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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대표문화재의 재작시기, 위치, 문화재의 특징 등 그리고 충남의 최근 주요사건 (자세하게 부탁), 충남의 대표적인 인물의 업적과, 어디서 언제했는지좀 부탁드립니다. 내공은 많이 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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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1.봉선홍경사 사적갈비
종 목 국보 제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시 대 고려시대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2.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3.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4.수덕사 대웅전
종 목 국보 제4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수덕사
시 대 고려시대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5.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종 목 국보 제5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시 대 통일신라
충청남도 청양군 칠갑산에 자리잡은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나무로 된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거대한 사각형의 돌로 만든 대좌 위에 높직하게 앉아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편이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않고 탄력적인 부피감도 줄어 들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왼손에는 약항아리가 얹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옷은 느슨하게 처리되었고, 옷주름 또한 드문드문 표현되었다.
4각형의 대좌는 불상보다 훨씬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이 대좌는 하대가 넓고 높은 반면에 중대와 상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바닥돌은 매우 넓은 편인데,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중대의 각면에는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을 새기고,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광배는 원래 돌로 되었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시대에 나무광배로 대체한 것 같다. 광배 중심부에는 꽃무늬를,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신라말과 고려초에 유행하던 광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특이한 탑 모양의 대좌와 감실형의 구조, 그리고 단아한 철불양식을 보여주는 9세기 말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된다.
6.서산 마애삼존불상
종 목 국보 제8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
시 대 백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7.정산 서정리 구층석탑
종 목 보물 제1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16
시 대 고려시대
공주에서 청양쪽으로 23㎞ 떨어진 벌판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부근에 고려시대 백곡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주위에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돌려 새겼는데, 바닥선이 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양식상 특징을 드러낸다. 윗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로 알맞은 두께의 돌을 덮어 안정된 모양새를 띠고 있다. 탑신 1층이 큰 점이 특징적인데, 2층부터는 높이가 뚜렷하게 줄어들지만 넓이는 크게 좁아지지 않아 우아한 느낌이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1층은 5단, 나머지 층은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약간씩 치켜올라가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9층이나 되는 층수로 인해 형태가 매우 높아져 안정감이 부족하다. 각 부분의 세부적 조각양식이나 기단의 안상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8.성주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9.안국사지 석탑
종 목 보물 제10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산102-1
시 대 고려시대
안국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삼존석불입상(보물 제100호)이 보존되어 있다.
탑은 아래부분인 기단부가 다른 탑들에 비해 간단하고, 2층 이상의 탑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어 다소 엉성해 보인다. 탑신은 유일하게 1층 몸돌만이 남아있는데,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이며, 처마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을 밖으로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10.보원사지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10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0
시 대 통일신라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 많은 충청남도의 문화재를 보실려면 아래의 사이트를 검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http://tour.chungnam.net/ctnt/ptal/ruin/01/ruin.01.001.list.jsp
*인물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만드실 무렵에있던 위인들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장영실(?~?)1430년 무렵 활동,이천 등과 함께 혼천의,간의,수표,앙부일구,자격루 등을 발명함
박연:(1378~1458)조선 최대의 악성 우리나라의 3대 악성(왕산악,우륵,박연)에 꼽힘
음악의 이론에 밝았고 중국에서 들여온 아악,편경,편종을 개량하여 더욱 소리가 좋고 높낮이도 알맞은 악기를 완성함 저서로는 난계유고,가훈 등이 있다.
신숙주:(1417~1475)조선시대의 학자로 호는 보한재 1439년에 문과에 붙은 뒤 집현전 부수찬을 거쳐 1443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명을 떨쳤다.
그 후 집현전 수찬으로 성삼문 등과 함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 여러가지 지식을 얻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큰 역할을 함 저서로는 보한재집,사성통고 등이 있다.
김종서:(1390~1453)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절재,문과에 붙은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433년에는 함경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가 되어 야인들의 변경 침입을 격퇴시키고 고려사를 엮는데 총책임을 맡기도 하였음. 단종 때 좌의정이 되었으나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여 계유정난의 제1차 희생자가 됨. 저서로는 제승방략이 있음.
황희:(1363~1452)조선 초기의 유명한 재상.조선을 세운 태조부터 세종까지 요즘의 정부 자리는 모두 거치고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을 24년이나 지냈던 명재상. 공적인 일과 정의로운 일을 추진할땐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했던 재상. 86세까지 나라일을 돌보다 은퇴하고 3년 뒤에 세상을 떠남.
맹사성:(1360~1438)조선 초기의 명재상으로 호는 고불.지금의 충청남도 온양 사람으로 세종 때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청렴결백했던 재상으로 오직 나라에서 주는 녹미(월급)만으로 생활하는 재상이었다. 태종실록을 엮는 총감독을 하기도 했다.
1) 성삼문 ([成三問][매죽헌(梅竹軒)]) [1418~1456]
1418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에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서 1446년 9월 2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3등의 칭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세조 임금이 된 후 단종을 왕위에 복위시키는 역모를 꾀하다 38세로 장열한 최후를 맞는다.
2)계백 [階伯] [?~660]
본명은 승이고 백제 말의 용감한 장수이자 충신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660년,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 동쪽 마도령)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 지금의 연산)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계백은 백제의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고 출전에 앞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싸움에 임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를 위한 계백의 충성심과 용맹성은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교훈이 되고 있다.
3) 김종서 ([金綜書][절재(節齋)]) [1390~1453]
김종서는 고려 말 1390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것은 세종이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여러 벼슬을 맡았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입이 잦자, 김종서는 1433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방을 개척했다. 이후 7년 동안 회령, 경흥, 종성, 온성, 경원, 부령에 육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를 맡아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여 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그 후 세종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김종서는 형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1449년~1452년에 걸쳐 고려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는 작업을 하였다.
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그는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황보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충심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1453년 왕위를 탐내고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4)이순신 ([李舜臣][충무(忠武)]) [1545~1598]
154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선전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임진왜란 중에 각종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승전보를 전하던 중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 중 유탄에 맞아 54세의 일기로 전사하였다.
5)한용운 ([韓龍雲][만해(萬海 •卍海)]) [1879.8.29~1944.6.29]
187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넓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돌아본 뒤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불교 경전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때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이어 1908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근대 문명을 돌아 보았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격려하며 다니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 학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듬해에 동래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썼다. 1918년에는 잡지 <유심>을 펴냈으며 1919년 일어난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공약 삼장을 썼다. 이어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뒤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26년 첫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으며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을 지냈고, 1930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바꾸어 불교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그 해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펴냄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독립 사상을 불어 넣었다. 이어 1935년 첫 장편 소설인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이듬해 자신이 이끌어오던 비밀항일단체인 만당사건으로 붙잡혀 옥살이를 하였다.
평생 조국과 불교를 위해 살던 한용운은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5월9일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6) 이상재 ([李商在][월남(月南)]) [1850.10.26~1927.3.29]
1850년(철종 1)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1881년 그는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가는 박정양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개화사상가들과 어울리면서 개화에 눈을 뜨게 된다. 1884년 홍영식의 추천으로 오늘날 우체국에 해당하는 우정국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김옥균, 홍영식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1887년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청나라 공사와 담판을 벌여 미국과의 수교를 성사시키고 귀국하였다. 서재필 등과 함께 1896년 독립협회를 만들고,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계몽운동을 펼쳤다. 1898년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1902년 이상재는 정부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2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이때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출옥 후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에 들어갔다. 1905년 을사조약 후 다시 관직에 나갔으나 1907년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3•1 운동에 관련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 난 이상재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를 통해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고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이 되었다.
1927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조병옥, 안재홍, 홍명희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신간회의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윤봉길 ([尹奉吉][매헌]) [1908~1932.12.19]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 때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하고, 22세 때에는 월진회(月進會)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 민족운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 29일 천장절 겸 상해 점령 전승경축 기념식을 홍구 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점령 일본군 군정 수뇌들이 여기에 모이게 되자, 윤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에 특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단신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군정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섬멸하는데 성공하였지만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 25일 현지의 군법재판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8) 유관순 [柳寬順] [1902.11.17~1920]
충남 천원군 목천면에서 태어나, 1918년 여자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였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되자 만세 시위를 지도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인 지령 마을로 돌아와서는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면서 만세 운동을 협의하여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1919년 음력 3월 1일(4월 2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음력 3월 1일 정오,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앞장서서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일본 경찰들이 만세 군중을 무자비하게 죽이자 군중들의 분노는 더욱 끓어 올라, 천안은 온통 독립 만세 소리와 군중의 물결로 뒤덮였다. 결국 그녀는 일본 경찰에 잡히고, 가족들은 일본 헌병들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집마져 불태워졌다. 공주 검사국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영명학교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 온 오빠 유관옥을 만났다. 그리고, 3년형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서울로 다시 옮겨졌다. 서울 법정에서는 재판 중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 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감격의 3월 1일을 맞자 다시 옥중 동지들과 비밀히 연락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후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고, 조국의 독립을 그리다가 그 해 가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9)김정희 ([金正喜][추사(秋史)]) [1786~1856]
어려서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24세 때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 등과 돈독히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1840년에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유배지에서 그는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풀려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들어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10)김좌진 ([金佐鎭][백야(白冶)]) [1889.11.14~1930.1.24]
충남 홍성의 부유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에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농토를 분배하여 해방시켰으며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18세에 이미 호명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1913년에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였다가, 1915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고, 사관양성소를 세워 군사를 훈련시켰다.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이범석•나중소 등과 함께 일본국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전투이다. 그 후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소련땅으로 갔으나, 소련군과의 충돌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신민부를 조직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투쟁과 민족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향년 41세에 부하였던 공산당원에게 암살당했다.
200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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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tah / lynnbella님 지식in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