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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말레이시아에 대해 모든것 알려주세요
joys**** 조회수 13,326 작성일2003.10.29
안녕하세요?

저희 이번주 사회 숙제중에 말레이시아에 대해

조사해오는 것이 있는데요,

조사량을 될 수 있으면 많이 해오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말레이시아에 대해 알고 계신 것 모두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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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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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23****
초수
동남아시아에 있는 나라.

위치 :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면적 : 32만 9845㎢
인구 : 2437만 명(2002)
인구밀도 : 73.9명/㎢(2002)
수도 : 콸라룸푸르(Kuala Lumpur)
정체 : 입헌군주국
공용어 : 말레이어
통화 : 링깃(Ringgit, RM)
환율 : 3.80RM = 1달러(2002.9)
1인당 국민총생산 : 3,380달러(2000)
면적은 32만 9845㎢, 인구는 2437만 명(2002)이다. 인구밀도는 73.9명/㎢(2002)이다. 수도는 콸라룸푸르이며 공용어로는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반도의 남부를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舊말라야 연방:13만㎢)와 보르네오섬 북서부의 사라와크 및 사바로 이루어지는 동말레이시아(북칼리만탄:20만㎢)로 이루어져 있다.

1. 자연

서(西)말레이시아는 북쪽은 타이, 남쪽은 싱가포르에 접하고, 동쪽은 남중국해, 서쪽은 말라카해협에 면하며, 동(東)말레이시아는, 남동쪽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섬과 접하고, 북동쪽은 술루해(海), 북서쪽은 남중국해에 면하며, 두 지역은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약 640km 떨어져 있다. 본토인 말레이반도의 주축을 이루는 산지는 인도차이나반도 중앙산계의 연장부로, 전체적으로 산이 많으나 최고점인 타한산(山)도 높이 2,190m에 지나지 않는다. 지질적으로는 주로 화강암·사암·석회암으로 이루어지며, 이 화강암 산지에 풍부한 주석광석이 매장되어 있다. 이 산지의 동서 양쪽에는 구릉지와 해안의 충적평야가 대칭적으로 펼쳐진다. 강의 유로(流路)는 짧으나 수량이 풍부하며, 하류는 밀림을 사행(蛇行)한다. 동말레이시아에서는 해안을 따라 넓은 저습지대가 뻗어 있으나, 배후는 지형이 높아져서 인도네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보르네오의 척량산맥(脊梁山脈)으로 연속된다. 특히 사바 지방은 산이 많으며, 높이 4,101m의 키나발루산은 동남아시아의 최고봉을 이룬다.

말레이시아의 기후는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열대우림형으로 고온다습하며, 연평균기온은 27℃, 연평균 강우량 2,410㎜로 말레이반도의 동해안에서는 북동 몬순기(10∼2월)에 상당하는 집중 강우를 볼 수 있다. 연평균강우량이 4,000mm를 넘는 곳도 있는데, 강우는 스콜 형태로 단시간에 집중호우현상을 이루기 때문에 토양침식이 진전되어 광범위하게 ‘라테라이트’가 분포한다. 또 이러한 기후는 전국토에 밀림을 만들어, 동말레이시아는 국토의 80%가 밀림에 뒤덮여 있다. 동물의 종류도 많아 호랑이·원숭이류를 비롯하여 각종 야수가 서식하고, 조류도 종류가 다양하다.

2. 주민

말레이시아가 있는 말레이반도 산지의 삼림지대에는 니그리토계(系) 원시민족인 사카이족(族)·세망족 등이 채집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나, 그 수는 극히 적으며, 총인구의 약 절반을 말레이인(人)이 차지한다. 말레이인은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중부 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 지방에서 이주해 온 종족으로, 그 시대는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주로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화교(華僑)는 총인구의 약 25%를 차지하며 말레이인과 더불어 주민의 주체를 이룬다. 중국인은 10세기경부터 소수의 이주자가 있었고, 16세기에는 주석광산의 경영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본격적인 이주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것은 영국이 주석광산이나 고무농장의 노동자로서 많은 중국인 쿨리를 반강제적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화교는 도시에 집중해서 상업에 종사하며, 일부는 노동에 종사한다. 인도·파키스탄인은 총인구의 약 7%를 차지하는데, 이들도 대부분 고무농장의 노동자로서 이주한 사람들이며, 도시에서 상인이 된 사람도 있다. 이밖에 소수의 유럽인과 유라시안이라고 하는 유럽 아시아의 혼혈인이 있는데, 거의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밖에 외국인 체류자가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한다.

동말레이시아에는 사라와크에 다야크족, 사바에 카다잔족 등이 살고 있다. 국어는 말레이어(語)이나, 영어·중국어·타밀어도 일반적으로 쓴다. 또 동말레이시아의 여러 민족도 제각기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969년 이후 말레이어 사용이 강력히 추진되어, 말레이어라는 명칭을 말레이시아어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나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2000년 인구증가율은 2.01%, 출생률은 1,000명당 25.3명, 사망률은 5.25명, 영아사망률은 20.96명이다. 평균수명은 70.83세로 남자는 68.22세, 여자는 73.63세이다.



3. 역사

말레이반도 부분과 싱가포르를 합쳐서 보통 말라야라고 부르는데, 역사적으로 보아 말라야와 사라와크·사바는 관계가 거의 없었다. 말레이반도에 최초로 생긴 왕국은 4∼5세기경에 흥한 북부의 란카수카 왕국(말레이인의 불교국)이며, 9세기가 되면서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국(불교국)이 반도 전역을 지배하였다. 또 13세기에는 수마트라에서 건너온 말레이인(人)의 일족이 싱가포르에 투마세크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14세기에는 사바의 마자파히트 왕국(힌두교)이 말라야 전체를 지배하였다. 이 무렵 아랍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지고, 1405년 투마세크 왕국의 후예가 세운 말라카 왕국은 말라야의 여러 토후국 외에 말라카해협을 넘어 수마트라의 동부까지도 지배하였다.

그러나 1511년 포르투갈인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이후 1641년 네덜란드의 말라카 점령을 거쳐, 1786년 영국이 페낭을 점령하고, 드디어 영국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말라야의 여러 토후국과 전략상의 요충을
모두 지배하였으며, 싱가포르·말라카·페낭을 직할식민지(해협식민지), 페라크·셀랑고르·네게리셈빌란·파항의 4개 토후국을 말레이 연방주, 트렝가누·케다·페를리스·켈란탄(이상 4개주는 영국 진출시까지 타이의 속령이었다)·조호르의 5개 토후국을 비연방주로 하여 식민지 경영을 진척시켰다. 중국인·인도인 노동자를 끌어들여 행한 고무·주석 산업의 개발은 대표적인 예이다. 태평양전쟁 때에는 일본에 점령되어(1942∼1945), 중국인을 중심으로 많은 주민이 살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957년 싱가포르를 제외한 11주가 통합되어 ‘말라야 연방’으로서 독립하였다. 1963년에는 싱가포르·사바·사라와크를 합쳐서 ‘말레이시아’가 성립되었으나, 2년 후 싱가포르가 탈퇴·독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사바(舊북부 보르네오)·사라와크는 15세기경부터 브루네이 왕국의 일부였는데, 사바는 18세기 초 술루(필리핀)의 술탄에게 할양된 후,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북부 보르네오 특허회사의 소유지가 되었다. 사라와크는 19세기 중엽부터 60년에 걸쳐 영국인 J.브룩이 브루네이의 술탄에게서 할양받은 지역(브루크 왕국)이었다. 사바와 사라와크는 모두 1942년부터 3년간 일본에 점령당하였으며, 종전 후 1946년부터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고 1963년에는 말레이시아연방에 가맹하였다.

4. 정치

말레이시아의 정체는 입헌군주국이다. 국왕은 9명의 술탄 중에서 5년마다 호선(互選)되고 임기는 5년이다. 1999년 4월 11대 국왕 양 디페르투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이 취임하였다. 의회는 상·하 양원제인데, 상원은 임기 3년의 69석으로 29석은 13개 주의회에서 각주마다 2명씩 선출되고, 연방 직할령 중 콸라룸푸르에서 2명, 라부안에서 1명이 임명된다. 나머지 40석은 국왕이 직능대표, 각계 공로자, 소수민족 대표 등을 임명한다. 하원은 193석으로 비밀, 평등, 보통,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의회 임기 만료(5년) 후, 또는 의회 해산 후 60일 이내에 총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1957년의 독립 이래 말레이인 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을 중핵으로 하는 연립여당 ‘국민전선’이 정권을 잡고 있다. 정부는 의원내각제로서 내각은 총리실과 24개 부처로 구성된다.

말레이반도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복잡한 인종 구성과 이에 따르는 인종간 경제활동의 차이는 오늘날 말레이시아 국내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구가 비슷한 말레이인과 이주민이 거주지구나 직업, 즉 소득을 달리하고 또 각기 자기들의 전통적 문화·종교·언어·사회관습 등을 고집하며 서로 융화되지 않고 병존하는 ‘복합사회’는 19세기 이후 영국의 식민지 행정하에서 형성되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땅을 점령한 일본은 말레이인을 중용(重用)하고 화교를 차별하였다. 이러한 민족분단 통치정책의 결과 각 민족간의 대립감정이 격화되어, 전후(戰後)에 시작된 정당정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거의 모든 정당이 민족적 기반 위에 설립되고, 제각기 자기 민족의 이익 옹호를 기치(旗幟)로 내세우고 있다. 여당은 이러한 여러 정당의 타협적인 연합체이나, 말레이인 정당인 UMNO가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역대 총리도 이 당에서 나왔다. 정부는 독립 이래 말레이인에게 여러 가지 특권(토지 소유·영업·고용·교육 등)을 줌으로써 경제수준의 향상을 도모하고, 가까운 장래에 평등한 입장에서의 민족 융화를 실현한다는 관점에서 정책을 펴왔으나 실제적으로 효과가 없는 것이 많았으며, 반면에 외국자본과 결탁한 화교자본은 두드러지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말레이인의 불만을 제고하여 1969년 5월 13일 대대적인 반(反)화교폭동이 발생하였다. 즉시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의회는 정지되었으며, 말레이인의 특권, 국왕의 지위, 유일한 국어인 말레이어, 국교로 삼은 이슬람교 등에 대한 일체의 논의가 금지되었다. 사건 후 실권을 장악한 부총리 라자크는 자본·고용면에서 말레이인의 상공업에 대한 적극 참여를 촉진하는 ‘신경제정책’을 발표하고, 말레이인 우대정책의 강화를 분명히 하였다.

라자크는 1970년 9월 독립 이래의 총리 압둘 라만 푸트라에 이어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그의 말레이인 우대정책은 화교·인도인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에 진출한 외국기업의 반발을 샀다. 라자크는 1976년 1월에 병사하고, 그후 후세인에 이어 1981년 6월 마하티르 빈 모하메드(Mahathir bin Mohamad)가 총리가 되었다. 마하티르는 술탄과 국왕이 가지는 헌법상 기타 특권을 축소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1993년 3월 헌법수정안을 의회에서 성립, 같은 해 3월 29일 발효했다. 1998년 9월에 부총리 안와르가 해임되고 직권남용·동성애 혐의로 기소되었다. 1999년 11월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마하티르가 이끄는 연합여당이 압승하였다.

외교는 영국연방의 일원으로서 독립 이래 친서방 노선을 취해왔으나, 1967년 소련과 국교를 맺고, 1970년에는 비동맹국 회의에 참가하여 ‘미·중·소 3국의 보장에 의한 동남아시아 중립화 구상’을 제창하였다. 1971년에는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동아시아의 평화·자유·중립지역화 구상’을 주도하고, 1974년에는 중공, 1975년에는 공산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80년 6월 콸라룸푸르에서 개최된 ASEAN 외상회의에서는 회의 직전에 베트남군(軍)이 타이 영토를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베트남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총리 마하티르는 구미 중심의 대국주의에 비판적이며 개발도상국의 입장과 권리 옹호를 주장하고 있다.

병역은 지원제로 10년간은 정규군, 2년간은 예비군으로 근무한다. 2000년 현재 정규군 11만 4500명이 있으며, 2001년 국방예산은 8억 3000만 달러이다. 현재의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2008년 완공을 목표로 새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를 건설 중이다.

5. 경제

말레이시아의 ‘복합사회’를 구성하는 인종은 경제면에서도, 말레이인(人)은 농업(고무·벼농사를 하는 소농민)·행정·군대·경찰 등에, 중국계는 상인·주석광산·고무농장 노동자·기술 전문직에, 인도계는 고무농장 노동자·운수부문·중하급 공무원직 등에 각각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밖에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구미자본(歐美資本)이 주요고무농장 및 주석광산과 수출입·은행·선박·보험 부문의 중추를 쥐고 있다.

말레이시아 경제의 근대적 발전은 19세기 말부터의 고무농장 개척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열대지방의 농장 경영에서 큰 성공을 거둔 전형적인 예이다. 고무농장은 대자본에 의한 대규모의 것(에스테이트)과 소규모의 것으로 대별되는데, 모두 말레이 반도 서해안에 집중한다. 말레이시아의 고무는 세계 천연고무 생산의 약 40%를 차지한다. 주석은 고무보다 먼저 말레이시아 개척의 요인이 된 것으로, 19세기 중엽부터 채굴되었다. 산지는 넓은 범위에 걸치나, 특히 서해안의 킨타 하곡(河谷)이 대중심지이다. 주석 외의 광물자원 개발도 활발하여, 반도 남부의 철광석·보크사이트광 등은 각지에 수출되며, 금광산지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들 근대적 산업과 대조적인 것이 전통적 농업이다.

말레이인은 각지에서 전통적 쌀농사에 종사해 왔는데, 식민지시대에는 고무와 주석 생산에 중점을 두고, 식량 생산에 대해서는 충분한 시책을 펴지 않아 쌀의 자급률은 30% 정도에서 머무르는 상태였으며 식량 증산에 노력을 기울인 것은 독립 이후의 일이다. 벼농사 지역은 반도의 북서부 및 북동부의 저지에 있으며, 말레이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다. 또 도시 근교에서는 채소 등의 집약 재배도 성하다. 이밖에 주로 동해안 등을 중심으로 연안어업도 행하여진다. 말레이시아는 소수의 특산물 생산과 그 수출에 의존해온 전형적인 단일재배 경제국이며, 이로 인하여 동남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에 버금가는 높은 소득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독립 후, 정부는 수출지향성 경제구조에서 탈피하고 경제의 다각화를 도모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발 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이것은 반도는 물론이고 사라와크와 사바에 대해서도 적용되지만, 특히 종래 개발이 낙후된 반도 동해안지방에 주력하여 지역적 격차를 해소하는 일, 농업과 농촌 개발의 중시, 농업의 다각화, 운수·교통의 확충과 전력 개발, 공업화와 이를 위한 말레이인의 직업훈련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1986년 이후 고무와 주석 중심의 경제에서 벗어나 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수출 지향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한 결과 고도성장을 달성하였다. 1997년에 통화·금융위기에 직면하였으나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1999년 2월 이후에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2000년에는 국내총생산 성장률 8.5%를 달성하였다. 말레이시아의 무역은 수출입 모두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활발하다. 2000년 수출은 982억 달러, 수입은 822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전기제품, 원유, 액화천연가스(LNG), 팜유, 천연고무, 목재, 수입품은 제조기기, 수송기기, 식료품이고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 싱가포르, 일본 등이다.

6. 사회

1957년의 말라야 연방 성립 때까지 술탄을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교적 위계제도(位階制度)는 말레이인 사회에만 존재하였으나(모든 말레이인을 술탄의 신하로 보았다), 그해에 제정된 ‘독립헌법’에 의해서 중국인·인도인도 국적 취득의 조건으로서 술탄의 충성스런 신하여야 한다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이 조건은 1963년 말레이시아 헌법에도 계승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인·인도인으로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적다. 이들의 일상회화는 중국어·타밀어이며, 각 인종간의 통혼도 별로 예가 없다. 중국인의 생활에서는 동향(同鄕) 조직인 방(幇)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푸젠방[福建幇]·광둥방[廣東幇]이 최대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 동업조직적 성격도 겸하며, 푸젠방의 경우 고무농장 경영자가 많다. 말레이시아에는 불교·힌두교·이슬람교가 잇따라 전해졌기 때문에, 현재에도 말레이반도 북부에는 불교 사원·힌두교 사원이 있다.

오래된 이슬람교 사원은 정부에서 관리하며, 새로운 이슬람교 사원이 국비로 건립되고 있다. 교육은 초등학교(6년), 중학교(초급 3년, 상급 2년),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며, 의무교육은 아니나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초급과정 3년간은 무상으로 실시된다. 초등학교·중학교에는 말레이어 학교 외에 영어·중국어·타밀어 학교가 있으나, 1969년 이래 말레이어 교육이 강력히 추진되어, 현재는 어학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수업은 말레이어로 행하여지고 있다. 대학교육은 초급대학·교육대는 3년, 대학교는 4년이며, 대학의 수업도 1981년까지 완전히 말레이어화되었다. 대학은 말라야대학교(1962), 이과대학(1969), 국민대학(1970), 농업대학(1971), 공과대학(1972) 등 국립대 12개교, 사립대학 7개교가 있다. 인구에 비해 대학수가 적고, 말레이인과 비말레이인 간의 대학 입학정원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1995년 현재 15세 이상 문맹률은 16.5%이다.

7. 문화

말레이시아 국민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의 영향을 받아 매우 독특하고 다양하다. 상대민족의 신념, 믿음, 전통에 대한 조화, 협력, 참을성이 말레이시아 문화의 독특한 융화를 이끌어냈다. 말레이시아 문화에서 문학과 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춤은 말레이시아 문화의 여러 요소에 강하게 널리 영향을 받았으며, 촛불춤 (Candle Dance)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조그만 쟁반에 받쳐진 촛불을 각 손에 들고 춤을 추는데 무용수의 동작으로 우아한 곡선과 호가 그려진다.

또한 말레이시아는 흥미로운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다양한 문화·종교·민족에서 비롯된 엄청난 수의 전통축제이다. 이슬람의 축제인 라마단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연례 행사에 속한다. 중국 축제인 신년행사는 거리의 오페라인 사자춤에 의해 절정에 이르며 여러 문화행사 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한 행사이다. 인도계 사람들은 성스러운 사원춤으로 유명하며, 타이푸삼(Thaipusam)의 기간 중에 수천 명의 신도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몸을 찌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사바(Sabah)와 사라와크 등의 토착부족은 쌀로 만든 술을 마시며 춤추고 노래하면서 추수감사 축제를 한다. 축제나 결혼식에서는 4행시인 《판투니스》를 낭송하거나 노래로 부른다.

8. 과학기술

말레이시아는 1963년 정부의 통신과 우편업무의 분리로 전기통신국이 생겼고, 1965년 국제통신을 국영화하였다. 1998년 현재 공중 통신 서비스를 위한 본회선수는 504만 5000회선이고 보급률(인구 100명당)은 23.2%이다. 통신시장은 기본전화 서비스, 공중전화, 무선호출, 셀룰러 전화 등의 분야에서 사업자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통신 사업자에 대한 소유 지분을 61%로 확대하였다.

자바탄 텔레콤 말레이시아는 통신 요금 인허가, 통신단말기, 장비 형식, 위성서비스, 무선주파수 할당 등 통신사업 전반에 대한 규제와 감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자바탄 텔레콤 말레이시아로부터 1987년 분리된 텔레콤 말레이시아는 1994년 5월까지 국내외 기본 통신 서비스를 독점 제공하였고, 기니, 인도, 말라위, 스리랑카 등에 합작 기업도 설립하였다.

1997년 말 현재 전송망의 93%가 디지털화되었고, 2015년까지 모든 가정에 광케이블을 연결할 계획이다. 광섬유망은 텔레콤 말레이시아, 피버레일, 비나리앙, 타임 텔레콤, 셀콤의 5개업자가 구축하고 있다. 셀룰러 전화 서비스는 1997년 말 현재 모비콤, 비나리앙, 타임 텔레콤, 무티아라 등의 6개업체가 9개망을 통해 220만 가입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 서비스는 1992년에 자링 서비스가 개시되었고 1997년 1월 현재 약 2만 5200대의 인터넷 호스트가 설치되어 있다. 1999년 현재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는 9개사이다.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국은 국영방송사인 라디오 TV 말레이시아(RTM TV1 & TV2)와 공영방송사인 시스템 텔레비센 말레이시아(TV3)가 있다. 지역방송은 시티 TV, 라디오 텔레비전 말레이시아 사라와크, TV말레이시아 사바가 담당하고 있다. 1998년 현재 TV 보유 가구수는 전체 375만 9000가구이다.

9. 대한관계

말레이시아는 1960년 2월 한국과 수교했으며, 상호상주공관을 설치했고 1973년 6월에는 북한과도 수교했다. 양국간에 체결된 협정은 무역협정(1962), 문화협정(1965), 항공협정(1967), 이중과세 방지협정(1983), 사증면제협정(1983), 과학·기술협력협정(1985), 투자보장협정(1988), 해운협정(1988)이다. 1996년 대통령 김영삼, 1997년 국무총리 고건,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였으며, 1993년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1996년 부총리 안와르, 1999년 외무장관 사이드 하미드, 2000년 10월 총리 마하티르, 2001년 5월 국왕 살라후딘이 방한하였다. 2000년 현재 대(對)한국 수출은 48억 7800만 달러이고, 수입은 35억 15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유류, 고무, 원목 등이고, 수입품은 전자통신기기, 건축자재, 선박 등이다. 한국인 교민수는 2,310명이고, 체류자는 2,277명이다.

200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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