에서 수만명의 시위대가 애국가를 부르면서 공수부대와 대치하였고, 그 와중에 역전파출소·학동파출소·광주시청·방송국·서부경찰서 등이 피습(被襲)되었으며, 20시 30분경 광주소방서가 시위대에 점거되고 소방차 4대가 탈취되었음.

o 20시경 시위대 약 3,000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20시 10분경 노동청 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 붙였으며,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1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음.

o 20시 20분경 시위대가 역전파출소·양동파출소·학동파출소를 점거하였고, 일부 시위대는 광주소방서에서 탈취한 소방차 4대로 사이렌을 울리며 가두(街頭)로 진출하였으며, 20시 50분경 광주시청이, 22시경 광주경찰서와 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점거되고, 23시경 광주세무서가 불타는 등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 전지역이 사실상 시위대에 장악되었음.

o 21시 20분경 7공수여단 33대대는 조선대를 방어하라는 11공수여단장의 명령에 따라 조선대로 복귀하였고, 7공수여단 35대대는 11공수여단장의 명령에 따라 23시경 전남도청 앞으로 집결함으로써 11공수여단은 사실상 시위 진압을 포기한 채 조선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를 계속하였음.

o 24시경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노동청 앞과 전남대 앞에서 경찰관과 공수부대원 수명이 사망한 사실이 전파되는 등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 지급을 요청하자, 11공수여단 61대대장과 62대대장은 62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위급시 사용하기 위해 탄창에 삽입하여 보관하는 실탄)을 실탄 15발 정도가 든 탄창 1개씩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위급시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음.

o 5월 21일 00시 36분경 시위대 3,000여명이 고속버스 3대를 돌진시키며 조선대 정문 돌파를 시도하였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최루탄을 쏘면서 이를 저지하여 버스가 조선대 담과 민가를 들이받고 정지하는 등 04시 40분경까지 치열한 공방을 계속하였음.

o 5월 21일 03시경 전남도청 앞에서의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감에 따라 공수부대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7공수여단 35대대는 충장로와 화순으로 통하는 전남도청 좌측 방면에, 11공수여단 61, 62 대대는 전남도청 정면 금남로 방면에, 63대대는 전남도청 우측 노동청 앞에 각 배치하였음.

5. 20 - (오후 - 3공수여단 시위 진압 상황)

o 양동사거리 일대에 배치되어 시위진압 작전을 하고 있던 3공수여단 15대대는 5월 20일 18시경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광주역으로 이동, 집결지 확보를 위하여 광주역 앞 도로를 차단하였고, 광주시청에서 대기하면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던 12대대는 광주역에 있는 15대대를 지원하고 KBS 광주방송국을 보호하라는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19시경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15대대와 합류하였음.

o 광주역 앞에서 다섯 갈래의 방사형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쏘며 수천명의 시위대와 대치, 공방을 벌이고 있던 12·15대대는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버스 등 차량 돌진 공격을 게속하자 인도(人道)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하였고,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重傷)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하였음.

o 한편 18시 30분경 3공수여단의 본부요원이 2.5t 차량 2대로 시내 작전 부대의 저녁식사 보급을 위해 전남대에서 500m 가량 떨어진 신안동 굴다리 부근에 이르러 시위대 2,000여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전남대에 잔류하고 있던 16대대 병력이 출동, 최루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나, 20시경 고속도로 쪽에서 차량 1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몰려와 공방전을 벌였으며, 16대대의 강력한 진압으로 시위대들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여 소강상태가 유지되던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1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하였음.

o 22시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대대장들로부터 엄청난 수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각 대대에 광주역으로 집결하여 전남대로 철수하도록 지시하였음.

o 시위대의 공세에 밀려 금남로 신탁은행 공터에서 자체 방호(自體 防護)에 치중하고 있던 3공수여단 11대대는 여단장의 광주역 집결 지시에 따라 22시 30분경 최루탄 발사 등으로 시위대를 돌파, 그경 공용터미널 일대에 배치되어 시위 진압 작전을 하다가 광주시청으로 이동한 13대대와 합류한 다음, 23시 30분경 11·13대대 합동작전으로 시가지를 장악하고 있는 시위대를 뚫고 광주역으로 이동, 12·15대대와 합류하였음.

o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지급 등 지원을 요청하자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22시 30분경 위협용(威脅用)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하여, 본부대 병력 약 20명으로 지원조를 편성, 여단 정보참모가 먼저 신안동 굴다리에 있던 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여발을 전달하고, 이어 여단 작전참모와 함께 광주역 뒤쪽 도로와 광주시청 앞 사거리를 지나 광주역으로 진출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쳐 경고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차량에 거치한 M60 기관총을 위협 발사하고, 권총과 M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E-8 발사기로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한 후 광주역에 도착하여 12·15대대에 경계용 실탄을 전달하였고, 이어 광주역에 도착한 11대대에도 경계용 실탄을 전달하였음.

o 3공수여단 소속 대대들이 광주역에 합류한 후에도 전남대 쪽과 KBS방송국 쪽에서 시위대가 여러 차례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였고, 3공수여단은 장교들의 권총·M16 발포와 E-8 발사기 발포로 돌진 차량을 저지하고 시위대를 해산시킨 다음, 5월 21일 02시경 KBS 방송국에 배치되었던 31사단 경계병력 장교 4명·사병 35명과 함께 전남대로 철수하였음.

o 5월 20일 밤 광주역 일대에서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김재화(남·25세), 김만두(남·44세), 김재수(남·25세), 이북일(남·28세)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으며, 최영철(남·39세), 김명환(남·16세), 나순돈(남·20세), 강인곤(남·20세), 김현택(남·24세)과 성명불상자(25-30세) 1명이 총상(銃傷)을 입었음.

o 시위대의 억센 저항에 부딪쳐 11공수여단이 전남도청 앞으로 밀리고,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 집결되어 전남대로 철수함으로써 전남도청과 조선대·전남대를 제외한 광주시 일원은 사실상 군경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고, 시위대는 밤새도록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서·파출소 대부분을 공격하였으며, 경계 병력이 철수한 KBS 방송국이 불타고,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이 시위대에 탈취되었으며, 5월 21일 02시 13분 광주지역의 일반 전화선이 단선 조치(斷線 措置) 되었음.

o 5월 20일 23시 20분 2군사령부로부터 발포 금지, 실탄 통제, 특전사 임무 20사단에 인계 고려 등에 관한 추가 작전지침이 하달되었고, 이어 23시 32분 소요 확산 저지를 위하여 광주시 외곽 도로 봉쇄 지시가 하달되었으며, 24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끌면 피차간에 유혈 충돌이 일어날 것 같다며 보병 부대를 투입하고 공수부대는 시 외곽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고, 그경 진종채 2군사령관도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를 건의하였음.

(6) 5월 21일 상황

(광주교도소 상황)

o 전교사는 시위대의 광주교도소 습격 첩보에 따라 5월 21일 01시 45분 31사단에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하달, 02시 45분경 31사단 96연대 2대대 소속 장교 13명·사병 444명이 광주교도소에 배치 완료되었음.

o 08시 58분경 버스 2대, 트럭 1대에 탄 시위대 400여명이 교도소에 접근하였고, 10시 22분경 150여명의 시위대가 버스 1대, 트럭 3대를 타고 교도소 앞을 2-3회 선회한 후 광주 쪽으로 갔으며, 11시 02분경 시위대 50여명이 장갑차 1대, 트럭 1대, 군용지프차 1대를 타고 교도소에 접근하였고, 15시 38분경 시위대가 경찰 기동순찰차등 20여대의 차량으로 교도소에 접근하였으나 계엄군과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며, 11시 46분경 31사단 소속 교도소 경계 병력에 실탄이 공수(空輸)되었음.

5. 21 - (20사단 증원 상황)

o 육본(陸本)의 20사단 증원 결정에 따라 20사단 61연대 소속 장교 82명·사병 1,413명은 5월 20일 22시 30분경, 사단 사령부와 62연대 소속 장교 114명·사병 1,555명은 5월 21일 02시 30분경 각 용산역을 출발하여, 61연대는 5월 21일 04시경, 사단 사령부와 62연대는 08시 50분경 순차 광주 송정역에 도착, 상무대에 집결하였음.

o 08시경 전교사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 교육대학으로 이동하던 20사단 61연대는 광주통합병원을 지나 돌고개 지역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쳐 상무대로 복귀하였음.

o 02시 30분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00여명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5. 21 - (계엄군 조치 상황)

o 5월 21일 04시 30분 육본(陸本)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재로 열린 계엄사 대책 회의에서, 계엄군을 광주 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고, 1개 연대(聯隊)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 소탕 작전은 5월 23일 이후에 의명 실시(依命 實施)하고, 자위권(自衛權)을 발동하기로 결정하였고, 06시 25분경 가스 살포용 500MD 헬기 5대가 전교사에 도착하였으며, 08시 전교사 지역에 진돗개(비상경계령) 하나가 발령되었음.

o 그 동안 광주 관련 보도를 통제하던 계엄사는 5월 21일 오전 처음으로,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고,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으며, 21일 오전 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하였음.

o 정 웅 31사단장은 10시경 시위대의 주장 내용이 정치적인 것이므로 물리적인 수습방안보다는 정치적인 수습방안이 최선이라는 내용의 사태 수습 방안을 전교사에 건의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를 2군사령부에 보고하였음.

o 11시 15분 성남비행장을 출발한 61항공단의 수송용 UH-1H 헬기 10대가 13시 10분 전교사에 도착하였음.

o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로부터 현역 장군 중에서 체신부장관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을 추천하였고,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된 윤흥정 전교사령관의 후임(後任) 내정 통보를 받은 소준열 육군 종합행정학교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부임 지시에 따라 15시경 헬기로 종합행정학교를 출발하여 16시 30분경 전교사에 도착, 5월 22일 10시 정식으로 전교사령관에 취임하였음.

o 5월 21일 15시 35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선무활동(宣撫活動)으로 시민과 불순세력을 분리하고, 지휘체계의 일원화(一元化)로 군 사기를 진작하며, 광주 외부도로망을 차단하고, 끝까지 교도소를 방어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16시 진돗개(비상경계령) 둘을 발령, 대공경계를 강화하였고, 같은 시각 전교사령관은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31사단장으로부터 전교사령관으로 전환, 직접 공수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하였음.

5. 21 - (전남대 앞 시위 상황)

o 전남대에는 5월 21일 이른 시각부터 시위대가 트럭·버스·소방차·장갑차 등을 몰고 와 10시경 정문에는 4만여명, 후문에는 1만여명의 시위대가 3공수여단 병력과 대치하여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으며, 그 무렵 엄청난 시위대가 모인 데다가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였다는 첩보가 전파되자, 13대대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각 경계용 실탄 탄창(30발) 2개씩 지급되었음.

o 12시경 시위대의 전격적인 차량 돌진 공격으로 전남대 정문이 300m 가량 시위대에 의해 돌파당하자, 3공수여단은 기동 예비 1개 대대로 시위대 전열(前列)을 공격하고, 2개 대대는 정문지역을 확보한 후 시위대를 밀어붙여 광주역 부근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정도 퇴각시키는 등 14시경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시위대가 장갑차·트럭 등 차량을 돌진시키자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차량을 향해 총격을 가하였고, 공수부대원들은 도망가는 시위대를 굴다리 부근 민가(民家)에까지 쫓아가 최루탄을 발포하거나 진압봉 등으로 강하게 가격하고, 시위대를 체포하여 전남대로 연행하였으며 시위대의 장갑차·5t 구난차·경찰가스차·트럭 등 차량 13대를 노획하여 4대는 파기하고, 나머지는 광주 교도소로 가져가 도로를 차단하는 데 사용하였음.

o 이날 전남대 앞 시위 진압 과정에서 주부 최미애(여·23세·임신 8개월)와 성명불상자 2명(운전자와 학생으로 추정)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최성환(남·18세·대동고1년·대퇴부 및 무릎관절 파편상), 양일권(남·19세·우측대퇴부 및 하지 총상), 신상균(남·15세·좌측 대퇴부 관통상) 등이 총상으로 부상을 입었으며, 공수부대에 연행된 안두환(남·46세), 장방환(남·57세)은 5월 28일 광주교도소에서 타박상 등으로 사망한 시체로 발견되었음.

5. 21 - (전남도청앞 시위 및 발포 상황)

o 전날 밤 시위대의 차량 공격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뒤 도로에서 교대로 가수면(假睡眠)을 취한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앞 금남로 전면(前面)에 11공수여단 61·62대대를, 노동청 방면에 63대대를, 광주천 방면에 7공수여단 35대대를 각각 배치하여 전남도청 방어를 준비하였고, 동이 트자 시위대들이 금남로로 몰려오기 시작하여, 5월 21일 08시 전남도청 앞에는 수만명의 시위대가 사체(死體)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蠻行)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음.

o 10시경 시위대 대표 4명이 7공수여단 35대대장의 안내로 전남도청에서 장형태 도지사와 면담, 공수부대의 철수, 연행자의 석방, 과잉 진압의 사과, 계엄사령관과의 면담 주선을 요구하였고, 장형태 도지사는 요구 조건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후 도청 앞에 마이크 설치를 기다리던 중, 먼저 구용상 광주시장이 나가 시위대에게 진정하도록 설득하려 하였으나, 시위대는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각목과 화염병을 던져 구용상 시장은 연설을 하지 못하였으며, 11시경 장형태 도지사는 시위대 앞에서의 연설을 포기하고, 헬기를 타고,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생업에 복귀해 달라는 방송을 하였으나 시위대는 12시까지 공수부대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음.

o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칼빈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고, 장갑차를 비롯한 트럭, 버스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시위대 전면(前面)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낀 11공수여단 61대대장은 여단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대책 강구를 건의하였으나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도청을 사수(死守)하라는 지시만 반복하였고, 11시경 63대대장은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대대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 지급하고,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음.

o 12시경에는 공수부대가 장갑차 2대와 함께 횡대(橫隊)로 도로에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을 저지하고,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100여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압박하여, 서로 10m 정도까지 접근,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되던 중, 13시경에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상무관·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하였고, 장갑차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 발포(空中 發砲)가 되고,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宣撫活動)의 일환으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를 방송하며 해산을 호소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뒤쪽에 있던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하여 버스 1대는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도청 좌측 건물과 충돌하여 정지하고, 장갑차와 다른 차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 나갔음.

o 시위대의 차량 기습 돌진에 놀라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이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대형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그 뒤에서 사격자세로 경계하는 있는 가운데, 13시 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으며,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카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이고, 그 중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를 하였음.

o 그 무렵 방송국 등의 경계임무를 수행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철수해 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사단으로 철수하면서 경계용 실탄 200여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에게 넘겨주어,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분배받았음.

o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강진·완도·승주·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를 확보, 무장을 하였는데,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정·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시 35분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 발을 탈취하였고,

14시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00여정, M1 소총 200여정, 실탄 4만 6,000여발을 탈취하였고,

15시 35분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만 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 4,000여발을 탈취하였고,

그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방직,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 화약고, 한국화약, 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900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70여발을 탈취하였음.

o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 사용 교육을 실시하였고, 15시경 광주공원에서 총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하였으며,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組)를 편성하여 정찰·도청 감시·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시민군(市民軍)이라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음.

o 14시 50분경 시위대의 장갑차가 다시 전남도청 광장 쪽으로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발포하자 후퇴하였고, 15시경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 20여정의 총기를 분배하였고, 화순 경찰서 등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도 학동 석천다리·지원동에서 총기를 분배하여 일부 무장 시위대는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였음.

o 14시 50분경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전남일보·수협 도지부·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일부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부근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였음.

o 15시 15분경 전남도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000여명이 모여 일부 시위대는 칼빈과 실탄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15시 50분경 칼빈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도경(全南道警)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하였으며, 16시경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게 30여정의 칼빈을 분배하였고,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하였음.

o 14시 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상공(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대공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고, 15시 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기종의 61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으며, 전교사로 복귀한 61연대장은 전교사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하였음.

5. 21 - (11공수여단 철수 상황)

o 5월 21일 16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와 자위권 발동을 승인받아 전남도청에 있는 7·11공수여단의 철수를 지시하는 한편, 16시 55분 예하 부대에 예비군무기 및 탄약 확보, 도로 봉쇄를 지시하고, 이어 17시 50분 광주도시권 외곽 도로의 완전 봉쇄를 지시하였음.

o 17시경 11공수여단 3개 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는 장갑차를 선도로 전남도청을 출발, 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공포(空砲) 사격을 하면서 조선대로 철수한 다음, 7공수여단 33대대를 포함한 공수여단 5개 대대 병력을 도보제대와 차량제대로 편성하여 시 외곽 철수를 시작하였음.

o 19시 30분경 차량제대가 먼저 장갑차를 선두로 조선대 - 전남도청 - 15번 도로를 따라 제2수원지로 철수하고, 도보제대는 조선대 뒷산 - 학동 - 지원동을 경유하여 산악능선을 따라 주남마을로 철수하였는데, 19시 40분경 차량제대가 전남대 병원, 남광주시장, 숭의실고 부근을 지나면서 시위대의 사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아 군 차량 3대가 전복되고, 그 과정에서 장교 1명과 사병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음.

o 16시 30분경 전남도청 상황실이 폐쇄되었고, 17시 15분경 전남도경 상황실이 폐쇄되고 도경(道警) 지휘부가 광주공항으로 이동함에 따라 경찰병력도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군경들은 운동복으로 바꾸어 입고 철수하였고, 20시경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의하여 접수되었음.

o 이날 전남도청 등 광주 시내 일원에서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15세 가량의 성명불상 남자(두부총상·의식 불명 상태로 13시 10분 전남대 병원 도착·총기불상), 진정태(남·27세·5월 21일 13시 50분 사망 상태로 전남대 병원 도착·총기불상), 최승희(남·19세·5월 21일 13시 15분 전남대 병원 도착·칼빈총상), 윤성호(남·27세·회사원·칼빈총상), 박민환(남·26세), 조사천(남·33세·목공·5월 21일 14시 광주기독병원 도착·칼빈총상), 나홍수(남·34세·5월 21일 17시 15분 전남대 병원 도착·칼빈총상), 안병태(남·26세·목공), 조남신(남·52세), 심동선(남·30세·다방 주방장·건물 옥상에서 피격), 김광석(남·전남대 2년·5월 21일 13시 55분 영남신경외과 도착·칼빈총상), 민청진(남·20세·5월 21일 13시 55분 영남신경외과 도착·칼빈총상), 황호정(남·63세·자택에서 피격), 김함옥(남·18세), 김용표(남·23세), 박세근(남·35세), 이경호(남·20세·칼빈총상), 박인천(남·26세·칼빈총상), 장하일(남·38세), 박금희(여·17세·춘태여상 3년), 김상구(남·22세·5월 21일 14시 10분 전남대 병원 도착), 채이병(남·25세), 박인배(남·17세), 윤형근(남·21세·5월 21일 15시 30분 전남대 병원 도착·칼빈총상), 임균수(남·20세), 김복만(남·28세), 정찬용(남·29세), 정영진(남·17세), 조대훈(남·33세), 김완봉(남·13세,무등중 3년), 김형관(남·22세), 나안주(남·27세), 김영철(남·23세), 박창권(남·14세·숭의중 2년), 이성자(여·14세·칼빈총상)와 성명 불상자 수 명이 총상으로 사망하였음.

5. 21 - (3공수여단 교도소 철수 상황)

o 5월 21일 14시 3공수여단에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광주시 외곽을 차단하고, 31사단 병력과 교대하여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16시 30분경 3공수여단은 15대대를 선두로 전남대를 출발하여 17시 20분경 광주교도소에 도착, 대대별, 지역대별로 광주-담양간 도로 차단 및 광주교도소 방어 임무를 분담하였음.

o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15대대가 교도소 앞 주유소에서 31사단 병력과 임무 교대 중, 고속버스 2대에 칼빈을 장착한 시위대의 기습 사격으로 공수부대원 1명이 부상을 입었음.

o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수십 명의 연행 시위대를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하였는데, 광주역, 전남대 등 격렬했던 시위대와의 충돌과정에서 흥분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이 호송트럭 안으로 최루탄과 가스를 집어 넣고, 연행자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군화발로 구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연행자 수명이 사망하였음.

o 광주-담양간 국도(國道)와 순천행 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에서 외곽 봉쇄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3공수여단 병력과 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 간에 간헐적으로 총격전이 발생하였는데, 그 와중에서 19시 30분경 픽업 차량을 타고 교도소를 지나가던 담양 거주 주민 4명이 칼빈 총격을 받아 임은택(남·35세)과 고규석(남·37세) 등 2명이 좌대퇴부 또는 흉부 관통 총상으로 사망하였음.

o 3공수여단은 5월 21일 밤 무장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 등 차량 6대를 노획하고, M1, 칼빈 등 총기 4정과 실탄 138발을 회수하였음.

5. 21 - (20사단 외곽 배치 및 추가 증원 상황)

o 전남도청에 있는 공수부대와의 임무 교대가 불가능함에 따라 대기중이던 20사단은 5월 21일 18시 50분경 전교사령관의 광주시 외곽 도로 차단·봉쇄 및 상무대 경계 명령에 따라 61연대를 광주-목포 및 광주-전주 간 도로 차단을 위해 송암동과 광주 톨게이트에, 62연대를 통합병원 입구와 송정리 비행장 및 전교사에 각 배치하였음.

o 1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각군 참모총장·류병현 합참의장·백석주 연합사 부사령관·진종채 2군사령관·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방부장관 주재 회의에서 계엄군 외곽 철수와 자위권 발동이 최종 결정됨에 따라, 19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방송을 통한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하였고, 이어 20시 30분 전교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하였으며, 20사단에는 21시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었음.

o 19시 20분 506항공대대 소속 500MD 헬기 4대가 전교사에 도착하였으며, 21시 육본(陸本)의 1개 연대 추가투입 지시에 따라 20사단 60연대 2대대·3대대와 91포병대대 소속 장교 88명·사병 1,514명이 성남 비행장을 출발하여 5월 22일 07시경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 격납고에 대기하였음.

o 5월 21일 22시 10분경 효천역 부근에 배치되어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61연대 2대대 5, 6중대와 지프차의 선도하에 트럭·버스 등 차량 6-7대에 탑승하고 목포쪽에서 오던 시위대 간에 교전이 발생하여 시위대 버스 2대가 전복되었고, 시위대와 교전을 보고받은 61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5월 22일 00시 15분경 1대대 1중대와 연대 수색중대 병력이 증원되었으며, 이어 01시경 광주쪽에서 버스 5-6대에 탑승하고 온 시위대와 다시 교전이 벌어져, 두 차례의 교전 과정에서 시위대 1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고, 시위대로부터 총기 16정과 실탄 500여발이 회수되었음.

(7) 5월 22일 상황

(광주시 외곽 상황)

o 5월 22일 00시 40분경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픽업 1대·1/4t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분승(分乘)하여 광주교도소에 접근, 3공수여단 병력과 교전이 벌어지고, 09시경 시위대 6명이 2.5t 트럭에 탑승하여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 경계근무 중이던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시위대 3명이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서종덕(남·17세), 이명진(남·36세), 이용충(남·35세)으로 추정>, 수 명이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으며, 3공수여단은 고속버스 2대·트럭 1대·픽업 1대를 노획하고 LMG 1정·M1 소총 5정·칼빈 4정과 실탄 약 400발을 회수하였음.

o 05시경 광주에서 목포로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황남열 일행이 송암동 연탄공장 앞 바리케이드에서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의 검문을 받은 후 통과를 허가받아 진행하던 중, 부근에 매복(埋伏) 중이던 61연대 수색중대 병력으로부터 시위대로 오인되어 사격을 받아 승용차 운전자가 사망하였고, 황남열 일가 3명은 총상을 입고 헬기로 후송되었음.

o 06시경 주남마을 일대로 철수한 7·11공수여단은 광주-화순간 국도(國道) 주변에 광주 쪽으로부터 11공수여단 61·62·63대대를 배치하고, 7공수여단 35대대 11지역대를 광주-화순간 국도에 있는 너릿재 터널에 배치하여 도로를 차단하였음.

o 07시경 광주-목포간 도로상의 남평 간이 활주로에서 20사단 61연대 1대대 1중대와 광주 방향으로 진행하던 무장시위대가 탄 고속버스 3대가 대치하였으나, 계엄군의 저지와 설득으로 시위대가 목포방향으로 돌아가 충돌은 없었음.

o 09시경 효천역 부근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매복중이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이, 그곳을 시위대 지역으로 오인하여 M1 소총을 흔들며 광주를 빠져 나가려던 승용차에 총격을 가하여, 탑승자 중 왕태경(남·26세)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사망하였고, 탑승자 2명은 총상을 입었음.

o 10시경 광주교도소 옆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에서 3공수여단 12대대 8지역대 병력의 총격으로 트럭을 타고 그곳을 통과하던 김성수(남·51세)와 그의 딸 김내향(여·5세)이 부상을 입었고, 그의 처 김춘아(여·43세)는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o 13시 35분경 20사단 62연대 3대대가 봉쇄하고 있던 송정리 지역에서 시위대가 무기반납 조건으로 광주시 진입을 요구하여 15시경 M1 등 소총 57정과 실탄 100여발을 반납하고 160여명이 봉쇄지역을 통과하였음.

o 18시 30분경 너릿재 터널에서 7공수여단 35대대 11지역대는 화순 방면에서 오던 2.5t 트럭 1대에 총격을 가하여 정지시킨 후 그 트럭으로 터널 입구를 봉쇄하였고, 운전자는 행방불명되었음.

5. 22 - (시위대 상황)

o 5월 22일 06시 30분경 날이 밝으면서 광주공원에는 무장시위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차량에 일련 번호를 부여하고, 차량별로 의료, 연락, 보급, 수송, 지휘·통제, 순찰, 전투 등의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금남로, 화정동, 산수동, 학동, 백운동, 서방 삼거리, 신역 등에는 각각 무장시위대와 차량을 배치하여 경계를 하였음.

o 금남로와 전남도청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도청을 점령한 무장시위대는 도청을 본부로, 서무과 사무실을 상황실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09시경 지역 유지와 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정시채(丁時采) 부지사 등 전남도청 간부들도 출근하여 사태의 추이와 수습 방안을 논의하였음.

o 12시경 전남도청 부지사실에서 이종기(변호사), 최한영(독립투사), 박윤종(전 광주시장), 조비오(신부), 윤영규(YMCA 이사), 김상형(전남대 강사), 이석연(전남대 교수), 장휴동, 신영순 등 각계 인사 15명이 모여 5월 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이종기)를 열고, 사태 수습 전 군 투입 금지, 군의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전원 석방, 사후 보복 금지, 책임 불문, 사망자에 대한 보상, 이상의 요구 관철 시 무장 해제 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마련하여 13시 30분경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을 만났으며, 계엄분소측은 무기를 반납하면 선별 석방하겠다는 내용과 사후 보복 금지에만 동의하고 나머지는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약속하고, 동일 연행자 848명을 석방하였음.

o 도청 시민수습위와는 별도로 홍남순(변호사), 조아라(장로), 이애신(YWCA 장로), 김성용, 조비오(각 신부), 명노근, 송기숙(각 교수), 이기홍(변호사), 윤영규 등 15-16명은 남동성당에 모여 시민수습위의 7개 요구 사항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 수습위의 조치를 일단 관망(觀望)하기로 하였음.

o 15시경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15시 18분경 관 위에 태극기를 덮은 18구의 사체(死體)가 분수대에 안치(安置)되었으며, 17시경 계엄분소로부터 요구사항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온 수습위 대표들이 시민궐기대회에 나가 협상 결과를 보고하면서 총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연설하자, 협상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시민들의 반발과 야유를 받았음.

o 18시경 전남대 명노근, 송기숙 교수가 도청 주변 학생 200여명을 모아 수습 방안을 논의한 결과 별도로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도청으로 들어갔으나, 도청 안에 있던 일부 청년들이 학생수습위원회의 구성에 반대하여 다시 논의한 끝에 20시경 임시학생수습위원회(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 김종배)가 결성되어, 시민수습대책위는 주로 계엄 당국과의 협상을, 학생수습위는 대민업무(對民業務)를 맡았으나, 수습위원들 간에 전교사와의 협상, 무기반납 문제를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진통이 계속되었음.

o 한편 광주 외곽 지역은 이날도 여러 경찰관서가 피습되었는데, 00시 05분 완도경찰서가, 06시 04분 강진경찰서가, 12시 12분 함평경찰서가, 14시 58분 목포 연동지서가, 15시 20분 목포경찰서가, 17시 35분 해남경찰서가, 18시 40분 화순 예비군 중대가 각각 점거되거나 파괴되고 다량의 총기와 실탄이 시위대에 탈취되었으며, 22시 30분경 숭의실고, 수정아파트 옥상, 삼익맨션 옥상, 신우아파트, 서부경찰서 옥상에 LMG가 설치되었음.

5. 22 - (계엄군 상황)

o 5월 22일 09시경 광주 일원에 계엄사령관의 경고문이 공중 살포되었고, 10시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정식 취임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신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와 국무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직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에게 광주로 내려가서 상황을 직접 파악할 것을 지시하여, 10시 20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급거 전교사를 방문,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공수부대의 성격 및 훈련 상태 등을 광주 시민에게 이해시키며, 선무활동(宣撫活動)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하고, 특별담화문을 녹음한 후 상경(上京)하여 광주 현지상황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음.

o 10시 30분경 2군사령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지시가 정식 하달되었고, 10시 45분경 31항공단 103항공대대로부터 AH-1J(코브라) 헬기 2대와 500MD 헬기 5대가 도착하여 전교사의 작전 통제에 들어갔으며,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 이상훈 육본 작전처장은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AH-1J 헬기로 조선대학 뒷산에 위협 사격을 하여 겁을 주어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지시하였으나, 항공단 관계자들의 반대 의견으로 실시하지 않았음.

o 10시 55분 2군사령부는 전교사에 송정리 비행장 및 송정리의 확보를, 11시 무장시위대의 광주시 외곽 탈출방지를, 11시 03분 고속도로 봉쇄와 확보를 각 지시하였고, 11시 22분경 무장 헬기가 장흥 교도소를 정찰하였으며, 11시 30분경 전교사는 500MD 헬기 3대의 무장화를 건의하였고, 12시 계엄사령관은 자위권 발동 대상, 시기, 방법, 결과보고 등에 관한 계엄훈령 제11호를 하달하였음.

o 14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최 웅 11공수여단장 등을 격려한 다음 상경하였고, 14시 30분경 구용상 광주시장이 헬기에서 호소전단을 살포하였으며, 15시 2군사령부는 육본(陸本)에 5월 23일 02시를 기한 충정작전 계획을 건의하였으나, 육본(陸本)은 무력 평정은 지역감정 해소 곤란, 민간인 인질(人質)시 대처 곤란 등을 이유로 5월 24일까지 대기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16시 30분경 20사단 60연대 2·3대대가 송정리 일대에 진입, 도로망을 봉쇄한 후 송정리역 부근에서 위력 행진을 하였음.

o 16시경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동일 17시까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차 3대를 선두로 하여 통합병원 쪽으로 이동하던 중 저지하는 무장시위대와 민가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서 인근 화정동, 쌍촌동, 내방동 등에 거주하는 이매실(여·68세), 김영선(남·20세·칼빈총상), 양회남(남·30세·칼빈총상), 임정식(남·18세·칼빈총상), 조규영(남·38세·총기불상), 함광수(남·17세), 김재평(남·29세), 손광식(남·20세·방위병·경비대 출근)과 계엄군 1명이 총격으로 사망하였고, 17시 50분경 계엄군이 광주통합병원을 장악하였음.

o 19시 20분 방송을 통하여, 현재 광주시내는 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 상태이며 일부 불순불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서 군인들에게 발포했다는 내용의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의 특별담화문이 발표되었음.

o 22시 30분 전교사는 UH-1H 헬기 10대, 고성능 스피커 2대, 가스살포용 500MD 헬기 1대 등 충정장비 추가 지원을 건의하였음.

(8) 5월 23일 상황

(외곽지역 상황)

o 5월 23일 03시 36분경 송정리 삼양타이어 공장에 무장 시위대 30여명이 기습을 시도하여 예비군 중대가 위협 사격을 하였고, 06시경 녹동마을에 있는 7공수여단 33대대 숙영지(宿營地)에 무장 시위대가 접근하여 사격을 하였으나 특별한 충돌은 없었음.

o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5월 21일부터 5월 22일 사이에 수차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부대에 접근,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였으나 대대장이 거부하였고, 이에 시위대가 야간에 부대를 습격하겠다고 돌아가자 2대대장은 부근 우슬재와 복평리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시위대의 습격을 대비하던 중, 5월 23일 05시 30분경과 10시경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계엄군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박영철(남·27세), 김귀환(남·나이 불상)이 총상으로 사망하였음.

o 10시경 광주시내 변전소 확보 지시에 의하여 광주변전소에 31사단 병력이, 계림변전소에 3공수여단 병력이 각각 투입되었음.

o 10시경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가 매복하고 있는 주남마을 부엉산 아래 광주-화순간 국도(國道)를 광주방면에서 화순방향으로 진행하던 미니버스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자, 부근을 순찰중이던 5지역대 5중대원들이 집중 사격을 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박현숙(여·18세·신의여상 3년), 고영자(여·22세·일신방직공원), 황호걸(남·20세·방송통신고 3년), 백대환(남·19세 송원전문대 1년), 김윤수(남·27세·운전사), 김춘례(여·18세·일신방직 공원) 등 10여명이 사망하였고, 여단본부로 후송된 부상자 3명 중 홍금숙(여·17세·춘태여고 1년)은 헬기로 후송되었으나, 성명불상 남자 중상자(重傷者) 2명은 공수부대원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음.

o 08시 25분경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병력의 총격을 받아 안병섭(남·22세)이 좌대퇴부 관통총상을 입고 사망하였고, 10시 20분경 소방차에 탑승한 무장 시위대 수명이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11대대와 교전 끝에 시위대 4명이 체포되고 소방차가 회수되었으며, 19시경 2.5t 트럭 1대에 탑승한 무장시위대 40여명이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13대대와 교전을 벌여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계엄군 1명이 부상을 입었음.

o 10시 50분경 해남 황산만에서 무장 시위대 40여명이 도로를 차단한 계엄군과 교전하여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하였으며, 11시 10분경 영산포-나주간 도로에서 시위대 15명이 바리케이드를 치던 계엄군의 정지 명령에 불응하자 차량 바퀴에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체포하였음.

5. 23 - (계엄사 및 전교사 상황)

o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3일 08시 50분 진종채 2군사령관과 관계 참모를 참석시킨 가운데 전교사 충정계획을 중심으로 소요 진압작전 계획을 논의하였는데, 광주지역 시위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특히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자 20여명이 있는 등 북괴(北傀)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실태이고, 장기화될수록 선량한 시민의 대정부(對政府) 원성(怨聲)이 심화될 것이므로 작전이 조기(早期)에 착수되어야 한다는 전교사 충정계획에 댸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소기 성과를 달성하도록 용의 주도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며, 시민의 무기 자진 반납 기대, 시민과 폭도의 분리, 현지 지휘관의 가용시간(可用時間) 등을 고려, 작전은 5월 25일 02시 이후에 의명(依命) 개시하되, 기본계획의 승인과 작전 개시 시기 결정권을 현지 지휘관인 전교사령관에게 부여하도록 결정하였음.

o 11시 33사단 101연대 2대대 소속 장교 25명, 사병 447명 육본(陸本)의 광주지역 소요진압을 위한 부대투입에 명령에 따라 성남비행장에서 대기하다가, 동일 16시 계획 취소로 주둔지인 안양으로 복귀하였음.

o 16시경 20사단 60연대는 송정리에서 상무대로 이동하고, 20사단 61연대는 7·11공수여단 임무를 인수하여 주남마을에서 광주-화순간 도로를 봉쇄하고, 20사단 62연대는 3공수여단의 교도소 방어 및 광주-화순간 도로 봉쇄 임무를 인수하며, 전교사 예하 학교 병력은 금당산, 톨게이트, 상무대, 통합병원, 극락교 일대를 점령하고, 3·7·11공수여단은 광주 비행장에 집결 보유하라는 계엄군 배치조정 명령이 하달되었음.

5. 23 - (광주시내 상황)

o 5월 23일 06시경부터 광주시내 일원에서 남녀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동참하여 청소를 실시하였고, 07시경 시내 여러 병원에 분산, 안치되어 있던 사체를 모아 전남도청 앞에 59구가 전시되었으며, 09시 35분경 전남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가 설치되어 무기 회수 활동을 전개하였음.

o 10시경 시민수습위원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전남대생·조선대생 각 10명을 추가하여 30명으로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수습대책위원장에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되었음.

o 한편 김성용·홍남순·이기홍·조철현·조아라·이애신·위인백·이영생·조봉환·장기언·김천배 등은 남동 천주교회에 모여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의 무력함을 지적하고, 구속학생의 석방, 공수단의 책임자 처단, 계엄군의 사과등 8개 항을 결의한 후, 전원 도청으로 들어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석하였으나,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당국에 반납하자는 수습대책위의 입장과 이견을 보여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지 못하였고, 내무국장실 옆방에서 회의를 가진 학생수습대책위에서도 무기 반납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었음.

o 13시경 회수된 총기 3,000여정 중 200정을 수습대책위원 장휴동과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이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반납하고 연행자 34명의 신병을 인수하였으며, 계엄분소 지휘관들과 협상을 벌였으나 수습위측의 요구사항 중 예비검속자 및 연행자 전원석방 문제에 대해 결론을 짓지 못하고 익일(翌日)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고, 15시경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는 5만여명의 시민이 모여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음.

o 16시경 정시채 부지사의 요청으로 학생수습위는 국장급 이상 전남도청 간부들의 출입을 허용하여 구용상 광주시장 주재로 전남도청·광주시청 국장 연석회의가 열려 장례(葬體)·식량지원 문제를 논의하였고, 18시경 학생수습위 회의가 열려 김창길 위원장으로부터 계엄분소와의 협상 결과를 보고받고, 무기 반납 문제에 관하여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음.

(9) 5월 24일 상황

(계엄군 교대 및 오인사격 상황)

o 5월 24일 01시 30분 그동안 주남마을에 주둔하면서 외곽봉쇄 임무를 수행하던 7·11공수여단에, 현 주둔지에서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전교사 예비대로서 의명(依命)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라는 전교사의 지시가 하달되어, 09시경 7공수여단 2개 대대는 헬기로 이동하였고, 11공수여단은 13시 30분경 20사단 6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육로(睦路)로 이동을 시작하였음.

o 09시 55분경 호남고속도로 광주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 장교 2명·사병 29명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를 진행하던 중,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이를 시위대로 오인, 총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명이 부상을 입었음.

o 09시 50분경 20사단 62연대는 전교사 숙영지를 출발, 12시 30분경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3공수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고, 10시 50분경 20사단 61연대는 전교사 보병학교 및 기갑학교 병력에 지역을 인계하고 주남마을로 이동, 7·11공수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으며, 14시경 송정리 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20사단 60연대는 상무대로 이동하였음.

o 13시 30분경 주남마을을 출발한 11공수여단 선두가 광주-목포간 도로에 접한 효덕초등학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그경 트럭을 타고 그곳에 와 있던 무장시위대 10여명을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였는데, 뒤따르던 11공수여단 병력이 주변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와중에서 효덕초등학교 뒤 놀이터에서 놀던 전재수(남·10세·초등학교 4년),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놀던 방광범(남·13세·중학생)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고, 13시 55분경 선두 63대대가 효천역 앞에 이르렀을 무렵 전일 20사단 6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송암동 효천역 부근에 매복(埋伏)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무장시위대로 오인,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사격을 가하자, 이에 63대대도 대응 사격을 하여 계엄군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그 와중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 주민 노득규(남·33세), 김영묵(남·45세·농업), 최철진(남·37세·벽돌공) 등이 총상을 입었음.

o 이에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은 부근 일대를 수색하여 무장시위대를 체포하였는데, 성명불상 무장시위대 1명과 시위대로 오인, 체포된 마을 청년 권근립(남·33세), 김승후(남·18세), 임병철(남·25세) 및 하수구에 숨어있던 박연옥(여·50세)이 격분한 공수부대원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음.

o 교도소 방어 임무를 20사단 62연대에 인계한 3공수여단은 16시 30분경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하였으며, 5월 23일 17시경 다시 광주에 온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5월 24일 오전 광주교도소를 방문하여 공수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오후에는 효천역 오인사격 현장을 살펴본 다음, 광주통합병원을 방문, 부상자들을 위문하였음.

5. 24 - (광주시내 상황)

o 5월 24일 03시경 조비오 신부 등 수습대책위원 4명은 무기 회수를 위해 광주 외곽지역을 방문하였으며, 09시 20분경 수습대책위원회 및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합동 명의로 질서유지 촉구, 총기 및 폭약 회수, 금남로 청소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단을 살포하였음.

o 10시 50분경 학생 대표들이 시민 대표들에게 회수한 총기 3,000여정을 인계하고, 시민 대표들이 이를 군에 전달하기로 1차 합의하였으나 학생대표들 간의 이견으로 인계하지 못하였고, 11시에 개최하기로 한 시민궐기대회도 이견으로 열지 못하였으나, 일부 시민수습대책위원과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무기 회수 활동을 계속하였음.

o 10시경 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분소를 다시 방문하여 수습 대책을 논의하였고, 15시경 계엄분소를 다녀온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계엄분소측으로부터 약속받은 계엄군 시가 진입 금지, 과잉 진압 시인, 연행자 석방, 사태 후 처벌 금지 등 8개항을 인쇄한 계엄분소 방문협의 결과보고라는 전단을 배포하고 무기의 반납을 호소하였으나, 시민수습대책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청년들에 의해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자유성토대회')가 열려 수습대책위를 성토하였음.

o 35,000여명의 학생·시민들은 묵념, 애국가 제창, 경과 보고, 민주시(民主詩) 낭독, 각계 대표 성명서 낭독의 순으로 궐기대회를 진행한 후 전두환 화형식을 갖고, 가두 행진을 한 다음 17시 30분경 해산하였고, 궐기대회 주도자들은 YWCA에 모여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았다고 분석하고, 유리한 협상을 위해서도 궐기대회를 계속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기획부, 궐기대회조, 가두방송조, 대자보·유인물조 등으로 임무를 분담하였고, 19시 30분경 호남동 소재 보성기업사무실에서 정상용·이양현·정시윤·윤기현 등은 궐기대회의 계속 개최, 투항주의적 투쟁지도부 교체, 도청 수습위 장악, 정부 고위층의 관련자 불처벌 각서 작성 후 무기 반납 등 향후 투쟁방향을 결정하였음.

o 5월 24일 서울시경은, 간첩 이창용이 광주에 들어가 학생·시민들의 시위를 무장 폭동으로 유도하는 등의 선동 임무를 띠고 5월 20일 02시 남해안에 침투, 광주 잠입을 시도하다가 계엄군의 검문 검색으로 포기하고 5월 23일 05시 특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여 배회하다가 검거되었다고 발표하였음.

(10) 5월 25 - 27일 상황

5. 25 - (광주시내 상황)

o 5월 25일 07시 30분 그동안 전남도청 내에서 정보 수사기관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정보부를 조직, 정보부장 또는 특공대장으로 행세하여 오던 장계범(23세·주점업)과 정향규(31세·운전기사)가 오히려 간첩으로 의심받게 되자, 도청을 빠져 나가려는 의도로 장계범이 독침에 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왼쪽 어깨를 잡고 쓰러져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후 도주한 소위 도청 내 독침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장계범과 정향규는 그 후 소요·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음.

o 10시 50분경 광주경찰서 및 서부경찰서에 경찰관 142명이 출근하여 대기하였고, 11시경 학생·청년 수습대책위원들은 YWCA 2층에서 홍남순·이기홍 변호사, 송기숙·명노근 교수 등을 참석시켜 논의한 끝에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 3개 항의 요구사항을 확인하고, 14시경 남동성당에 다시 김성용 신부 주관하에 홍남순·명노근·송기숙·조아라 등이 모여 위 3개 항을 재확인하고, 도청 내 시민수습위원회를 대신하여 청년·학생들과 요구사항 관철시까지 무력 대항하기로 결의하였음.

o 15시경 무기 반납식을 갖기로 했던 것이 백지화되고, 5만여명의 시민이 도청 광장에 모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최후까지 죽음으로 투쟁하며, 과도 정부(過渡 政府) 즉각 퇴진하라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우리의 결의'라는 선언문을 낭독하였으며, 17시 20분경 시민들은 검정 리본을 달고 계엄 철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하였음.

o 17시경 홍남순·김성용 등은 도청내 수습위원회에 합류하여 이 위원회를 장악하였고, 정상용·김종배 등은 계속 투쟁을 강력히 주장, 무기반납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을 주장하던 학생수습위 김창길이 위원장직을 사퇴한 후, 22시경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새로이 구성하여 위원장에 김종배, 내무담당 부위원장에 허규정, 외무담당 부위원장에 정상용 등을 선임하고, 무기 재분배, 계엄군 재진입에 대비한 외곽 경비 강화 등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음.

5. 25 - (전남도청 진입작전 준비 상황)

o 5월 25일 04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 작전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여, 이에 따라 육본(陸本)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이 작성되었음.

o 12시 15분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상무충정작전을 5월 27일 00시 01분 이후 전교사령관의 책임하에 실시하도록 최종 결정하고, 같은 날 오후 황영시 육군참모차장과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이 광주에 가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이를 직접 전달하였으며, 14시 30분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상무충정작전 계획을 보고하고, 대통령의 현지 직접 선무활동을 건의하였음.

o 14시 30분경 계엄사 탄약검사반이 은밀히 전남도청에 투입되어 수류탄 279발, 최루탄 170발을 분해하였음.

o 17시 30분경 최규하 대통령이 주영복 국방부장관, 김종환 내무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대동하고 광주를 방문하였는데,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평화적인 해결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고 있으나 강경파에 의하여 도청이 장악되어 있어 대화가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200-300명의 강경 시민군에 의하여 80만 광주 시민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므로 진압작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하고, 장형태 도지사는 치안을 회복해 주되 신중을 기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최규하 대통령은 진압 작전을 하는 경우 상당한 희생이 예상된다는 보고를 듣고 직접 전남도청에 가겠다고 주장하였으나 국무위원들과 군 지휘관들이 만류하자 광주 시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녹음한 후 상경(上京)하였으며, 21시 다 같은 국민 사이에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으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붙일 것이니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사태를 수습하자는 내용의 최규하 대통령 담화문이 방송을 통해 발표되었음.

5. 26 - (진입작전 준비상황)

o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5월 26일 10시 30분 전교사령관실에서 20·31사단장, 3·7·11공수여단장, 전교사 예하 보병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화학학교 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압작전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3공수여단은 전남도청을, 11공수여단은 전일 빌딩· 광주관광호텔· YWCA 건물을, 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각 특공조를 편성, 점령한 후 20사단에 인계하기로 하고, 보안상 작전 날자와 시각은 추후 하달(下達)하기로 결정하였음.

o 16시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광주비행장을 방문하여 3·7·11공수여단장에게 5월 27일 00시 01분 부로 작전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음.

o 21시경 전교사 문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하였고, 같은 시각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가발과 민간인 복장을 공수하여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 부대원을 격려하였으며, 22시 40분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5월 27일 새벽 진압작전을 개시할 예정임을 보고하였음.

5. 26 - (광주시내 상황)

o 5월 26일 04시 - 06시 광주시 외곽을 봉쇄하고 있던 일부 계엄군 병력이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봉쇄 지역에서 광주시내 쪽으로 전진 이동하자,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개시된 것으로 오인한 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은 금남로에서부터 전차가 진입해 오던 농성동으로 걸어 가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면서 사태 수습을 수습위원들에게 일임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의 지시로 전차들이 복귀하였음.

o 07시 20분경 시위대는 차량을 동원하여 계엄군의 시내 진입사실과 09시 시민궐기대회 개최예정 사실을 알렸으며, 10시 - 14시 30분 수습위 대표들이 계엄분소를 방문, 협상을 벌였으나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으로부터 24시까지 무기를 회수하여 군에 반납하라는 통고를 받았음.

o 11시 30분경 계엄군 진입 소식을 들은 3만여명의 학생·시민이 모인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계엄군측의 협상 위반, 시민 이간(離間) 책동을 성토하고, '전국 언론인에게 드리는 글',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 '대통령각하께 드리는 글' 등이 채택되었고, 궐기대회 후 시가 행진을 하였음.

o 12시경 전남도청 정문 앞에서 5-6명을 1개 조로 하여 모두 7개 조의 기동타격대가 조직되어 조별로 군용 짚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별로 칼빈 소총과 실탄 1클립이 분배되었으며, 시내 순찰·계엄군 동태 파악과 진입 저지·치안 유지 등의 임무가 부여되었음.

o 12시 10분경 민주시민투쟁위는 광주시민들이 총을 버릴려면 정치적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과도 정부 퇴진, 계엄령 즉각 해제, 살인마 전두환 처단, 구국 과도정부(救國 過渡政府) 수립 등 정부에 요구하는 7개항의 '80만 광주시민의 결의'를 채택하였고, 14시경 전남도청 내무국장실에서 정시채 부지사에게 백미(白米)·부식·연료 등 8개항의 지원을 요구하였으며, 16시경 장형태 도지사가 등청(登廳)하자 투쟁위원들은 사망자들에 대한 도민장(道民葬)을 요구하였고, 협의한 결과 5월 29일 도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장지(葬地)는 망월동 묘지로 정하였음.

o 15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다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려 시민 행동 강령을 채택하여 발표하고, 시민들의 체험담과 목격담에 대한 토로가 있었으며, 민주시민투쟁위는 궐기대회 종료 무렵, 오늘 밤 계엄군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하였고 5-6천명의 군중들은 금남로-유동삼거리-양동 복개상가-공단 입구-화정동까지 행진한 후 도청으로 돌아오면서 대부분 해산하였고, 도청을 사수(死守)하기로 한 200여명만이 남아 박남선 상황실장의 지휘하에 YWCA에 대기하였다가 전남도청으로 들어가 무장한 다음 전일빌딩·YWCA·계림국교 등에 배치되었음.

o 18시경 전남도청 내에서 수습위원들간에 마지막 회의가 개최되어, 진압작전시 대항하는 것은 엄청난 피해만을 야기할 뿐이므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는 의견이 다수로 채택되었으나, 윤상원·박남선 등 최후 항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회의실로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여 이들을 내쫓아, 무기 반납을 주장한 인사(人士)들은 21시경 모두 전남도청을 빠져 나갔음.

o 23시경 전남도청에서는 상황실장의 지휘로 시민군 배치 현황을 점검하였고, 24시에는 시내 전화가 두절되었으며, 5월 27일 02시경 계엄군의 공격을 제보 받은 민주시민투쟁위 홍보부 박영순·이경희가 광주시내를 돌면서 마지막 가두 방송(街頭 放送)을 하였고, 04시경 전남도청 내의 모든 전등이 꺼졌음.

5. 27 - (전남도청 진입작전 상황)

o 5월 26일 23시경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사병 66명은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 종합운동장·조대부중·조대여고·전남 기계공고·조대앞·노동청을 거쳐 5월 27일 04시경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3중대·2중대·1중대·특공중대·4중대·11중대 순으로 진입하여 05시 21분 전남도청 점령을 완료하고, 07시 30분 20사단 61연대에 전남도청을 인계한 후 08시경 부대로 복귀하였음.

o 7공수여단 특공조인 33대대 8·9지역대 6개 중대 장교 20명·사병 181명은 5월 27일 01시경 광주비행장을 출발, 광주통합병원을 경유하여 05시 06분 광주공원을 점령하였음.

o 광주공원에는 시위대가 이미 전남도청으로 이동하여 충돌이 없었으나 7공수여단이 광주공원에 접근하는 도중 시위대와 두 차례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7공수여단 병력은 05시 42분 20사단 61연대 1대대와 연결, 임무를 인계하고 07시 25분 최초 집결지로 복귀하였음.

o 11공수여단 특공조 61대대 4중대 장교 4명·사병 33명은 광주비행장에서 주답으로 공수되어 5월 27일 01시 50분 조선대 뒷산에 도착한 다음, 전남도청 뒤로 침투하여 04시 46분 제 1목표인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저항없이 점령하고, 이어 06시 20분 YWCA 건물을 점령한 후 06시 40분 20사단 61연대에 인계하고, 07시 05분 광주비행장으로 복귀하였음.

o 20사단은 02시 20분 장교 252명, 사병 4,305명이 31사단 책임지역인 서구를 제외한 전 지역을 대상으로 충정작전에 참여하여, 07시 25분 계획대로 작전을 완료하였음.

o 31사단은 04시 장교 56명·사병 693명이 충정작전에 참여하여, 07시 15분 계획대로 광주 서구 지역 일신방직 일대를 점령하여 작전을 완료하였음.

o 이날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 수행 과정에서 양동선(남·27세·광주고 직원), 오세현(남·25세·회사원), 박용준(남·24세·신협 직원), 유영선(남·27세·회사원), 김동수(남·22세·회사원), 김종연(남·19세·재수생), 이강수(남·19세·금호고 2년), 박성용(남·17세·조대부고 3년), 유동운(남·19세·한신대 2년), 안종필(남·16세·광주상고 1년), 문재학(남·16세·광주상고 1년), 민병대(남·20세·부화장 종업원), 김명숙(여·14세·서광여중 3년), 이금재(남·28세·상업·칼빈총상), 문용동(남·26세·호신대 4년), 이정연(남·20세·전남대 1년), 김성근(남·23세·목공)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시위대 295명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하였음.

(11) 후속 처리 상황

o 5월 27일 05시 15분경 전교사령관은 계엄사령관에게 작전을 성공리에 마쳤음을 보고하였고, 진압작전이 종료된 후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을 대동하고 전교사를 방문하여 작전상황을 보고받고, 전남도청에서 정시채 부지사로부터 광주 분위기, 피해 상황을 보고받은 후 작전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귀경하였음.

o 보안사에서는 남웅종 참모장과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이 광주에 내려 와 상황을 보고받고 사후 수습책을 의논한 후 최경조 대령에게 사후 수습지침을 시달하였으며, 6월 8일 보안사로 귀대한 홍성진 1군단 보안부대장은 광주 상황을 정리, 분석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하였음.

o 3공수여단은 5월 29일 07시 05분 거여동 주둔지로 복귀하였고, 11공수여단은 5월 29일 06시 30분 서울로 복귀하여 경희대 등에 배치되었으며, 7공수여단은 6월 6일 00시 40분 복귀하였고, 20사단은 6월 27일 20시 복귀 하였음.

o 5월 29일 광주지방검찰청과 전남북 계엄분소 합동으로 희생자에 대한 검시를 실시하였으며, 5월 3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의 경위및 진상과 사후처리 방침' 발표를 통하여 '이번 사태는 포고령을 위반한 학생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투입된 군과 시위군중 간의 충돌이 유언비어 등으로 확대되고, 끝내 무장폭도의 난동으로 광주시 일원이 무법천지화 된 것으로, 군은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도 자제하고 총 한방 쏘지 않고 악화 방지에 주력하고, 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자체 수습노력를 기다렸으나 시민군을 자처한 시위대가 장기 게릴라전 태세를 갖추고 폭약 등으로 자폭태세를 갖추어 부득이 선량한 시민과 폭도가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 기습작전을 실시하였다'며 무력진압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음.

o 6월 9일 계엄사는 사망자 수 등에 관한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민심을 현혹하고 있다면서 '광주사태' 관련 민간인 사망자 총수 148명 중 신원 판명자 126명의 명단을 발표하였고, 7월 3일 계엄사는 '광주사태 관련자 처리방침'을 통해 모두 2,200명을 연행하였으나 대부분 훈방하고, 시위 주동 및 배후 조종, 총기 탈취, 교도소 습격, 살상, 방화, 약탈, 악성 유언비어 날조 유포 등 죄질이 무거운 정동년, 홍남순, 전춘심 등 375명은 계속 조사중이라고 발표하였고, 9.5일 전남북 계엄분소는 '광주사태'와 관련, 175명을 군법회의에 공소제기하고, 174명은 기소유예 훈방하였다고 발표하였음.

※ 광주 시위 진압과 관련하여 고소·고발된 이병우, 박재철, 차달숙, 강영욱, 김인환 등 5명은 당시 다른 업무관계로 출동하지 못하였거나, 다른 부대에 근무하고 있어서 광주에 출동하지 않았음.

4.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운영

o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의 반대로 국회 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는 보류한 채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관철한 군으로부터 계속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 설치 문제가 제기되자,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緊急措置)의 발동은 고려대상이 될 수 없으며 필요하다면 현행법규(現行法規)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해 볼 것을 지시하였음.

o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1980.5.2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요강을 마련하여 이원홍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에게 제시하였고, 이원홍 수석비서관은 비서관들로 하여금 조문화(條文化) 작업을 하게 하여 5.25.경 국보위설치령을 완성하였음.

o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에 근거한 한시적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는 대통령령이 성안되자,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5.26. 중앙청 국무총리실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에게 국보위설치안을 보고하였고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반대 의견을 보이자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박동진 장관을 초청하여 국보위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음.

o 5.27. 16:00 박충훈 국무총리서리 주재로 열린 제46회 정례 국무회의에서 총무처 의안 제386호 대외비 안건으로 제출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설치령이 의결되고, 5.31. 대통령령 제9897호로 공고됨으로써 국보위(國保委)가 발족되었음.

o 5.31. 10:00 청와대에서 국보위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 주재로 첫 국보위 전체회의가 열렸는데, 당연직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은 박충훈 국무총리서리, 김원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박동진 외무부장관, 김종환 내무부장관, 오탁근 법무부장관,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규호 문교부장관, 이광표 문공부장관,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유병현 합참의장,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등 15명이고, 임명직 위원은 백석주 육군 대장, 김경원 대통령 국제정치담당특보, 진종채, 유학성, 윤성민, 황영시, 차규헌 육군 중장, 김정호 해군 중장, 노태우, 정호용 육군 소장 등 10명으로, 각료(閣僚)가 8명, 군장성(軍將星)이 14명, 청와대 관계자 2명이었음.

o 동일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이하 상임위원회라 함) 상임위원장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되었고, 당연직 상임위원은 국보위 사무처장 정관용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원장과 운영위원장 이기백 육군 소장, 법사위원장 문상익 대검검사, 외무위원장 노재원 외무부 기획관리실장, 내무위원장 이광로 육군 소장, 경제과학위원장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재무위원장 심유선 육군 소장, 문공위원장 오자복 육군 소장, 농수산위원장 김주호 농수산부 식산차관보, 보사위원장 조영길 육군 준장, 교체위원장 이우재 육군 준장, 건설위원장 이규효 건설부 기획관리실장, 상공위원장 금진호 상공부 기획실장, 정화위원장 김만기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등 13개 분과위원장이고, 임명직 상임위원은 차규헌, 신현수, 강영식, 박노영, 김윤호, 권영각 육군 중장, 정원민 해군 중장, 김상태 공군 중장, 노태우, 정호용, 김홍한 육군 소장, 김인기 공군 소장, 안치순, 민해영, 최재모, 신현수 대통령 비서관 등으로, 군장성(軍將星)이 18명, 공무원이 12명 이었음.

o 첫 국보위 전체회의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들과 상임위원들에게 임명장이 수여된 다음 최규하 대통령의 훈시가 있었고, 동일 14:00 삼청동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제1차 상임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어 상견례를 가졌음.

o 6.5. 삼청동 중앙공무원교육원 건물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박충훈 국무총리서리,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참여한 가운데 국보위 현판식을 한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제2차 상임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분과위원장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였음.

o 국보위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은 전두환 상임위원장이나 상임위원장을 대리한 이기백 운영분과위원장과 각 분과위원장들이 참석하는 분과위원장회의 형식의 상임위원회에서 논의하여 결정하였고, 각 분과위원회의 정책 입안 사항은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결재를 하였음.

o 6.13. 국보위 운영분과위원회는 국보위 운영의 4대 기본목표를 국가 안보 태세의 강화, 합리적 경제 시책의 뒷받침, 정치 발전을 위한 내실 도모, 국가기강 확립으로 확정하고, 9개 추진지침(推進指針)으로 계급 의식의 선동이나 정부 전복기도 근본적 제거, 불법시위나 소요행위 근절, 사회적 비리 척결, 정치풍토 쇄신,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언론풍토(言論風土) 조성,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 통제, 건전한 노사관 확립, 각종 사회악 근절, 과외과열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 쇄신 등을 정하였음.

o 6.18. 계엄사는 계엄확대와 동시에 체포한 이른바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 이들이 당국의 정화의지에 순응, 853억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자진 헌납하기로 다짐하고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사퇴할 뜻을 밝혀 형사처벌을 유보하며, 차제에 비윤리적 방법과 작태로 기업을 운영해 온 부패 기업인의 대오 각성을 촉구한다고 밝혔음.

o 이어 국보위 정화분과위원회는 6.19. 기업윤리 정화 작업의 일환으로 동명목재 회장과 부인, 아들에 대하여 재산양도 각서 이행 및 재산은닉 여부를 합동수사본부로 하여금 조사에 착수하도록 하였다고 발표하였고, 7.26. 동명목재상사 시설을 제3자에 인수시키고 회장 일가 개인소유 재산 중 미담보 재산 138억원을 미지급 임금과 퇴직금 등에 충당하는 내용의 동명목재 정리 대책을 발표하였음.

o 7월 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김만기 정화분과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관계부처의 장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2급 이상 공무원의 숙정결과를 마련하였다고 보고하였고, 최규하 대통령은 적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의하여 공정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하였음.

o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7.9. 공직사회의 누적된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척결하여 깨끗하고 밝은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장관 1명, 차관 6명, 지사 3명을 포함하여 2급 이상 공무원 232명을 숙정(肅正)한다고 발표하였고, 그 후 7.31.까지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81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공직 또는 관련직을 사임하였음.

o 국보위는 7.30. 과외 금지, 대입 본고사 폐지, 대학 졸업정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을 전격 발표하였는데, 특히 과외 금지는 발표 다음 날인 8.1.부터 시행에 들어가 이에 위반하는 사회지도층은 공직에서 사퇴시키는 등 사회정화 차원에서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경고하였음.

o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8.4. 조직·상습폭력, 치기배 기타 퇴폐적인 각종 사회적 독소를 뿌리뽑기 위한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하고, '불량배 소탕'에 관한 삼청계획(三淸計劃) 제5호에 따라, 11.27. 제4차 단속까지 모두 57,561명을 검거하여 그 중 3,052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38,259명을 군부대 순화교육(醇化敎育), 이른바 삼청교육(三淸敎育)에 회부하여으며, 16,250명을 훈방 조치하였음.

o 그밖에도 국보위는 부정·불량 식품 및 약품 단속을 실시하고, 변칙 해외체류자 특별구제 조치와 영세 중소기업에 대한 입지대책, 전과기록 말소 등 신원기록 정비작업을 단행하였고, 대학생 해외여행 제한 해제, 해외 인력 송출절차 개선방안, 수출입 절차 간소화 추진계획을 시행하였으며, 연좌제(連坐制)를 폐지하였음.

o 국보위는 9.1.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의장직을 승계하고, 상임위원장은 이기백 운영분과위원장이 직무를 대행하였으나, 10.27. 제5공화국 헌법과 함께 국가보위입법회의설치령(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설치령 개정령)이 시행됨에 따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되었음.

(2)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기소·재판

o 5.17. 19:00경 김근수 중앙정보부 안전조사국장은 안전조사국과 대공수사국 수사관들을 소집, 합동수사본부의 지침에 따라 사회혼란 및 학생 소요 배후조종자들을 검거·수사하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검거 대상자별로 수사팀을 편성, 수사에 착수하였음.

o 중앙정보부 김근수 국장은 수시 수사 내용을 이학봉 합동수사단장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하고, 합동수사단의 요청에 따라 5.20.경 중간수사 결과 발표문안을 작성, 이학봉 보안사 합동수사단장,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순차 보고하였음.

o 계엄사는 5.22. '김대중이 학생소요를 배후에서 조종·선동하여 온 확증을 잡고 연행 조사 중인데, 김대중은 정상적 정당활동을 통해서는 정권 획득이 여의치 못할 것으로 판단, 변칙적 혁명 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계기를 조성하기로 하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하여 5월 중순 대학 교내·외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예춘호·문익환·조성우·장기표 등과 회동, 5.22. 정오를 기해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제 봉기를 획책하는 등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내용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였음.

o 계엄사는 위 발표에서 김대중의 '대학별 배후조종 지원 선동사례'로 1980.3.초 서울대생 심재철에게 100만원을 제공하고, 심재철이 학생회장에 당선, 시위를 주도한 사실, 복학생 박계동의 소개로 만난 고대생 박일남에게 45만원을 제공하고, 박일남이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울 조종, 시위를 벌인 사실과 그 밖에 1980.5.경 부산대 복학생 조태원에게 34만원을 제공한 사실을 드는 한편, 사상 배경으로 김대중이 반국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 국민회의(약칭 韓民統)를 결성, 일본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사실을 적시하여 용공행위(容共行爲)를 해왔다고 벍혔음.

o 5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의 재일 한민통 관련 부분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입건, 수사할 것을 김근수 국장에게 지시하였음.

o 5.31. 계엄사는 '광주사태의 경위 및 진상과 사후처리 방침' 발표에서, 사태의 발단은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은 데는, 북괴의 간첩과 이에 협력하는 불순 위해분자들의 책동 외에도 학생 소요를 배후조종해 온 김대중이 전남대와 조선대의 추종 학생, 주로 복학생을 조종·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 사태의 발단이 되었고, 사태 악화 과정에서 광주 시내 골수 추종분자들이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판명되고 있다며, 김대중을 면담하고 그로부터 이른바 민주화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받은 복학생 정동년과 조선대생 김인원이 5.18.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한 사실과 김대중 측근으로 10,26. 이후 김대증과 6회 접촉한 홍남순 변호사가 조선대 교내시위를 조종하고, 5.23. - 5.26. 사이에 전남도청을 출입하면서 폭도들에게 100만원을 주며 조종·격려한 사실을 「광주사태 주요 배후 주동분자와 활동 사예」로 적시하였음.

o 계엄사는 7.3. 발표한 '광주사태 관련자 처리방침'에서 이미 연행자 1,146명을 훈방하였고, 곧 사안이 경미한 679명을 추가 훈방할 예정이며, 김대중으로부터 데모자금 500만원을 받아 사태의 발단이 된 학생시위를 일으킨 정동년과 역시 김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현지 사태를 일으키도록 하고, 사태 주동자들에게 100만원을 주어 투쟁을 계속하도록 선동한 홍남순 둥 사태 주동 및 배후조종자 53명을 포함, 죄질이 무거운 375명은 계속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음.

o 이어 계엄사는 7.4. 김대중과 그 추종분자들이 소위 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포섭, 학원 소요사태를 폭력화하고, 5.22.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 혁명사태를 유발,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 한 내란음모 사실이 드러났다며, 김대중과 그 추종세력 37명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음.

o 계엄사는 또 김대중이 내란음모 이외에도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조직·구성하여 북괴의 노선을 지지·동조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사용한 혐의도 드러났다고 밝히고, 김대중 일당의 검거로 가장 중요한 정치일정 저해 요인이 해소된 만큼 정부가 공약한 1982.6. 말까지 정권이양의 정치일정은 계획대로 추진될 것임을 강조하였음.

o 수사결과 발표를 앞둔 6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3회에 걸쳐 김대중 공동의장을 만나 광주 상황을 알려 주면서 대통령이 될 것을 단념하고 협력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대중 의장은 거절하였음.

o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은 연행 53일만인 7.9.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다음, 7.12. 김대중 등 24명은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로, 나머지 계엄위반사범 13명은 수경사 계엄보통군법회의로 송치하였고, 군검찰부은 8.14. 전원을 구속기소(拘束起訴)하였음.

o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기소 당일인 8.14. 10:00에 개정된 제1회 공판을 시작으로 9.17.까지 모두 17회 공판을 열었는데, 8.14. 10:00에 개정된 제1회 공판은 모두 13만여자로 된 피고인 24명에 대한 공소장 낭독으로 끝났으며, 9.11. 결심 공판에서 군검찰관은 김대중 피고인에게 사형을, 문익환 등 관련 피고인에게는 최고 징역 20년에서 최하 징역 7년을 구형함에 따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5.17. 김대중 피고인이 연행된지 117일만에 결심되었음.

o 9.17.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 피고인에게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계엄법·외국환관리법위반죄를 적용,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하였고,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최고 징역 20년에서 최하 징역 2년을 선고하였음.

o 10.24.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 피고인 24명에 대한 육본 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심 제1회 공판이 시작되어, 10.29. 제 6회 공판에서 군검찰관은 피고인 전원에게 원심 구형량대로 구형하였는데, 11.3. 항소심 재판부는 김대중 피고인 등 17명에 대하여는 항소를 기각하고, 문익환 피고인 등 7명은 원심을 파기, 감형하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음.

o 11.7. 피고인 24명 중 김대중 피고인 등 12명이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1981.1.23.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김대중 피고인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동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위해 관용한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등 관련 피고인 12면 전원을 감형(減刑)하였음.

(3)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下野)

o 최규하 대통령은 1980.5.18. 오후 5·17 조치관련 특별성명에서 정치발전 일정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음을 밝힌데 이어, 5.21. 신현확 국무총리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박충훈 무역협회 회장을 임명하는 등 대폭 개각을 단행하였음.

o 5.20. 박정희 시해사건 피고인 김재규 등 5명에 대한 사형판결이 확정되었고, 5.24. 이들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었음.

o 6.12. 10:00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신두영 감사원장·국무위원 전원·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배석한 가운데, '국가기강 확립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10월 말까지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확정한 다음 1981년 상반기 중에 선거를 실시, 6월 말까지 정권을 이양할 계획임을 밝혔음.

o 한편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임명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6.2. 중앙정보부장서리직의 사표를 제출하였고, 동일 계엄 확대 조치 등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정부 개헌작업이 재개되어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 개헌요강작성 소위원회가 열렸으며, 소위 위원들의 예방을 받은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최규하 대통령이 밝힌 년내(年內) 개헌, 내년 봄 선거, 정권이양 일정에 아무런 변함이 없을 것임을 밝혔음.

o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6월 말경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하여 개헌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에 따라 법사분과위원들은 7월 중순 개헌안 시안을 만들어 그 장단점을 검토하였음.

o 7월 중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령관실에서 정도영 보안처장·권정달 정보처장·허삼수 인사처장·이학봉 대공처장·허화평 비서실장·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허문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노태우 수경사령관과 함께 국보위에서 연구한 개헌안 골격을 보고받고, 대통령 선출방법, 대통령 임기, 국회의원 선거구제 등을 논의하여 간선제(間選制) 대통령 선출방법 등을 결정하였음.

o 8.10.경 대통령 간선제·임기 6년·단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요강이 작성되었고, 권정달 정보처장, 우병규, 박철언 국보위 법사분과위원은 수시 이용훈 법제처장을 만나 정부 개헌작업을 주관하던 법제처 개헌요강작성 소위원회에 국보위 작업 내용이 반영되도록 조치하였음.

o 8월 중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우병규·박철언 국보위 법사분과위원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 헌법 개정안과 관련하여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 임기 7년을 관철하도록 지시하였고, 우병규 위원은 8.20.경 이용훈 법제처장에게 이를 전달하여 헌법 개정안에 반영되도록 하였음.

o 한편 최규하 대통령은 7.18.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후임에 유학성 3군 사령관을 대장 예편과 동시에 임명하는 한편, 3군사령관에는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을 대장으로 승진시켜 임명하고, 육군참모차장에는 차규헌 육사 교장을 발령하였음.

o 7.30.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정달 정보처장이 배석한 가운데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정계은퇴 선언을 종용하라 지시하였고, 8.13.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대변인을 통해 신민당 총재직을 사퇴함과 아울러 정계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하였음.

o 최규하 대통령은 7.31. 설악산으로 하계 휴가를 떠나 8.3.까지 3박 4일 동안 강원도에 머무른 뒤 서울로 돌아 와, 8.10. 서기원 대변인에게 하야 성명을 작성할 것을 지시하였음.

o 그경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을 그만 두겠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대통령을 맡아 달라고 하여 시간을 달라고 하고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군부의 의견을 들어 볼 것을 권유하였음.

o 8.5. 대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8.6. 롯데호텔에서 한경직·강신명·조향록·김지길 목사 등 기독교계 지도자 24명이 주관한 조찬기도회에 참석, 지난 봄 일부 정치인들의 과열된 정치활동, 일부 학생들의 몰지각한 난동으로 큰 혼란에 빠졌으나, 슬기롭게 난국을 극복하고 이제 새 시대·새 사회 건설을 위한 대열에 힘차게 매진하고 있다면서, 막중한 국운 개척의 사명을 완수하자고 기원하였음.

o 8.10.경 유학성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환 내무부장관에게 전두환 장군의 집권이 기정사실화 되었으니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하는데 협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음.

o 8.11.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뉴욕타임즈지와의 회견을 통하여, 한국은 군부의 지도력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고, 새 세대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는 야망(野望)아닌 천명(天命)에 맡겨야 한다고 밝히고, MBC-TV와의 특집 회견에서 새시대의 국가지표는 민주복지국가(民主福祉國家)의 건설임을 천명하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소신을 밝혔음.

o 8.16. 10:00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전국에 중계된 TV,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진지한 토론을 통해 개헌안의 골격이 잘 잡혀 가고 있는 단계이며, 정치 발전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하면서, 학생 집단 시위와 광주사태 등에 대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정치 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해 왔고, 불행했던 우리 헌정사(憲政史)에 평화적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기며,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마련하기 위해 대국적 견지에서 대통령직을 물러난다는 내용의 하야성명을 직접 발표하였음.

(4)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o 8.18. 서울과 제주를 필두로 잇달아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안보보고회의에서 새 대통령 후보로 전두환 장군이 추대되었고, 8.21.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구국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위기를 수습하고 새 시대·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여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결의하였으며, 동일 최규하 전 대통령도 특별시국성명을 발표하여, 새 지도자는 사심(私心)이 없고 확고한 신념과 지도력을 겸비해야 할 것이며,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특수한 안보상황 하에서는 국민의 전폭적 지지는 물론 국가보위(國家保衛)의 주체인 군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다고 밝혔음.

o 8.22.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예편되고, 후임 보안사령관에는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임명되었음.

o 8.27.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 대의원 2,540명 중 2,525명이 투표하여 2,524표를 얻은 전두환 후보가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9.1.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였음.

o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정치활동은 새 헌법이 확정된 후 빠른 시일내에 재개토록 하되 참다운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정치풍토를 개선할 것을 밝히고, 이를 위해 선동·비리·파쟁(派爭)·권모·사술(詐術)·부정·부패 등의 정치 작태에 책임이 있는 구(舊) 정치인들을 이미 상당수 정리하였지만, 앞으로도 구습(舊習)에 물든 정치인에게 정치를 맡기지 않겠다고 하여 정계 개편(改編) 방침을 분명히 하였음.

o 9.29. 제5공화국 헌법 개정안이 공고되었고 10.22.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5.5%, 찬성 91.6%으로 개정안이 확정되어, 10.27. 공포되었음

o 1881.2.25. 개정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전체 유효투표의 90.2%인 4,755표를 획득한 전두환 후보가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3.3.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였음.

5.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운영

o 전두환 대통령은 1980.9.25.경 파당(派黨)적 이해에 집착해온 정당과 명예와 권세와 재부(財富)를 탐욕하는 정치꾼 등 구정치질서를 청산하여 새 시대의 완벽한 결실을 담보한다는 이유로, 현존 정당의 전면 해체, 제10대 국회의 해산, 새 국회 구성시까지 국보위(國保委)의 권한 대행, 구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특별법의 제정 등을 골자로하는 새 헌법안 부칙(附則)을 확정하고, 9.26.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보위(國保委)를 국가보위대책회의로 변경하는 국가보위대책회의설치령을 마련하였음.

o 그러나 입법기능을 행사하게 될 국가보위대책회의의 구성상의 문제점이 제기되고,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민간 요소를 가미한 입법기구를 설치하여 입법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따라 미군정(美軍政) 시절의 남조선과도입법회의를 모델로 한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방안이 채택되어, 국가보위대책회의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하는 한편, 헌법개정안 부칙에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각계의 대표자로 구성한다는 조항을 추가하였고, 9.29. 08:30 국무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이 의결됨과 동시에 위 국가보위대책회의설치령은 국가보위입법회의설치령으로 수정 의결되었음.

o 10.27. 제5공화국 헌법인 개정헌법이 공포·시행됨에 따라 5.17. 이후 사실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형식만 유지해 오던 제10대 국회가 해산됨과 동시에 국보위를 개칭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음.

o 동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첫 회의를 소집,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의결하였고, 정부로 이송된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이 10.28. 국무회의의 의결과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공포됨에 따라, 동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의원 81명을 새로 임명·발표하였음.

o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0.29. 09:00 여의도 국회의사당 참의원 회의실에서 입법의원 72인의 출석으로 제2차 본회의를 열고, 의장에 이 호 의원, 부의장에 정래혁, 채문식 의원울 선출하고, 이어 각 상임위원장으로 운영위원장에 이기백, 법사위원장에 정희택, 외교국방위원장에 이원경, 내무위원장에 장승태, 경제제1위원장에 박태준, 경제제2위원장에 고재청, 문공위원장에 송지영 등을 선출, 입법회의 구성을 마쳤음.

o 국가보위입법회의는 회의 구성을 마치자 바로 그날 정치풍토쇄신에관한특별조치법안을 의원제안으로 접수, 본격적인 입법 활동에 들어가, 11.3. 동법을 의결하는 등 1980.10.29.부터 1981,4,10까지 166일간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25차의 본회의와 197차의 상임위 활동을 갖고, 정당법·정치자금법·사회보호법·언론기본법·국가보안법 등 법률안 189건을 비롯한 총 25건의 안건을 처리하고 제11대 국회가 구성됨과 동시에 해산하였음.

Ⅳ 수사 결과

1, 사건의 성격

o 고소·고발인들은, 12·12 사건으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피의자 전두환 등이 일련의 정권 탈취 계획에 따라 전군(全軍)에 강력한 충정 훈련을 실시하고 중앙정보부장서리직을 강점한 다음,

- 아무런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에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의와 국무회의장 주변에 배치한 무장 병력을 배경으로 국무회의 의결을 강제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군울 동원, 국회를 점거하여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키는 등 그 기능을 마비시키고,

- 계엄 해제와 정치일정 단축 등을 요구하는 정치인과 재야 민주 인사들을 체포하여 내란음모 혐의 등을 조작, 사법조치함과 아울러,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등 기존 정치인들을 사실상 제거하는 한편,

-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계엄 확대, 김대중 체포 등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과 학생들을 잔혹하게 진압, 그들의 공분과 저항을 유발하여 소요사태를 유도한 다음 법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광주 진압 작전을 감행하는 등 의도적으로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야기하여 비상 상황을 조성하고,

- 이를 빌미로 초헌법적 비상 권력기구인 국보위를 설치하여 국가 주요 정책을 주도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대통령과 내각을 사실상 무력화시킨 후,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피의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고,

- 대통령에 의해 설치된 대통령 자문기관에 불가한 국보위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명칭만 고쳐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마음대로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등 위헌적 입법기구를 설치·운영함으로써,

- 국헌(國憲)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暴動)하여 내란(內亂)하고, 그 과정에서 군을 정권 찬탈의 목적에 이용하여 군형법상의 반란(叛亂) 등을 함과 동시에 살인 및 살인미수 등의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였음.

o 이에 대하여 피의자들은,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고소·고발인들이 문제삼고 있는 제반 조치들은 최규하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취한 정당한 국가통치권의 행사였으며,

- 피의자들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상황에 따라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거나 지시에 따라 또는 맡은 직책상 상급자의 지시·명령을 받거나 자신의 판단 하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던것일 뿐이고,

- 최규하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하자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당시의 헌법절차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집권을 하게 된 것이지, 정권 탈취를 위한 사전 계획이 있었거나 그에 따라 조치나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변소하고 있음.

o 살피건데, 이 사건에 있어서 위헌(違憲) 또는 위법(違法) 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외형적으로 보면, 그 중 기본적인 행위나 조치들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거나 최규하 대통령의 이름아래 행해진 것은 사실임.

- 즉, 최규하 대통령은 계엄령 하에서 이미 군이 보안·정보·수사 등 업무를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기능 정상화 등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하였고,

-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계엄 하에 있다는 이유로 국무회의의 심의·의결을 거친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재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은 2만5천여명의 계엄군을 서울대·연세대·고려대·전남대·조선대 등 전국 92개 대학과 중앙청·국회·신문사·방송국 등 전국 136개 국가 안보목표에 투입하는 한편,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정치 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였고,

- 또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으로부터 각종 소요사태에 대한 배후조종 혐의자와 사회적 지탄 대상인 권력형 부정 축재자에 대한 조사계획을 보고받고 수사기관의 범죄 혐의자 수사에 부당히 간여할 일은 아니므로, 법에 따라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당부하였으며, 이에 합동수사본부는 주요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대표들을 소요 배후조종 또는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하였음.

-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의 상황이 악화되자 직접 광주를 방문하여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면서,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정부는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붙일 것이므로 냉정과 이성를 되찾아서 슬기롭게 사태를 수습해 나가자고 호소하였고, 이어 계엄당국은 치안부재 상태를 해소한다는 이유로 광주 재진입 작전을 단행하였음.

- 또 최규하 대통령은 계엄 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 대통령를 보좌하고 내각과 계엄군 당국 간의 협조를 긴밀히 하여 효율적으로 국책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대통령 소속하에 국보위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하였음.

- 최규하 대통령은 집단 시위나 난동과 소요로 정부를 타도하려는 행위를 엄단하고, 공직자 사회 부조리 척결을 계속 추진하며, 각종 사회악(事會惡)과 퇴폐 풍조를 일소해 나가되 이른바 권력형 부정축재의 조사는 그 범위와 기간을 가급적 국한시키고, 중상과 모략·왜곡과 선동·권모술수와 극한 투쟁으로 고질화된 정치풍토(政治風土)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다짐하는 한편.

- 공공질서의 확립과 사회 안정이 이룩된다면 학원의 정상화와 정치 활동의 재개를 포함하여 경제·사회 발전에 상응하는 정치 발전을 계속 추진할 결의를 천명하고, 이를 위하여 개헌안을 마련, 늦어도 1980.10.월 말까지는 국민투표에 회부, 확정 짓고, 1981년 상반기 중에 선거를 실시하고 6월 말까지 새 정부를 수립, 정권을 이양할 계획임을 밝혔으나,

- 그 후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合憲的)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은 정치 발전의 하나라며 대통령직에서 사임(辭任)하였던 것임.

- 따라서 앞에서 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 등의 체포·연행, 계엄군 병력의 광주 시위 진압, 국보위 설치·운영,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국보위 상임위원장 겸직 및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등은 모두 국정 최고 책임자이던 최규하 대통령의 공무원 임명권 및 국군통수권의 행사이거나 계엄선포권 등 국가긴급권(國家緊急權)의 발동 또는 법령(法令)에 근거한 정치적 또는 행정적 지시·명령과 그에 따른 하부기관의 집행행위들로서, 외형적으로는 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최규하 대통령의 국사행위(國事行爲) 또는 그 집행행위(執行行爲)에 해당된다고 볼 수있음.

o 그러나, 다른 한편 비상계엄의 확대, 정치인의 체포·연금, 정치활동의 금지, 국보위의 설치·운영 등 문제가 되고 있는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군부 최고 실력자로서 합동수사본부장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주도하에 기획·입안하여 추진한 조치들로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집권에 성공하여 새 공화국을 출범시키는 과정에 있어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이른바 정권 창출(創出)의 준비 또는 기초행위로서의 실질(實質)도 가지고 있음.

o 먼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을 살펴보면,

- 비록 최규하 대통령의 인사 발령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군 정보·수사기관 책임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함으로써 국내외 정보와 중앙정보부의 예산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공식적으로 각료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게되어 그 영향력이 군부에 국한하지 않고 내각 등 민간 부문에도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 이로써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정보를 독점한 실력자로 부상하여 후일 정국을 주도하고 집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할 것임.

o 다음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비상기구 설치 등 이른바 보안사의 「시국수습 방안」추진 경위를 보면,

-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경우에는 사법·행정사무를 관장하는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의 지휘·감독을 받게 됨으로써 국정 운영에서 내각이 배제되어 필경 군의 전면 등장과 정치개입을 초래하게 되고, 내각을 조정·통제하는 비상기구의 설치나 국회의 해산, 정치활동의 규제 문제는 성격상 헌정 질서(憲政 秩序)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고도의 정치적 사안이므로 당연히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입안되고 추진되어야 할 사항이라 할 것인바,

-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료 누구도 그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거나 거론하지 않았음에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무상 직접 관련이 없는 보안사 참모들에게 지시하여 입안하게 한 다음, 이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지휘관들이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하고,

- 특히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귀국한 직후에 계엄사령관·국방부장관과 함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가 있었음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심지어 계엄확대안건 심의시에는 국무회의장 주변에 집총한 군병력까지 대거 배치하여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이를 전격적으로 추진하려 한 것은,

- 비록 이로 인하여 대통령이나 국무위원들이 의사(意思)를 강요당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군을 배경으로 기존 관료 세력을 제압하고 이를 관철, 정국을 주도하고자 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임.

o 또 지역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한 배경를 살펴보면,

- 계엄 확대가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계엄 강화의 한 방안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요 진압이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당시도 이미 계엄하이었으므로 굳이 계엄을 확대하지 않더라도 필요에 따라 계엄군을 소요 진압에 투입할 수 있었고,

- 실제로도 사북사태나 학생 시위에 대비하여 3·11공수여단이나 20사단 병력이 출동하여 소요 진압 투입을 대기한 일도 았었을 뿐 아니라,

- 이전에도 계엄사령관이 특별담화 또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통하여 수차 소요에 대한 단호한 대처방침을 천명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순한 계엄 강화 방안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음.

- 오히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당초에 추진하려 했던 시국수습방안의 내용과 실제 계엄 확대와 동시에 단행된 여러 가지 조치들을 보면, 계엄 확대의 명분 아래 비상기구의 설치, 기성 정치인과 재야인사의 연행·체포, 임시국회의 소집 무산, 정치 활동의 금지와 같은 특단의 조치를 추진하는 데에 뜻이 있었다고 판단되며,

- 이러한 조치들은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정국 장악 또는 주도 의사없이는 계획도, 추진도 할 수 없는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임에도 이를 전격 추진하고, 결국 이를 바탕으로 집권에 이른 사실에 비추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주도함으로써 향후 정국을 주도하고 장악할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음.

o 다음 여야 정치인과 재야인사의 체포·연행·연금(連禁) 조치를 살펴보면,

- 비록 실정법위반 혐의를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체포·연행·연금 대상 인물의 사회적 지위나 정치적 비중 등을 감안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이 대통령의 사전 지시 없이 체포·조사계획을 입안하여 추진한 것은 단순한 범법자 수사라고만 보기 어렵고,

- 더구나 가택 연금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연행자들에 대한 수사과정에서도 불법구속·가혹행위 시비가 야기되고, 그 후 상당수는 재산헌납·공직사퇴라는 편법적 처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점 등에 비추어,

- 정치인과 재야인사에 대한 체포 등의 조치는 계엄 확대를 통한 정국 주도에 뜻을 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향후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유력 인사를 포고령 위반 혐의 등을 내세워 사실상 정치권에서 제거한 것으로서, 이는 결국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후일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것임.

o 특히 계엄 확대와 동시에 취한 정치활동 금지 조치를 보면,

- 이는 보안사 권정달 정보처장이 시국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계엄사에 통보하여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않고 계엄포고로 발령한 것인데,

- 1972.10.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특별선언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전례가 있기는 하나, 계엄포고는 물론 어떤 조치로도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할 수 없는 법리(法理)임에도 대통령 재가도 받지 않고 그와 같은 내용의 계엄포고 발령을 감행한 것은, 계엄 확대를 계기로 기성 정치인과 기존 정치권을 일거에 배제하고 향후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사가 강력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임.

o 임시국회의 소집무산에 관하여는,

- 피의자들은 국회에 배치된 계엄군의 잘못된 출입통제 조치의 우발적 결과인 것처럼 변명하고 있으나,

- 현장에 투입된 하급 지휘관이 감히 독자적 판단으로 국회의원의 등원(登院)을 저지하였다고 볼 수 없음은 물론, 그러한 출입통제만으로 임시국회 개회(開會)가 무산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임.

- 즉, 계엄 확대와 동시에 전격 단행된 군병력의 전면적 배치와 여야 주요 정치인들의 대거 체포·연금 및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계엄포고의 발령 등으로 사실상 국회나 정당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 국회의장직을 대리하던 민관식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제104회 임시국회 개회를 시도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개별적인 계엄군의 등원 저지와 무관하게 이른바 5·17 조치로 임시국회의 개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는바,

- 국회 등원 저지 상황 등이 즉시 계엄사령관에게까지 보고된 사실이 육본 상황일지 등에 의하여 확인되는 점을 감안하면, 군고위층인 피의자들은 당시 그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음은 물론, 사실상 그러한 결과를 의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임.

- 또한 계엄 해제 등을 논의하기로 예정된 임시국회의 무산은, 계엄 상황을 이용하여 정국을 주도하고자 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서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결의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절실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음.

o 끝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보면,

- 국보위는 당초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의 반대로 대통령 자문·보좌기구의 형식을 취한 것인데,

- 우선 그 설치 경위가, 대통령 스스로는 물론 계엄 업무의 주관 기관인 국방부 장관이나 계엄사령관, 또는 국보위설치령의 제안 기관인 총무처장관이 그 필요성을 느껴 추진한 것이 아니라, 정보·수사기관인 보안사의 일부 참모들이 계획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추진한 것이고,

- 실제의 구성에 있어서도, 15명의 당연직 위원 중 국무총리와 7명의 각부 장관 외에 6명이 현역 장성이고, 임명직 위원 10명 중에는 9명이 현역 장성이며, 상임위원회의 경우, 상임위원 30명 중 당연직 상임위원인 분과위원장 14명 중 6명과 임명직 상임위원 16명 중 12명이 현역 장성으로, 이미 대통령에 대한 보좌나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장·차관과 행정부의 실무자외에는 모두 현역 장성들이 임명되었을 뿐이며,

- 특히 운영에 있어서, 국보위 전체회의는 임명식을 포함, 단 2회 형식적으로 개최되었을 뿐이고, 사실상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장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 전국 비상계엄의 경우 계엄사령관이 행정사무를 관장하게 되어있음에도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대부분의 주요 행정 정책을 수립하여 행정 각부에 시달· 집행하고, 심지어는 역으로 국보위가 결정한 정책을 계엄사가 집행하는 등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행정에 관하여 사실상 내각을 조정·통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는바,

- 이는 상임위원회 아래에 행정 각부에 대응하여 내각의 조직과 흡사한 14개의 분과위원회를 두어 실질적으로 주요 정책을 결정하였고, 또 실제 국보위의 공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공직자 숙정·삼청교육·사회악 일소·과외 금지 등 교육개혁·기업 체질 강화·농수산 지원·중공업 투자 조정 둥 대부분의 조치들이 비상사태하에서 국가 안보 및 사회질서 회복이라고 하는 협의(峽義)의 계엄 업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행정업무인 사실에서도 명백하다 할 것임.

- 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자 곧 국보위 법사위분과위원들을 동원하여 헌법개정안 요강을 작성, 이를 정부 개헌 작업에 반영되도록 하는 등 정권을 장악할 경우의 권력구조 등 헌정질서(憲政秩序)를 검토하였을 뿐 아니라,

-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5공화국 헌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최종 순간까지 국보위를 국회의 권한을 대행할 과도 입법기구로 삼을 생각을 할 정도로 국보위를 제5공화국 탄생의 산실로 평가하였으며,

- 그 후 실제로 국보위를 모태로 하여 발족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보위의 개혁 조치들을 뒷받침하고 법제화하는 법률을 제·개정한 점 등을 종합하면,

- 결국 국보위는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자문보좌기구로서보다는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와 같이 행정 각부를 조정·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 됨으로써 국보위를 주도한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국정의 실질적 주도자임을 내외에 과시하는 데 이용 되었다고 할 수 있음.

- 더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일련의 조치 중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가택 연금,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의 계엄포고령 제10호 발령, 국회의원의 국회 출입 통제,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에 대한 재산 헌납과 공직 사퇴 처리, 전 건설부장관 김현옥 등 부패 공직자에 대한 연행 및 재산 헌납과 공직 사퇴 처리,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 보안사 주관의 헌법 개정안 검토 작업 등은 전적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에 의하여 추진되고 조치가 이루어 졌는바, 이러한 조치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와 사회적 영향을 고려할 때, 정국 주도 의사를 배제하고는 설명되기 어려운 성격의 행위라고 할 것임.

o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그 후 위와 같은 조치 등을 기반으로 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下野)하자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추대결의 등 군부를 배경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단독 출마 당선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였고,

- 정권 획득에 성공하자 바로 헌법을 개정하여 5·17 조치로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체포·연금 등으로 사실상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던 구정치인들에 대하여 정치풍토를 쇄신한다는 명분으로 향후에도 정치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근거규정을 설치하는 등 그가 주도하여 단행한 일련의 정치적 변혁 조치들을 새 정권, 즉 제5공화국의 헌법질서 속으로 수용한 사실에 비추어,

- 앞에서 본 일련의 조치들이 외형적으로는 비록 최규하 대통령의 국사행위 또는 그 집행행위의 외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實質)에 있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예기치 않은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의 공백기에 12·12 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제5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용하여 국군 보안사령관·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중앙정보부장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입안·추진한 정치적 성격의 행위들로서,

-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련의 조치 과정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가 장악하고 있던 군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창출해 나간 정치적 변혁 과정에 해당된다고 할 것임.

o 다만 일련의 조치나 사건 중에서 광주 민주화 요구 시위와 그 진압에 대하여 살펴보면,

- 사태의 배경이 된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의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은, 다른 지역에서는 소요가 발생하지 않은 점에 비추어 이례적이기는 하나, 이미 학생회 지도부에 의하여 휴교시의 행동지침이 내려져 있어 이에 따라 전남대 앞에 상당 수의 학생들이 모이게 됨으로써 시위를 시작할 수 있는 구심점을 갖게 된 데다가, 학생들이 계엄군의 기습적 대학 점령, 잔류 학생들에 대한 구타, 무조건적인 해산 조치에 분격하고, 계엄확대를 통한 군의 전면 등장과 김대중 등 정치 지도자와 학생 지도부의 체포에 반발하여 군병력의 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감행하였고, 이에 강한 기질을 가진 공수부대가 폭동 진압식의 강경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되며,

- 이후 사태가 악화된 원인은, 계엄군의 입장에서는 군의 등장과 그 위력만으로도 시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공수부대의 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패나 방호복 등 방호 장비 없이 군복만을 입은 채 시위를 진압하고 주모자 등을 체포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료 부대원들이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를 입자, 강력한 공격적 진압과 체포를 위주로 작전을 하면서, 남녀노소나 시위 가담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가격하거나 체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고, 심지어는 연행자들을 반나(半裸)의 상태로 만들어 기합을 주기까지 하여 극도의 분노감과 적개심을 야기한 데다가, 보도 통제로 인하여 정확한 실상(實相)이 알려지지 않음으로써 악성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발생하고, 그것이 다시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고립감(孤立感)과 아울러 격렬한 저항감(抵抗感)을 야기함으로써 마침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게 하였고,

- 이에 차량 시위대가 형성되어 공수부대에 차량 돌진을 감행하고, 공수부대는 돌진 차량을 저지한다는 이유로 발포를 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광주 시민들도 무장 저항을 하게 되는 극한 상황에 이른 것으로,

- 결과적으로는, 계엄 상황을 이용하여 정국을 주도하고자 한 군수뇌부(軍首腦部)가 학생·시민들의 계엄 해제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호한 진압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판단하고, 위와 같은 강경 진압과 군병력의 계속적 증원으로만 사태를 수습하려 함으로써 결국 현장 지휘관들의 엄격한 제어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과 계엄군간에 적대감으로 인한 살상행위로까지 발전하여 엄청난 피해를 야기한 비극적 사태가 초래되었던 것으로 판단됨.

- 그러나 육본에서 5.3.부터 소요진압 부대의 배속(配屬)을 변경시키고, 5.8.부터는 13공수여단 등의 이동을 시작하고, 5.14.에는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수경사 병력을 광화문 지역에 배치하였는바, 이는 보안사에서 준비하고있던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조치와는 별도로 학생 시위가 대규모화, 격렬화 되고, 점차 경찰병력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됨에 따라 취해진 조치였음이 인정되고,

- 전남대 둥 3개 대학에 7공수여단 2개 대대 병력을 배치한 것은 비상계엄 확대 선포에 따라 전국 92개 대학과 136개 중요시설에 계엄군을 배치하면서 그 일환으로 인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배치한 것이고, 7공수여단의 경우, 원주둔지가 전북 금마로서 33대대장을 포함하여 부대원의 40%가 전남북 출신이며, 1979.10. 부마사태 당시에도 3공수여단이 출동하여 시위 진압 작전을 수행한 일이 있는 점 등에 비추어 7공수여단 2개 대대의 광주 배치가 특별한 의도 아래 시행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 달리 피의자들이 보안사를 중심으로 계엄 확대, 비상기구 설치등 일련의 조치를 검토·시행함에 있어 광주 유혈사태와 같은 사태를 의도적으로 촉발하거나 기도하였다고 볼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광주에서의 민주화 요구 시위 발생이나 그 진압이 사전 계획에 따라 추진되거나 발생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할 것임.

o 또한, 이 사건 고소·고발 내용 중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조작 주장 부분은, 피의자들이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등을 불법 연행한 후 , 내란음모 등 혐의를 조작하여 기소를 하고 사형을 선고하게 함으로써 내란을 목적으로 사법살인(司法殺人)을 기도하였으나 국내외의 반발로 미수(未遂)에 그쳤다는 것인바,

- 1980.5.17.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연행함에 있어, 당시 계엄포고 제1호에는 포고령 위반사범의 경우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계엄법위반이 적용된 동 사건에서 구속영장 없이 체포하였다고 하여 위법이라고 할 수 는 없으나,

- 다만 사법경찰관의 법정 구속기간 10일을 훨씬 초과하여 사건을 군검찰에 송치(送致)하고, 계엄선포중에 현행범이 아닌 예춘호, 김녹영, 이택돈, 손주항 의원 등을 체포 구금한 사실,

- 5.22. 중간 수사결과 발표시 김대중 공동의장이 서울대 심재철에게 100만원, 고려대 박일남에게 45만원, 부산대 조태원에게 34만원 등을 지급하여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후 그 부분이 기소되지 아니한 사실,

- 체포한 후 가족들에게 구속 통지를 하지 아니하였고, 수사중 변호인 선임이나 가족의 접견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공판개시일 직전에야 변호인 등의 접견이 이루어 진 사실,

- 수사기록상 김대중 공동의장이 광주시위를 배후 조종하는 등 광주시위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조사된 자료가 없고, 그러한 사실을 송치(送致)하거나 기소(起訴)한 것이 아님에도, 수사결과 발표에 있어서는 광주시위를 배후 조종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한 사실 등이 확인되었으나,

- 재판 과정에 있어서 공개재판주의(公開裁判主義) 위배 여부, 분리 심리(分離 審理)의 부당성 여부, 피고인 진술의 부당 제한 여부, 법관 아닌 자의 재판 관여 여부 등은 이미 당시의 재판에서도 주장되어 대법원이 위법 사유가 없다는 판단을 한 바 있고,

- 판결문상의 각 범죄행위의 사실 여부 내지 허위 자백 여부는 당시 사건이 대법원까지 3심을 거치면서 재판부의 독자적인 증거 판단에 따라 판결이 선고되어 확정(確定)되었으므로, 이제 고소·고발인들의 주장만으로 재판기관의 사실 인정(事實 認定)을 수사기관이 새로이 논단하기는 어렵다 할 것이며,

-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합동수사본부를 장악한 피의자들이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체포·연행함에 있어 상당한 정치적 판단과 고려 하에 이를 단행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언정,

- 이른바 사법살인(司法殺人)은 수사기관은 물론 소추기관인 검찰과 재판기관인 법원이 공모(公謨)하여 추진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인데, 군검찰관이 공소제기하여 계엄군법회의와 계엄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전원일치 판결로 확정된 이 사건에 있어서, 공소제기로부터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 까지 일련의 재판과정을 피의자들이 지배·조종하였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으므로,

- 형사소송법규에 따른 이 사건 재판절차를 피의자들이 사전 계획한 데 따라 추진되거나 진행된 조치로는 볼 수 없다 할 것임.

o 그리고 이 사건 고소·고발 내용 중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운영에 관한 부분은, 1980.10.27. 입법권한이 없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임의로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제정하여 동년 10.29.부터 1981.4.10.까지 위헌적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여 내란(內亂)하였다는 것인바,

-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설치경위나 구성에 있어서 비민주적인 요소가 지적되고 있기는 하나,

-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설치·운영은, 1980.8.16.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9.1. 취임한 후 새 헌법에 따라 발생한 상황으로,

- 이미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창출하기에 이른 정치적 변혁 과정을 제도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하여 제5공화국 헌법 부칙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입법권을 부여한 데 근거한 것이며, 새삼 정국을 장악하거나 주도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로 보기는 어렵다 할 것임.

2. 법적 판단

o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정치적 변혁 과정에 있어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창출하기에 이른 일련의 행위들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 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사법부에서 판단된 사례가 없으나, 정치적 변혁의 주도세력이 새로운 정권 창출에 성공하여 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아 새로운 헌정질서를 수립해 나간 경우에는,

-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정권 형성의 기초가 된 사실행위에 대하여 사실의 규범력을 인정하여, 사후에 있어 법적 인증을 하여야 한다거나(G. Jellinek, Allgemeine Staatdslehre, 337쪽 이하 참조; 심헌섭, 법철학Ⅰ, 법문사, 1983년, 101쪽 이하에서는 새로운 '승인의 규율'이 탄생하여 새로운 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설명하고 있고, 森末伸行, 법철학개설, 중앙대학출판부, 1994년, 182쪽 이하에는 새로운 시스템에 적합한 행위의 반복을 통한 승인이 새로운 법의 효력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음)

- 정치적 변혁이 성공하여 새질서가 실효적으로 되면 새 질서가 법률질서로 되며, 이는 근본규범의 변동으로 새로운 정부가 법정립(法定立)의 권위로 인정되는 데 따른 것으로, 만약 정치적 변혁이 실패하여 새 질서가 실효적이 되지 못한 때에는 헌법 정립이 되지 못하고 일련의 행위는 범법행위를 구성한다거나(H.Kelsen, Reine Rechtslehre, 1934년, 제5장; 순수법학, 켈젠 著, 황산덕 譯, 조문사, 1953년, 110쪽이하 참조),

- 재래의 실정법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법질서가 수립된 경우에는 법적 안정성의 요구에서 이러한 사태가 법의 기초가 되어 법적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G. Radbruch, Einfuhrung in die Rechtswissenschaft, 1969년, 제1장; 법학원론, G 라드브루흐 著, 정희철 譯, 양영각, 1982년, 55쪽; 법철학입문 구스타프 라드브루흐 譯, 엄민영외1 共譯, 육법사, 1982년, 67쪽 참조)는 등의 이유로,

- 무너진 구헌정질서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의 창출을 위한 행위들의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결국 사법심사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유력함.

o 이러한 견지에서 형법학자들은 내란죄에 대하여, 이는 현존하는 국가의 헌법상의 통치 기구 또는 정치적 기본 제도에 대항하여 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적 행위로부터 헌법적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 만약 국가의 정치적 기본 조직인 통치 조직이 변경되고 지배 권력이 교체되는 등 그 변혁에 성공하였을 경우에는, 행위시에 현존하던 법질서는 새로운 법질서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구질서에 불과한 것으로서, 구질서를 지키기 위한 내란죄로 새로운 체제의 주체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통설을 이루고 있는데

- 우리나라 형법학자들은, 내란죄는 법과 사실 간의 한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내란이 그 미수 단계를 떠나 완전히 그 목적을 달성한 때에는 이미 새로운 법질서가 확립되어 기존의 질서는 이론상 새로운 법질서에 의하여 보호받을 수 없다거나(유기천, 全訂新版 형법학 각론강의 下, 일조각, 1986년, 225 - 226쪽),

- 국가의 존립은 형법 규범의 기능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기능에 불과하여 내란이 성공했을 때에는 형법에 의하여 처벌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이재상, 全訂版 新稿 형법각론, 박영사, 1994년, 621쪽, Welzelhk Willms의 저작 인용; 진계호, 全訂版 新稿 형법각론, 대왕사, 1991, 1082쪽)

- 또는 내란이 성공하여 기존의 법질서를 파괴해 버리면 내란죄에 관한 형법 규정의 적용 문제는 생겨나지 않으며, 내란죄의 규정은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 관련자가 체포되었을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이유로(황산덕, 형법각론, 방문사, 1988년, 15쪽, Welzel의 저작 인용) 형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 일본과 독일의 형법학자들도 대체로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바(Welzel, Das Deutsche Strafrecht, 11판, 480쪽; 大塚仁, 현대법률학전집 27, 형법각론 하권, 청림서원, 1981년, 553쪽; 團藤重光, 증보 형법강요각론, 창문사, 昭和 57년 9쪽; 江家義南, 형법각론, 청산서원, 1956년, 5쪽; 態倉 武, 일본형법각론 하권, 경문당, 昭和 45년, 54쪽; 川瑞 博, 통설형법각론, 삼성당, 1993년, 310쪽; 飯田忠雄, 「內亂と刑事責任」, 神戶학원법학 제2권 제2호, 1971년, 17쪽 등 참조)

- 이는 결국 처벌법규가 변경되거나 폐지되어 형벌권이 소멸한 경우에 해당되어 앞에서 본, 사법심사가 배제된다는 이론과 그 결론을 같이 한다고 할 것임.

o 이 사건의 경우, 최규하 대통령이 1980.8.16. 하야한 후,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9.1. 대통령에 취임하고, 동년 9.29. 전두환 대통령이 구시대의 철저한 청산과 구정치와의 완전한 결별을 위하여 국회와 정당를 해산하고 국보위(國保委)로 하여금 국회 기능을 대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제5공화국 헌법을 공고하여 10.22.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하여 헌법을 개정한 다음, 1981.2.25. 개정헌법에 따른 선거인단 선거를 거쳐 동년 3.3.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은 이 사건에 있어 사법판단 여부가 문제된 일련의 행위를 바탕으로, 비록 간접선거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국민적 심판을 거쳐 새 정권을 창출하고 새 헌법질서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음.

o 즉 위에서 본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선포, 김대중 등 여야 정치인과 재야 인사 등의 체포·연행·연금·정치 활동의 금지와 임시국회의 소집·무산, 국보위의 설치·운영 등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고있는 일련의 조치와 행위는 정치적 변혁 과정에서 기존 통치질서를 대체하고 새로운 헌법질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고, 그 후 새 헌법에 의하여 헌법질서 속으로 수용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 이와 같은 헌정질서의 연속성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사법기관이 사법심사의 일환으로 그 위법 여부를 판단할 겨우, 자칫 새 정권 출범 이후 새 헌법이나 법률에 의하여 실효성을 부여받아 유지되어 온 헌정질서의 단절을 초래하여 정치적·사회적·법률적으로 중대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 새 정권 출범 이후 국민투표 또는 대통령선거 등 여러 차례의 국민적 심판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주권자인 국민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을 사후에 사법적으로 번복하는 부당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 새 정권이 출범하여 새로운 헌법질서가 실효화(實效化)된 이 사건의 경우, 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나 행위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이유로 사법심사가 배제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함.

o 그리고 이 사건 고소·고발 내용 중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운영 관련 부분은,

- 1980.9.29. 국무회의 심의·의결을 거친 제5공화국 헌법부칙과 국가보위입법회의설치령에 의하면, 개정헌법 시행과 동시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변경하는 한편, 개정헌법 시행일로부터 새로이 구성되는 국회의 최초 집회일 전일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로 확정, 공포된 1980.10.27. 위 국가보위입법회의설치령에 규정된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들이 헌법부칙에 규정된 입법권을 행사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제정하고, 동법에 의거, 다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성하여 헌법부칙에따라 국회의 권한을 행사한 것인바,

-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입법 활동은 헌법에 의하여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는 과도 입법기구의 입법행위로서, 권력분립적 견지에서 사법적 판단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한 전형적인 통치행위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역시 사법심사가 배제된다고 할 것임.

o 따라서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하여는, 그들의 행위나 조치가 구체적으로 내란죄(內亂罪) 등에 해당하는 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형식판단(形式判斷) 우선 법리에 따라 전원 공소권(公訴權)없음 결정을 하였음.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

(1)발포 경위

O 고소·고발인들은, 공수부대의 발포는 5.20. 23:00경 광주역 앞에서 시위 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5.21. 13:00경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의 형태를 보면, 이는 시위대의 차량 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 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별도로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의도적인 발포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하였음.

O 수사한 결과, 광주에서의 최초의 발포는 5.19. 17:00경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있었던것으로 확인되었는바,

- 5.19. 17:00경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 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장갑차에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空砲)를 쏘고 다시 위협 사격을 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한 것이었고,

- 또 5.20. 23:00경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 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 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하여 이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하여 발포하고,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고, 5.21.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 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에 대응하여 돌진하는 차량에 발포하였고, 그 와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와 같은 발포 경위에 비추어 위 발포가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임.

O 5.21.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그 경위에 관하여, 시위대의 1차 장갑차 공격 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테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 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으나,

- 수사한 결과, 11공수여단 61, 62 대대는 도청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 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 상태에 들어 간 5.20. 24:00경 대대장이 대대장 짚차 등에 통합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 이상의 장교들에게 1탄창(15발)씩 분배하고, 63대대는 5.21. 10:30경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동일 13:00경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장교들 위주로 실탄이 분배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 되었으며,

- 13:00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발포가 있었고,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으며, 그경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였고,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도청및 주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사실이 확인되었음.

- 다만, 고소 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이와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 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만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러 행하여 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 구호를 외치거나, 차량으로 도로를 진행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 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구체적으로 총기 발사나 차량 돌진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음.

(2)광주 파견부대 지휘권 이원화(二元化) 여부

O 고소 고발인들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 지휘관인 계엄사령관, 2군사령관, 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 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 세력의 사전 계획에 의해 지휘되었다고 주장하였음.

- 즉,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투입될 당시의 광주 상황이 공수부대의 투입이 필요할 정도가 아니었고, 현지의 31사단장이나 전교사령관이 요청한 사실이 없음에도 공수부대와 학생들의 최초 충돌 이전 시간에 특전사령관이 벌써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을 지시하였고,

- 계엄사령관이 자위권 보유를 최초로 천명한 것은 5.21. 19:30 이고, 2군사령부가 자위권 행사를 지시한 것이 5.22. 10:30임에도 하급부대인 7공수여단은 5.21. 18:00에, 전교사(戰敎司)는 동일 22:30에 미리 자위권 발동 명령을 내리고, 심지어는 5.20. 23:00경 이미 3공수여단이 발포하였으며,

- 5.24.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과 효천역 부근에서 두 차례나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이 발생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별도의 지휘체계가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임.

O 그러나,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 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陸本)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 진압 투입은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 5.18. 오후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진압에 나선것은, 계엄 확대 선포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되며,

-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 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5.18. 14:00경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 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하여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고,

-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18.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에 거점 배치하고, 5.19. 11공수여단의 추가 작전통제에 따라 책임지역을 구분하여 시위 진압에 투입하고, 5,21.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의 일련의 부대 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헁한 사실이 인정 되며,

-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보유 천명 시간과 각 부대의 자위권 발동 지시 시간이 군자료상 선후가 맞지 않는 듯한 것은 사실이나, 자위권 발동이 결정된 마당에 계엄사령관의 방송을 통한 발표 이전에 지위권 발동 사실이 하급 부대에 통보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5.21. 16: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계엄군 외곽 철수와 함께 자위권 발동 승인을 받은 사실 등에 비추어 그와 같은 지시들이 발령, 전파되는 과정에서 선후가 다르다고 하여 지휘권이 이원화 되었다고 단정 할 수 없고,

- 5.21. 16:00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에는 각 공수여단이 책임지역에서 외곽봉쇄 임무만을 수행하다가 광주 재진입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광주 재진입 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하여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 또 군부대간의 오인 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 간에 상호 상황 전파 및 통제의 미숙, 단위 부대 지휘관들의 상황 판단 미숙과 침착성 부족 둥에 기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 없음.

O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 하에 있음에도,

- 31사단 등과는 무전 교신 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 장교들이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 장치를 설치하여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 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 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 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3) 무기 피탈 고의 방치 여부

O 고소·고발인들은 사전에 계획된 학살 만행의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 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 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광주 시민들이 광주 외곽 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까지 돌아오는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고, 무기가 광주에 반입된 후에 외곽 도로가 봉쇄된 점 등을 들었음.

O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 탈취는

- 5.19. 15:15경 시위대가 기독교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 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되었으며,

- 그 후 5.20. 23:00경 광주세무서 방화(放火),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하였고, 5.21. 13:00경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 되었으나,

-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 탈취에 나선 것은 5.21. 13:00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 지역으로 진출하여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업체 등에서 대량으로 총기와 실탄을 탈취하였던 것임.

O 당시 군이나 경찰이 광주 외곽 지역의 일선 지·파출소와 방위산업체 등에 산재해 있는 무기, 실탄, 탄약류를 조기에 회수하여 통합 보관하는 등 실효성 있게 통제 못하고 경찰관이나 향토사단인 31사단 방위병 1-3명이 경계병력으로 배치되어 있다가 무기를 탈취당한 것은 사실이나,

- 광주지역의 시위가 확산되자 두차례에 걸쳐 광주 시내 예비군 무기고에 있는 소총과 실탄을 회수하여 군부대에 보관시킨 것 또한 사실이고,

- 다만 군의 조기진압 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 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해한 상태이었고, 지방 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되어 인근 지방으로까지 진출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 특히 5.21.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 전남도청 앞에서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을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 병력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는 보기 어렵고, 달리 군이 시위대의 무기 탈취를 의도적으로 방치했음을 인정할 아무런 자료를 발견할 수 없음.

(4) 헬기 기총 소사 여부

O 광주에서 무장 헬기의 공중 사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야기 되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 되었고, 조비오 신부, 이광영 승려, 아놀드 피터슨 목사 등이 헬기 기총 소사를 목격하였다고 주장하였음.

O 이에 대하여 당시 육군항공단 근무 관계자들은 헬기 기총 사격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하는 것으로 그러한 사격을 실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군 관계자료상으로는 5.21. 2군 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 무장 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 기간중 헬기가 총 48시간 동안 무력시위를 하였다는 기재 외에, 실제 공중 사격 실시 여부에 대해여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할 수 없었음.

O 먼저 목격자의 진술을 살펴보면,

- 위 이광영은 5.21. 14:00경 헬기 사격으로 15-6세의 여학생이 어깨 부위를 피격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적십자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그당시 헬기 사격 피해자가 내원(來院)하였음을 확인할 수 없었고,

- 조비오 신부가 5.27. 헬기 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 란(洪 蘭)은 검찰 조사에서 부근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 사격에 의하여 다쳤다고 진술하였으며,

- 정락평(鄭樂平)은 5.21. 13:00격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을 사격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성(남, 30세)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사입구 1x1cm)이고, 당시 빌딩 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광주오월항쟁사료전집 714쪽)도 있으며,

-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 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동인이 사격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 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용 불빛임이 확인되었고,

- 그밖의 목격자들도 막연하게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 뿐 달리 구체적으로 피해사실을 진술하지 못하고 있는바,

- 광주시내 적십자병원, 기독병원, 전남대학병원의 각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 보아도 그 당시 각 병원에서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내원하였거나 입원, 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65명에 대한 광주지방검찰청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 기총 사격에 의한 사망이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 또한 AH-1J 헬기의 장착 무기인 토우 미사일, 2.75인치 로켙, 20밀리 발칸포(분당 750발 발사)나 500MD의 장착 무기인 2.75인치 로켙, 7.62밀리 6열 기관총(분당 2,000 - 4,000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부분의 인명 피해와 뚜렷한 피탄 흔적, 파편 둥이 확인되지 않았고,

O 전교사 교훈집의 '유류 및 탄약의 높은 소비율'이라는 기재는, 교훈집 작성시 헬기 사용의 일반적 교리상의 문제를 육군 항공 운용교범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적시해 놓은 것이고, 실제 다른 사례에 비해 광주지역에서 유류나 탄약을 많이 소모했다는 것이 아닌 점 등에 비추어 헬기 장착 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인명 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음.

(5) 대검 및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O 대검 사용 여부

- 군 관계자들은 대부분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대검을 사용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나,

- 착검 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던 중 시위대로부터 투석 공격을 당하자 일부 부대원이 착검 상태에서 하차하여 시위대를 추적, 체포하였던 사실이 인정되는바, 그 과정에서 대검 부분으로 피해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 실제로 하헌남, 최승기, 김인윤, 이인선, 최미자 등이 당시 자상(刺傷)을 입었고, 사망자 손옥례, 권근립, 윤개원, 김평용, 박종길, 민병렬, 허 봉, 김경환 등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된 점을 종합하면,

- 지휘관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시위 진압 현장에서 대검이 사용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음.

O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 군 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는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으로서 인체에 화염을 방사하였다면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광주에서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한 적이 없고, 당시 화염용 약품 자체가 지원된 일이 없으며, 다만 소요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 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넣어 이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바, 달리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하거나 화염방사에 의한 화상 사망 사실을 인정할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음.

- 다만 최강식(남, 38세)이 5.21.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 장갑차를 몰고 가다가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고 화상을 입었고(1987.7.15. 악성 섬유성 조직구암으로 사망), 최병옥(남, 21세)이 5.21. 전남대 앞에서 시위중 화염방사로 안면에 화상을 입었으며, 최충용(남, 29세)이 5.19. 광주소방서 앞에서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를 위협용으로 수직으로 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각 주장(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1007-1013쪽)하였으나,

- 최강식에 관한 보상금지급결정 관련 서류에 의하면, 동인은 5.21. 장갑차를 몰다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중흥동 건축 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어 전남대, 광주교도소, 상무대를 거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 경위가 막연히 기재되어 있고,

- 최병옥은 검찰 조사에서 5.21. 14:00경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 부근 민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환기 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보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고, 동인에 관한 보상금지급결정 관련 서류에 의하면, 동인은 5.20. 16:00경 전남대 앞 굴다리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어 교도소로 호송될 때 공수부대원이 차량에 최루탄을 집어 넣어 화상을 입었다고 진술서를 작성하였고, 동일 내용의 강길성의 목격 진술서도 첨부되어 있으며, 달리 위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없었음.

(6) 광주 외곽지역 피해 관련 진상

O 5.21.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27. 재진입 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및 도로 차단 등과 관련하여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 사례가 주장되어 왔음.

O 그 중 앞에서 본 수사결과에 상세히 적시한 바와 같이

- 3공수여단 5개 대대가 5.21.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연행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 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 차량 안으로 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키고 최루탄을 터뜨려 화상 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 후에도 진압봉 등으로 구타하였으며, 교도소 도착 당시 차량에는 질식사 등으로 사망한 5-6구의 사체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3공수여단은 5.24. 까지의 광주교도소 방호 기간중 수 차례 무장시위대와 교전한 외에, 5,22, 10:00경 교도소 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 일가를 시위대로 오인, 총격을 가하여 일가 3명이 총상을 입고, 그 중 처 김춘아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한 사실이 있고, 위와 같이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 사체및 교전 과정 또는 부상자 치료 과정에서 사망한 사체 등 모두 12구의 사체를 교도소 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 부근에 배치된 20사단 61연대 뱡력에 의해서도 5.22. 05.40경 및 09:00경 2회에 걸쳐 시위대 차량으로 오인한 총격으로 왕태경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한 것이 확인되었고,

- 5.23. 17:00경 20사단 62연대 2대대에 의한 광주통합병원 확보 작전시 무장 시위대와 민가를 두고 벌인 교전 과정에서 인근 화정동, 쌍촌동, 내방동에 거주하는 이매실, 함광수 등 주민들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음이 확인되었으며

-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도 5.23. 2회에 걸쳐 시위대와 교전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박영철 등 2명이 사망하였음이 확인되었고,

- 5.23 10:00경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는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 미니버스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다가 총격을 받아 박현숙등 10여명이 사망하였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 도중 다시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음이 확인 되었음.

(7) 사망자 수

O 현재까지 정부의 관련 자료에 의하여 확인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수는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고, 광주 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은 47명임.

O 위 사망자 수는 당시 사체로 확인된 숫자이나, 사체 중에는 신원이나 사망 경위가 일체 불상인 경우가 많고, 한편 목격자의 진술 등에 의하여 사망자가 있음은 확인되면서도 당시 사체가 발견, 확인되었는지 여부나 신원불상인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 곤란하여 당시의 실제 사망자 수를 지금 다시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음.

2020.05.0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7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sseo****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5.18은 전두환 신군부 패거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입니다.

무기 들었어도 민주화운동입니다.

무기 들었으므로 민주화운동 아니라는 생각은 어리고 단순한 생각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정당한 시위(운동)에 부득이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근혜:

민주화운동입니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명박: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영령들 앞에 온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온 분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김영삼: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닙니다..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 백명을 죽일 수 있습니까.. 5.18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에 길이 길이 크게 기록돼야 합니다.

조갑제: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신문들과 모든 신문사, 방송국들도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21.07.11.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bj****
수호신
한국어 2위, 국어 어원, 어휘 3위, 국어 맞춤법, 문법 3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State Department released declassified diplomatic document about 5.18 Kwangju. I attached my version to explicate the truth. Michael

<特種> 5.18 광주騷擾 - (1980)

글 - 마이클 리

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

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시민들의 무장폭동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을 두고 40년이 넘도록 국내에서는 그것이 민주항쟁이다 (Democratic Uprising), 아니다 북한이 개입한 민중폭동이다 (People's Insurgence), 하며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데, 나는 결론적으로 딱 잘라서 그것은 틀림없이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한 작전이었다고 단언한다. 사건경위를 추적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찬반양측이 자기들에게 유리한대로만 이론을 전개 하고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위한 내용만을 골라서 말하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들이 모두 중요한 핵심을 피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발사한 총알이 어디에 맞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 하는 것이다.

1979년 후반에 북한에서는 조선노동당의 대남공작 총책이 김중린 이었는데 소위 남조선에 포치되어있는 혁명역량이, 우리식으로 말하면 잠복간첩들과 동조자들로 구성된 지하세력이, 총동원하여 남조선 민중봉기에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령을 내렸다. 동시에 북한의 특전대인 제17공수여단이 그해 여름부터 치열한 특수훈련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1980년 여름 이전에 남조선 해방을 위한 대사변이 일어나는데 우선 서울과 마산과 광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남조선 지하에 구축해놓은 혁명역량이 주도하되 표면적으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투쟁으로 표방하고 이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인민해방시민군이 북조선에 무력지원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하고, 그때 북에서는 제17공수여단과 특전부대를 남파하여 1950년 6.25사변 때 실패한 조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외근무 중에 이 정보를 최초로 접수하고 워싱턴에 보고한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이 정보를 접수한 미국정부는 1980년에는 남한에서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요가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미국정부는 이 정보를 한국정부와 공유했을 것으로 믿는다.

최은희와 황장엽의 증언

그와 비슷한 시기에 북으로 납치되어간 영화배우 최은희의 증언에도 동일한 내용이 암시되어있다. 즉, 1978년에 노동당의 고위급 간부한사람이 말하기를 약 3년 이내에 남조선이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이런 뒷이야기를 제쳐놓고는 5.18 광주사태의 엉킨 실타래를 풀을 수가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울과 마산에서는 불발했고, 좌우지간 1980년 5월 18일에 예상했던 대로 민중소요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후일에 필자가 탈북자 여러 사람을 심문 했는데 그들도 정확하게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그들은 이런 말도 하였다. 즉, 1981년 6월, 인민군 특전부대 정치담당 간부 학습강의에서 김일성이 언급하기를 <지금까지 우리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3번 놓쳤는데 그중에 광주사태가 제일 아깝다.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과 그의 동반자 김덕홍도 잡지 월간조선의 김용삼 기자에게 북한이 광주사태를 지휘했고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일꾼 상당수가 광주사태 직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공작대원들의 산발적 침투

그동안 탈북자들이 누차에 걸쳐 북한 특공대원들이 남한에 잠입하여 5.18 광주소요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그 규모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이 460명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600명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2013년 5월 18일, 광주사태 33주년을 전후하여 국내에서는 북한특공대 개입여부를 놓고 언론계에서 치열한 공방이 있었는데, 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북한이 개입하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 개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더 정확한 분석과 판명이 도출되어야할 것이다. 어떤 언론인들은 광주사태에 동원된 북한 특공대가 마치 Normandy 상륙작전처럼 일시에 집결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그런 일은 불가능함으로 북한개입을 아예 부정하기도 하지만, 북한 특공대는 오래전부터 2인조 3인조 형식으로 침투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광주에 집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79년 10월 부마사태 때에 잠입한 북한공작원들과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탄광 노사분규 때 침투한 공작원들도 북으로 가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광주사태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광주사태 작전 지휘부는 목포에 있었다고 한다.

현역 특수군이 아닌 민간인 특공대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군의 개입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 광주에 동원된 북한공작대는 현역군인이 아니며, 물론 여러 인민군 부대에서 차출되어 동원된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남공작부서에서 현역군보다 더 무서운 훈련을 받은, 군부대의 단대호가 없는, 민간인 대남공작 특공대였다. 원래 계획은, 광주폭동이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었다면, 1980년 5월 27일에, 6.25사변 때처럼 현역군대를, 즉 비정규전 특전대 병력이 대거 남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사태가 27일 오전에 진압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취소 하였다고한다. 두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서는 학생교과서에, <광주사태는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지령한 과감한 거사>라고 기록되어있고,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는 1980년 8월에 세워진 광주작전 희생자를 위한 <렬사 추모비>가 있다. 그 비석에는 158명 희생자 이름이 적혀있고, 다른 문헌에는 희생자가 총 490명이라고 되어있다. 북한에서도 그들을 인민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대남공작대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현역 군인이 아니었다.

무등산의 진달래

북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참모장 상장 박승원이 광주 5.18작전에 왔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2000년 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 때 북측차석대표로 제주도에 왔던 인물이디. 그는 마식령 스키장 건설과 관련해 공이 크다며 북한정부로부터 노력영웅칭호와 금메달, 국기훈장 1급을 받은바 있다. 그는 1988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대남영웅대회’'에서 (인민문화궁전 지상에서는 ‘'전국영웅대회’'가 열렸고 지하에서는 ‘'대남영웅대회’'가 열렸음) 토론자로 출연하여 5.18 광주항쟁참전의 공훈담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5.18 광주참전 ‘'대남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제작된 <무등산의 진달래> 노래 제작에도 기여한바가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김일성을 찬양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처럼, 이 <무등산의 진달래>가 지금 평야에서 뿐만 아니라 남한 광주에서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가.

擧事인가 巨事인가

그 당시 전두환 주도 신군부 세력에 대한 국민정서가 경직되어 있었고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열망이 극한에 치닫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때, 북한의 개입이 없이 광주시민들만의 순수한 민주화투쟁으로 진행이 되었더라면, 혹 불미스러운 혼잡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품어야하는, 거사(擧事)가 아닌, 역사적인 거사(巨事)가 되었을 것인데, 5월 21일 오후에 불과 4시간 사이에 44개의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5,408정의 무기를 탈취하고 트럭 3대분의 폭약과 뇌관과 도화선을 탈취하고, 170여명의 좌익사범을 포함하여 2,700여명의 죄수가 수용되어있는 광주 교도소를 습격하고, 166명의 사망자중 총에 맞아 사망한 116명중에 진압군의 M-16에 맞은 희생자는 36명이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에 맞은 사람은 8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와 같은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80명은 진압군 주둔지역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희생 되었다. 우리는 절대로 광주시민군이 광주시민을 쏘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폭도들을 태우고 가던 트럭의 운전수가 차를 세우고 시민에게 광주 시청의 위치를 물어본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북한 대남공작에 도둑맞은 광주의 민주화 열망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열망에 대한 순수한 동기와 그들의 명에를 우리는 지키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개입하여 광주시민들을 혼미의 소용돌이 속으로 유도하고 그들의 민주화투쟁을 마치 국가전복을 목표로 하는 민중봉기의 형식으로 작전조작 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광주시민들의 <순수>와 <열망>이 북한의 <대남공작>에 도둑맞은 것이다. 광주시민이나 5.18관계 단체들이 아직도 북한의 개입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Stockholm Syndrome>이다. 북한의 개입이 없이 순전히 광주시민들만으로 궐기를 하였다면 광주사태의 모양새는 그렇게 거칠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광주사태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써야한다. 광주의 민주화투쟁을 국가적으로 공식인정하고 저들의 명예를 존중하되, 북한의 개입을 부인하지 말고 온 국민이, 특히 광주시민들이, 새로운 인식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광주시민들이 앞장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5.18과 김대중 그리고 김영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에 전국적으로 국가안보 상황이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을 때 마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좌익세력에 의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부는 1980년 5월 17일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6일 김대중은 민주화촉진 선언문을 발표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퇴진과 전국의 군인과 공무원들의 정부명령 불복종을 주장 하였다. 그리고 17일에 그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1980년 5월 18일에 발발 하였다. 김대중은 이미 광주사태 발발 이전에 광주사태가 국가전복으로 종결 될 것을 예견하고 혁명정부 수립을 위한 내각을 조직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1981년에 대법원은 광주사태가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무장폭동으로 확정 판결을 하였고 김대중은 광주사태 배후조종 역할로 사형언도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런데 그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그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평생 조용히 살겠다는 조건부로 특별사면을 탄원하고 사면석방 되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망명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약속을 어기고 정계에 복귀하였으며, 1998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0년 6월 15일엔 평양에 가서 대한민국을 김정일에게 헌납할 흉계를 모의 하는 등 평생을 대한민국의 역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아야 할 일이 있다. 1993년 이후 김영삼이 집권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의 스캔달을 아우성치는 호남세력의 잡음을 잠재우기 위하여 1995년 12월 21일에 그가 광주 5.18 국가전복 무장폭동을 민주화 민중봉기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 하였는데, 이 같은 망국범죄를 지원하기위하여 386 운동권 세력이 북을 쳤고,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협력한 대표적인 인사는 당시 안기부장 이었던 권영해와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였다. 그리고 대법원이 1997년 4월에 광주 5.18 무장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뒤집고 1981년 판결을 폐기했다. 슬픈 일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인식을 바르게 인식할 줄 모르는 학자나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이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는 분명히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 무장폭동이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정부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처사다. 이 문제를 놓고 진부찬반 양론으로 오래 동안 혼란스러웠으나 지난 2020. 5. 12부로 결론이 내려졌다. 미국 국무성이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를 공개했는데, 5.18 광주사태에 북한 특공대의 개입과 그들의 침투방법 그리고 그들의 공작 목적이 대한민국 국가전복이었으며 반국가세력의 합세협력을 구체적으로 시인하였다. 국무성 공개내용은 필자가 그동안 한국 언론에 발표한 내용과 100% 일치한다.

광주의 명예를 광주가 지켜라

광주의 명예를 지키려면 광주가 앞장 서야한다. 그 일은 이런 순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 개입을 인정하라. 순수 민주화 열망과 북한의 대남공작에 동조한 세력을 구별하라. 광주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고 그들에 대한 모든 혜택을 폐쇄하라. 그들이 수령한 모든 보상을 회수하고, 자수하고 협조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처리하되,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법처리 하라. 광주 시내에 건립중인 김대중 치적기념관을 용도 변경하라. 가장 열열한 반공애국시민은 광주에 많이 살고 있다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하라. 광주가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광주의 불명예와 오명은 역사 속에서 우리민족이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이며, 대한민국 정부도 이 일을 바로잡지 못하면 국가 정체성이 파괴되고 중환자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2020.05.21.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8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yeun****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미국 CIA에서 밝힌 내용을 검색해보세요.

김대중지지세력과 북한의 추종자들이 나라전복 체제전복을 하려고 일으킨 사건이다라고 발표했답니다. 30년이 지나 해제된 기밀사항이라네요.

역사 바로 잡아야지요!

2023.10.03.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9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by****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상식적으로 군 병기를 능숙하게 다룰줄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아무리 반국가 반정부 투쟁이라도 다수의 사상범있는 교도소를 공격할수 있을까.?

능력있는 예비군이라도 현역 부대를 습격하여 전투할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당시 현장에서 위와같은 투쟁 당사자가 나와서 증언해야 납득될것 같다.

2023.10.24.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